낙강범월시의 유래
낙강시회는 1196년(고려 명종26년) 최충헌의 난을 피해 상주에 우거했던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시회(詩會)로부터 1491년(성종22년)의 상주목사 강구손, 의성군수 유호인 등의 시회를 거쳐 1862년(철종13년)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1813∼1872)에 이르기까지 666년 동안 총 51회에 걸쳐 이루어진 역사적인 시회(詩會)입니다.
이 시회를 열었거나 참석한 사람은 이규보, 안축, 김종직, 유호인, 김일손, 권오복, 이황, 강신, 조찬한, 이준, 조정, 조익, 류진, 전식, 전극항, 전극염, 조우인, 강사상, 채득기, 홍여하, 손만웅, 조정융, 정도응, 신석번, 이옥, 이만부, 권상일, 조천경, 이승연, 정종로, 이경유, 류주목 등입니다. 이 분들은 이미 한국문학사 및 유학사에 오른 선비들이어서 낙강시회의 품격을 한층 더 높여주었지요.
여기서 임술년 7월16일은 1622년으로 사서 전식선생이 60세 되던 해이고,
사서 전식(沙西 全湜), 큰아들 규천 전극항(虯川 全克恒), 작은아들 창주 전극념(滄洲 全克恬) 3부자가 함께 낙강범월시회에 참석한 것으로 유명하다.
得淸字小序
‘淸字’자를 얻어 쓰는 시의 짤막한 서문1)
沙西 全 湜
단구2)의 15일 자리에 나와 蒼石3)옹이 갔었다. 좌석의 손과 벗은 다 평소 의중에 있던 친한 이었다. 종일 술을 주고받으며 얘기를 나누어 그 취흥이 거나한데 얼마 뒤 어스름녘에 더위가 가시자 작은 거룻배를 앞 여울에 띄워 달빛을 타고 거슬러 오르며, 퉁소 소리를 들으니 단란하고도 즐거웠다.
술병을 기울여 자작하고 노래하고 읊조려 서로 화답하니 아지 못할래라, 파옹坡翁의 옛 놀이가 능히 또 이 가운데의 진실한 즐거움을 가졌던가. 파옹坡翁은 두 손을 얻어 따랐으나 우리들과 더불어 한가롭게 논 사람은 이미 10여 인에 이르렀다. 그 풍류와 문장의 아담함은 또 두 손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우리들의 오늘 밤 놀이는 옛날 동파옹의 놀이에 그리 뒤지지 않으리라.
다만, 날이 16일이 아니고4) 강이 적벽은 아니나, 오히려 용연5)에서 모여 완상키로 하였으니, 이 못은 실로 嶺南영남의 큰 못이다. 붉은 언덕과 푸른 절벽이 빙 둘러서 하늘 높이 섯는데 파옹으로 하여금 다시 놀게 하더라도 반드시 이 사이에서는 시부詩賦를 읊었으리라.
주인옹主人翁6) 검간공黔澗公이 젊은이와 어른 20여 인을 모아 놓고 먼저 와 있었다. 그것은, 속수7)의 모임과 비교해 보아도 아주 지나침이 있었다. 나는 마침 조물주의 희롱을 당하여 오던 길에 비를 만나 촌집에 갇히어 부득이 여러 벗과 함께 할 수 없었고, 여러 벗들도 미친 구름이 시샘하여 명월의 시8)를 욀 수도 없었다. 세상 온갖 일이 다 이같이 슬프니 좋은 때를 만나 흡족해하기 어렵다는 시를 이에서 거듭 읊조린다.
아, 속수涑水의 뱃놀이 성대하였도다. 운자韻字를 나누어 시 짓는 일은 옛부터 있었으니, 어찌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여 뒷날 오늘을 보는 자로 하여금 아쉽게 여기게 하랴. 맑을 청淸 자를 얻어서 애로라지 크게 한 번 웃는다.
16일 해 질 녘, 속수로부터 도남서원으로 가다가 길에서 소나기를 만나 촌집에서 잤다.9)
※ 全湜(1562~1642)의 자는 淨遠이요 호는 沙西다. 西厓 柳成龍과 旅軒 張顯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여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임란에 창의하여 국토수호에 앞장섰고, 학문과 문학에 다 능하였다. 중국 사신행의 기행으로 「槎行錄」이 있음
1) 서문(小序)의 표시는 편의상 필자가 단 것임
2) 丹丘는, 신선이 사는 곳으로 밤낮으로 밝다는 丹邱·丹臺·丹丘城이라고도 함
여기서는 당시 상주 영역이었던 丹密縣(현·의성군)을 가르킴.
3) 蒼石은, 李埈의 호임.
4) 龍淵은, 앞에서 말한 自天臺 밑의 용소
6) 主人翁이란, 黔澗 趙靖이 당시 도남서원 원장이었음을 가르킴.
7) 涑水는, 단밀면 涑岩洞, 渭川이 동리 앞으로 흘러 동명을 대신함.
8) 明月章은, 소동파의 「전적벽부」에서도 ‘誦明月之詩’란 말이 나옴
9) 마지막 구절은, 沙西가 손수 단 註임.
'淸'자를 얻어서
沙西 全 湜
오동나무 가지에 맑은 가을빛 드니
단구丹丘의 경치는 강성1)보다 좋도다.
뉘 집 맛좋은 술은 시벗을 맞는가
특별한 곳 호쾌한 놀이에 명월을 얻었네.
오늘 함께 완상함을 무엇이 방해하랴
문득 삼경에 이름도 깨닫지 못하네.
아득한 공중에 구름 흩어져 가을바람 이니
너른 들 하늘과 맞닿은 곳에 구슬 같은 이슬 가득하네
계수나무노 물결에 띄우니 사람 그림자 일렁이고
꽃다운 자리 물에 임하여 나그네 마음 깨끗하네.
술잔 앞 시 읊음은 강락2)을 따를 만하고
좌상의 문장 재능은 수형3)을 맡을 만하네
아름다운 일4)은 천년 세월에 드문데
좋은 날은 하물며 두 어려움5)을 겸하였네.
오래 앉았으니 문득 적삼이 서늘해져
도리어 허공을 날 날개라도 생기는가 싶네
그래서 옛날 멋진 자취 남긴 일 상상하고
다시 오늘 밤 뭇 선비 모일 일 생각하여
배를 옮겨 연일 밤 즐김을 갖고자
말고삐 나란히 하고 벗들 가는 길 재촉하였네
소나기가 어찌 곽노6)에게만 푸짐한지
찬 주점7)에서 끝내 장경長卿같이 누웠네
원망스레 용암8)을 바라보니 몸은 병날 지경인데
좁은 방에 혼자 자며 꿈결에 자주 놀라네.
저같이 많은 시기 받은 건 조물주의 탓이니
하찮은 재주로는 군평9)에게 묻지 말라.
여러 번 동파노인 후적벽부10) 읊조리니
도산陶山의 한바탕 웃은 정11) 배나 생각나네.
모부12)에서 시월에 다시 유상하여
뱃전 두드림 낙강洛江에 모여 또 서로 맞자네.
신선땅이 아마도 범인을 받아 주겠지
학이 나를 스치며 우는 소리 오래도록 듣네.
1) 신선 땅 같은 丹丘(단밀현)의 경치는 江城(강마을)보다 좋다는 뜻. 江城은, 李白의 ‘江城如畵裏’(강가의 성은 그림 같은데)라고 하여, 宣城을 묘사한 바가 있음.
2) 康樂은, 진나라의 謝靈運(385~433)을 가르킴이니 그가 康樂侯에 봉작되었기 때문에 불리던 호. 書畫에 정교하고 시에 능하였으며 성품이 호탕하고 산수를 사랑하여 회계에 살며 시를 지으면 귀천 없이 다투어 외었다 함. 李白이 그의 시풍을 사랑함.
3) 水衡은, 고대 한무제 때 설치했던 皇家의 上林苑을 관장하고 겸하여 稅收를 관리하던 관청. 여기서는 조정의 주요 벼슬을 지칭함.
4) 소동파가 행하였던 적벽놀이.
5) 二難은, 겸하기 어려운 두 일로, 여기서는 뛰어난 풍경과 선비를 다 갖추기 어려움을 뜻함
6) 郭老는, 집을 떠나 타향에 있는 노인으로 봄. ‘郭’은 성밖이란 뜻이 있어, 작자가 상주성 밖의 단밀에 있었기 때문.
7) 寒壚(찬 주막)의 ‘壚’를 문집(沙西先生文集卷1)소재의 작품에서는 ‘술독로罏’자로 표기하엿다. 본 작품은 문집 소재의 작품과 詩語가 다른 곳이 아주 많은데 심지어는 詩句까지 변경된 곳이 11군데나 됨, 뒤의 長卿은 司馬相如의 字
8) 龍岩은, 洛江의 명소 자천대 밑 용소.
9) 君平은, 한나라 嚴遵의 字.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음.
10) 소식의 〈後赤壁賦〉는, 꿈에 깃옷을 입은 道士를 만나는 일이 주요 제재가 된 작품임.
11) 『沙西先生文集』 소재의 작품 끝에는 이 웃음에 대한 註가 달렸음. 즉, 退溪가 月川 趙穆등과 風月潭에서 놀기로 하였는데 비가 와서 놀지는 못하고 시 두 수를 지었다. 제1수의 3.4구에서, “무단히 어젯밤 강이 바다 되어, 천 년의 풍류 한바탕 웃음에 부치었네. ”(無端昨夜江成海 千載風流一笑休)라고, 하였음
12) 謀婦는, 모의하는 곳. 의견을 모아 결정하는 곳이란 뜻의 謀府의 誤記인 듯함.
[原文]
得 淸 字
沙西 全湜
丹丘十五之席 余與蒼石翕赴焉 座上賓朋俱平素意中之親也 竟日酬酌 其興陶然 旣而薄暮暑去 因泛小艇於前灘 乘月洄泝 聽簫團樂 壺觴而自酌 歌詠而相和 未知坡翁舊遊 能復有此中眞樂耶 坡翁得二客從行 吾黨之所與翶翔者 已至十數輩 而其風流文雅 又非二客之比 則吾黨此夜之會 不必多讓於疇昔也 第以日非旣望 江欠赤壁 更圖會翫於龍淵 淵實嶺中之巨浸也 丹厓翠壁 環立揷天 使坡翁復遊 亦必有吟於此間也 主翁黔澗公 會少長二十餘人 已先在矣 其視涑水之集 亦遠過之 余適値造物兒所戱 滯雨於道傍村舍 不得與諸友同之 而諸友亦被狂雲之妬 不果誦明月之章 世間萬事皆如此怊悵 難逢恰好辰之時 重咏於斯焉 嗚呼 泛涑之擧盛矣 分韻之事古也 烏可以拙才而辭之 使後之視今者惜也 得淸者聊博一笑 十六日暮 自涑水向書院 路遇驟雨 滯宿村舍
秋入梧梢報晩晴
丹丘色相好江城
誰家美酒邀詩伴
特地豪遊得月明
今者何妨供勝翫
居然不覺到深更
遙空雲散金風起
曠野天低玉露橫
桂棹泛流人影動
芳筵臨水客心淸
樽前歌詠推康樂
座上文才屬水衡
美事由來千載罕
良辰况是二難幷
偏知坐久衣衫冷
却訝凌虛羽翼生
仍想昔年留勝迹
更思來夕會群英
移船欲辦連宵樂
須友爭催並轡行
驟雨豈曾饒郭老
寒壚終復臥長卿
龍岩悵望身還病
蝸室孤眠夢屢驚
若被多猜因造物
休將小數問君平
頻吟坡叟重遊賦
倍憶陶山一笑情
謀婦孟冬猶再賞
叩舷崇洛且相迎
仙區倘荷客凡骨
佇廳玄裳過我鳴
[출처] 역주 낙강범월시( 譯註 洛江泛月詩) [ 譯 권태을]
◎ 이준 [ 李埈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류성룡의 문인.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때 여러 차례 의병을 모았다. 경상도도사로《중흥귀감》을 편술, 왕에게 바쳤다. 예조정랑·수찬등을 지냈고, 정묘호란의 공으로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다. 저서《창석문집》이 있다.
출생-사망 | 1560 ~ 1635 |
본관 | 흥양(興陽) |
자 | 숙평(叔平) |
호 | 창석(蒼石) ·유계(酉溪) |
시호 | 문간(文簡) |
주요저서 | 《창석문집(蒼石文集)》 |
본관 흥양(興陽). 자 숙평(叔平). 호 창석(蒼石) ·유계(酉溪). 시호 문간(文簡). 류성룡(柳成龍)의 문인. 1591년(선조 2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경세(鄭經世)와 의병을 모집, 고모담(姑母潭)에서 적군과 싸워 패했다. 1594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이듬해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로 나가 《중흥귀감(中興龜鑑)》을 편술, 왕에게 바쳤다.
1597년 지평(持平)으로 류성룡과 함께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가 같은 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소모관(召募官)이 되었다. 이어 예조정랑 ·수찬 등을 역임, 160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교리(校理)가 되었으나 점차 대북(大北)의 횡포가 심해지자 사직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어 교리 ·집의(執義) ·응교(應敎) 등을 거쳤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에 다시 의병을 모집하고 왕명을 받들어 전주에 가서 수만 섬의 군량미를 모은 공으로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가 되었다. 상주 옥성서원(玉城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창석문집(蒼石文集)》, 편저서에 《형제급난도(兄弟急難圖)》가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준 [李埈] (두산백과)
◎ 조정 [ 趙靖 ]
요약
조선중기의 선비로 임진왜란에 아들과 의병으로 참전하였으며 전장을 기록한 《진사일록》을 남겼다.
본관 | 풍양(豊壤) |
호 | 검간(黔澗) |
국적 | 조선 |
활동분야 | 정치,군사 |
주요업적 | 임진왜란 의병참전 |
호는 검간(黔澗), 자는 안중(安仲),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6), 정묘호란(1627)의 전란을 모두 겪은 조선시대 선비로 두 아들과 함께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전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두 아들을 참전시키고 본인은 서울로 상경하여 임금(인조)이 전장에 나갈 것을 건의하는 소(疏)를 세 차례 올렸다고 전해진다. 1599년 추천에 의해 희릉참봉에 봉해졌으며, 1603년 49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5년 대과에 합격하였다. 이후 사헌부감찰, 대구판관, 해남현감, 청도군수, 봉상시(奉常寺)의 기관장(정:正) 등의 벼슬을 직책의 우열을 가리지 않고 수행하여 74세까지 벼슬길에 머물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인조의 강화도 몽진 대열에 합류하였다. 1606년 고향 상주(尙州)의 선비들과 도남서원 건립을 추진하였으며 서원의 원장으로 추대되어 일을 관장하였다. 이후에는 장천서당을 세워 마을교육에도 힘썼다. 1628년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당(養眞堂)을 짓고 독서하며 수양하다가 82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사후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의성군의 속수서원(涑水書院) 숭절사에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임진왜란 발발 후 의병으로 참전하여 세세하게 기록한 2년동안의 기록《진사일록(辰巳日錄)》이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으며, 1707년 숙종 때 채헌징 등에 의해 편집된 시문집 《검간문집》이 전해지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조정 [趙靖] (두산백과)
◎ 조목 [ 趙穆 ]
요약
조선시대의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郭再佑) 의병군에 합세하여 전공을 세웠다.
본관 | 평양(平壤) |
자 | 희보(熙甫) |
호 | 낙분당(樂分堂) |
국적 | 한국 |
활동분야 | 군사 |
본관은 평양(平壤)이며 자는 희보(熙甫), 호는 낙분당(樂分堂)이다.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의 공신 조인규(趙仁規)의 후손이다. 연일현감(延日縣監) 재직 중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두 아들과 함께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佑) 의병군에 합세하여 왜군을 무찌르는데 큰 전공을 세웠다. 현재 태안군 원북면 대기리에 있는 홍현사(弘賢祠)에서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목 [趙穆]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