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웅박고을과 환관 김처선을 찾아서
나는 가끔 럭비공처럼 나도 모르게, 어디로 튈지 모를 때가 자주있다.
오늘도 아무 생각없이 TV를 보다말고, 10시가 지나는 시간에 방콕에만 있기가 그래서 어디론가 가보자고 길을 나섰다.
그렇다고 아주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연산군 당시 충언을 하다 목숨을 잃은 환관 김 처선의 흔적을 더듬어보고자, 그의 탄생지로 알려진 세종시 전의면 양지리가 그 목적지였는데....
양자리가 있다는 덕고개를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 세종시로 빠지는 길로 접어들고 말았고,그러다가 병천 방향으로 길을 틀어 전동면으로 향하다가 발견한게 뒤웅박고을 이정표였다.
뒤웅박 고을은 두차례 가보긴 했으나,정작 제대로 돌아볼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해 다시 가보려던 곳이라서, "옳지 잘됐다" 쾌재를 부르며 그곳으로 향했다.
두차례 가본 것은 모두다 귀인의 초대를 받고 자가용에 실려갔던 때문이라, 지리도 제대로 몰랐고 식사만하고 대충 둘러본 까닭에,세세한 모습을 사진에 담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우선 뒤웅박 고을을 차분히 돌아보고, 그래도 본래 목적지인 김 처선 유적지를 찾아 나섰는데,그러다가 6.25사변 당시 격전지였다는 개미고개 자유 평화의 탑과,전의 향교와 전의 면사무소를 들려보기도 하였다.
이후 또 다시 김 처선 유적지를 찾아 나섰지만,헛수고만 하고 겨우 김처선로만 한컷 찍고 되돌아와야만 했다.
여행은 꼭 가보고자 했던 목적지가 아니라도, 어디든 가다보면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수확물을 건질수 있어 좋다.
오늘 여행도 의외로 좋은 구경을 많이 할수 있어 더없이 행복했고,좋은 힐링의 시간이 되어 만족스러운 여행길이 되었다.
뒤웅박 고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예사롭지 않은 거목 느티나무
이런 멋진 노거수가 보호수로 왜 지정받지 못했을까?
주변이 어수선하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 보기에 민망하다.
뒤웅박 고을에 도착하여
식사를 하지 않는 관광객은 약간의 관람료가 있는가 보다.
박물관과 레스토랑 으로 올라가는 입구
뒤웅박고을은 전통장류박물관이 있고, 운주산 기슭 아래 으리으리한 규모의 장독대가 있는 전통 장류 테마공원이다.
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장 담그는 아낙네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시골 마을은 아니다.
공원 안에 장을 담가놓은 옹기만 2천여 개나 된다.
이곳에서는 장독대 사이를 거닐며 손수 장을 담그시던 할머니 얘기도 들려주고,..
가끔씩 손사래를 치는 아이들에게 우리 먹을거리인 장이 얼마나 좋은지도 자연스럽게 설명해준다고 한다.
전통 장류를 찾아가는 여행이니 승용차로 쉽게 달려가기보다 열차여행을 택하는 것도 괜찮은 한 방법이리라.
뒤웅박고을은 경부선 전의역과 조치원역 사이에 있다.
전의역에서 버스를 타고 10여 분을 달리면 청송1리, 청송산업단지 앞에서 내리면 뒤웅박고을 이정표가 외지인을 반긴다.
큰길에서 작은 오솔길을 따라 1.5km 정도 걸어 들어가면 뒤웅박고을이 나온다.
뒤웅박고을의 장은 청송리 인근에서 재배에는 콩을 주원료로 하는 원칙을 고집스럽게 지켜가고 있다고 한다.
뒤웅박고을 전역은 아기자기한 테마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초입의 십이지신상 거리를 지나면, 다양한 형태의 장독대가 모습을 드러내며 장류 테마공원임을 알린다.
어머니 장독대는 설립자의 모친이 직접 사용했던 옹기 유물을 모아서 조성한 장독대로 어머니 조각상이 함께 들어서 있다. 해담뜰 장독대는 천연의 맛을 이어가는 '지킴이 장독대' 역할을 하며, 장 만들기 체험자들을 위한 가족 장독대도 있다.
이런 풋풋한 사연의 장독들이 마당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뒤웅박고을의 설립 취지와도 맞닿아 있다 할것이다.
뒤웅박고을은 우리 어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족의 건강을 생각하며 정갈하게 담근 전통 장류를 보급해 건강한 참살이 식문화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뒤웅박고을의 '뒤웅박'은 추수가 끝나면 이듬해 풍농을 위해 씨앗을 보관하던 종자 보관 용구에서 따온 이름이란다.
"여자팔자 뒤웅박"이란 말이 있는데,뒤웅박에는 이런 저런 곡식들을 담아두기에 어떤 곡식을 담느냐에 따라 귀한 그릇으로 여기기도 하고,그럭저럭한 잡곡 그릇으로 쓰인다해서 나온 말이리라....
최고의 약은 걷는것이다.최고의 운동은 걷기이다.
걷기를 권장하는 좋은 글이 빼곡히 적혀있고,뒤웅박 고을에 관한 소개도 나타나 있다.
12지간의 동물상 조형물이 줄지어 서있고....
곳곳에 시를 새겨 놓았다.아마도 주인장께서 시를 각별히 좋아하거나 시인인지도 모르겠다.
으름이 주렁주렁
산 다래도 주렁주렁
주렁주렁 열린 열매들이 얼마나 여유로운 풍경인가!
줄지어 늘어선 장독대를 보고 있노라면, 그저 넉너한 풍요로움이 느껴진다.
전통 장류 박물관
쉼터도 여유롭게 조성되어 있었고....
인공 폭포
뒤웅박 고을에서 한참 나오다 만난 청송 2리 서당골길이다.
6.25격전지 개미고개에서...
6.25당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고,장렬한 전사를 했던 아까운 목숨들이 기억되고 있는 현장
나라가 이러한 피흘린 희생에서 존재한다는 걸, 오늘날 젊은이들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개미고개 바로 주변에 곰과 공작새등 각종 동물들이 있는 베어트리 파크가 있다.
또한 운주산성으로 향하는 길이 나오기도 한다.
모두 다 예전에 돌아본 곳 들이라서, 오늘은 생략키로 하였다.
전의 향교
전의 면사무소
면사무소에 들려 김 처선에 관해 알아보려 했으나,도무지 깜깜이다.
향토 문화 담당자에게 전화로 문의해봐도 돌아온 답변 역시 신통한게 없었고...
비록 신분이 환관이긴 했지만, 폭정을 하던 왕에게 충언을 하다 목숨을 잃은 충신을 이토록 모른단 말인가!
많이 가슴 아팠고,우리나라가 역사 의식이 이정도인가 생각하니 분한 마음이 일기도 했다.
충남에는 유난히 수많은 충신들이 출생했던 곳이라서, 나는 가능하면 시간 나는 대로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다.
전의 유래비에는 김처선의 이야기가 나타나 있었다.
전의면에 관한 기록도 비교적 잘 기록되어 있기도 했다.
전의에서 여러 사람을 붙들고 물어 보았지만,제대로 출생지 하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렵사리 교동리에 가보라고 해서 찾아갔지만,거기서도 아무런 수확을 건지지 못하고 다만 김 처선 거리가 있다는 것만 알아내는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왕의 물 시장은 전의 초정수라는 세종대왕이 음용했다는 약수터에서 유래한다.
전의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2.4㎞ 정도의 거리에 관정리 중대부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차령산맥 기슭에 위치하고 있어 연기지방에서도 손꼽히는 청정지역으로, 마을의 북쪽에 있는 탑고개를 중심으로 천안시 성남면과 행정경계를 이루고 있다. 탑고개에 오르는 중턱에는 ‘초정(椒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에서 나는 물은 천안의 목천, 청주의 초수와 더불어 물맛이 좋은 초수로 오래 전부터 이름나 있기도 하다. 이 초수는 2004년 3월 9일 연기군 향토유적 46호로 지정되었다.
초수는 물맛이 호초(胡椒 : 후추)처럼 톡 쏘는 맛이 나는 물인데, 세종장헌 대왕실록(世宗莊憲 大王實錄)에 의하면 전의, 목천, 청주에서 나는 초수를 사기그릇에 받아 밀봉한 후 매일 왕실로 올려 보내어 음용(飮用)하니 피로가 회복되고 피부, 안질병, 위장병 등을 치료하는 신비한 약수라고 30여 곳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전의초수는 인체에 필요한 미네랄 성분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고, 소화촉진 역할뿐만 아니라 땀띠 등의 피부질환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전의초수를 상품화하여 국내시장은 물론 해외시장까지 개척하여 지역경제발전에 큰 성과를 올리고 있다.
<전의향토지발간추진위원회·조치원문화원, 『전의향토지』>
간신히 찾아낸 김 처선 로
환관 김처선은 누구인가?
김 처선은 조선 연산군 조 당시 내시로써,무려 4명의 왕을 모셨던 최고위 판내시 부사 겸 상선을 겸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연산군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자 환관 김처선은 등청을 하면서 집안 식구들에게 ''나는 오늘 죽을 것이니 기다리지 마라"라는 말을 하고 등청을 해서 아침부터 연회를 배풀고 있던 연산군에게 간하기를 ''늙은 놈이 경서와 사서를 여러번 읽어 봤고,능하지는 않지만 네 분 임금을 섬겼는데,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군주는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연산군은 김처선에게 활을 쏘아 맞히자, 활에 맞은 환관 김처선은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간하다가 죽었는데 이 늙은 내시가 어찌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연산군은 화살 하나를 더 쏘아 김처선을 맞히자, 김치선은 넘어져 땅에 무릎을 꿇자 연산군은 김처선 다리를 부러뜨리고는 일어나서 걸어보라고 하자, 김처선은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어 다닐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연산군은 김치선의 혀를 자르고 배를 갈랐으나 김치선은 숨이 넘어 갈때까지 간언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환관 김처선이 죽자 연산군은 그 시신을 호랑이에게 주고 양자와 7촌까지 연좌 죄를 물어 처형하고 본관인 전의 김씨도 없애버렸다고 한다.
김 처선의 유적지를 찾아나섰다가 만나본 충신 홍 직 정려문
홍 직이란 분은 솔직히 잘 모르던 분인데,오늘 비로소 이런분도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정려문을 세우라고 할 당시는 오늘날 어떤 훈장보다도 귀한 내용일텐데, 잡초만 무성하니 세월이 참으로 무심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