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41
7월4일[연중 제1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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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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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pKDR07qwPA
(김동영 라파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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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제대로 된 풍랑을 한번 만나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기치 않았던 파도에 휩쓸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린 시절부터 워낙 물을 좋아했던 저인지라, 또 짧게나마 경험했던 직장생활도 바다가 지척인 곳에서 했기에 저는 자주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돌변하는 바다, 정말 무섭습니다. 성난 바다, 정말 감당하기 힘듭니다. 순식간에 닥쳐온 돌발 상황 앞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오시는 피정객들 위한 식재료 마련을 위해 낚시배를 탔습니다. 선장님께서 고개를 갸우뚱하셨지만, 새벽 공기를 뚫고 한 시간이나 달려왔는지라, 사정사정해서 출항을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큰 바다로 나가자마자 엄청난 풍랑에 낚시는 고사하고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주기적으로 큰 너울 파도가 들이닥쳤는데, 파도가 얼마나 높던지 파도의 정점에 머무르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때 마다, 철렁 가슴이 내려앉던 그 섬뜩함이 아직도 기억에 선합니다.
항구가 코앞인 데도 워낙 파도가 높다 보니 통제가 안 되더군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제 머릿속에서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침실이랑 사무실 청소 깨끗이 하고 오는 건데, 생명보험이라도 하나 들어놓았어야 했는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 역시 갑작스럽게 맞이한 큰 풍랑 앞에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생명의 위협 앞에 제자들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간 받아온 특별 제자교육도, 예수님을 향한 신뢰도, 위신도,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주무시던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외칩니다.
“주님, 구해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느님,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 참삶의 길잡이이신 스승님과 한배에 타고 있었던 제자들이었지만, 살짝 들이닥친 위기 상황 앞에 갈팡질팡하며 심하게 흔들립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등 뒤에서, 내 오른편에서, 내 왼편에서 나를 꽉 붙잡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의 손길 안에 푹 잠겨있으면서도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며 부르짖습니다. 하느님의 충만한 위로와 사랑을 시시각각으로 전달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목말라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인생의 풍랑 앞에 설 때마다, 하느님의 침묵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이 들때마다, 예수님께서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여겨질 때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신다는 마음이 들 때마다, 반드시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에 항상 동행하는 분이십니다. 잠시라도 우리와 떨어지면 불안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보시며 우리를 드넓고 푸른 초원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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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내 인생은 나의 것?>
어렸을 때, 김현준과 민혜경이 부른 ‘내 인생은 나의 것’이란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모든 걸 책임질 수 있어요…….”
이렇게 흥얼대면서 저도 모르게 그 노래의 내용까지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부모님의 간섭으로 나이가 들어서도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려서부터 나의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 이 노래에 감사합니다.
사제가 되어서는 예수님께서 부모, 형제들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말씀을 깊이 새겨 특히 어머니의 간섭을 많이 배제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엔 제가 있는 성당에 와서 제가 성당에서 말썽 안 부리냐고 신자들에게 묻고 다녔다는 이야기까지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제가 유학 할 때 아들이 보고 싶을 때는 인천 공항에 전철을 타고 왔다 갔다 하시기까지 하셨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저도 마음이 짠해 지지만 또 사제가 어머니의 정에 끌리면 안 되기 때문에 가끔은 매몰차게 대할 때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성당에 찾아온 어머니를 만나지 않고 그냥 돌려보낸 적도 있었고, 어머니는 내려가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저도 마음이 아팠지만 또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학을 다 마치고 한 달 간 유럽을 여행하면서 돈을 다 쓰고 무일푼으로 돌아왔을 때, 차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저는 차를 살 돈이 없었습니다. 대출을 받아가면서까지 차를 사기는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에 어머니가 차를 원하면 당신이 사주겠다고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차가 없이 지내면서도 어머니께 먼저 차를 사 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내 인생에 관여하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큰돈을 요구할 ‘염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차 없이 지내는 제가 안쓰러웠는지 어머니께서 먼저 차가 안 필요하느냐고 물으셨고, 저는 마지못해 받는 것처럼 어머니 귀한 돈을 받아 차를 샀고 지금까지 잘 타고 다니고 있습니다.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해 놓고 무언가를 청할 때, 우리가 ‘염치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양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건 그냥 ‘자존심’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아무리 간섭하지 말라고 해도 항상 줄 준비가 되어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두려웠던 때가 있다면 언제일까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또 큰 지진이 나고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무덤에서는 죽은 이들이 살아 나왔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너무나도 두려운 상황입니다. 어쩌면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또 어쩌면 그리스도께 잘못했다고 사죄하고 구해달라고 빌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염치가 있는데 자신들에 못 박아 죽인 하느님께 손을 내밀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께 못질을 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울 수 없었던 이유는 자신들을 구원해 줄 그 분을 그들 스스로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배에서만은 자신들이 왕이기 때문에 그분이 자신들을 간섭하지 못하게 못 박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풍랑이 일어 위기상황이 왔다고 어떻게 염치없이 그분께 손을 내밀겠습니까? 정말 매 순간 그분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란 그분을 내 삶에 간섭하지 못하게 못 박지 않고 매사에 그분 간섭을 받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분 앞에서만은 내 인생은 내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그분께 봉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봉헌했으면서 내 것만 찾다가는 어려운 상황에서 손을 내밀지 못하게 되어 두려움에 벌벌 떨어야 할 때가 자주 오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분을 못 박아놓고 혼자만 열심히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주저하지 말고 손을 내미십시오. 그분의 존재뿐만이 아니라 그분이 ‘사랑’이심을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불란서 혁명 당시 어떤 어머니가 세 아들과 함께 집에서 쫓겨나 며칠 동안을 산 속과 들판을 헤매었습니다. 부인과 아들들은 나무뿌리와 풀잎을 먹고 연명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군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덩굴 속에 숨었습니다. 군인상사는 덩굴 속에 인기척이 있는 것 같으니 찾아보라고 병사에게 명령했습니다.
한참 후에 어머니와 아이들이 끌려나왔습니다. 군인상사가 그들을 본 순간 그들이 굶어 죽기 직전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군인 상사는 너무 측은해서 빵 한 덩어리를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굶주린 이리처럼 그 빵을 얼른 받아 세 조각으로 나누더니 아이들에게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을 본 군인 상사가 말했습니다. “애들에게만 주고 자기는 안 먹는구나!”
그 옆에 있던 사병이 “아마 배가 안 고픈가 보죠”라고 말하자, 다시 상사가 하는 말이 “아니다. 어머니라서 그렇지”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를 믿는 것은 온전히 믿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믿어야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주고 또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 자비와 사랑을 믿는다면 자존심과 염치 같은 것은 바다에 내다 버리고 풍랑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그분께 손을 내밀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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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순례 중에 가이드로부터 ‘비잔티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잔티움은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도시입니다. 로마의 박해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얻었던 교회는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얻었습니다. 교회에 자유를 준 로마의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입니다. 그 황제가 로마의 수도를 옮기면서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 때 세워진 교회가 ‘성 소피아 성당’입니다. 가이드는 비잔티움의 역사를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스에 ‘비자’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고향에서 살기 어려워서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때 신탁을 받았는데 신탁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눈 먼 이들이 사는 마을의 건너편으로 가서 공동체를 세우면 된다,’ 비자는 눈 먼 이들의 마을을 찾아 다녔지만 어려웠습니다. 함께 고향을 떠난 사람들도 불평과 불만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도착했는데 건너편의 동네가 훨씬 살기 좋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 때 비자는 깨달았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눈은 뜨고 있었지만 건너편 마을이 훨씬 살기 좋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구나.’ 그리고 비자는 건너편 마을로 가서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비자가 세운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비잔티움’이라는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고,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눈으로, 계명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의 눈으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의 눈으로는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나라를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성공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찾는 눈으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근심과 두려움 그리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느님나라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눈을 뜬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눈 먼 이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눈 먼 이들의 도시에서 새로운 ‘비잔티움’을 보았던 것은 아브라함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서 새로운 ‘비잔티움’을 보았던 것은 롯입니다. 안타깝게도 롯의 아내는 새로운 비잔티움을 보았지만 소돔과 고모라에 머물러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빛바랜 교회의 유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새로운 비잔티움을 찾으려 했던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눈 먼 이들의 도시를 떠나 새로운 꿈과 희망을 찾아 나섰던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복음의 기쁨으로 이코니아에, 안티오키아에, 스미느라에, 에페소에, 필립비에, 테살로니카에, 고린토에, 아테네에, 로마에 새로운 ‘비잔티움’을 세웠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구세로로 믿고 따르는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눈 먼 이들의 도시’에서 내가 ‘비잔티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구원의 방주’는 세상의 재물과 권력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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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23-27: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배에 타신 것은 그들이 위험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겸손하도록 가르치고자 하셨다. 군중을 보내신 다음 그들만 옆에 있게 하시고 풍랑에 휩쓸리게 하셨다. 그들이 시련을 인내심 있게 견디도록, 어떠한 어려움이나 박해도 견디어 낼 수 있게 하신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24절)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깨어 있고,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완전한 파멸의 위험 속에 있는데도 당신 혼자만 잠이 드셨을까? 폭풍을 이겨나가기 위해 고도의 기술의 키잡이가 필요한 때 말이다.
배를 모는 제자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허사였다. 그들은 겁에 질려 예수님께 달려갔다. 그들은 그분께 풍랑에 죽게 되었다고 구해달라고 애원하였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26절) 그리고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잠잠해졌다. 제자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분을 찾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분이 그들과 함께 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배가 물속으로 잠길 것 같은 어려움에 부닥치자,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25절) 했을 때,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꾸지람을 듣는다. 그들은 결코 믿음이 없는 자들이 아니었지만, 위험이 닥쳤을 때,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이 약한 자들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신다. 당신의 교회라는 배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든 세상의 풍랑을 잠재울 수 있으시다.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이 안전한 항해로 하늘 본향에 도달하도록 이끄신다. 그리스도께 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배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거룩한 키잡이가 있어야 교회라는 배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할 수 있고 목적지 항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27절) 예수님께서는 명령 한 마디로 풍랑을 잠재우셨다. 그래서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이 바로 그분이야말로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인정하고 믿었다. 그분을 온전히 믿고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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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4-27)
이 이야기 앞에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마태 8,16)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밤늦게까지 병자들을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파도 때문에 위험해진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 주무신 것은, 몹시 피곤하셔서 그랬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사셨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처럼 ‘배고픔’과 ‘피곤’을 겪으셨습니다.> 또 제자들이 위험한 상황에 부닥쳐 있다는 것에 관심이 없어서 주무신 것이 아니라, 거센 바람과 큰 파도 때문에 그들이 좀 고생하긴 해도, 그들에게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는 것을, 즉 누가 죽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 중에 어부 출신 제자들이 있으니 바람과 파도를 잘 극복할 수 있다고 믿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자기들이 죽게 되었다고, 또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겁을 내면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실력을 믿으셨는데, 제자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못 믿었습니다.>
마태오복음에는 제자들이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마르코복음에는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고 비난하는 것 같은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마르 4,38), 루카복음에는 “스승님,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8,24) 이야기의 전체 내용과 상황을 보면, 마르코복음의 기록이 가장 정확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 것은 도와달라고(살려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겁에 질려서 그냥 깨운 것입니다. 그 상황은 구약성경 요나서에 있는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주님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니,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 그러자 뱃사람들이 겁에 질려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면서, 배를 가볍게 하려고 안에 있는 짐들을 바다로 내던졌다. 그런데 배 밑창으로 내려간 요나는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선장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요나 1,4-6)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 것은 요나서에 나오는 선장이 요나를 깨운 것과 거의 같은 심정으로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고 제자들을 꾸짖으셨는데, 겁을 낸 것을 꾸짖으신 것일까? 믿음이 부족한 것을 꾸짖으신 것일까? 무서우니까 무서워한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제자들이 가져야 할 ‘믿음’은, 단순히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주님께 맡겨 드리는 믿음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믿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사람들’은 제자들입니다.(마르 4,41; 루카 8,25) 예수님의 권능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놀라워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가 있는데, 그렇게 해석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서 저자는 왜 ‘제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그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을까? 주님이신 예수님의 권능 앞에서, ‘보잘것없는 사람’으로서 경외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해석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배’는 교회를, 또는 우리 각 개인의 인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흔히 해석합니다. 바람과 파도는 교회가 겪는 박해와 시련을, 또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는 고통과 슬픔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무고 계셨다는 것은, 사람들 쪽에서 “주님께서 안 계신 것 같다.”, 또는 “주님께서 우리의 고난에 무관심하신 것 같다.”라고 오해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안 계신 것 같아도 주님은 바로 옆에 계신다는 것, 무관심하신 것 같아도 주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는 것,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켜 주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자주 겪는 대형 참사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주님은 어디 계신가?”,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라고 묻게 됩니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기도해서 기적적으로 죽음을 피하는 경우도 많지만, 피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경우도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깊은 슬픔과 고통에 빠져서 울고 있는 유가족들에게 “이것은 다 주님의 뜻이니…….”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고 잔인한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것을 모르더라도, 울고 있는 이들과 함께 울고 슬퍼하면서, 슬픔과 고통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사랑으로’ 옆에 있어 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는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묵시 21,4)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함께 나아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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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에 오릅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벌어진 사건을 전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와 배라는 배경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셨다는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악령을 쫓아내시거나 병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와는 달리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다른 말로 하자면 자연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복음의 시작은 예수님과 제자들이지만 이 사건의 반응에 등장하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짧은 이야기이지만 제자들이 겪은 일과 사람들의 반응 사이에는 시간적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그들은 이 일을 듣고 바람과 호수도 예수님께 복종한다는 것에 놀라워합니다.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납니다. 실제로 갈릴래아 호수에는 가끔 큰 풍랑이 일어 배를 띄우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 쓰인 ‘풍랑’이라는 낱말은 다른 곳에서 ‘지진’으로 옮기기도 합니다.(24,7 참조) 그 원인은 서로 다르겠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호수가 물결치고 땅에 진동이 이는 것을 같은 말로 표현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은 모두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제자들과 예수님의 이 대화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전할 뿐만 아니라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입니다. 배는 자주 공동체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공동체는, 그것을 굳건하게 믿는 공동체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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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사베리오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풍랑으로 배가 뒤집힐 정도의 위기감에 제자들은 두려움을 느낀다.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붙이고 계신 스승 예수님이 야속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제자들이 믿을 것이라고는 스승밖에는 없는데 그분은 웬일인지 그저 잠을 자고 계신다. 제자들이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예수님께 다가가 흔들어 깨운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는 꾸중만 되돌아온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믿음이 약해서 우리는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겁을 낼 수밖에 없고 두려울 수밖에 없는 일들을 수없이 만나면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신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느낀 두려움 자체를 두고 탓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함께 있는데 무엇이 그리도 겁나느냐?”임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을 식별하는 지혜가 얻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을까? 우리가 겁내는 것은 무엇일까?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며 겁낼 것을 가지고 겁을 내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분의 가르침은 간단명료하다. 영혼을 파괴하는 것, 영원한 삶을 방해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며,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늘 마음에 담고 살라는 이야기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오 복음 10장 28절)
무서운 꿈을 꾸다가 깨어나서 겁에 질려 울어대던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기자 이내 울음을 그치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다시 잠이 든다. 우리 모두가 어렸을 적 보이던 모습이다.
하느님을 엄마 품처럼 느끼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 항상 엄마 품 같은 하느님을 떠올려야 한다. 그분의 품 안에서 가장 편안한 내가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분께서 계시고 그분께서 말씀하시는데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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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서 보듯이 소돔은 하느님의 진노로 유황과 불의 심판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롯을 구해 주시지만, 롯의 아내는 자신의 재물과 땅이 못내 아쉬워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고 맙니다. 욕심이 문제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거센 풍랑이 일자 제자들은 겁에 질리지만, 예수님께서는 평온하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같은 현상 앞에서 대조되는 자세입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거친 세파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늘 걱정, 불안, 공포, 시련, 좌절, 분노를 겪고 있지요.
하지만 오늘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불필요한 걱정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가 실제로 겪어야 하는 공포나 시련도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지 않은 경우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기도 하고,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아직도 걱정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걱정이나 불안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나 자신이 불안, 분노를 만들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두 가지 점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첫째, 내가 하는 걱정이나 고민이 어디서 온 것인가? 원인이 어쩌면 나한테 있지나 않은가?
둘째, 내가 처한 어려움이 만일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라면, 그래서 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면, 이를 해결하고자 주님을 얼마나 찾았는가?
따라서 늘 예수님을 변함없이 신뢰하며 그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깊게 가꾸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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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형근 블라시오 신부님]
얼마 전 방송에서 군인들이 훈련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는데, 이 훈련하는 과정 중에 동료끼리 신뢰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사람 키 정도의 높이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바로 뒤로 넘어지면 넘어지는 장소에서 동료 병사 여러 명이 손으로 넘어지는 병사를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얼음판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다가 넘어지면 큰 사고를 당하기에 반드시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걸어라고 이야기 합니다. 왜냐하면 넘어질 때 손이 안전핀이 되어 큰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신뢰 프로그램에서 높은데서 주머니에 손을 넣는 행위는 나 자신의 안전핀을 스스로 차단하고, 동료에게 모든 것을 의지한다는 뜻인데, 뒤에서 많은 동료가 위험 없이 받쳐주고 있었지만, 막상 높은 데서 아무런 의심이나 동요 없이 동료를 신뢰하여 잘 넘어지는 병사는 많지 않았고, 의외로 많은 병사가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어느 본당에서 청년들이 보좌신부님을 헹가래치다가 3번째에 힘이 빠져서 그랬는지, 아니면 나 혼자 빠지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에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3번째에 그 신부님을 땅에 떨어뜨렸는데, 그 후유증으로 허리를 다쳐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음을 본 적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따라 올랐다고 합니다. 마침 그때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는데도 예수님은 주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보다 풍랑에 대한 공포가 더 컸기 때문에 주님께 살려달라고 했고, 주님은 풍랑을 잠재웠습니다. 제자들은 그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여러 모습에서 신뢰를 가졌지만 결과적으로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할 만큼의 권능에 대한 신뢰를 가지지 못하였던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면서 꾸짖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분명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에 대한 신뢰를 주었지만, 제자들의 눈이 멀어 믿음에 대한 신뢰를 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어느 누구에게 나 자신을 믿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 할 것 없이 자신을 개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자신의 신앙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머릿속으로는 별 의심 없이 믿고 있으면서도 마음으로 행동으로 주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집을 마련하거나 큰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복권에 당첨되어 요행을 바라는 것처럼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푼 한 푼이 저축으로 목돈이 되는 것처럼 신앙도 아주 조그마한 데서부터 충실한 믿음을 키워가는 것이 중요한듯합니다.
자신에게 조그마한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주님을 찾기보다 세상일에 더 깊이 빠지곤 합니다. 집안에 누가 아프거나 사업이 안 될 때 유혹의 목소리를 하느님을 믿어서 그렇다고 하면, 아니라고 스스로 부정하면서도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탐하고서는 고해성사로 ‘회개를 하면 되지’라고 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그리고 큰일도 아니면서 조그마한 신앙적 충돌로 쉽게 냉담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인생의 풍랑을 만나곤 합니다. 풍랑을 만날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배가 있다면 우리는 크게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풍랑에 견딜 수 있는 믿음의 큰 배를 만들도록 합시다. 앞에서 본 예화처럼, 믿음에 대한 신뢰를 쌓기 위해선 평소의 삶에서부터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고 주님만이 참된 세상의 주인이라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이 신뢰는 열려진 눈과 마음으로 항상 주님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에서부터 깨닫는 때 성령의 은총도 우리와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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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불안할수록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은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알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으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보게 될 뿐 아니라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굳센 믿음을 간직하십시오. 믿음이 큰 만큼 하느님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믿고 의탁하는 만큼 강하게 하느님을 만납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한배를 탔는데 어떤 이는 잠을 자고 있고, 어떤 이는 겁에 질려 허둥거립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있었기에 무서울 것이, 없으며 절박한 생존의 난국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 위기는 아예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보호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을 깨운 것을 보면 아직 그들의 믿음이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 품 안에 있었으면 아무 걱정할 것이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믿는다고 하였지만, 철저히 맡기지 못했던 제자들입니다. 아마 우리도 같은 위험에 처했더라면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려움에 맞서 주님께 살려달라고 매달렸다는 것입니다.
허둥대던 제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권위를 가지고 선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고, 풍랑과 파도를 지배하는 주님의 능력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이제는 단순한 무서움의 차원을 넘어서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하며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면서 커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따른다기보다 따름으로써 성장합니다.
혹 어려움에 직면할 때 아직도 허둥대고 있다면 믿음의 부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1베드 5,7)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25.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수많은 폭풍우 속, 시련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내가 느끼지 못한다고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일수록 더 큰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주님께 떠맡기고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 37,5) 성경을 보면 롯의 가문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하는 천사의 말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 19,26) 믿지 못한 결과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고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민수 21,9)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어찌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그러므로 믿으십시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십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마치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역사가 하느님의 선물인 것처럼 말입니다.”(까롤로 까레또)
믿음 안에서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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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등학교 때, 한 선생님은 시험 보기 전에 문제와 답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문제와 답을 알려줘도 못 맞추는 멍청이가 있다.”
우리는 그럴 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내는 문제를 어떻게 틀릴 수 있냐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시 한 번에 60명 정도 되었는데, 모두 100점 맞았을까요? 아닙니다. 틀린 사람이 꽤 많았습니다. 틀리면 바보 멍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을 했던 저 역시 부끄럽게도 틀렸습니다.
문제와 답을 가르쳐줘도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귀담아듣지 않으면 당연히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기꺼이 선택하셨습니다. 또 그 나라를 우리가 잘 모르기에 자세히 가르쳐주셨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정답도 미리 가르쳐 주셨습니다. 말만 하면 혹시 잊어버릴까 봐 당신이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이 답이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는 우리입니다.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면서 나만을 위한 사랑을 말하고 또 행동한다면 그 나라에 적합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 됩니다. 문제와 답까지 모두 알려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는 믿음을 통해서 바르게 정답을 맞힐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탄 제자들은 호수에서 큰 풍랑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피곤하셨는지 이런 상황에서도 주무시고 계셨지요. 어부 출신이 많은 제자단이었지만,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답을 전에 이야기하지 않으셨을까요? 분명히 하셨습니다. 즉,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시기에 그분께 대한 믿음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으니, 절박한 상황에서는 새하얗게 잊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이 전혀 없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어렵고 힘든 상황은 우리 곁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보여주셨던 정답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상황에서도 걱정하지 않고 힘차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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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 두려워 마시게>
마태오 8,23-27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그대 두려워 마시게>
홀로인 듯
늘 함께 걷는
우리의 벅찬 길에서
내 곁에
늘 그대 있어
나 두렵지 않듯이
그대 곁에
늘 나 있으니
그대 두려워 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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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잠자고 계시는 주님? 잠자코 계시는 주님!>
제가 부산 영도의 한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입니다.
아주 강한 태풍이 부산을 강타하였습니다.
저녁 미사와 모든 모임이 끝나 신자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저 혼자 성당에 남아 성당 문단속을 하는데 얼마나 비바람이 거센지 성당 창문들이 다 떨어져나갈 듯하였습니다.
순간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있다는 무서움이 엄습하였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문을 닫고 수도원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오늘 복음이 생각나면서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성당에 앉아 기도를 하는데, 먼저 저의 신앙 없음이 깊이 반성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없다고 저는 나 혼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무신론자였습니다. 저는 비바람만 보고 주님은 보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무서움은 악과 홀로 대면할 때 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옆에 어린아이라도 있으면 덜 무섭고 덜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여럿이 같이 있고, 힘센 사람과 같이 있으면 훨씬 덜 무섭고 두렵게 되겠지요.
그러나 무서움과 두려움은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근본적으로 하느님 없이 악과 대면할 때 오는 것입니다.
게다가 악과 악의 세력이 엄청나게 크면 아무리 힘 센 사람이 옆에 많이 있어도 무섭고 두렵습니다.
바로 이때가 하느님께 믿음을 둬야 할 때입니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악일지라도 주님께는 “까짓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엄청난 파도 앞에서도 주무셨습니다. 엄청난 파도를 “까짓것”으로 여기며 꾸짖으실 수 있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고 믿는 사람은 그 어떤 악도 “까짓것”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없는 두려움이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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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 인생 항해 여정>
- 기도와 믿음 -
일기쓰듯 하는 매일 강론입니다. 어제는 3개월만에 하늘병원에 다녀왔고 다음엔 10월초입니다. 한번만 더가면 2023년도 지납니다. 소리없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몸살감기 후유증인지 자꾸 눞게 되고 잠이 쏟아져 어제도 아까운 시간 많이 누워지냈습니다.
참 난세亂世입니다. 언제나 말세末世란 느낌이지만 작금의 국내외 현실이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힘들다 아우성이요 평화로운 곳이 없습니다. 국내 현실도 흡사 내전을 방불케 합니다. 총칼만 안들었지 어디나 참 치열한 전쟁같은 상황입니다. 인터넷을 열어봐도 혼란스런 뉴스들입니다. 노아의 방주처럼 찾는 교황님 홈페이지 뉴스입니다.
“교황님은 평화를 위한 기도를 요청하신다. 피흘리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기도합시다. 기도는 세상을 보호하고 지탱하는 ‘부드러운 힘이다(the gentle force)’.”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심각한 폭력이다. 다시 반복되는 시간들이다. 가난, 불평등, 식량, 물, 건강, 교육, 집과 같은 기본적 자원의 결핍이 인간 존엄에 심각한 범죄가 되고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 전인류 가족의 참된 진보를 위해 일하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소서.”
“교황님의 7월 기도지향은 성체성사적 삶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그들 삶의 중심에 미사전례를 놓아야 한다. 미사는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며 하느님과 형제자매들과의 만남으로 열어주기 때문이다.”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눈에 띤 기사들입니다. 교황님의 시야는 세계 곳곳을 향해 열려 있음을 봅니다. 결국은 7월의 기도지향으로 모아집니다. 성체성사적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미사로 수렴되고 미사는 하루로 확산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인간성 회복에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인해 주는 미사전례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오늘 창세기는 소돔의 멸망과 롯의 구원에 대한 일화이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일화입니다.
소돔을 멸망시키기전 롯가족의 탈출이 참 긴박하게 이뤄집니다. 천사들의 적극적 도움으로 미련으로 쉽게 떠나지 못하는 롯 가족을 초아르에 간신히 피신 시킨 후 주님은 죄악으로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십니다. 그림처럼 소개되는 세 장면을 나눕니다.
1.‘주님께서 당신이 계신 곳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성읍들과 온 들판과 성읍의 모든 주민, 땅 위에 자란 것들을 모두 멸망시키셨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다.’
2.‘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가 주님 앞에 서 있던 곳으로 가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들판의 온 땅을 내려다보니, 마치 가마에 나는 연기처럼 그 땅에서 연기가 솟아 오르고 있었다.’
3.‘하느님께서 그 들판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롯이 살고 있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롯을 기 멸망의 한 가운데에서 내보내 주셨다.’
홍수의 심판에서 구원된 노아처럼, 불의 심판에서 구원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기도덕분에 살아 난 롯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하느님을 완전히 잃어버린 죄악으로 가득한 무법천지 세상을 상징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라는 강력한 회개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아내는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뒤돌아 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으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참으로 착잡했을 것입니다.
강건너 불이 아닙니다. 기후위기를 통해 인류종말의 어둔 그림자가 지구에도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절박한 생태적 회개의 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흡사 풍랑 중에 전복될 위기에 처한 지구 공동체 배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인생 항해 여정중인 공동운명체인 우리들입니다.
저는 올해 수도원 창립 36주년이 된 요셉수도공동체를 묵상합니다. 창립 다음해 1988년 부임하여 35년 동안 세상 바다 항해중인 요셉수도공동체란 배가 지금까지 건재할 수 있었음은 순전히 기도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숱한 전복의 위기중에도 주님께서 수도원의 중심에서 늘 함께 해주셨기 참으로 안전했음을 봅니다.
답은 하나, 기도뿐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영혼이 기도하고 회개합니다. 기도는 한결같아야하고 간절하고 절실해야 합니다. 기도의 힘,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이 그 모범입니다. 큰 풍랑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시니 그만큼 믿음이 좋으시다는 것입니다. 위기에 처한 제자들의 반응이 신속합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짧으며 강력한 기도인지요! 이렇게 겸손히 빈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도요, 참으로 기도해야 할 난세중의 난세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요 믿음도 배워야 합니다. 믿음의 빛만이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더욱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어나시어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순전히 기도의 힘,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제자들은 물론 우리가 평생 화두로 지니고 살아야 할 물음입니다. 바로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분이신, 토마스가 어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고백했던 예수님입니다. 더불어 인생 항해 여정중 늘 우리 작은 공동체의 배에 중심에 자리잡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팎의 풍랑을 가라앉히시고 우리 모두에게 좋은 믿음과 더불어 깊은 안정과 평화를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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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8,27)
<풍랑은 회개의 메시지!>
오늘 복음(마태8,23-27)은 '예수님께서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나섭니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시면서 일어나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풍랑이 멎었습니다.
우리들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풍랑들이 많습니다. 어찌보면 우리의 삶은 바람 잘 날 없는 풍랑의 삶이 아닐까? 크고 작은 시련들, 아픔들과 같은 풍랑들은 언제나 내 곁에 있습니다.
차이는 그 앞에서 드러납니다. 금방 넘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인내하면서 참아내는 사람, 풍랑들을 이겨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토빗기에 나오는 토빗이 바로 그런 모든 풍랑을 이겨내고 다시 부활한 사람입니다. 모두가 한 두 번은 꼭 읽고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토빗은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주님을 굳게 믿고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면서 주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주어진 은총이 부활입니다.
풍랑을 좋아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풍랑 앞에서 즉시 주님께 감사기도를 청하는 사람도 한 사람 없습니다. 풍랑 앞에서는 누구나 힘들어 합니다. 차이는 누가 더 빨리 우리의 구원을 위해 겪으셔야만 했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랑, 곧 주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로 더 빨리 나아가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풍랑을 이겨냅니다. 그래서 다시 부활합니다.
우리도, 나도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을 굳게 믿고 풍랑을 이겨냅시다! 회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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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rD0yh1OQ-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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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 8, 25)
거칠게
몰아치는
큰 풍랑입니다.
그 속에서
감출 수 없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풍랑은 우리들
삶의 모습입니다.
큰 풍랑 속에서
두려움을 만나고
기도를
만나게 됩니다.
큰 풍랑 속에서도
함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큰 풍랑에
필요한 것은
큰 믿음입니다.
큰 풍랑조차
우리의 믿음을
훼손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
믿음을
되살려 놓는
은총이 됩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요동치는
이 마음까지
이끌어가시며
고요하게 만드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알게되고
주님을 믿게하는
큰 풍랑의
은총입니다.
주님을 믿고
나가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이란
풍랑속에서
부질없는 것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거센 풍랑속에서
자라나는
간절한 믿음입니다.
풍랑속에서도
길은 분명히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의 길을
오늘도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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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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