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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비밀 7 - 7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강의방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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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조(翼祖) 때에 이르러서도 이대로 따라 행하고 고치지 않았다. 익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
강성(强盛)하니, 여러 천호(千戶)의 수하(手下) 사람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
여러 천호들이 꺼려서 모해(謀害)하기를,이행리(李行里)【익조.】는 본디 우리의 동류(同類)가
아니며, 지금 그 형세를 보건대 마침내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니, 어찌 깊은 곳의
사람에게 군사를 청하여 이를 제거하고, 또 그 재산을 분배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거짓으로 고(告)하기를,우리들이 장차 북쪽 땅에서 사냥하고 오겠으니 20일 동안
정회(停會)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익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기일이 지나서도 오지 않으므로,
익조가 친히 현성(峴城)에 가니, 다만 노약(老弱)과 부녀(婦女)들만이 있고 장정(壯丁)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한 여자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그 짐승이 많은 것을 탐내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였다. 익조가 이에 돌아오다가 길에서 한 할멈이 머리에 물동이[水桶]를 이고 손에는 한 개의
주발[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서, 익조가 갑자기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자 하니, 할멈이 그
주발을 깨끗이 씻어 물을 떠서 바치고, 이내 말하기를공(公)은 알지 못합니까? 이곳 사람들이
공을 꺼려하여 장차 도모하려고 군사를 청하러 간 것이고, 사냥하려고 간 것은 아닙니다. 3일
후에는 반드시 올 것인데, 귀관(貴官)의 위엄과 덕망이 애석하므로, 감히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하였다. 익조는 황급히 돌아와서 가인(家人)들로 하여금 가산(家産)을 배에 싣고
두만강(豆滿江)의 흐름을 따라 내려가서 적도(赤島)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자기는 손
부인(孫夫人)과 함께 가양탄(加陽灘)을 건너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알동(斡東)의 들에
적병이 가득히 차서 오고, 선봉(先鋒) 3백여 명은 거의 뒤를 따라왔다. 익조는 부인과 함께 말을
달려서 적도(赤島)의 북쪽 언덕에 이르렀는데, 물의 넓이는 6백보(步)나 될 만하고, 깊이는 헤아릴
수도 없으며, 약속한 배도 또한 이르지 않았으므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북해(北海)는 본디
조수(潮水)가 없었는데, 물이 갑자기 약 백여 보(步) 가량이나 줄어들어 얕아져서 건널 만하므로,
익조는 드디어 부인과 함께 한 마리의 백마(白馬)를 같이 타고 건너가고, 종자(從者)들이 다
건너자 물이 다시 크게 이르니, 적병이 이르러도 건너지 못하였다. 북방 사람이 지금까지 이를
일컬어 말하기를, 하늘이 도운 것이고 사람의 힘은 아니다.하였다.
익조는 이에 움을 만들어 거주하였는데, 그 터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알동(斡東)의 백성들이
익조의 있는 곳을 알고, 그를 따라오는 사람이 장꾼과 같이 많았다. 모두 섬 가운데 오랫동안
거주하다가, 직도(稷島)ㆍ추도(楸島)ㆍ초도(草島)의 재목을 베어 배 10척을 만들어 지원(至元)
27년(1290) 경인에 다시 수로(水路)로 해서 의주(宜州)에 돌아와 거주하니, 공주(孔州)의 백성들이
모두 그를 따라왔다. 그들이 거주하던 땅을 지금도 적전(赤田)이라 일컬으니, 그들이
적도(赤島)에서 온 때문이다.
모년(某年) 9월 10일에 익조가 훙(薨)하였다. 안변부(安邊府)의 서곡현(瑞谷縣) 봉룡역(奉龍驛)
북동(北洞)에 장사지냈으니, 곧 지릉(智陵)이다. 처음에 익조는, 함주(咸州)의 토지가 평탄하고 넓고
비옥하기 때문에 알동(斡東)의 백성들로서 남으로 오는 사람을 함주(咸州)의 귀주(歸州)ㆍ
초고대(草古臺)ㆍ왕거산(王巨山)ㆍ운천(雲天)ㆍ송두(松豆)ㆍ도련포(都連浦)ㆍ아적랑이(阿赤郞耳) 등에 살게
하였다. 그러므로, 함주(咸州)를 일컬어 알동 일언(斡東逸彦) 【여진(女眞)에서는 백성을
일언(逸彦)이라 한다.】이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도조가 안변(安邊) 이북의 땅을 다 차지하였으나 함주(咸州)로 옮겨 거처한 것은,
남방으로 온 백성과 가까이 하고, 또 목축(牧畜)하는 데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도조의 꿈에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나는 백룡(白龍)입니다. 지금 모처(某處)에 있는데, 흑룡(黑龍)이 나의 거처를
빼앗으려고 하니, 공(公)은 구원해 주십시오. 하였다. 도조가 꿈을 깨고 난 후에 보통으로 여기고
이상히 생각하지 않았더니, 또 꿈에 백룡이 다시 나타나서 간절히 청하기를,공은 어찌 내 말을
생각하지 않습니까?하면서, 또한 날짜까지 말하였다. 도조는 그제야 이를 이상히 여기고 기일이
되어 활과 화살을 가지고 가서 보니, 구름과 안개가 어둑컴컴한데, 백룡과 흑룡이 한창 못
가운데서 싸우고 있었다. 도조가 흑룡을 쏘니, 화살 한 개에 맞아 죽어 못에 잠기었다. 뒤에 꿈을
꾸니, 백룡이 와서 사례하기를,공의 큰 경사(慶事)는 장차 자손에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지정(至正) 2년(1342) 임오 7월 24일에 도조가 훙(薨)하였다. 함흥부(咸興府)의 예안부(禮安部)
운천동(雲天洞)에 장사지내니, 곧 의릉 (義陵)이다.
세종 15년2월26일
임금이 안숭선으로 하여금 세 의정에게 밀의(密議)시키기를,태조와 태종의 유복지친(有服之親)이
함흥 땅에 많이 사는데, 태조께서 개국(開國)하자 변고(變故)를 많이 당하여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고, 태종께서도 겸양(謙讓) 하시와 벼슬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과인에 이르러서도 복(服)을
다한 친족에게 벼슬을 다 주기 어려웠다. 당 고조(唐高祖)는 동성(同姓)을 널리 봉(封)하자
봉덕이(封德츺)가 그르다고 하였고, 송 신종(宋神宗)은 은혜가 단문(袒聞)의 친족에게 미쳐서
이름을 주고 벼슬을 제수하자,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일컬었으니, 지금 태조ㆍ태종의
유복지친에게도 모두 벼슬을 주고 또 전토를 줌이 어떨까. 또 한창수(韓昌壽)의 아우 융전(隆田)은
바로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동생인데, 첨설 사재부정(添設司宰副正)으로서 【다만 그 직(職)을 주고
그 벼슬에 근무하지 아니하는 것을 첨설이라고 한다.】 함흥에 물러가서 늙었고, 그 형
검한성윤(檢漢城尹) 금강(金剛)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하여 죽은 뒤에 추증(追贈)하였으니, 지금
융전에게 동지돈녕(同知敦寧)을 주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옛날 환조(桓祖)의 후손이 종친의
반열(班列)에 있었는데, 하윤(河崙)이 태종조 때에 말하기를, 태조의 후손으로부터 종친의 반열에
두어 원근(遠近)과 친소(親疎)를 분별하소서.하여, 태종께서 드디어 법을 세워 분별하였으나, 지금
생각하면, 종친으로 종친의 반열에 두기에 마땅하지 못한 사람을 내가 다 알지 못하여, 혹 임명해
쓸 때에 빠뜨렸으므로 충의위(忠義衛)에 붙이고자 하나, 만일 혹 불가하다면, 별도로 붙일 곳을
설립하는 것이 어떨까.하니, 황희ㆍ권진 등이 아뢰기를,역대(歷代)를 상고하건대, 혹은 종척(宗戚)을
중히 하여 일과 권세를 전임하고, 혹은 친한 연고를 혐의하여 벼슬을 주지 아니하였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종친을 친목함은 천리(天理)와 인정에 합하는 지극한 도리입니다. 만일 재능이
있으면 다른 사람과 같이 서용하고, 진실로 그 재주가 없으면 작(爵)을 준 뒤에 시골에 한가롭게
물러가 살게 함이 가하옵니다. 또 함흥의 진황 전지(陳荒田地)를 한 사람마다 3, 4결(結) 혹은 4,
5결을 주고 전조(田租)를 없애어 특별한 은혜를 내리옵소서. 또 융전(隆田)에게 벼슬을 주는 일은,
또한 전하의 사의(私意)가 아니고, 실은 종척을 돈목(敦睦)하는 공의(公義)이오니, 마땅히 벼슬을
더하여 은의(恩義)를 보일 것입니다. 충의위(忠義衛)는 오로지 공신(功臣)의 후손을 위하여 설치한
것입니다. 또 별도로 붙일 곳을 설립하면 다른 날에 자손이 많아서 후폐(後弊)가 생길까
두렵사오니, 그것보다는 예전대로 재능(才能)이 있는 이를 골라서 쓰는 것이 가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모두 좇고, 태조ㆍ태종의 유복지친을 기록해 아뢰도록 명하였다.
삼수갑산 야인과 삼국유사
검토관 최홍제(崔弘濟)가 글에 임하여 아뢰기를, 고구려 때 당(唐)나라 군사가 와서
안시성(安市城)을 칠 적에는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창졸간에 10만 병마(兵馬)를
구득하여 구원했고, 신라 김유신(金庾信)이 백제를 칠 적에도 6만 병마를 썼습니다. 이때에
당해서는 삼국(三國)이 서로 대립하여 국토가 협소했는데도 군액(軍額)이 오히려 이러했습니다.
지금 우리 국가가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죄상을 묻기로 한다면, 13만의 병마를 어찌 쉽게 구득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온 나라 군사를 출동시킨다 하더라도 6만 군사도 구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종 30년10월9일 유보는 아뢰기를,변경 방비에 관한 일도 잘 살피셔야 합니다.
가덕도(加德島)에 진(鎭)을 설치하는 일은, 비록 태평 시대라고는 하지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포(滿浦) 건너편에 와서 사는 야인(野人)들은 타일러도 떠나지 않으면 죄를 성토하고
몰아내야 합니다. 이 일도 우려스럽긴 하지만 이는 변방의 일입니다. 함경도에는 귀화한 야인이
내지(內地)에 많이 삽니다. 북청(北靑)의 무해대(無海臺)【지명(地名)임.】에는 귀화한 야인들이 매우
많이 살고 있으므로 더욱 우려됩니다. 지난날 제포(薺捕)에 왜노(倭奴)가 많이 와서 살 적에
조정에서는 뱃속의 병처럼 생각하였었습니다. 그러다 경오년의 난(亂)이 일어났었는데 국가에서
제압하였으니 매우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함경도에 많이 살고 있는 야인은 왜노보다도 많습니다.
만일 그들이 기회를 봐서 일어난다면 화를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노는 주사(舟師)여서
칼만 사용할 수 있을뿐 활은 잘 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야인은 육전(陸戰)이 그들의
장기(長技)이니, 휘몰아 쳐들어오는 것을 염려하여 미리 조처해야 됩니다. 하고, 특진관(特進官)
윤희평(尹熙平)은 아뢰기를,북청의 무해대에는 귀화인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는 삼국 시대부터
있었습니다. 지금 그들을 물리치고 육진(六鎭)을 설치하였지만 함경도는 본래 우리 나라 땅이
아닙니다. 이른바 남옥저(南沃沮)는 곧 오늘의 오도리(烏道里)【호족(胡族)의 일종임.】이고
예맥(穢貊)은 곧 오늘날의 강원도 땅입니다.
춘천(春川)에서 맥국(貊國)의 도장[印]을 얻었다고 하니, 이곳은 예맥 땅인 것입니다. 지금
경흥(慶興)으로 물러나 사는 골간우지개(骨間亐知介)【호족의 일종임.】가 바로 그들인데 말을 타고
휘몰아쳐 오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전조(前朝)말에 고원(高源)과 덕원(德源) 사이로
들어왔었습니다. 덕원에 철관(鐵關)【지명임.】이란 곳이 있는데 여기로 온 것입니다. 우리 태조
대왕과 이인우(李仁佑)가 이들을 평정하였지만 그곳은 본래 우리 땅이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의 도읍은 지금의 삼위(三衛)【모련위(毛憐衛)와 건주위(建州衛) 등임.】에 있었으며,
동옥저(東沃沮)는 곧 백두산 동쪽 갑산(甲山)과 삼수(三水) 땅입니다. 북청의 무해대와
경성(鏡城)의 청암(靑巖)에는 귀화한 야인이 옛부터 살았습니다. 용성(龍城)의 물이 갈라져서 한
줄기는 수을온(殊乙溫)으로 흐르고 한 줄기는 청암으로 흐릅니다. 청암의 야인은 편안한 마음으로
농사에 전념하며 살아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경성은 성이 튼튼하고 성 밖으로는 긴 강이
흐릅니다. 강 건너 백성의 전지는 야인의 전지와 서로 섞여 있어 함께 농사지어 먹고 삽니다.
수확을 미처 거두지 못하고 들어올 경우에는 곡식을 야인에게 맡기고 옵니다. 야인도 지금은
우리 나라 사람과 같고 글을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경원과 경흥 등지에 사는 야인과
서로 왕래하여 혼인을 맺습니다. 요즈음은 문천(文川)에까지 옮겨 와 사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호복(胡服)을 입고 말타고 사냥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혹 황해도 등의 지역으로도
나와서 백성들이 말리려 널어놓은 곡식을 빼앗아 가는 등 제멋대로 날뜁니다. 그대로 두면
강원도에까지 이를 것이고 이어 하삼도(下三道)에까지 올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무리는
추쇠(推刷)해도 되겠습니다만, 만일 무해대와 청암 등지에서 편안하게 사는 자들을 추쇄한다면
반드시 소동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고, 보는 아뢰기를, 지금은 비록 이러하나 오호(五胡)의
난(亂)을 거울삼아야 합니다. 오호가 마음을 바꾸어 귀화할 때는 백성과 같았지만 끝내 중국을
피비린 내나는 전쟁터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이런 일은 천천히 도모해가면
가능하지만, 급하게 조처하면 소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광해 즉위년8월16일 비변사가 함경 감사 장만(張晩)의 진폐 차자(陳弊箚子)에 대하여
회계하기를,함경도는 <관동과 이어진 지역으로 곧 삼국 시대 신라의 경계입니다.
정몽주(鄭夢周)의 연자루기(燕子樓記)에서도 참고할 수 있거니와, 신라 성덕왕의 순수비(巡狩碑)도
아직 황초령(黃草嶺)에 남아 있어 사적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고구려의 땅이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신라 중엽 이후로 고구려에 편입되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대가 북쪽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기후가 몹시 춥고 토지가 척박한데다, 또 호인(胡人)의 부락과 강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생활의 어려움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지만,그러나 여느 때는
번호(藩胡)와 고기 및 소금을 무역하여 입에 풀칠을 하여 왔는데, 지금에 와서는 호인의 부락마저
다 비고 초서(貂鼠) 따위의 물건을 매매할 길이 없어서 떠돌며 고생하는 모양이 날이 갈수록 더
심각합니다. 삼수(三水)ㆍ갑산(甲山)에 있어서는 지세가 높고 기후가 추워서 곡식이라고는
귀리뿐인데, 때로는 7월에 서리가 내려서 이것마저 전혀 수확하지 못할 적도 있어, 식생활의
어려움은 육진(六鎭)보다도 더 심하고 큰 산과 깊은 계곡만이 수천 리를 뻗어 있을 뿐이니,
지지(地誌)에 이른바 1보(步)의 평지도 없다는 말이 참으로 헛말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방어를
육진보다 조금 허술히 하였던 것이나, 지금의 사세로 말한다면 지대가 노추(老酋)의 소굴과
가까워서 우예(虞芮)ㆍ여연(閭延) 일대에서 몰래 별해(別害)로 진출하여 함흥(咸興)을 지레 공략할
경우, 참으로 관북 지역 복심(腹心)의 걱정거리입니다. 외적이 쳐들어 올 우려가 북도에 더 있기
때문에 지난날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육진의 예에 따라 상의원에 공납하는 초서(貂鼠)ㆍ호피(狐皮)ㆍ
토초피(土貂皮) 역시 절반으로 줄였던 것으로, 군민(軍民)이 입은 혜택은 실로 컸습니다. 그리고
본도의 남ㆍ북 두 도가 군민이 줄어든 수가 이미 십분에 이르러서, 이른바 내버린 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불교의 허탄(虛誕)한 이야기로 고려 도종의 역사 왜곡을 미화한 것이다. 조선조의
사관들은 이 광망(狂妄)한 이단서(異端書)를 취급하지 않았다. 삼국유사는 사서(史書)가 단연코
아니다. 삼국유사는 고려 왕건이 한(漢)나라를 완전히 없애려한 뜻을 받들어 만든 책으로 일연이
불가(佛家)의 설화를 인용한 것이다. 세종이 삼국유사를 이용하려 하였으나 너무나 황당하여
폐기하였다. 다만 삼성혈(三姓穴)의 전설을 지리지 제주목에 기록한 것이다. 이 삼성혈은 왕건이
조작한 것으로 한(漢)나라의 대성(大姓)인 고(高)씨, 부(夫)씨, 양(梁)씨의 득세(得勢)를 방지하기
위하여 제주에다 설화로 조작한 것이다. 이 사실을 세종이 또한 이용하여 지리지에 기록한 것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
세종 지리지 전라도 제주목《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해동 안홍기(海東安弘記)에 구한(九韓)을
열거(列擧)하였는데 탁라(?羅)가 네 번째에 있다. 백제 문주왕(文周王) 2년 병진 【유송(劉宋)
후폐제(後廢帝) 원휘(元徽) 4년.】에 탐라국 사자(耽羅國使者)에게 은솔(恩率)이란 벼슬을 주었고,
동성왕(東城王) 20년 경신【남제(南齊) 태조(太祖) 건원(健元) 2년.】에 탐라에서 공부(貢賦)를 바치지
아니한다 하여 왕이 친정(親征)하여 무진주(武珍州)에까지 이르렀는데, 탐라에서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었으므로 이에 중지하였다.하고, 주(註)에 이르기를, 탐라는 곧
탐모라(耽牟羅)이라.하였다. 백제가 망하니, 신라 문무왕(文武王) 원년 임술【당나라 고종(高宗)
용삭(龍朔) 2년.】에 탐라국주(耽羅國主)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좌평은 백제의 벼슬 이름이다.】
단종 즉위년6월28일 황해도 지역에 창궐하는 전염병에 대한 경창부윤(慶昌府尹) 이선제(李先齊)가
상서하였다. 신이 들으니 황해도 인민의 병이 갑자기 여항(閭巷)에서 발생하여 사방에 전염해서
북으로 평안도에 이르고 남으로 기현(畿縣)에 이르러, 사망이 서로 이어 민호(民戶)를 싹 쓸었다
합니다. 어찌 까닭이 없이 그러하겠습니까? 신이 무오년ㆍ기미년 간에 집현전에 입직(入直)하는데
봉산군(鳳山郡)에 사는 서리(書吏) 오성우(吳成祐)가 직소(直所)에 따라 들어왔습니다. 신이 황해도
인민의 발병한 연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난 날에 문화현(文化縣) 단군(檀君)의 사당을 평양에
옮긴 뒤에, 괴이한 기운이 뭉치어 마치 귀신 모양 같은 것이 있어 밤에 다니며 검은 기운이
진(陣)을 이루고 행동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바라보고 놀라고 괴이하여 숨어 피하고,
이것으로 전파하여 고하였습니다. 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병의 발생이 실로
단군의 사당을 옮긴 까닭이다. 여기(쪸氣)가 먼저 구월산의 산간 민호에서 일어나 점점 문화ㆍ장연ㆍ
재령ㆍ신천 등지에 번지어 전염되어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으니, 민생이 불쌍하다. 하였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세종께서 마음에 극히 아프게 여기어 전의 부정(典醫副正) 김여생(金麗生)을
보내어 그 도의 의원 5인을 거느리고 마을에 돌아다니며 여러 방법으로 구료(救療)하고 또
감사에게 전지(傳旨)하기를, 문화ㆍ장연ㆍ황주ㆍ재령ㆍ신천 등지 주현(州縣)에 모두 여제단(쪸祭壇)을
설치하고 전물(奠物)을 풍성하게 갖추어, 여러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지성으로 재계하고 제사를
행하여 여기(여氣)를 사라지게 하라. 하였으니, 그 구제하는 법이 사책에 펴서 있으므로
성려(聖慮)가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오랠수록 병은 더욱 치성하여 다른 지방에 파급되고 남김없이 전염하여 죽으니,
만연하는 해(害)가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마음에 이리저리 생각한 지가 오랩니다. 지금
사초(史草)를 편수하는데 무신년에 이르러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유관(柳觀)이 상서하기를,
문화현(文化縣)은 신의 본향입니다. 부로(父老)들이 말하기를, 「구월산(九月山)은 이 고을의
주산(主山)인데 단군 때에는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 이름하였다.」하였습니다. 산의 동쪽 재[嶺]가
높고 커서 연접하였는데 그 산 허리에는 신당(神堂)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 창건하였는지 알지
못하나, 북쪽 벽에 단인 천왕(檀因天王)이 있고 동쪽 벽에는 단웅 천왕(檀雄天王)이 있고 서쪽
벽에는 단군 부왕(檀君父王)이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삼성당(三聖堂)이라고 칭하고 그 산 아래에
사람이 사는 곳도 또한 성당리(聖堂里)라 칭합니다. 당의 안팎에는 까막까치가 깃들이지 않고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단군이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는데 이 산 아래에
삼성당이 지금도 남아 있으니, 그 자취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고을의 동쪽에
장당경(藏唐京)이라고 이름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하였던 곳이라
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단군이 처음 왕검성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마땅히 기자(箕子) 사당에
합하여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대개 단군이 요(堯)와 더불어 아울러 섰는데 기자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이니, 어찌 아래로 기자 사당에 합하겠습니까? 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 경기 광주목
일장 산성(日長山城)은 주치(州治)의 남쪽에 있다.【높고 험하며, 둘레가 3천 9백 93보(步)요, 안에
군자고(軍資庫)와 우물 7이 있는데, 가뭄을 만나도 물이 줄지 아니한다. 또 밭과 논이 있는데,
모두 1백 24결(結)이다. 《삼국사(三國史)》에는,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비로소 한산(漢山)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 경기 부평도호부 인천군
【《삼국사(三國史)》에 이르기를, 주몽(朱蒙)의 두 아들, 큰 아들 비류(沸流)와 둘째 아들
온조(溫祚)가 북부여(北扶餘)로부터 10인의 신하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가는데, 백성들이 많이
좇았다. 드디어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땅을 바라보매, 비류가
바닷가에 살기를 원하니, 열 신하가 간(諫)하기를, 오직 이 한남(漢南)의 땅이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띠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을 의지하고, 남쪽으로 기름진 땅이 열리고, 서쪽으로 큰
바다가 막혀서, 천험(天險)의 지리(地理)로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비류가 듣지 아니하고, 그 백성을 갈라 가지고 미추홀로 돌아가고,
온조는 열 신하를 거느리고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다. 오랜 만에 비류가,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지 못하고 돌아와서, 위례성의 도읍이 안정되고 인민들이 안락한 것을
보고, 마침내 부끄러워서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하였다.】
◎ 충청도 청주목 직산현
본래 위례성(慰禮城)이다. 백제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이 도읍을 만들고 나라를 세웠는데,
고구려가 차지하여 사산현(蛇山縣)으로 고쳤고, 신라 때에도 그대로 따라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가, 고려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백제 시조 온조왕 사당[百濟始
祖溫祚王廟]【현의 동ㆍ북쪽 사이 5리에 있다. 금상(今上) 11년 기유 7월에 비로소 사당을 세우고,
봄ㆍ가을에 향축(香祝)을 전하여 제사를 지내게 한다.】
◎ 충청도 청주목 연기현
대천(大川)은 웅진(熊津)이다.【《삼국사(三國史)》의 신라(新羅) 4독(瀆)에 웅천하(熊川河)라고
쓰고서, 중사(中祀)에 실었는데, 본조(本朝)도 그대로 따라서 봄ㆍ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낸다.】
◎ 충청도 공주목
명산(名山)은 계룡(鷄龍)이요,【주(州) 동쪽에 있다. 《삼국사(三國史)》에 이르기를, 신라가 5악(岳)을
만드는데, <계룡을> 서악(西岳)으로 삼아서 중사(中祀)에 실었다.고 하였다. 본조에서는
소사(小祀)로 하고, 봄ㆍ가을마다 향ㆍ축(香祝)을 내리어 제사를 지낸다. 아래 산허리에 작은 못이
있는데, 잠연(潛淵)이라 한다. 아가리는 작고 안은 넓어서, 그 깊이를 알수 없으며, 사람이 나무나
돌로 메우면, 그 이튿날 나무와 돌이 모두 <밖으로> 나온다. 땅 속에 용신(龍神)이 있어서 구름
기운을 타고 드나든다 하여, 가뭄을 만나 비를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다.】
◎ 경상도 경주부 울산군
【김부식이 이르기를, 경덕왕이 우화현(于火縣)을 우풍현(虞風縣)으로 고치고, 율포현(栗浦縣)을
동진현(東津縣)으로 고쳤는데, 지금 고쳐서 울주(蔚州)에 합속(合屬)시켰다. 하였다.】
별호(別號)는 공화(恭化), 또는 학성(鶴城)이다.【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본군(本郡)의 정(呈)에
일컫기를, 본디 계변성(戒邊城)인데, 신라 말기에 학(鶴)이 와서 울기 때문에 신학성(神鶴城)이라
고쳤고, 고려 태조 때에 고을 사람 박윤웅(朴允雄)이 큰 공이 있어서, 하곡(河曲)ㆍ동진(東津)ㆍ
우풍(虞風) 등의 현(縣)을 병합하여 흥려부(興麗府)를 설치하였는데, 뒤에 낮추어서
공화현(恭化縣)이라 하고, 또 고쳐서 지울주사(知蔚州事)로 하였다.고 하나, 《삼국사(三國史)》와
《고려실록(高麗實錄)》에는 기재되지 아니하였으니, 그 옳고 그름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오직
《육익(六翼)》에 이르기를, 예전에는 화성군(火城郡) 또는 흥려부(興麗府)로 일컬었다.고 하였다.】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의성현
【《삼국사(三國史)》에 이르기를, 경덕왕(景德王)이 구화현(仇火縣)을 고쳐서 고구현(高丘縣)으로
하였는데, 지금은 의성(義城)에 합속(合屬)되었다.고 하였다.】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진보현(眞寶縣)
《삼국사(三國史)》를 상고하건대, 경덕왕이 칠파화현(漆巴火縣)을 고쳐서 진보(眞寶)로 하여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는데, 지금의 보성(甫城)이며, 또 고구려의 조람현(助攬縣)을
고쳐서 진안(眞安)으로 하여 야성군(野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는데, 지금의 보성부(甫城府)라.
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진보ㆍ진안 두 현이 합하여 보성부(甫城府)가 된 것이다.
◎ 경상도 상주목 합천군
해인사(海印寺)는 가야산(伽倻山) 남쪽에 있다.【교종(敎宗)에 속하며, 밭 2백 결을 주었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산형(山形)은 천하에 뛰어났고, 지덕(地德)은 해동(海東)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정수(精修)할 땅이다. 하였다. 절에 최치원(崔致遠)의 서암(書岩)ㆍ기각(碁閣)이 있는데,
《삼국사(三國史)》에 이르기를, 최치원이 가족을 데리고 해인사에 숨어 자유롭게 노닐면서 늙어
죽었다.고 하였다.】
◎ 강원도 춘천도호부 인제현
서화(瑞和)는【《삼국사(三國史)》에는 화(禾)로 되었다.】
◎ 경기 양주도호부 고양현
본래 고구려의 달을성현(達乙省縣)인데, 신라가 고봉(高烽)으로 고쳐서 교하군(交河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높은
산머리[山頭]에서 봉화(烽火)를 피우고 고구려의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고봉(高烽)이라
하였다.고 하였다.】행주(幸州)는 본래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인데, 신라가 우왕(遇王)이라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혹은 왕봉현(王逢縣)이라고도 한다.【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이름을 왕봉(王逢)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 경상도 경주부(慶州府)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6이니, 이(李)ㆍ최(崔)ㆍ정(鄭)ㆍ손(孫)ㆍ배(裵)ㆍ설(薛)이다.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조선(朝鮮) 유민(遺民)이 산골짜기에 나누어 살아서 여섯 마을이
되었으니, 첫째는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둘째는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 세째는 취산
우진촌(칪山于珍村), 네째는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으로서, 이것이 진한 육부(辰韓六部)가 되었다. 육부 사람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높여서 임금으로 세웠으니, 이가 신라 시조가 되었다. 세째 임금
유리왕(儒理王) 8년에 이르러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인해 성(姓)을 주었으니, 양산은 양부(梁部)로,
성(姓)은 이(李)로 하고, 고허는 사량부(沙梁部), 성은 최(崔)로, 우진은 본피부(本被部), 성은
정(鄭)으로, 대수는 점량부(漸梁部), 성은 손(孫)으로, 가리는 한지부(漢祗部), 성은 배(裵)로, 명활은
비습부(比習部), 성은 설(薛)로 하였다.고 하였다.】삼가 선원(璿源)을 상고하건대, 본디 나온 곳은
바로 경주 이씨이다. 하늘에서 내린 성이 3이니, 박(朴)ㆍ석(昔)ㆍ김(金)이다.【박씨는 김부식이
이르기를, 고허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록나정(楊麓蘿井) 곁 숲속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가서 본즉, 말은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와서 거두어 길렀더니, 10여 살에 미쳐, 용모와 재주가 뛰어나고 숙성하였다. 육부의 사람들이,
그 나온 것이 신이(神異)함으로써 함께 높여서 이를 임금으로 삼아 세우니, 이가 바로
박혁거세이다. 진인(辰人)이 호(瓠)를 박(朴)이라고 하는데, 당초의 큰 알이 박과 같기 때문에 박으로 성을 삼았다.고 하고, 석씨는 김부식이 말하기를, 다파야국(多婆耶國)은 왜국(倭國)의
동북쪽 1천 리 거리에 있었는데, 처음 그 나라 임금이 여국(女國)의 왕녀에게 장가들어, 애기를 밴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으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음은 상서롭지 못하니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 여자가 차마 버리지 못하여,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과 아울러서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내었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의 바닷가에 이르니, 사람들이 괴이히
여겨 취하지 아니하였다. 또 진한(辰韓) 아진 포구(阿珍浦口)에 이르니, 곧 박혁거세 39년이다.
바닷가의 노모가 노끈으로 궤를 끌어당겨 해안에 매어놓고, 궤를 열어 보니, 어린아이가 있었다.
드디어 가져다 길렀더니, 장성함에 미쳐, 신장이 9척이요, 풍채가 빼어나고 밝으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를 알지 못하니, 처음 궤가 떠 올 때에한 마리의
까치가 지저귀며 따랐으니 마땅히 까치 「작(鵲)」자에서 새 「조(鳥)」는 없애고 석(昔)으로 성씨를
할 것이며, 궤 속에 간직한 것을 벗고 나왔으니 탈해(脫解)로 이름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고기잡이로 업을 삼으매, 어멈이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골상(骨相)
이 남과 다르니, 학문에 종사하여 공명을 세움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오로지 학문에
정신을 다하고, 겸하여 지리(地理)에 통하니, 남해왕(南解王)이 그 어짊을 듣고, 그 딸로써 아내를
삼게 하였다. 장차 죽을 적에 그 아들 유리(儒理)에게 이르기를, 너의 박(朴)ㆍ석(昔) 두 성은
아들과 사위를 논하지 말고, 나이가 많은 자로써 서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하였다. 유리가
장차 죽을 때에 미쳐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탈해는 선왕(先王)의 고명(顧命)이 있고, 또
어짊이 왕위를 이음이 마땅하다.고 하여 탈해가 이에 임금 자리에 서니, 이가 신라 넷째
임금이다.고 하였다.
김씨는 김부식이 이르기를, 탈해왕 9년에,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나무 사이에서 닭의
우는 소리가 있음을 듣고, 날이 밝자 대보(大輔) 호공(瓠公)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가 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임금이 사람을 시켜 궤를
가져와서 열어 보게 하니, 어린아이가 그 안에 있는데, 용자(容姿)가 기위(奇偉)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좌우에게 이르기를, 이는 하늘이 내게 아들을 줌이 아닐까 보냐.하고, 거두어 길러서
이름을 김알지(金閼智)라고 하였는데, 장성함에 미쳐 총명하고 지략(智略)이 많았다. 금궤에서
나온 까닭으로 성을 김으로 하였다. 김알지의 7세손 김미추(金味雛)가 신라 조분왕(助賁王)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조분왕이 아들이 없어서, 그의 동생 첨해왕(沾解王)으로써 왕위를 잇게
하였더니, 첨해왕도 또한 아들이 없으므로, 국인(國人)이 김미추를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가진 시초이다. 하였다.】
문하 시중 낙랑후 문렬공(門下侍中樂浪侯文烈公) 김부식(金富軾)【고려 인종(仁宗) 때
사람.】금오산(金鰲山)【본부(本府)의 남서쪽에 있다. 신라 시조의 궁전(宮殿) 유기(遺基)가 있는데,
후인(後人)이 그 터에 창림사(昌林寺)를 세웠다. 지금은 없어졌다.】
이견대(利見臺)【동해(東海) 바닷가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왜국이 자주 신라를
침범하므로, 문무왕(文武王)이 이를 근심하여 맹세하기를, 죽어서 용(龍)이 되어 나라를 보호하고
도적을 방어하겠다.고 하더니, 장차 죽을 적에 유명(遺命)하기를, 나를 동해 바닷가의 물
가운데에 장사하라.고 하였다. 아들 신왕(神王)이 그대로 좇아 장사지낸 뒤에 추모(追慕)하여
대(臺)를 쌓고 바라보니, 큰 용이 바다 가운데에 나타나 있었다. 그러므로 이견대라고 이름을
지었다. 한다.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대왕바위라고 일컫는다. 대(臺) 밑으로 70보 가량
거리의 바다 가운데에, 돌이 사각(四角)으로 있어, 높이 솟아 사문(四門)과 같으니, 이것이
장사(葬事)한 곳이라고 한다. 김부식이 이르기를, 문무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유명(遺命)에
따라 동해 어귀의 큰 돌 위에다 장사지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왕이 용으로 화하고, 인하여
그 돌을 가리켜 대왕바위라고 한다. 하였다.】
◎ 경상도 경주부 청도군(淸道郡)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신라에서 구도성(仇刀城) 경내의 솔이 산성(率爾山城)ㆍ오도 산성
(烏刀山城)ㆍ가산현(茄山縣)【경산성(驚山城)이라고도 이른다.】등 3성(城)을 대성군(大城郡)으로
만들었는데, 지금 청도(淸道)에 합속(合屬)시켰다. 고 하고, 또 이르기를,경덕왕이
오야산현(烏也山縣)을【구도(仇道)라고도 한다.】고쳐서 오악(烏岳)으로 하고, 경산현(驚山縣)을
형산현(荊山縣)으로 하고, 솔이산현(率已山縣)을 소산(蘇山)으로 하여, 밀성군(密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는데, 지금 청도군에 합속하였다 고 하였다.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인동현(仁同縣)
김부식(金富軾)의 《신라지리지(新羅地理誌)》에는,성산군(星山郡)의 영현(領縣)이 넷인데,
수동현(壽同縣)은 본디 사동화현(斯同火縣)이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였으나, 지금 경토(境土)로써 이를 상고하건대, 수동(壽同)을 인동(仁同)으로 고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신녕현(新寧縣)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경덕왕이 매열차현(買熱次縣)을 고쳐서 민백현(쮈白縣)으로
하였는데, 지금 신녕현(新寧縣)에 합속(合屬)시켰다.고 하였다.】
◎ 평안도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낙랑군(樂浪郡)은 산의 둘레를 따라
성바퀴를 삼았는데, 남쪽으로 패수 가에 임하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해행(海行)하여 남쪽으로 바닷가를 끼고 패강(浿江) 어귀의 초도(椒島)를 지나서
신라(新羅)의 서북(西北)을 얻었다. 하였고, 또 수 양제(隋煬帝)의 동정조서(東征詔書)에 말하기를,
창해(滄海)를 배로 천리(千里)를 가서 패강을 가로 질러가면 평양에 이른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말하면, 지금의 대동강이 패수가 됨이 명백하다. 그런데, 《문헌통고》에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압록강을 가리키어 패수라 한 듯하니, 대개 전해 듣기를 잘못한 것이다.
◎ 평안도 평양부
인종(仁宗) 13년 을묘【송나라 고종(高宗) 소흥(紹興) 원년.】에 서경(西京)의 중[僧] 묘청(妙淸)과
유참(柳참) 및 분사 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이 모반(謀叛)하여, 군사를 보내어
절령도(컏嶺道)를 끊고 국호(國號)를 대위(大爲), 연호(年號)를 천개(天開)라 하며, 모든 관료
(官僚)를 두고, 그 군사를 천견충의(天遣忠義)라 하니, 이에 원수(元帥) 김부식(金富軾)등을
명하여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토평(討平)하고, 유수(留守)ㆍ감군(監軍)ㆍ분사(分司)ㆍ
어사(御史)를 제외한 모든 관반(官班)을 없애고, 또 경기(京畿)의 4도(道)를 삭제하였다.
-도선의 예언, 이상한 일[靈異]. 본군 사람의 속설에 전하기를, 고려 때 사람 최씨의 경원
가운데에 오이 하나가 열렸는데, 길이가 한 자나 넘었으므로, 온 집안 사람들이 자못 이상하게
여겼었다. 최씨의 딸이 몰래 이것을 따먹었더니, 저절로 태기가 있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부모가 아비 없는 자식을 낳았다고 꾸짖고 대숲[竹林]에다 버려 두었는데, 예니레 만에 그
딸이 가서 보니, 비둘기가 와서 날개로 이를 덮고 있었다. 부모에게 여쭈어 가서 보이니,
이상하게 여겨서 데려다가 길렀다. 장성하게 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을 도선
(道詵)이라 하였다. 한다.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이르기를, 도선이 당(唐)나라에 들어가서 일행 선사(一行禪師)에게
지리법(地理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왔다. 산(山)을 답사(踏査)하는데,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혹령(鵠嶺)에 이르러 세조(世祖:왕건 부친)의 집을 지나다가, 그 새로 집짓는 곳을 보고 이에
말하기를, 피[?]를 심을 땅에【우리 말에 피[?]와 임금[王]은 음(音)이 다르나, 뜻이 같은
까닭이다.】어찌 삼[麻]을 심는고. 하고, 말을 마치자 가니, 부인이 이 말을 듣고서 들어가
세조(世祖)에게 고하였다. 세조가 황급하여 신을 거꾸로 신고 뒤쫓아 가서 만나보니, 옛부터 서로
아는 듯하여 같이 유람하기를 청하였다. 함께 구령(鳩嶺)에 올라가서 산수(山水)의 맥(脈)을
살펴보았는데, 도선이 위로 천문(天文)을 바라보고 아래로 시기의 운수[時數]를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 땅의 맥(脈)이 임방(壬方)인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수(水)와 목(木)이 근간(根幹)이
되어 내려와서 마두명당(馬頭明堂)이 되었으니, 마땅히 수(水)의 큰 수[大數]를 쫓아서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간으로 하면, 하늘과 땅이 큰 수[大數]에 부응할 것입니다. 만일 이
비결(秘訣)대로 하면 반드시 거룩한 아들[聖子]을 낳게 될 것이니, 마땅히 그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비봉(秘封) 한 통을 만들어 겉봉에 쓰기를, 삼가
글월을 받들어 백배(百拜)하고 미래(未來)에 삼한(三韓)을 통합할 임금 대원 군자(大原君子)
족하(足下)께 드립니다. 하였다.
세조가 즉시 이 비결을 좇아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이듬해에 과연 태조(太祖)를 낳았다.한다. -
이미 대륙 삼국에 대한 내용은 재야 민족 사학자 오재성이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에서 통치자
칭호와 국호의 사용 연대 및 수도와 국호의 연구로 대륙 내 광복신라(江淮新羅)와
독립신라(동신라:반도와 만주)를 말하고, 고구려는 광복신라와 독립신라의 두 지역을 상실하고
대륙신라인 광복신라(江淮신라)에게 패망했다고 말한 바(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통일신라는
광복신라로 당과 연합해 고구려 멸망) 있거니와, 같은 재야 민족 사학자 이중재는 「새고려사」
에서 「명사(明史)」, 「송사(宋史)」, 「요사(遼史)」, 「해동역사(海東繹史)」, 「오대사(五代史)」고려전,
「고려사 지리지」, 「송사」고려전 강역, 「진서(鎭書)」의 한국땅 지명을 인용해 고려가 대륙에
있다고 단언한다.
-< 고구려는 광복신라(江淮신라)와 독립신라(東신라:반도와 만주)의 두 지역을 상실하고
광복신라(강회신라:대륙신라)에게 패망하였다 >
이중재의 대륙사 고증의 핵심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1.「명사(明史)」기록-조선은 기자가 도읍 했던 나라이다. 기자가 도읍 했다면 산서(山西)성
태원(太原)에서 후일 망명하여 남으로 내려가 섬서성 서안(西安)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우는 것을
뜻한다. 고구려가 서안, 장안(長安)성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나당연합군의 작전으로 고구려는 동쪽
또는 북쪽으로 옮겨가 기원 후 668년에 만주에 있는 통화(通化)현과 환인(桓仁)현에서 망하고
말았다. 그 후 당나라와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서안(西安)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점령되었다.
옛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살고 있던 땅은 송악이었다. 송악은 말할것 없이 동경(東京)이며
평양(平壤)인 동시에 서경(西京)이다. 여기서 서경은 섬서성 서안(西安)이다. 춘추전국시대 이전은
천산과 곤륜산을 기준했으므로 유럽은 요서(遼西)였으며(이중재는 서안은 동경이었다. 명사에서
송악은 동경이며 동경은 평양이고 평양은 서경 즉 서안이다. 평양이 서경에 있을 때 나라 북쪽에
있는 이웃나라는 글란(거란)이며 서쪽에 있는 부족국가는 여직(女直:여진)이다.
*고려 왕건이 대륙 왕건을 흉내냈다는 주장에 대해: 대륙 내 3국 설과 대륙 내 고려 설을
제기하고 있는 오재성, 이중재의 학설은 많은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김문기의 후손
김기태씨의 가문에 조선왕실의 비밀로 전해지고 있는 내용 중 고려 왕건이 대륙 내 왕건을
흉내냈다고 하는 주장은 아직 필자로서도 정확히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즉 대륙
3국과 대륙고려를 상정하면 대륙의 왕건은 동일인이어야 하지만 김문기 가문의 비밀은 이것이
동명이인이라 주장하고 있기에 혼란스러워 하는 말이다. 아무튼 이중재씨는 대륙 답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見「새고려사」50쪽 이하)
신라의 패망과 고려의 출현: 고구려가 망하자 신라와 당나라는 강토를 양분해 가졌다. 고구려가
있던 땅은 당나라가 차지했다. 그리고 서안과 낙양 밑 쪽 광활한 영토는 신라(오재성이 말하는
소위 江淮광복신라)가 가졌다. 당이 망한 뒤 경순왕은 후당(後唐)시 후진(後晉)의 씨족이었던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말았다. 나라를 내어준 대가로 낙랑공주를 태조 왕건에게서 하사
받았다. 이때가 경순왕 8년 가을 9월이었다. 그때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한 곳은 산서성
운주계(運州界)이며, 30여 군과 현이다. 운주계란 하남성과 산서성의 접경지 위쪽이며, 하현(夏縣)
아래 안읍(安邑:현재는 運城)이다. 후진은 고구려와 같은 혈통으로 고구려를 망하게 한 것은
나당이지만 따지고 보면 고구려의 씨족 일부는 당나라이다. 그러므로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지만
직계혈통은 당나라에서 뿌리가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양서(梁書), 원사(元史), 명사(明史), 해동역사, 북사, 송사, 책부원구(冊府元龜)
등 각종 사서를 살펴보면, 신라 경순왕은 당나라 무후(武后) 이법(李法)의 외손자로 되어있다.
「삼국사기」경순왕 편 본문에 경순왕은 문성대왕(文聖大王)의 후손으로 (당나라) 효종(孝宗)
이창(伊滄) 벼슬을 한 이(李)씨라 하고 백제 의자왕 편에 경순왕이 당나라 무후의 손자라
했으므로 효종은 당나라 무종의 아들로 당과 신라는 외가댁 혈족관계이다. 당나라가 섬서성
장안성에 도읍 했을 때 신라는 서안 서쪽에 있는 기산(岐山)인 계림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당나라 수도 인접지에 신라 경주가 있었기 때문에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 최치원이 당에 수학한 것이나 혜초가 실크로드를 간 것은 신라가 대륙이고
같은 혈통관계라 가능한 것이다. 신라가 당나라와 대륙에 함께 있었으므로 왕건은 신라를 산서성
안읍(安邑)에서 항복 받을 수 있었고 고려는 당나라와 신라가 망한 후 후당이 생길 때 함께
후진(後晉)의 씨족으로서 또 고구려의 후예로 당당히 대륙서안을 기준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의 뿌리 : 태조 왕건의 뿌리는 정확한 문헌이 없을 정도이다.
「제왕운기(帝王韻紀)」세계도(世系圖)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려 태조의 조상은 성골장군(聖骨將軍)이다. 고려시조는 사찬(沙粲)이다. 사찬의 후예가
원덕대왕(元德大王)이다. 당나라 숙종황제와 정화황후에게서 태어난 경강대왕(의조:왕건 조부)에
이어 세조(왕융:왕건 부친)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이 고려 태조 왕건이다. 당나라 숙종은 당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이형(李亨)이며 연호는 지덕원재(至德元載)이다. 이형은 후당 시 토번의 성을
함락시키고 7군을 거느리고 3 성(城)을 장악한 사람이다. 당 숙종 황제의 아버지인
원덕대왕(742-756)은 천보 원년으로 출발하여 15년 만에 물러나고 숙종이 등극한다. 그 후
보응(寶應) 원년에 진(晉)나라에서 조서를 받고 진(震)국을 세운 사람이 발해왕 대조영이다. 한편
후진(後晉)의 씨족이었던 왕건은 대순(大順) 원년(890)에 사천성 공주(邛州:邛峽縣)에 있던
촉(蜀)나라를 취한다. 왕건은 당나라 때 촉 나라를 기원후 890년에 갖게 되고 촉왕이 되었지만
후당(923-936)이 들어 선지 얼마 되지 않은 42년 만에 망한다. 그러나 기원 후 939년 후진(後晉)
때 성을 이(李) 씨로 바꾸고, 기원 후 935년 신라 경순왕에게 항복을 받으면서 고려로 등극한다.
왕(王)씨 성을 이(李)씨로 바꾼 것이 아니고 왕건을 그대로 두고 이 씨의 성씨인 것처럼
바꾸었다는 것이다.
현재 대륙에서 왕건은 혈통이 없고 시골출신이며 떠돌이 야인처럼 가르치고 있다. 아주 못된
불량배인 양 사서를 기록하고 있으며 사천성 현지 가이드들에게도 왕건을 불량아로 취급해
교육시키고 있었다. 한마디로 현재 중국은 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려는 저의가 뚜렷했다.
후진(後晉)은 5대 10국 시대 때이다. <국사년표(國史年表)>는 왕건이 890년 중당(中唐) 대순
원년에 촉왕이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5대10국 때 석경당(石敬塘)이 글란(거란)병을 빌려 후당을 망하게 했다. 그리하여 국호를
진(晉)이라 하였다. 사학자들이 말하기를 이때는 후진(後晉)이라고 했다. 도읍은 하남성
개봉현에서 다스렸다. 후진은 산동성, 섬서성, 감숙성, 하북성, 산서성 남부이며 안휘성 북부지방
이었다. 글란(거란)의 신하인 후진은 두 임군에 11년간 지속했으나 소멸하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고려는 후진(後晉)의 씨족에서 뿌리가 내린 것으로 사서는 기록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제왕운기」는 당나라에서 뿌리가 내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참고:「고려사」역시 당 숙종에서 뿌리내린 것으로 되어있다)
「고려도경」의 건국설: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만이(蠻夷)는 스스로 군신과 같은 혈족이라고 했다. 그들의 호는
선우가한(單于可汗)이다. 기자가 봉해진 때부터 조선(朝鮮)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주(周)나라,
진(秦)나라, 한(漢) 고조 12년 연(燕:본래는 동이족의 하나) 나라 사람인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무리를 취합하고 뭉쳐서 만이(蠻夷)들과 함께 규합해 나라를 만든 곳이 조선의 땅이다....
주몽이 천자의 아들이라 외쳐 고기와 자라를 타고 강을 건너 도착한 곳이 흘승골성(紇升骨城:어떤
사서는 낙양 근처라 하고 어떤 사서는 서안이라 했으나 확실치 않다. 그러나 하남성과 섬서성
지방은 틀림없는 사실이다)이니 주몽 일행은 흘승골성에서 살고 국호를 지어 고구려라 하고
고(高)씨라 했으며 한편 고려라 했다. 한무제가 망한 뒤 조선은 고려 즉 고구려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한(漢)나라를 격파한 왕망(王莽)은 고구려(高句麗)로 아름을 바꾸었다.(후한서 고구려전 참고)
그리고 왕망의 손자 우거(右渠)는 조선사군(朝鮮四郡)을 설치했다. 한사군이란 조선사군이며
고구려현이다. 특히 고구려현에 속하는 것은 원도(元菟)군이다. 원도군이란 현도(玄菟)군을 말한다.
현도군의 군장 즉 소국의 임금은 북을 하사하고 북과 기녀와 예악의 부서를 두게 했다. 이
부서에 속하는 사람들도 조정에서 입는 옷을 입고 고을 현감의 명에 따라 관청에 이름을 올리게
했다. 왕망이 병사를 일으켜 흉노를 베고 항복을 받았다. 고려인들은 점점 늘어만 가는 도적들을
변방으로 쫓았다. 광무 중흥시 고려관리를 북방에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
- 끝 –
[출처] 114. 왕조의 비밀 7 - 7|작성자 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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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소설인줄 알고 얻었는데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뒤엎어버리는 내용이었다.
진실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역사의 진실이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일 뿐이다.
어느 먼 미래에 누군가 타임머신이라는 기계를 만들어 그 시절로 돌아가
사진도 찍고 녹음도 한다면 모를까 이미 세월에 묻혀진 역사의 진실을 어느 누가 알까?
옛날에는 사람들이 알도 잘 낳은 것은 같은데 요즘은 왜 사람들이 알을 낳지를 않을까?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신이라면 한국인들에게는 단군왕검, 해모수, 주몽, 박혁거세가 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