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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한 번 공부하였던 내용입니다. 복습이니 조금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반드시 읽고 오셔서, 토론이라도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2022.12.12
4) ** 이슬람 세력은
무하메드는 622년을 원년으로 하여 유일신 종교(이슬람)를 창립했다.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 종교이지만, 교리가 훨씬 더 단순하여 쉽게 퍼져나갔다.
(기독교의 신약은 없고, 구약을 많이 응용하였다.)
이때는 서쪽의 비잔틴 제국과 더 서쪽의 사산왕조(이란) 시대이다. 이들을 군사적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급격하게 팽창했다.
북아프리카의 해안과 스페인을 장악하였다.(711년부터)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샤를마뉴가 방어하면서 두 세력이 대치했다.(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의 대치)
***중세의 이슬람은
이슬람 세계를 중심에 놓으면, 주변에 비잔틴 인, 유대인, 페르시아 인, 인도 인이 있다.
7세기 이후의 정복 전쟁으로 이슬람 문화를 퍼트리기도 했지만, 주변 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슬람 문화를 이루는 바탕을 보면
1) 이슬람 발상지는 사우디아라비아 이다.(베드윈 족)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이 크다.(아라비아 반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유일신은 같으나, 우상 숭배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예수는 예언자일 뿐 신이 아니다.
2) 기독교에 비해 평등적이며, 계율은 관용적이다.
3) 632년에 마호멛이 죽고, 후계자는 주변국에 정복전쟁을 일으킨다.
주변에 이슬람 문화를 퍼트리고, 또 그쪽 문화도 받아들인다.
(이슬람 종교에 손상주는 것은 절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4) 완전한 형태의 성서는 쿠란 뿐이다. 성경은 사도에 의해서 많이
왜곡되었다.
5) 정치 체제는 이슬람 종교 체제에 귀속하였다.
신앙과 일상생활이 일치하였다.
6) 모든 권력은 신에게 귀속한다.
7) 그리스 문명(철학과 과학)을 수용하여 과학이 발달하였다.
특히 의학의 ‘갈레노스’는 의학에서 신적 존재이다. 중세 유럽인이 갈레노스
에 너무 빠져서 의학 발전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북 아프리카를 거쳐 스페인에 진출한 이슬람은 아랍인의 이슬람이 아니다.
이슬람을 믿는 무어인이다.)
이슬람 세력이 피레네를 넘어 프랑스로 북상하자, 이들을 방어하는 프랑스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메로빙가 왕조를 건설한다.
751년에 실제의 권력자인 피핀이 정권을 장악하여 (메로빙거에서)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다.
(*권력은 힘에서 나오고, 전쟁은 힘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배양지이다.)
피핀의 아들이 샤를마뉴(칼) 대제이다.(742-814)
새를마뉴 대제는 카톨릭을 후원하여, 바티칸에 영토를 주어서 교황령을
만들었다.
프랑크 왕국은 유럽 최고의 왕국이 되어서 유럽을 지배했다.
샤를마뉴가 죽자 세 아들에게 영토를 나눈다. 프랑크가 분리되어서
오늘의 독일, 프랑스, 이태리의 기초가 되었다.
5) 이때의 교황권은 바닥이었다. 카로링거 왕조의 황제권에 기를 펴지 못했다.
이 시기의 교황이 무력한 존재로 기독교도 어려움에 처하자
수도원 운동이(퀼리니 수도원) 나타나면서 기독교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기독교가 어려움에 처하고, 민중의 삶이 고달프자 성인 숭배 사상과
순례 행위가 나타난다.(순례는 고난의 체험이기도 하다.)
*** 820-30년 경에 콤포스텔라(폴투갈-스페인 경계지역)에 야고보의 시신을 발견했다 하여, 야고보의 무덤-성당을 지었다. 중세 유럽인의 순례의 중심지가 되었다.
(야고보는 순교한다. 그때의 피가 지중해를 건너, 대서양으로, 폴투갈 해안까지 흘러갔고 시신도 그곳까지 흘러와서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있었다.)
(*순례는 중세의 기독교 문화를 잘 보여준다. 순례가 유행하는 배경은 중세의 삶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중요한 순례지는 예루살렘과 콤포스텔라 였다.)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공인을 거쳐서 여러 번의 교리 논쟁을 거친 후에 유럽의 정신을 지배하는 세력이 되었다. 로마가 붕괴 되고 난 뒤에 기독교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로 분열하였다.
황제(샤를마뉴 대제)가 교회의 후원 세력이 되면서 황제권이 교회를 압도하는 권위를 가진다. 한편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중심을 둔 교회(그리스 정교회)는 터키, 그리스를 위시하여 한 때는 이탈리아의 시실리아, 베네치아,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도 세력권에 두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1073-1085) 때에 교황권을 회복한다. (뒤에 공부합시다.)
십자군 운동
*십자군 운동의 배경
이슬람이 등장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에도 기도교-무슬렘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상대 종교에 관용했고, 혼인관계도 맺었다.
튀르크 족(셀죽 터키, 오스만 터키)이 서진하여 비잔탠 제국과 세력 다툼이 일어나면서, 터키 서해안의 기독교 도시들(에베소, 안티옥 등)이 위기를 느끼고, 예루살렘이 넘어가면서 기독교계가 불안해 했다.(대체로 1000년 대에 해당한다.)
이때 스페인에서는 기도교인들이 이슬람을 몰아내자는 ‘레콩키스타’ 운동이 일어났다.
또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가 사제 서임권을 놓고 서로 파문을 하면서 분열하였다. 수세에 몰린 로마 교황청이 힘을 만회하기 위해서 온갖 선전선동을 동원하였다. 그 하나가 무슬림의 손에서 팔레스타인을 찾자는 운동이었다. 전쟁의 요구였다. 전쟁에 동참함으로 자기가 지은 죄를 보속받는다고 선전하여 많은 기독교인이 참전했다고 한다.
<레콩키스타>
스페인은 이슬람과 싸우는 성스러운 기사단을 조직하였다.성전 기사단, 구호 기사단, 이베리아 기사단 등등이다. 기사단을 이끄는 사람은 주로 하급 귀족이었고, 이 운동을 레콩키스타라고 했다. 이 기사단의 모임이 영국 젠트리의 모체라고 한다.
1492년에 그라나다가 항복함으로, 스페인에서 이슬람은 모두 쫓겨났다.
십자군의 전개
우르비노 2세는 교회를 강화하기 위해서 프랑스에 여행 중에 간단한 연설을 했다. 이슬람(셀죽 터키이다.)의 위협을 받는 동방의 그리스도 인을 도우자는 짧은 연설이었다.
이때 소위 기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난폭한 짓들을 하였고, 종말론이 유행하면서, 순례가 대 유행이었다. 난폭한 기사들이 자기의 죄를 씻는 방법이 순례객을 보호하고, 동방의 기독교인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교황의 연설에 호응하여 동방으로 출정했다.
이들은 아나톨리아를 통과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기독교 왕국을 세웠다.(영화 킹덩 오브 헤븐은 이때를 다루었다.) 그들은 이슬람과 유대인을 학살했다고 한다.
본래 비잔틴 제국의 땅이므로 비잔틴에 바쳐야 하나. 기독교 왕국을 세웠다.
교황 우르비노 2세는 가짜 뉴스를 퍼트리며 선동했다.
--> 동방 지역에 하나님을 부정하는 세력이 침입하여 칼로 강탈과 살해를 한다.
2. 십자군 전쟁 시작(1095) --- 많이 참여했다.
목적은 동방 교회를 보호하고, 안전한 성지순례(예루살렘)
노르만 기사들(바이킹 후예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 1차 십자군 전쟁 성공 — 예루살렘 왕국 건국
십자군 참여자들은 폭력적, 약탈 – 이슬람 국의 반발을 불러
중동에서 쫓겨난다.
4. 십자군의 시작은 신앙심에서 출발했으나
나중에는 개인의 탐욕을 채우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5. 4차 십자군 — 베네치아에서 출발
이때는 전쟁이 바로 장사 수단으로 전락
비잔틴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대 약탈을 자행 – 기독교가 동, 서로
분리된다.
6. 4차 십자군은 교황 인노켄다우스 3세(1190 – 1216)가 소집
이단을 처형한다는 목적을 세웠다.
(이때의 대표적 이단 종파는 프랑스 알비에 있는 카타리파 였다.)
==> 결과적으로 카타리 파는 궤멸 당하고, 종교재판이 나타난다.
카타리 파 225명이 화형 당하고 – 이후 종교재판이 극성을 부리다.
십자군 운동 요약
1095년에 교황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교황 우르비노 2세는성지(예루살렘)의 회복을 주장하면서 동방 원정을 부추겼다.(선동적인 언사들-가짜 뉴스를) 이슬람 세력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때를 시발로 1096년에서 1270년 까지 8차의 군사 원정이 있었다.
제 1차 십자군(1096-99)은 프랑스 귀족(주로 노르만 기사)이 참여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기독교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십자군 약탈과 학살을 무자비하게 저질렀다. 그 외에도 몇 개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몇 개의 기독교 왕국을 세웠다. 왕국을 지키기 위해 종교 기사단(템플 기사단 등)을 조직했다. 이슬람 국에게 뻿기도, 뻬앗기기도 하면서 8차까지 이어졌다.
이슬람 국의 반격으로 기독교 왕국은 무너지고, 1291년에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지역까지 뻬앗기면서 십자군은 막을 내린다. 이 시기의 서유럽은 살기가 어려워서 십자군은 강도짓을 많이 했다. 4차 때(1203)는 같은 기독교 국가인 콘스탄티노플를 점령하여 약탈했다. 이 사건으로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는 완전히 갈라섰다.
일반적으로 십자군 운동이 다양한 목적으로 여러 차례 있었지만
1 ~ 4 차까지만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십자군의 평가
시작의 먼 원인은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 지역을 장악하자. 기독교의 저항이 일어나는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975년에 프랑스에서 남부의 이슬람 정착민을 몰아냈다. 1016년에는 프랑스-이태리 연합으로 이태리 사르테냐 섬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냈다.
이후 비잔틴 제국의 바실리우스 황제(제위 976-1025)는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 크레타, 키프로스를 회복했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도 몰리고 있었다.
1092-93년에는 북부 스페인을 회복했다.
십자군 원정은 종교적인 열정보다도 노르만 기사들의 약탈과, 후원세력인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제노바의 돈벌이를 목적으로 함으로, 같은 기독교 세력인 비잔틴 제국도 몸서리 쳤다고 한다. 십자군의 말기에는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과 손잡고 기독교 세력을 막는 촌극도 있었다.
십자군은 전쟁에서 명분도 잃고, 패전을 많이 했고, 힘을 키운 이슬람 세력(오스만 터키)이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게 된다.
5. 성전 기사단
1차 십자군이 세운 기사단이다. 1차 십자군의 중심 세력은 프랑스 기사단이었고, 이들이 성전 기사단의 모체가 되었다. 성전 기사단의 본래 이름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전사들’이다. 줄여서 성전 기사단이라고 불렀다.
성전 기사단은 베네딕트 수도원의 규칙을 엄격히 따랐다. 청빈, 순결, 복종을 맹세했다. 목적은 순례단을 보호하는 것이다. 성전 기사단 외에도 이런 종류의 기사단이 많았다. 그 중의 하나는 요한 기사단으로, 이 둘은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다.
성전 기사단은 순례객을 보호하면서도, 이들을 대상으로 오늘로 치면 은행업을 해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토지를 기증하는 사람도 많았다. 어느 왕국에도 소속되지 않으면서, 돈이 쌓이면서 독자적인 행보를 하였고, 심지어는 이슬람을 고객으로 맞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은 변하고 있었다. 교회의 권력이 세속의 왕에게로 이동하였다. 성전 기사단은 돈을 벌면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왕들은 세력이 커가는 성전 기사단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자유로운 행동을 하는 기사단을 교황도 좋지 않는 시선을 바라보았다.
1312년에 교황 클레멘트 5세가 성전 기사단의 해체를 선언했다. 프랑스 왕은 1314년에 성전 기사단의 지도자 자크 드 몰레를 붙잡아 화형에 처했다. 죽을 때 많은 저주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말들이 후대에 전설을 만들어냈다. 실제로 오늘까지도 사실 이야기와 전설이 수없이 전해온다. (소설 다빈치 코드도 전설 중의 하나를 소재로 삼았다.)
*템플 기사단(여러 성전 기사단 중의 하나이다.)
이 시기에 여러 기사단이 나타났다. 템플 기사단은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소개한다.
1114년 경에 프랑스의 영주이고, 기사인 위그(1070-1133)가 여행 중의 순례자를 이슬람의 약탈자로부터 보호하는 목적으로 예루살렘에서 결성했다. 이것은 스페인이 이슬람으로 나라를 회복하려는 레콘키스타와도 관련이 있다.
1139년에 교황이 이들에게 특권을 부여하자, 이들은 오로지 교황에게만 봉사하였다.(왼쪽 어깨에 빨간 십자가를 붙였다.-이들이 흘린 피의 상징이라고 한다.)
6. 십자군 뒤 이야기
십자군 전쟁의 시작은 어쨌거나 신앙심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 왕국까지 세웠다. 그러나 이집트 술탄이 예루살렘 왕국을 정복하고(1187), 레반트 지역에서 점점이 있는 기독교 소왕국을 점령해 나갔다.
1189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는 교황의 호소를 받아들여 십자군 원정을 이끌었다. 이때 영국의 사자왕이라는 리처드 1세도 참여했다. (3차 십자군의 긴 이야기는 생략, 관심이 있으신 분은 자료를 찾아 공부하십시오,) 사자왕 리처드는 오스트리아 왕에게 붙잡혀 프리드리히 1세에게 넘긴다. 프리드리히 1세는 비싼 몸 값을 받고 리처드 1세를 영국에 넘겨주었다. 영국인에게 리처드 1세 이야기는 영웅적인 무용담이 곁들여져서 굉장히 인기 있는 왕이다. 전설적인 영웅으로 떠 받든다.
이때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킹덤 오브 헤븐’이다.
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가 배를 건조하여 참전했다. 배 값을 원정이 끝난 후에 십자군에서 지불하기로 했으나, 십자군이 승리할 가망이 없자. 베니스 군은 원정길에서 기독교 도시들을 약탈했다. 십자군도 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약탈했다. 이로서,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는 결정적으로 갈라섰다.
이제는 십자군이 성지회복이라는 목표 따위는 팽개쳐버리고, 도시를 약탈하는 깡패집단으로 변했다. 중세라는 시대가 강도질을 하지 않고는 먹고 살기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것이다.
(사진 – 콘스탄티노플 점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