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의 엔트로피 / 한정원
의자가 없어서 봄은 오지 않았다
바람이 걸려 있는 숲속에 서 있었다
구청에서는 버스정류장을 하나 더 만들어 놓고
노인들을 기다렸다
의자를 놓기 위해 정류장을 늘리고
산수국화에 받아놓은 빗물을 주고
목적지 노선표에 전광판을 연결했다
의자가 생기고 소식은 오기 시작했다
약국은 최초로 의자가 있어서 쉴 수 있던 곳
약국에서 만난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다고
면도를 하고 정류장 의자에 나와 앉아 있으면
나도 잘 있는 거라고
연인은 떠났지만 의자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의자에 앉을 때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허리를 받쳐주고 목을 기댈 수 있는 의자를
구청에서 개발했다고
밤에는 별을 보기 위해 따뜻한 정류장 의자에 갔다
봄은 떠나기만 하는 계절
항상 뻥튀기를 사서 들고 오는 노인은
가벼운 과자의 빈 공간이 좋다고
햇살을 향해 앉았다가 경쾌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우울한 날에는 동편을 향해 앉고
기쁜 날에는 서쪽으로 앉았다
버스는 갈 곳을 짚어 주는 별자리
실시간으로 빨강색 화살표는 깜빡거리고
갈 곳 없는 노인들은 전광판을 따라
예전에 가본 곳을, 살았던 곳을 기억하며
백 년을 더 살았다
버스 정류장에 나와 앉아 보는 봄, 가을
노인들은 해가 질 때 다시 의자를 확인하고
구청 직원은 가끔 의자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렸다
의자는 따뜻한 바닥을 갖고 있었다
— 계간 《상상인》 2025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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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원 시인
1955년 서울 출생. 수도여자사범대(현 세종대) 교육학과 및 세종대 대학원 교육학과 졸업
1998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그의 눈빛이 궁금하다』 『낮잠 속의 롤러코스터』 『마마 아프리카』 『석류가 터지는 소리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