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맛 (1)
장학생으로 뽑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면서 부산까지 밀려간 UN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밀고 올라가면서 한반도의 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나 보다 하고 기뻐하고 있을 때, 중공군의 인해전술 공격으로 우리의 꿈은 깨어졌다.
중국통일을 이룬 모택동은 전쟁이 끝나고 8기군 중공군인들의 부담이 컸던 때여서 그 많은 중공군을 총알받이로 한국전선에 내 몰은 것이었다. 일당 백 ‘관우장수’ 일지라도 천명, 만명이 달라 들면 당해내지 못할 그런 상황이 한국전선에서 벌어진 것이다. 천지가 얼아 붙던 1월 4일, 우리는 다시 한 번 서울을 떠나 부산에서 피난민생활의 둥지를 틀어야했다.
그와같은 엄청난 상황 중에서도 경기여고 박은혜 교장선생님은 부산의 영도 섬에 텐트를 치고 피난 내려오신 경기여고 선생님들을 모아들여 수업을 시작하셨다. 내가 고 2학년(5학년) 때였다.
고 3이 되던 어느 날, 교장실에서 우리 반 학생 몇 명을 부르시고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펴보시더니 교장선생님이 나를 찍으셨다. 미국 시카고 트리뷴 사에서 주최하는 세계 고등학생대회에 한국 고등학교 학생을 초대하였기에 그 대회에 보낼 대표를 선발하기위해 문교부가 각 고등학교에 대표를 보내라는 공지를 내린 것이었다.
약 30명 남짓한 남녀 학생이 문교부에 모였고, 교육감 선생님이 우리에게 ‘부산’이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글을 쓰게 하였다. 이 글쓰기에 통과한 남녀 6명이 최종 후보로 또 인터뷰를 해야했다. 인터뷰 장에 들어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화대학교 총장이며 한국 UN 대표의 일원인 김활란 박사, 연세대학교 총장이셨으며 당시 문교부 장관인 백낙준 박사, 그리고 한국 교육을 위해 UN이 파견한 베너-(Benner) 박사님 등, 당대의 가장 고명하신 분들이
나란히 앉아 계시는 게 아닌가!
교장선생님이 가라고 하셔서 갔고 평소에 경쟁심이 별로 없던 나는 내가 꼭 대표로 뽀혀야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나란히 앉은 심사의원들의 위상에 그만 질려버렸다. 이화여고생인 춘원 이광수 선생님의 따님인 이정화 양이 대표로 뽑혔다. 이화여고는 축제분위기였다고 했다. 박은혜 교장선생님은 아무런 내색을 하시지 않았지만 나로서는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난리가 날줄 알았더라면 좀 더 열심히 뛸 것을...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정화 양은 뽑힐 자격이 충분했기에 억울하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절친한 친구로 남아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몇일 후, 베너-박사가 경기여고 교장실에 오셔서 교장선생님께 내가 미국 대학교의 장학생으로 뽑혔다고 알리셨다. 교장선생님이 이 사실을 아버지께 알리셨는데, 아버지는 내가 너무 어려서 혼자 미국에 보낼 수 없다고 하셨다. 베너-박사는 동대신동 우리 집에까지 찾아오셔서, 이 대학교가 얼마나 안전한 곳인가를 역설하시며 아버지를 설득하시는데 서공하셨다. 이런 경위로 18세인 나는 우리 6남매 중 제일 먼저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첫댓글 존경하는 오덕주 테레사 회장님!
2024년 새해에 주님의 큰 은총속에서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첫회분 감사히 읽었습니다.
우리 왕언니께 새해 첫세배드립니다. 금년에는 좀더 건강해지시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부산 영도섬에서 경기여중에 첫 입학을 했는데, 왕언니께선 벌서 유학길에 오르셨네요~
유학 중에 우리 왕언니께서, 미국 학생들, 특히 한국 남학생들 사이에 엄청 인기셨다고~ 귀가 따갑게 저는
들었답니다. 그 남학생들중에 저의 남편될 사람이 끼어 있었거든요~ ㅎㅎ 올려주시는 귀한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