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과학자의 세상 보기] 1964년 입시 엿파동
며칠 전에야 ‘엿기름’이 뭔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엿기름이란 엿에서 뽑은 기름으로 식혜 만드는데 쓰는 것인 줄 알았다. 참기름, 들기름, 콩기름, 팜유(야자유), 올리브유 등등 일상속에 수많은 기름(Oil)을 접하는데 엿기름이라고 다르겠나 하며 별 생각없이 살아온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그나마 무슨 곡식을 싹을 내서…하는 정도는 주워들었지만.
이름이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엿기름의 ‘기름’이 먹는 기름(Oil,油)이 아니라 ‘기른다’에서 왔기 때문이다. 옛날엔 숙주나물을 숙주기름, 콩나물을 콩기름(?)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엿기름의 옛말도 보리길움이었다나? 암튼 엿기름은 곡식, 특히 보리의 싹을 나게한 후 건조시킨 것이다. 한자로는 맥아 (麥芽)라고 하며 영어권의 양조분야에서 몰트(Malt)라고 하는 물건이 바로 엿기름이다.
보리같은 곡식이 씨앗으로 역할하려면 싹이 나야하는데 이때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게 된다. 곡식낱알에 함유된 다량의 디아스타제 효소 (Diastase, 아밀라아제의 일종)에 의해 녹말이 분해되고 이로부터 에너지원인 포도당이 만들어지게 된다. 식혜를 만들 때도 바로 엿기름에 포함된 디아스타제가 쌀밥을 삭혀서, 즉 녹말을 분해하여 엿당 또는 맥아당을 만들어주므로 단맛이 나게 된다. 만들어진 엿당을 효모(Yeast)가 발효시키면 만들어지는 것이 술이다.
엿은 말하자면 식혜를 농축하여 굳힌 것이다. 굳히기 전이 물엿, 조금 졸인 것이 조청이다. 완전히 굳히면 갱엿이 되는데 너무 단단해서 먹기가 힘들다. 사먹는 엿은 먹기좋게 굳힐 때 공기를 불어넣기 때문에 부러뜨려 보면 단면에 구멍이 많다. 어릴때 보면 엿장수한테 가재도구를 갖다주고 엿 바꿔 먹었다가 엄마한테 혼나는 아이들이 정말 있었다. 우산 펴들고 담장 위에서 뛰어내리기 같은 것도 대개 그런 아이들이 한다.
끈적거리는 성질 때문에 꼭 붙으라는 가족의 염원을 담아 매년 수능이나 입학시험장 같은 곳 교문이나 담벼락에 등장하는 것이 엿이다. 나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1964년에도 입시경쟁과 한국부모들의 교육열은 치열했던 모양이다. 1964년 12월 서울시 중학교입학시험때 터진 소위 <엿파동> 또는 <무즙파동>이 그 좋은 예이다. 출제자들의 자질이 부족했던지 무려 20여 개 문항에 복수의 정답이 있다는 논란이 일었다. 특히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이 과학과목 18번 문제였던 <다음중 엿을 만드는데 엿기름 대신 넣어도 되는 것은?>이었다. 원래 정답은 <디아스타제>였지만 객관식 답안 중에 그 디아스타제가 듬뿍 들어있는 <무즙>도 있었던 것이다.
아래는 필자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시험을 보다 겪은 일이다. 세 칸의 네모에 써야하는 정답이 개구리인 건 알았는데 그날따라 표준어 개구리 세자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사투리인 깨구락지와 네모 세 칸 사이에서 고민고민하던 나는 결국 깨-구-락 세자를 써놓고 나오고 말았다. 1964년의 수험생들도 디아스타제와 무즙을 놓고 무척 번민하였을 것이다. 시험 후에는 부모들과 교육기관 사이에 거센 항의소동이 일어났다. 교육기관측이 무즙을 정답으로 인정하지 않자 결국 재판으로까지 사태가 번졌다. 특히 대한민국 최고 명문중학교이던 경기중학교에 지원했다가 무즙이라고 답을 쓰는 바람에 불합격 처분을 받은 학생들의 어머니들은 정말로 무즙으로 만들고 콩고물까지 묻힌 엿을 증거물로 재판장에 준비해오는 치밀함(?)과 열정을 과시하였다. 바로 이 사건이 <엿먹이다> 혹은 <엿먹어라>라는 표현의 기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무척 아끼는 조카딸이 이번에 수능시험과 대입의 관문을 거친다. 나도 고3 수험생일 때는 학력고사 날이 인생을 결정하는 날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30여 년이 지나 돌아보니 인생에 있는 몇몇 체크포인트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동안 열심히 뛰어온 조카딸을 포함한 모든 대입수험생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최영출 (생명공학 박사)
[샌프란시스코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7/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