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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김승석
봄꽃소식을 알리는 바람이 잦아들고 있다. 초봄의 매화풍(梅花風)부터 늦은 봄의 연화풍(楝花風)까지 입하(立夏)가 지나자 조용하다.
출리산방의 마당가에는 분홍색 낮달맞이 꽃과 하얀 데이지 꽃이 무더기로 피어나 하늬바람에 살랑거린다. 그 옆 수국은 아직 낌새가 없는데 감귤 꽃향기가 진동하는 과원의 가장자리에 덩그러니 서있는 멀구슬나무도 연보라빛 꽃을 피워 ‘날 보러 오세요.’라고 손짓한다.
옛 선인들은 멀구슬나무 꽃이 피면 여름이 시작된다고 했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되었을 때 지은 ‘전가만춘(田家晩春)’에 이런 시구가 있다.
“비 그쳐 방죽에 서늘한 기운이 깔리고 / 멀구슬 꽃바람 잦아들자 해가 점점 길어진다. / 하룻밤 새 보리 이삭이 모두 뽑혀 / 평원의 푸른빛이 줄었구나.”
20년 넘게 과원에 살다보니 하늘과 구름, 땅과 물, 바람, 나무는 내 길벗이 됐다. 비록 감정도 없고 말도 없는 자연이지만 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쉼 없이 일러주고 있어서 그렇다.
“일체는 무상하다(Sabbe saṅkhārā aniccā)”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역행(逆行)해서 우리 인간은 상(常)을 바란다. “몸에 병이 없고, 늙지 말고, 늙음에 이른 것은 무너지지 말라”라고 애원하지만 부처님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다. 무상한 까닭에 고(苦)라는 세존의 가르침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알고 보는 정도로는 도(道, magga)의 흐름에 들어갈 수 없다.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오신 오월에는 법(法, Dhamma)의 향기가 온 누리에 펴진다. 부처님의 두 번째 설법으로 유명한 「무아의 특징 경」(S22:59)에서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무상(無常, anicca)이란 단순히 비관적인 덧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섯 가지 무더기, 즉 오온(五蘊)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있다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변하는 것이 무상의 특상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苦, dukkha)이다. 왜 그런가? 끊임없이 압박받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압박받는 형태가 괴로움의 특상이다. 괴로운 것은 무아(無我, anatta)이다. 왜 그런가?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 형태가 무아의 특상이다.
부처님께서 『앙굿따라 니까야』 「하나의 모음(A1:5:8)에서」 “비구들이여,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법도 이렇듯 빨리 변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마음이다.”라고 강조하셨다.
이 경의 가르침에 따라 10여 년 이상을 명상하였더니, 물질(몸)의 변화 속도보다 마음의 변화가 더 빠름은 체험하고, 또 마음을 비롯한 법들은 ‘찰나 생生 · 찰나 멸滅’하는 일어나고 사라짐의 문제일 뿐이고, 소유의 문제로 아님을 알고 보게 됐다. 법의 향기가 마침내 나에게 미치게 된 것이다.
우리 불자들이 많이 애송하고 있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 물에 때 묻지 않는 연꽃같이”라는 시구(詩句)는 고대 인도의 베나레스의 왕이 깨달음을 성취한 뒤 읊은 감흥어이다.
왕은 출가 전에 사자의 몸가짐, 어부의 그물, 연꽃 등을 사색하다가 갈애나 견해의 두려움이 생겨나더라도 이것에 엉키거나 오염되지 않겠다는 발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찰나적으로 생멸하며 흘러가는 탐·진·치의 마음으로부터 해탈하기 위한, 다이아몬드마저 절단할 수 있을 정도의 지혜를 세존께서 깨닫고 그 길을 우리 인간에게 안내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첫댓글 .. 무상 고 무아 ..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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