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하동관 사장 김희영씨는 딸 손을 잡고 먼 옛날 신혼 여행지였던 제주도를 다녀왔다. 시집 와서 48년간 오로지 곰국 솥을 지키느라 처음 떠나보는 여행이었다. 제주에서 보낸 며칠이 꿈만 같았지만 무엇보다 ‘코릿푸드페스티벌’에 내놓은 하동관의 곰탕이 제일 먼저 동나는 걸 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제주도 사람들이 우리 집 곰탕을 그리 좋아할 줄 몰랐어요.”
낯선 제주에서 하동관을 알아준 이들에게 몇 번이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김씨의 눈빛이 아이처럼 해맑다. 평생 우직하게 곰국 끓이는 일에 신명을 바친 김씨는 올해 78세로 우연히도 곰탕 명가(名家) 하동관의 나이와 일치한다. 하동관은 1938년 일제강점기에 고 김용택씨가 고달픈 동포들에게 진짜 고깃국을 먹여주자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하동관이라는 이름은 유명한 역술가가 지은 것으로 경남 하동과는 관계가 없고 서울 북촌 반가(班家)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소문이 자자한 탕반 솜씨는 처음 문을 열 당시 요리에 조예가 깊던 류창희씨의 손맛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류창희씨의 지인 가족인 홍창록씨네로 주인이 한 번 바뀌었고, 홍창록씨의 며느리 김희영씨에게로 대물림되었다. 세 사람은 모두 서울 북촌 반가에서 태어난 토박이로 손맛이 뛰어나고 맘씨가 넉넉해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특히 시집온 지 2년 만에 국솥을 물려받아 지난 48년간 김희영씨의 한 손에서 무르익은 곰탕 맛은 더욱 정갈하고 진솔하게 완성되어 하동관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빚어냈다.
성공의 비결에 대해 김씨는 “좋은 한우 암소고기를 쓰고 정성껏, 정직하게 끓여내는 것”이라고 한다. 70년 가까이 북촌 단골 정육점에서 매일 양지와 사골, 내장을 받아와 오랜 세월 숙련된 감으로 정성껏 끓여낸다. 곰탕과 최고의 궁합을 이루는 이 집의 소문난 깍두기 재료도 오랜 단골집에서 들여온다. 매일 깍두기를 담가 3~4일 익힌 후 냉장고에 넣었다가 상에 내기 때문에 늘 한결같은 맛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곰탕 하면 으레 뚝배기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집은 좀 다르다. 유리알처럼 맑은 곰탕 국물에 밥을 말고 얇게 썬 양지수육과 양포를 가지런히 올려 놋그릇에 정갈하게 담는다. 곰탕이 나오면 따끈한 국물에서 훅 풍기는 달큰하고 진한 육향에 진짜배기 음식이라는 믿음이 절로 간다. 대파를 듬뿍 넣고 휘 저어 한술 뜨면 고기와 밥이 따로 돌지 않고 편안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입안 가득 고소한 풍미가 퍼진다. 곁들여 나오는 깍두기는 마치 과일처럼 아삭하고 상큼해서 곰탕의 느끼함을 잡아준다. 사이다처럼 톡 쏘는 깍두기 국물을 주전자에 따로 내는데 곰탕 국물에 이것을 좀 부어 훌훌 마무리하면 답답했던 속까지 확 풀린다. 한마디로 하동관 곰탕 한 그릇이면 어느 집 코스 요리도 부럽지 않다.
서울 반갓집 전통의 곰탕 맛을 지켜나가기 위해 흘러간 세월만큼 우여곡절도 많이 겪었다. 1970년대 고기파동 시절엔 한우를 구하러 전국의 우시장을 안 가본 데 없이 돌아다녔다. “한번은 고기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 소머리고기를 넣었다가 손님들에게 혼쭐이 났지요. 그 뒤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쌀이 부족했던 1970년대 박정희 정부 시절, 중년층 이상이라면 혼분식 장려운동을 기억할 것이다. 학교에서 매일 도시락 검사를 받던 그때, 쌀밥을 팔아야 하는 그의 고충도 컸다.
“매주 수요일은 정부에서 분식의 날로 지정하고 쌀밥을 못 팔게 했어요. 설렁탕엔 국수라도 같이 내면 되는데 우리 집 곰탕엔 국수가 안 어울려 고민 끝에 만두를 빚어 넣었지요. 새벽까지 잠을 쫓아가며 만두 2000개를 빚느라 주방식구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 서울 명동에 있는 하동관 현관.
하동관은 2007년 청계천 도시재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65년간 그 자리를 지켰던 을지로 본점을 명동으로 옮겨 왔다. “큰 빌딩은 낯설어서 일부러 조촐한 집을 찾아왔어요. 옛날집 대문부터 모서리 닳아버린 나무식탁까지 죄다 가져와 쓰고 있지요.” 수십 년간 정든 곳을 떠나는 게 아쉬워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허투루 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세월 따라 장작과 유연탄, 19공탄, 석유버너, 가스 등 한국의 연료 변천사를 다 겪어오면서 연료가 바뀔 때마다 곰국의 제맛을 살리기 위해 꽤나 애를 먹었지만 제대로 된 곰탕 하나에 쏟아부은 노력만큼은 일편단심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은 것이 하나 더 있다. 하동관의 문 닫는 시간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곰탕 한 그릇에 소주 한잔 기울이고 싶은 애주가들의 볼멘소리에도 불구하고 아침 7시에 문을 열고 오후 4시 반이면 어김없이 문을 닫는다. 전날 준비한 500여 그릇의 곰탕이 얼추 그 시간이면 다 떨어지는 까닭이다. 지난 78년간 한 번도 탕을 더 끓이거나 탕이 남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 자랑이자 전통이다. 이쯤이면 체인점으로 사업을 키울 만도 한데 직영점 외에는 일절 분점이나 체인점을 내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맛이 분산되면 원래의 맛을 제대로 살려내기 어렵기 때문이란다.
하동관에서는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선불로 식권을 사고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78년 세월에 ‘장군의 아들’ 고 김두한 의원이 유일한 외상손님이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어느 날 친구 분과 드시고 ‘달아놔’ 하고 가셨는데 일주일 뒤에 돌아가셨어요. 고기라도 한 점 더 드리지 못한 게 아쉬웠는데 얼마 전 그 따님 김을동씨가 찾아와 매스컴에서 봤다면서 아버지의 외상값을 갚아줬지요.”
▲ 외동딸 장승희씨와 어머니 김희영씨.
종로통의 정재계·문화계 인사들이 줄줄이 찾아들었고 김영삼·김대중 등 역대 대통령도 단골손님이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유독 이 집 곰탕을 좋아해서 연초 초도순시 때면 참모들과 즐겨 먹었다. 제주도 초도순시 때는 경호실에서 헬기 편으로 30인분의 곰탕을 공수해 점심식사를 할 정도였다. 해외를 오갈 때마다 고향집 어머니 밥상을 찾듯 하동관에 들러 따듯하게 속을 채우는 손님들, 생전에 하동관 곰탕을 즐겼던 부모님의 제사음식으로 곰탕을 포장해가는 자식들, 부모님 따라오던 아이들이 장성하여 자기 아이들과 함께 오는 손님 등 사연은 가지가지지만 모두가 하동관의 변함없는 맛을 찾아온다.
이렇게 대를 이어 찾는 손님들을 이제 김씨의 외동딸 장승희씨가 대를 이어 맞이하고 있다. 평생을 일궈온 하동관을 맡아 달라고 했을 때 신문사 출신으로 광고 쪽에 관심이 많았던 딸은 몇 날 며칠 울면서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가 더 연로해지기 전에 비법을 전수받기로 마음먹었다. 공교롭게도 김씨가 국솥을 물려받던 그 나이에 딸도 하동관에 들어와 곰탕 끓이는 감을 익혔다. 어느덧 곰탕과 인연을 맺은 지 10년이 된 딸은 어머니가 친구도 한 명 없이 곰탕 하나에 평생을 전념했다며 안쓰러움에 눈시울을 붉힌다.
“철없던 사춘기 시절 곰탕 냄새 나는 엄마를 원망한 적도 있었는데, 그만큼 곰탕 하나에 고집스레 정성을 쏟은 엄마 덕분에 오늘의 하동관이 있다고 생각해요.”
승희씨는 어머니가 지켜온 하동관 본래의 색을 명확하게 이어나가면서도 고여 있지 않고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북촌 할머니 3대로 이어진 서울 곰탕 맛을 어떻게 이어갈지, 자신에게 주어진 제일 큰 숙제와 역할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더 맛있게 하기 위해 연구한다는 자체가 하동관에서는 무의미해요. 대를 이어 찾아주시는 손님들께 ‘그 딸도 역시!’라는 한마디만 들을 수 있다면 성공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