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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 각자와 친구 맺기를 신청하시는 예수님!
저희 집 근처에 저희 공동체와 마치 한 가족처럼 지내는 아이들의 집이 있습니다.
피정 센터 큰 행사 때도 초대하고, 여름 겨울 캠프 때는 아이들이 저희 집에 와서 마음껏 뛰고 즐기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저희 할아버지들은 그저 마음이 흐뭇할 뿐입니다.
한번은 거룩한 부활 성야 미사 때였습니다.
막내가 꽤 만만치 않았는데, 그 긴 전례 동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리저리 다니면서 소음을 발생시켰습니다.
그러나 미사를 주례하는 저는 하나도 괴롭거나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이 존재 자체로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아이들이 저희와 함께 있다는 그 자체로 행복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도 똑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이리저리 좌충우돌하고,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길을 가고,
그분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더라도, 하느님께는 살아있는 우리 존재 자체로 기쁘고 감사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아무리 큰 허물과 상처투성이어도, 하느님께서는 그저 넉넉한 미소와 너그러운 가슴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우리를 당신 품에 꼭 안아주실 것입니다.
살아있는 우리 존재 자체가 하느님께는 기쁨이요 행복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 친구 맺기를 신청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친구는 그저 그런 친구가 아닐 것입니다.
친구 중의 친구, 진정한 친구, 절친을 의미합니다.
절친의 의미에 대해서 과거 인디언들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
진정한 친구 관계는 절대로 그냥 맺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동고동락함을 통해 진정한 친구 사이로 발전합니다.
모든 것을 서로 공유함을 통해 우정은 깊어갑니다.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와 그 사이의 모든 벽이 허물어집니다.
내 것이 네 것이 되고, 내 것이 네 것이 됩니다.
진정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장점, 강점, 경쟁력, 건강 등등 긍정적인 측면도 받아들이지만, 상대방의 약점과 상처,
고통과 결핍, 실패와 좌절까지도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친구가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물의 창조주, 자비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오늘 이 부당한 죄인,
결핍투성이인 우리 각자를 향해 친구가 되자고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다가오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기 위해 꼭 필요한 것 하나는?
사람이 우울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관계’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관계는 왜 안 될까요? 나의 교만을 누군가가 꺾어주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교만이 있으면 관계에 있어서는 무능력자가 되고 그 때문에 슬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57세 아빠의 머리 꼭대기에 앉은 초4 아들’ 편에서 아이는 “난 왜 이렇게 나쁘게 태어났을까? 난 왜 태어나서 고통받을까?”라는 생각을 글로 썼습니다.
자기의 교만이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손찌검하는데도 엄마는 아이를 믿어주고 공감해주려고만 합니다.
아버지는 집에서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아이를 훈육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방송국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호전됩니다.
엄마는 아이를 키울 때 아빠 없이 자기 힘만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빠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아빠도 또 누군가에게 의존합니다.
아이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이렇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가 실천됩니다.
가지가 가지인 줄 알려면 반드시 어떻게 해서든 이 아이, 이 사람을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때문에 포도나무 비유에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당신께 붙어있는 방법이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성모 꽃마을 박창환 가밀로 신부의 『하늘 아래 첫 동네: 말기 암 환자 호스피스 사목일기』에서
‘정을 떼려고’라는 글의 내용입니다.
넉 달 전 초등 5학년 아들, 3학년 딸을 둔 9세 아빠가 간암 치료 불가 판정받았습니다.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무료 호스피스 시설인 성모 꽃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끝까지 남편 노릇, 아빠 노릇 해주지 못하고 가는 것이 제일 가슴이 아픕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업 실패로 자살 시도까지 했지만, 아이들 때문에 다시 살아보기로 하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술 때문에 간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환자의 여동생으로부터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빠가 100만 원을 주며 착한 일 한 번 안 해 봐서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고 맡겼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시누이에게 그 돈을 준 것에 서운해했지만, 아내에게 주었다면 분명 자식을 위해 쓸 수밖에 없었음을 알고 그렇게 한 것에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남편은 자기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며 하느님께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맡긴 것이었습니다.
환자는 이것으로 무언가 큰 숙제를 끝냈다고 느끼고 편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사랑은 능력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려고 시도해 본 사람은 자기 능력만으로는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겸손하게 자기가 나무가 아니라 ‘가지’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을 사명으로 삼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 ‘더 보이’(2019)는 슈퍼맨의 또 다른 버전입니다. 자녀가 없었던 한 부부는 우주에서 떨어진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웁니다.
아이는 자신이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알려줄 수 없었습니다.
우주에서 떨어진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지구를 파괴하는 자가 됩니다.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반면 진짜 ‘슈퍼맨’은 자기 아버지가 이 지구를 지키라는 사명으로 자기를 지구에 보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구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준 힘과 지식을 배웁니다.
그렇게 지구인들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
구약의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 사람들을 회개시키라는 하느님 명령에서 도망칩니다.
그 결과 큰 물고기 배 속에 갇히고 맙니다.
빛에서 도망치면 어둠뿐입니다.
사랑의 계명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저절로 지옥으로 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인 줄 모르고 나무인 줄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신께 붙어있게 하시기 위해 서로 사랑하라는 단 하나의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붙어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5,9-17: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오늘의 주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나야 하는 형제적 사랑이다. 그 근거는 요한에 의한 서간에 있다. 하느님의 성령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들어오는 데 있어서 어떤 차별을 두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대우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도 사람을 차별대우해서는 안 된다고 사도행전은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 모상을 닮았으므로 사랑의 모상이다. 이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니, 우리가 사랑한다면 우리는 삼위 일체적 삶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난다(1요한 4,7). 바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사랑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다. 이 사랑의 계명은 주님의 "명령"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의 "지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생활을 한다. 그것이 신앙인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신(8절)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늘의 복음은 지난 주일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결속과 공동체적 차원에서 그리스도께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절).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우리가 사랑을 산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사랑이 없이는 은총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비록 떠나시지만, 사랑으로 가지와 포도나무처럼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그분과 튼튼히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절)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이란 그분과 친교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은 은총이다. 이 기쁨은 우리 신앙인 모두가 언제나 간직해야 할 기쁨이다. 우리의 기쁨은 하느님 안에서만 가질 수 있다. 그 기쁨을 가지려면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사랑하면서 가질 수 있기에 우리는 계속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 나를 이길 때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이것이 당신의 계명이라고 하신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로마 13,10)이라 하였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모든 계명도 지키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모든 계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라는 말씀은 바로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그리스도께서는 친구들만이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은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그분의 친구가 되어 친교를 가질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종에서 친구가 되게 해 주셨고 마지막으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단계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에 우리의 삶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그분과 아름다운 친교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15절) 제자들은 하느님의 친구가 되었다. 이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따랐던 말씀이며, 그가 “하느님의 벗”(야고 2,23)으로 불렸던 말씀이다. 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지혜가 사랑에 도달하면, 그 지혜는 우리를 하느님의 친구로, 자녀로 만든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사랑은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셨다. 가지가 나무와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우리가 그분과 떨어져서는 맺을 수 없다. 이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 두 사랑의 계명이 우리의 열매이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이런 친교가 그 이유이다. 우리가 당신을 따르기 때문에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름으로써 우리가 영광스러워졌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삶이다. 우리의 행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 열매로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열매를 맺는 이가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새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요즘에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거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재미있는 것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사실 미사 때에도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사람을 보곤 합니다. 어떤 청소년의 경우 미사 내내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더군요. 본당 로비에 앉아 열심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청소년에게 “만약 스마트폰이 없으면 어떻겠니?”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절대 안 돼요.”
캠프에 가서 스마트폰을 반납해야 한다면 캠프 자체를 가지 않겠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스마트폰이 그리 대단한 것 같지 않은데 여기에 목숨 걸듯이 하는 모습에서 걱정도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런 모습에 대해 내면을 향하기보다는 다른 방향이나 외부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면은 전혀 보지 않고 외부에만 관심을 두는 모습에서 참 행복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두 내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랑, 평화, 믿음, 희망…. 모두 내면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면이 튼튼해질 때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내면보다는 보이는 외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외적으로 화려하고 풍요로워야 행복한 것처럼 말합니다. 커다란 착각입니다. 외적인 것에 대한 만족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어느 정도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그 충분한 액수에 도달하면 더 갚고 싶어 합니다. 스마트폰도 한 시간만 하면 충분할 것 같지만, 한 시간이 지나면 그 시간이 너무 짧다고 말합니다.
내면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 사랑은 겉으로 보기에는 실천하기 힘들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사랑받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2)
우리의 내면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사랑. 그 사랑은 받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사랑해야만 합니다. 말로만 사랑한다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행동하는 사랑을 통해 진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내 내면을 더 풍요롭게 만들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고 내 영혼의 선장이다(윌리엄 어니스트 헨리).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부활 제6주일."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
생명의 계절
오월은
생명에 대한
감사로 우리를
이끕니다.
어린이들과 함께
더 좋은 사랑의
세상이 되길
꿈꾸며
기도드립니다.
생명과 함께
기쁨이 있습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기에
지배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생명 주일입니다.
생명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생명의 가치를
가장 우선시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모두가 생명을
내놓는
사랑뿐입니다.
사랑은
생명에 대한
존중입니다.
하나같이
소중한
생명입니다.
모든 사랑은
한결같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서
철이들고
깨어납니다.
지나친
이기심과
욕심은 언제나
생명을 경시하는
아픔으로 모두
떨어집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생명을
힘들게하는
뻔뻔함에서
벗어나는 길이
생명을 살리는
기본정신입니다.
모든 생명을
하느님같이
존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생명의
참모습입니다.
생명을 지키려
희생하는
모습에서
참된 사랑을
만납니다.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어울려야
더 아름다운
사랑이 됩니다.
더 큰 사랑을
향해 나가는
사랑의
생명 주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예수님의 명령!'
오늘 복음(요한15,9-17)은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의 끝말씀과 사랑의 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한 속죄 제물로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이 사랑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아가페 사랑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7)
5월의 첫 주일인 오늘은 '생명 주일'입니다. 생명 주일은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죽음의 문화'를 없애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존중받는, 더 나아가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까지도 널리 존중 받는 생명의 문화를 더 발전시키고, 부활시키자는 의미를 담고 있는 주일입니다.
낙태와 자살과 저출생의 문제와 노인문제와 전쟁과 생태계 파괴 등과 같은 생명경시 현상(죽음의 문화)의 근본 문제는 '사랑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준엄한 명령인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하느님께서 존재하게 하셨습니다.(창세1,1-2,4 참조) 때문에 모든 생명은 결코 인간에 의해 함부로 파괴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화가 생명의 문화로 바뀌려면, 나 자신이 단순하게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단순하게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회개와 한 나라의 올바른 지도자의 선출로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 갑시다!
복음 말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