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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학 개론
- 안 순 덕 -
이른 아침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왔다. 여자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엄마의 방문을 열었다. 지난가을 산책로 입구의 난전에서 사다 준 밍크 꽃무늬 몸빼바지를 입은 엄마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누워 있었다. 젊었을 때 지나가던 사람이 뒤돌아보지 않으면 화가 났다는 한 시절 아름다웠던 엄마는 너무도 홀쭉해 애처로웠다. 가슴팍에 손을 대자마자 엄마는 눈을 떴다. 나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허리 깊숙이 손을 넣어 엄마를 일으켰다. 엄마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걸 보고 냉동실에서 전복 두 마리를 꺼냈다. 잘게 다진 전복을 냄비에 담으려다가 도마를 떨어뜨렸다. 전복은 주방 바닥에 달라붙어 잘 떨어지질 않았다. 겨우 전복을 다 떼어내고 일어서니 엄마가 식탁에 와 앉아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배가 고픈지 얼굴을 찡그리는 엄마는 오드리 햅번을 닮았다. 세계적인 배우를 닮았다는 것은 일평생 엄마의 자존심이었지만 엄마는 입만 벌리면 경망스럽고 상스러웠다. 아무리 아름다운 말과 문장도 엄마에게 가면 사정없이 싼 티가 났다. 엄마는 나중에 자신의 병명을 알고는 꼭 오드리 햅번과 같은 대장암이라고 말했다. 나는 엄마가 죽을 다 먹고 나서야 여자에게 전화가 왔더란 말을 했다. 엄마는 북쪽을 향해 절을 두 번 한 뒤 울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고 난 엄마는 아버지의 유골을 차지하려는 속내를 드러냈다. 나는 딴 여자랑 삼십 년을 산 뒤 죽은 아버지의 뼛가루를 한사코 고집하는 엄마가 딱했다. 아버지는 처자식을 버리고 수 십 년을 나가 살았다.
“징그러워 정말. 이제 와서 유골을 갖는다는 게 가당키나 하우. 그럴 양이면 죽기 살기로 바짓가랑이를 잡던지 참 지극도 하우.”
엄마는 배롱나무 아래에 아버지를 묻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의 높고 얕은 목소리 때문인지 간절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빈소에는 명철의 회사 직원들이 찾아왔다. 나이에 비해 승진이 빨랐던 명철은 몰려드는 문상객들로 해서 바빴다. 딴 여자 품에서 갔다고 해도 아버지는 아버지라 죽음 복에 자식 복까지 있다고 오래도록 왕래가 없었던 고모가 흡족해 했다. 명철은 일평생 하는 일없이 빈둥거렸던 아버질 좋아하는 고모를 싫어했다. 아버지가 집 나간 지 삼십 년, 내가 9급 공무원으로 주민센터에서 일하고부터 일 년에 서너 차례 아버지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벌렸다. 명실은 사는 게 어렵고 명철은 마음에 없어서, 나는 혼자 아버지의 빈손을 채워주었다.
아는 것만 많았던 아버지는 여자가 구제품 옷 장사를 해서 번 돈에 숟가락을 얹어놓고 살았다. 아버지가 일흔 되던 해, 여자는 아버지가 실명을 했다고 알려왔다. 노인들에게 쉽게 찾아오는 황반변성의 치료시기를 놓쳤기 때문이었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우산도 없이 빗속을 가야 하는 여자에게 나는 매달 얼마의 돈을 보냈다. 장례식 날 아침, 여자에게 전화를 해 엄마의 뜻을 알렸다. 그러라고 여자가 말했다.
“아이고, 하마터면 죽은 아버지 서로 가지겠다고 싸울 뻔했네. 떡하니 호적에 있는 본처의 지엄한 명을 어쩌겠어. 하여튼 우리 엄마 세기말적 사랑 못 말려. 얼마나 맺힌 그리움이 많았으면 뼛가루라도 간직하려고 그럴까. 언니, 그래도 여자가 개념은 있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명실의 말은 명랑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유골을 받아들고 굽실굽실 절을 하며 유골함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뼛가루를 뒤적이며 골고루 정성스럽게 어루만졌다.
“감격스럽기도 하겠수.”
명실이 핀잔을 주었다. 삼우날 유골을 묻으러 오겠다며 동생들이 돌아갔다. 나는 배롱나무 옆에 섰다. 작은 잎이 달랑거리는 배롱나무 아래로, 삽질하기 좋을 만큼 흙이 말랑말랑했다. 집안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안방 창문턱에 걸터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문리버 와이더 댄 어 마일
아임 크로싱 유 인 스타일 섬데이
오 드림 메이커 유 하트 브레이크
웨얼 에버 유얼 고잉
아임 고잉 유얼 웨이
엄마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속의 햅번처럼 머리에 수건을 둥글게 말아 올리고 지팡이를 기타처럼 튕기며 노래를 불렀다. 아름다운 오드리 햅번이 티파니에서 아침을 맞으며 사랑을 갈망하며 불렀던 노래를, 엄마는 자못 진지하게 부르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디서든 노래를 해대던 엄마의 소프라노가 듣기 싫었다. 엄마는 일상의 말도 걸핏하면 뮤지컬처럼 곡을 붙여 말했다. 사람들은 얼굴도 예쁜 엄마가 노래까지 잘한다고 칭찬했다. 나는 언제인가 아버지가 집을 나간 건 엄마의 노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투 트리프터스 오프 투 씨 더 월드
데얼즈 써치 얼 랏 오브 월드 투 씨
위얼 애프터 더 쌔임 레인보우스 엔드
웨이팅 라운 더 밴드 마이 허클베리 핀 프렌드
문 리버 엔 미
엄마는 최대한 정확한 발음으로 노래하려고 애를 썼다. 몇 달 동안 함께 살면서 처음 듣는 노래지만 나는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무심코 책상 위 달력에 눈이 갔다. 노란 형광펜으로 동그라미를 해둔 날짜 옆에 그려진 잔별. 나는 볼펜으로 동그라미와 잔별 위에 하릴없이 덧칠을 했다. 꼭 일주일 남았다. 높은 콧대에 비해 눈매가 부드럽고 더위를 많이 타는 남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남편은 사립대학의 한국어센터 시간강사였다. 센터에서는 주로 아시아 학생을 상대로 고급 한국어를 가르치고 매주 목요일은 동네의 다문화여성들에게 두 시간씩 기초 한국어를 가르쳤다. 남편이 행복학에 대해 관심을 가진 건 칠 년 전이었다.
행복학은 모든 사람의 인생 여정에 필요한 학술적 영역을 넘는 새로운 학문이라며 방학을 이용해 서울을 오르내리며 행복학을 공부했다. 남편은 그때그때 알게 된 행복의 이론을 내게 전했다. 행복이 인생의 유일한 기준이자 최종목표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행복학을 펼친 샤하르 교수의 이론이었다. 들어보면 다 맞는 말이긴 했지만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남편과 나는 가끔 행복전도사였던 최윤희의 동영상을 보기도 했다. 남편이 시립도서관에서 행복학 강의를 시작한 건 사 년 전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는 파랑새가 아니다. 늘 가까이에 있는 행복은 ‘하면’ ‘한다면’의 조건 절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양보 절이라는 게 행복학의 기초였다.
남편이 리노아를 따로 만나기 시작한 건 지난해 봄부터였다. 리노아는 나이차가 많은 한국 남자와 결혼해 봉제공장에 다니던 필리핀 여자였다. 한국어 수업을 받는 다문화 여성들이 집에 놀러 왔을 때 본 리노아는 작은 키에 조용하면서도 몸을 아끼지 않는 바지런한 여자였다. 리노아는 수도 마닐라에서 가까운 칼로오칸 시티의 비엔비 마을이 고향이라고 했다. 도시와 묘지 사이의 가장 가난한 묘지마을에 사는 어린 여자들은 한국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꿈이었다. 리노아도 택시 운전을 하는 한국인 남편을 만났다. 한국인 남편은 리노아를 성 노예로 다루었고 폭력으로 인한 두 번의 유산 끝에 정신장애를 앓고 있었다.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는 가끔 집에 놀러 오게 했다.
리노아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자주 울었다. 남편의 폭행을 더는 견딜 수 없어 리노아는 결국 다문화 디딤터에 있으면서 가족지원센터장과 남편의 도움으로 간신히 이혼을 했다. 남편이 리노아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한 게 새해 첫날이었다. 남편이 리노아에게 유난스럽긴 했지만 연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남편이 리노아와 만나면서도 내게 행복을 말했다는 것이 쓸쓸했고 한편으론 수치스러웠다. 체류기간이 짧아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리노아는 이혼 후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리노아가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없었던 일이 될 거라고 여기진 않았다. 내가 정리를 해주면 필리핀으로 들어갈 생각인 남편은 필리핀 말을 부지런히 배웠다.
남편은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칼로오칸 시티의 어린 여자들에게 삶의 가치를 어디다 두는지에 따라 행복과 불행의 길이 정해지며 행복은 멀리서 찾아야 하는 파랑새가 아니라는 걸 가르쳐주고 싶다고 했다. 남편이 몇 년 동안 열중했던 행복학은 그 스스로에게 스물두 살의 리노아를 사랑하게 했고 나에겐 수면제를 먹게 했다. 처음엔 반 알씩 먹고도 몇 시간은 잘 수 있었지만 나중엔 한 알을 먹고도 밤새 뒤척였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인정스럽고 친절했으며 언제나 낮은 곳을 바라보면서 나를 일깨워 주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 죽어버리는 우리나라를 떠나고 싶다고 했을 때 가고 싶으면 혼자 가라고 한 적이 있었다. 리노아를 만나기 훨씬 이전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남편은 보기가 안타까웠다. 새로운 내일의 기대보다 나에 대한 속죄의 마음 때문인 것을 잘 알았으므로 나는 애통해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남편에게 기대할 것은 없었다. 리노아는 출국 전날 나를 찾아와 남편을 보내지 말라고 기다리지 않을 거라며 울기만 하다가 갔다. 대한민국 평균 이상의 삶을 산다고 믿고 있었던 나는 간단한 짐을 챙겨 엄마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내 눈치를 살펴가며 나를 얕보는 것 같았다. 병중이긴 했지만 엄마는 남의 손을 빌리지 않을 만큼만 아팠다. 엄마는 내가 집으로 들어가자 살날이 며칠 남지 않은 듯 골골거렸다. 동생들과는 달리 나는 처음부터 엄마에게 살갑지 않았다.
쉴 새 없이 표정 연기를 하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엄마의 노래가 싫었다. 걸핏하면 ‘마이 페어 레이디’나 ‘화니 페이스’에서 햅번이 불렀다고 오버하며 노래하는 것은 질색이었다. 사람의 관계가 쌍방이 오고 가는 거라서 엄마도 내겐 늘 날을 세웠다. 엄마는 자신을 쏙 빼닮은 명실을 좋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나는 다섯 달을 함께 살았다. 명실은 내 속사정을 듣고 놀라긴 했지만 남편을 탓하지는 않았다.
“형부는 아직 나이 들지 않았네, 그 나이에 습관으로 살지 않으려 하다니. 자신의 삶에 집중한다는데 말리지 마. 뭐 형부만 그런 거 아니잖아. 예전에 왜 시인 박목월도 여대생과 함께 제주도로 도망쳐 살았잖아. 시인이라서 그래. 시인들은 인생을 그저 낭만적 행위로만 본다니까. 형부도 엄청 시적이잖아. 그런 관점에서라면 아버지도 그렇고. 근데 언니, 박목월 아내는 제주도로 찾아가서 두 사람에게 돈을 건네고 추운 겨울 지내라고 두 사람의 겨울옷을 사주고 왔었잖아. 그랬더니 두 사람이 아내의 마음에 가슴 아파하며 사랑을 끝내게 되었고.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여대생에게 준 박목월의 시가 바로 ‘이별의 노래’란 거 아니야. 아버지가 집 나갔을 때 언니가 나한테 말해주었던 이야기야. 언니가 얼마나 감동적이게 얘기했다고. 그때 우리 그랬잖아. 아내도 여대생도 박목월도 참 쿨 하고 멋있다고 말이야. 언니, 인생은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날벼락을 쳐. 하지만 그게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되어선 안 돼. 날 봐.”
명실은 삶의 변수에 호들갑 떨지 않았다. 일곱 살짜리 쌍둥이 두 딸이 눈앞에서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도 오래 울지 않았다. 명실은 불완전한 삶을 화초처럼 잘 가꾸었다. 엄마와 명실, 나는 모종삽으로 배롱나무 앞쪽의 흙을 파내는 명철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간간이 내린 빗방울로 흙은 부드러웠다. 유골함을 가슴팍에 끌어안은 엄마는 살뜰한 애정을 받고 산 조강지처처럼 애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명철은 어느 정도 판 구덩이에 유골함을 넣어보더니 키가 낮다며 조금 더 깊이 팠다.
“우리 말연 여사야 오매불망 그리던 임이라 그렇다 쳐도 언니가 난감하겠네. 앞마당에 백골을 두고 소름 끼쳐서 어떻게 살라고.”
명실이 살 떨리는 흉내를 냈다. 명철이 흙을 다 파내고 유골함을 묻자 엄마가 얼른 손으로 흙을 가만가만 두드려가며 단단히 다졌다. 엄마는 그윽한 표정으로 나무를 올려보더니 아고고 박수를 치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들고 나온 것은 젊은 아버지의 사진액자였다. 엄마는 노끈으로 허연 가지가 갈라지는 중간에 사진액자를 고정했다. 엄마는 앞으로 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액자가 제대로 걸렸는지 확인했다. 명실은 재밌는 표정을 짓고 명철은 그런 명실에게 타박을 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명실은 연신 엄마를 놀려댔다.
“어머나, 이것 좀 봐, 세상에 우리 말연 여사 얼굴에 홍조가 들었어. 대단도 하셔라. 죽고 없는 아버지가 그리도 좋수?”
명실의 말에 엄마가 흡족해 했다. 명철과 명실은 남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고 돌아갔다. 엄마는 배롱나무 아래 아버지를 모시고 난 뒤부터 생기가 돌았다. 며칠 사이 살이 오른 얼굴은 보기 좋았고 아프기 전처럼 다시금 부르기 시작한 노래엔 바이브레이션이 더욱 심해졌다. 엄마는 지팡이 없이도 집안과 마당을 부지런히 오갔다. 마치 나무가 아버지이기라도 한 듯했다. 태생이 자존감 없는 엄마였다. 엄마가 아버질 모셔왔다는 걸 아버지가 알면 뭐라 할까. 첫말에 아버질 내준 여자가 떠올랐다.
건강할 때부터 옳은 돈벌이도 못했던 아버지. 아버지가 시력을 잃은 지 십여 년, 여자는 세월의 갈피마다 행복했을까. 나는 마루에 서서 우두커니 마당을 바라보았다. 마당 한가운데 아버지의 유골이 있다고 생각하니 오금이 저렸다.
"명화야"
법원 앞 횡단보도를 건널 때 남편이 큰소리로 불렀다. 변함없이 다정한 남편의 목소리에 하마터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남편은 법원 담장 아래로 나를 이끌었다. 커다란 화분마다 백일홍이 핀 거리에서 남편이 행복의 주문을 걸면서 살다보면 내게 알맞은 행복이 올 거라고 말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 가장 나은 선택을 했다고 나는 약간 웃으며 남편에게 전해 들었던 말을 했다. 일주일 후면 출국한다는 남편은 기약 없는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갔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주민센터로 향했다.
일요일 아침 새소리에 잠을 깼다. 시간이 지나면 어떨지 모르지만 당장은 마음이 편했다. 봄 들어 여름까지 이혼을 결심하고 정리하는 동안 나는 물속에 가라앉은 듯했다. 몇 달 동안 입술을 깨물었다. 남편은 리노아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삶의 지향을 따라 잠깐 다녀올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나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애썼다. 지독한 시간들이었다. 마당에서 엄마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보니 엄마는 감색 맥시치마에 흰색의 짧은 셔츠, 그 위에 얇은 흰 카디건을 걸치고 까만 카플린 모자를 썼다. 야윈 몸에 걸친 화려한 옷이 한층 우습다. 엄마는 노래를 부르면서 허리를 잔뜩 엎드려 배롱나무 주위를 천천히 돌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연출하는 비현실적인 풍경에 현기증이 일었다. 며칠 새 배롱나무 가지마다 뭉게뭉게 연분홍 꽃들이 피었다. 엄마와 얼굴이 마주쳤다. 엄마가 모자를 살짝 들어 보이며 웃었다. 순간 일평생이 오만했던 엄마의 얼굴에서 난생 처음 보는 엄마의 기쁨을 보았다. 엄마는 고작 뼛가루로 돌아온 아버지의 영혼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긴 세월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배롱나무 아래 엄마의 일편단심, 일평생 경망스럽고 격 없던 엄마가 오늘은 뜬금없게도 아름다워 보였다. 단 한순간도 와 닿지 않았던 엄마의 눈빛과 노래에 나는 맘이 흔들렸다. 나는 물끄러미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라고 아버지의 기억만 껴안고 살고 싶었을까.
자식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엄마는 얼마나 오래 고독했을까. 나는 레몬을 띄운 얼그레이 홍차를 엄마에게 갖다 주었다. 아침부터 하늘이 잔뜩 흐렸다. 가을장마가 일찍 올 거라는 기상예보대로 이내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잠깐 사이에 빗줄기가 세졌다. 베란다에 나가보니 아파트며 학교 병원이 실루엣으로 비쳐 들었다. 남편의 소식을 들은 건 남편이 필리핀으로 간 지 이 년 뒤였다. 비엔비 마을에서 온 레디를 통해서였다. 필리핀으로 간 남편은 리노아를 만났지만 리노아는 처음부터 필리핀에 애인과 세 살 난 아들이 있었다. 리노아는 처음부터 사실을 숨겼다.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야하는 가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한국 남편과 결혼을 했지만 리노아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혼 후 필리핀으로 돌아간 것도 애인과 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떠나기 전 리노아가 남편을 보내지 말라며 울던 생각이 났다. 남편은 지붕 없는 집에 살고 있는 리노아 가족에게 지붕을 선물해 주곤 좀 더 먼 빈민가로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레디가 말했다. 나는 헤어져간 남편의 오래된 스프링수첩을 넘겼다. 겨울 운주사의 적막함과 애타는 눈동자와 상처가 아물고 손톱 밑으로 올라오는 생살의 기쁨에 대해 쓴 글을 보니 그리움이 솟았다.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이 든다고 좋아하던 황지우의 시집 속엔 유채꽃갈피가 끼어져 있었다. 제주도 이중섭 거리에서 샀던 책갈피였다. 나는 김광석 시디를 오디오에 넣었다.
김광석의 마지막 노래라며 사다주었던 남편의 마지막 생일선물이었다. 이따금 남편의 흔적에 젖어들어 내 가슴은 흥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기억은 새길수록 통증이 가라앉았다. 엄마처럼 나도 엄마처럼 아리지 않을 만큼만 상처를 껴안고 살다보면 내 상처도 꽃이 되는 날이 올까. 손톱 아래 연분홍 생살이 느릿느릿 돋아날까. 나 자신에게 행복의 주문을 걸며 살다 보면 맹랑하게 자라나는 이 기다림 언젠가 행복으로 돌아올까. 나는 세찬 빗소리에 잠겨드는 노래의 볼륨을 높였다.
[작가 프로필]
경남 김해 출생 / 청술레 동인 / 소설집 <소금꽃> 산문집 <인생은 아름다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