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개
엄옥례
잠시 머리가 핑 돌더니 코피가 떨어진다. 한꺼번에 몰려드는 일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몸에 비상등이 켜진 것이다. 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마음의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 바닥에서 몸을 세웠던 그때처럼.
결혼 후, 계절의 수레바퀴가 스물 몇 번 돌았어도 나는 집 안에서만 맴돌았다. 그저 내조가 최선이라는 소신으로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에만 마음을 두었다. 나를 딛고 올라가고 그러다 지치면 기대라고 말없이 등이 되어 주었다. 가족들이 소소한 꿈을 하나 둘 이루어 갈 때면 마치 내가 성취한 것처럼 가슴이 벅찼다. 더 높이 날아오르라고 뒤에서 힘껏 부채질했다.
특히 남편에게 더 애를 썼다. 남들의 눈에는 남편과 이인삼각이 되어 내조를 잘하는 아내로 보였겠지만 속내는 그게 아니었다. 남편에게 보이지 않는 끈을 매어 두고 목표 지점으로 가는 길을 벗어나지 않게 당겼다 놓았다 하고 있었다. 닦달인데도 남편은 이를 응원으로 여기며 내가 바라던 곳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올랐다. 하지만 마지막 고비에서 발을 헛디뎌 그만 추락하고 말았다.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남편도 부상을 입어 고통이 심했겠지만 나는 더 깊은 내상(內傷)을 입었다. 몸도 방바닥에 널브러져 가자미처럼 납작하게 퍼졌다. 귀에서 윙윙 소리가 나고 고통은 내 머리채를 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마음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어디에도 바닥은 있는 법, 하늘이 나를 이유 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치지는 않았으리. 축 늘어진 몸을 꿈틀꿈틀 일으켜 세웠다. 어항 속에서 안주하는 앤젤피시가 되기보다는 스스로 서서 아마존의 정글로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누구에게나 재능을 공평하게 주었다 하니 내게도 나름의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결심은 섰지만 막상 세상으로 뛰어들자니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었다. 마음뿐인 그 즈음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무엇이 있었다.
늘 고공비행만 하는 솔개도 고비가 있는 법이다. 팔십 수년을 사는 솔개는 생을 반쯤 살면 발톱이 무뎌져 먹이를 낚아채기 힘들다. 먹이를 잡아채더라도 부리가 굽어 쪼아 먹기 어렵다. 게다가 날개마저 두터워져 높이 날지 못해 도태와 생존을 가르는 벼랑 끝에 선다.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은 솔개로 하여금 두려움과 고통을 안고 산꼭대기에 서게 한다. 허기에 몸을 휘청거리고 피를 흘리면서도 헌 부리를 바위에 쪼아 부수어 새 부리가 돋아나면 낡은 발톱과 깃털을 뽑는다. 마침내 새 발톱과 깃털을 갖추고 또 한 번 창공을 향해 힘차게 비상한다.
환골탈태의 시간을 가졌던 솔개처럼 나도 일신(一新)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또는 남편에게 힘이 되라고 가졌던 모임들을 하나, 둘 정리해야 했다. 모임의 중심에 서서 펄럭이던 치맛자락도 거두어들였다. 외돌토리가 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관계 속에서 발을 빼자 세상에서 내가 쓸려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체면과 겉치레, 내게 달라붙은 낡은 타성을 벗지 않고는 새로워질 수 없기에 살이 찢겨지는 아픔이 있더라도 한 가닥 미련조차 버려야 하리. 일상을 두고 산 정상 바위로 올라가는 솔개의 심정도 그랬을까.
솔개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적을 할퀴고 뾰족한 부리로 사냥감을 쫀다. 이것은 생존 수단이며 또 한편으로는 새끼에게 줄 먹이를 구하는 모성이다. 나는 세상에 나가 무엇을 할까. 이성을 가진 사람이기에 쌀독이 바닥나더라도 남을 쪼거나 할퀴지는 않아야 한다. 모성이 알을 품듯 세상을 품으며 먹이를 구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세상에서 마음 다친 아이들, 아픔이 있는 사람들을 쓰다듬는 일을 하기로 했다.
녹슨 머리로 밤낮없이 책을 읽고 공부했다. 그러자니 공기 같던 나의 손길에 길들여진 가족은 아부재기를 쳤다. 정성이 부족한 반찬에 대강 해 놓은 빨래 손질, 설렁설렁 해치운 집 안 정리에 불평이 따랐다. 이제껏 뒷바라지하며 살아온 나에게 무슨 이카로스가 될 거냐며 남편이 빈정댈 때면 내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마음이 흔들려 털썩 주저앉고 싶었지만 오히려 남편의 차가운 태도가 내 중심을 세웠다. 남편은 내가 지쳐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걸까. 아니었다. 내 성격을 잘 알고 어떤 연단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뒤늦게 세운 뜻을 무너뜨릴까 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끈을 묶어 놓고 조심스럽게 당겼다 풀었다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는 일이 들어왔다. 교안을 짜고 연습도 해 두었으나 구들장 귀신이던 내가 남을 지도하기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뒤엉켜 싸우는 아이를 떼어 놓느라 진땀을 빼는가 하면 한 아이를 달래 놓으면 다른 아이가 뒹굴었다. 첫 시간을 마치고 나니 허탈감이 온 신경을 타고 돌았다. 가족들 뒤에서 조용히 내조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모나고 울퉁불퉁한 심성을 감싸 안아 둥글게 어루만지는 것이 내 일 아닌가. 더군다나 나를 지켜보는 눈은 또 몇인가. 마음을 다잡으며 노인의 외로움을 다독이고 청소년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일을 자청했다. 간혹, 우울증을 못 이기는 노인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짓궂은 학생의 장난에 넘어지기도 하지만 내 몸짓이 그들에게 위안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웃을 수 있는 일이다.
금빛 날개를 가졌어도 공기의 저항이 없다면 날 수 없듯, 삶도 날갯짓과 저항이 균형을 이루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리. 청둥오리도 강한 상승 기류를 타고 높디높은 히말라야를 넘는다지 않는가. 이리저리 부딪히며 나를 비우다 보니 그 자리에 일이 들어왔다. 새로운 바람을 만나면 새가슴처럼 조마조마한 마음이 앞서 잠시 기우뚱거리지만 이내 중심을 잡는다. 인생사 다 그러하듯, 바람을 타는 일이 아니겠는가.
세상으로 나가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아직도 그 맛은 맵고 쓰다. 대나무 살을 깎고 문종이를 자르는 소년처럼, 나를 깎고 잘라내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하리. 바람을 예정하고 연을 만들고 또, 연을 만든 소년만이 꿈을 실어 하늘 높이 날릴 수 있을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