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며칠 앞 두고

1. 추석을 며칠 앞 둔 가을 날씨는 무척이나 화창하다. 서울 잠실아파트 베란다에도 가을 햇살이 기어들었다. 나무판자로 만든 작은 마루바닥 위에는 밝고 맑은, 따스한 햇볕이 앉았다. 나른하게 졸고 싶은 초가을의 오후. 헌 책방으로 나가서 헌 책을 고르려는 생각을 접었다. 20년 전에 관심을 두었다가 그만 둔 논리학, 비판논리학 책을 요즘에는 부쩍 사고 싶었다. 집 바깥으로 나가봐야 주머니만 더 가벼워질 게다. 헌 책 구입마저도 나한테는 부담이 되기에 입 꾹 다물고는 책상에서 잡글을 쓰고 있다.     어제의 일이다. 에리베이터 안에서 대머리 벗겨진 50대의 중늙은이가 벽에 기댄 채 눈 감았는데 헝클어진 머릿카락에서 땀방울이 흘러서 쭈글쭈글한 얼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에리베이터가 내려가는 그 짧은 순간인데도 피곤을 달래는 모습이 측은했다. 마음이 짠해서 지켜보다가 눈 뜬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피곤하지요?" 사내는 픽식 웃었다. 아무 말도 안 한 채. '지금 일할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하다고 생각하세요. 이런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니까요.' 내가 덧붙였어도 지친 사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에리베이터가 1층에 멈추었다. 공동출입구 바깥에는 대형 이삿짐 트럭이 두 대가 서 있었고, 열어제킨 카고 안에는 옮겨야 할 이삿짐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저 작은 체구로, 어떻게 저걸 다 나르지? 그리고는 얼마쯤 돈을 버는데? 가족은 있어? 하는 안쓰러움으로 나는 가슴 아파했다.   그 중년 노동자한테 한 말이 나 자신한테 던진 독백일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퇴직한 뒤 일자리가 없는 나를 달래는 수작인지도 모르겠다.   미화원(쓰레기 청소부)으로 채용해 주겠다고, 돈을 가로챈 구청 직원이 검거되었다는 뉴스가 방금 전에 보도되었다. 지금은 도둑질 못해 먹는 사람이 등신이 되는 세상이다. 사회 저명인사들, 정치인과 재계의 수장들이 저지르는 비리와 비행은 끊임없이 보도되어도 결과는 유야무야하거나 없던 일로 끝나며, 이런 사례는 더욱 고도화 지능화되는 세상이다. 가진 자들이 더 많이, 더 지능적으로 도둑질하는 세상이 되었다. 땀 흘려가며 일해야 하는 일자리조차도 별로 없는 세상에서 품값이 값싼 노동자들이 허우적거리고 있다. 지금도, 앞으로도.   이런 날에는 신을 탓하고 싶었다. '오직 신(神)만이 알겠지. 그 멍청하고도, 아무런 능력도 없는 신이기에 이런 현실에는 끝까지 침묵하겠지.' 엉뚱하게도 없는 신을 탓한다. 그 잘난 정치인이나 정부 등을 탓하다가는 엉뚱하게도 수갑팔찌가 채워질 수도 있으니까.         2. 추석이 가까워지니 마음이 푸짐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한 생각도 든다. 추석 선물을 언제 받았던가 하고 나를 되돌아 보아야 할 시간이다.   예전, 직장에 다닐 때다. 명절이라는 구실로 겉만 푸짐한 박스 하나씩 직원들에게 나눠주었다. 어떤 때는 비누나 퐁퐁류의 세제 등이 든 박스 하나, 어떤 때에는 10kg짜리 쌀 한 푸대도 받았다. 장관 하사품이라는 라벨은 꼭 붙었다.   퇴직한 뒤로는 이런 것조차도 없었다. 민간인을 전혀 상대하지 않는 부서에서, 그것도 미관말직으로 봉직하였다가 퇴직한 나를 누가 기억해 줄까? 아무도 없다. 아니 있기는 하다. 결혼한 자식들은 회사에서 얻었다는 생활용품 박스나 또는 과일박스를 제 어미한테로 들고 오기도 했다. 나는 퇴직한 뒷날부터 시골로 내려 가 늙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추석이나 설에는 그래도 다녀가는 사람은 있었다. 내 고향 근처에 있는 공원묘지, 제 아비의 산소에 들렀다는 누나의 자식(딸, 아들)들이 선물꾸러미를 내놓기도 했다. 그들의 외할머니가 드실 만한 과일류가 주로였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그런 선물은 전혀 기대하지도 않게 되었다. 내 어머니가 안 계시기에. 올 2월 말에 저 저머너의 세상으로 먼 여행길 떠났고, 그들의 외삼촌인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생질이 내 시골집에 잠깐 들릴 수도 있겠다. 굳게 닫힌 대문 밖, 바깥마당에 차를 잠깐 멈추고는 텃밭 여기저기를 먼 발치로 둘러볼 수도 있겠다. 아닐 수도 있고.   오늘 점심 밥상머리에서 아내는 궁시렁거렸다. '시골집에 혹시 대전의 생질네가 다녀 갈까요? 텃밭에 있는 밤나무에서 밤톨을 줏어 갔으면 좋겠네요. 또 늙은 감나무에서 감도 조금 따 갔으면 싶네요. 아무도 없는 빈 집, 빈 텃밭이라서 과일들이 떨어지고는 곧 없어지겠네요.' 어쩌면 아내의 예견대로 빈 집의 빈 텃밭 속의 과일을 저절로 없어질 게다. 산짐승인 고라니, 들짐승인 쥐가 들락거리고, 산새들이 기웃거리면서 먹거리를 맛 볼 게다. 아무려면 어떠랴 싶다.   올 6월 말경에도 그랬다. 텃밭 속의 왕보리수 열매, 매실이 잔뜩 매달린 것을 보고도 시골집에서 잠깐만 머물렀다. 대전이 본거지인 사촌동생이 시골집에 잠깐 들릴 수도 있기에 매실과 왕보리수를 다라도 따 가라고 일렀다. 나중에 텃밭에 가보니  땅바닥에 떨어진 매실은 곰팡이 슬어서 새까맣게 썩고 있었다. 그 많은 매실이. 초가을인 지금쯤 시골 텃밭에는 무엇이 더 있을까? 꽃무릇도 꽃 피우고, 은행알도 가지가 처억 늘어지도록 다다닥 매달렸을 게다. 그만 생각하자. 올 추석에는 그냥 서울에서 머물자.   서울에서 머무는 나한테 누가 추석 선물을 보낼까? 아무도 기대도 하지 말자. 아무 것도 기대도 하지 말자. 미관말직으로 퇴직한 나를 누가 기억해 줄까? 아무런 권력도 권한도 없이 못난이처럼 반평생을 더 산 내가 무슨 힘이 있었다고 나를 기억해 줄까? 그냥 머저리처럼 못나게 산 나를 탓해야겠지. 인생 참 잘못 살았다는 생각도 문득 들기도 한다. 아내가 새마을시장에 가서 차례상에 올려놓을 과일 몇 봉지 사면 그뿐이다. 그것으로 차례제사를 지내면 된다.   서울 잠실 전척역 지하쪽에는 대형마트가 있다. 추석 선물이야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없는 것은 나같은 서민의 지갑 두께. 고가품인지 명품인지는 몰라도 그런 상품구매는 서민로서는 꿈도 못 꿀 것이다. 중간품인 인삼과 녹용들이 지하매장에서 눈길을 유혹하지만 나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훨씬 값이 싼, 종이박스만 큼직한 과일상자가 알맞는 성싶다. 그러나 이것도 아니다. 정찰가격을 보고는 인상 한번 찡그려야야 할 게다.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면 어느새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명절선물 그런 것 없어도 산다, 안 받아도 너끈히 산다.   일전 뉴스를 보았다. 10억 원 이상의 금융재산을 가진 사람은 전 인구의 0.35%인 18만 2천여 명. 평균 금융재산액이 22억 3천 만 원을 넘는다는 통계수치에 이제는 놀라지 말아야겠다. 나도 통장을 가졌다. 정확히는 빚통장이다. 갚아야 할 빚통장을 올해 개설했다. 퇴직 이후에 '새로운 빈민층'으로 추락 중인 내가 '인생을 헛 산 것이며, 잘못 살았다'고 자탄하는 이유다. 살다가 살다가 더 지치면 악의 씨앗처럼 불만은 발아되겠지. 가진 것이 적다라는 생각, 상대적 박탈감이 들면 남은 것은 발악이겠지. 생계형 범죄가 왜 생기는 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어느새 '묻지 마 범죄'를 저질러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부의 세습이 없으면, 각자도생의 능력과 노력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쉽게들 말한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줄 것이다.'라는 말씀을 믿어 보자. '노오오오오오오력을 더 해야 되는가?' 아쉽게도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수두룩한 세상이다.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없고 부족한 것은 다 내 탓이다.  요즘 회자되는 핼조선(hell 朝鮮)이 뇌리에 박히기 시작했다.   시집 간 두 딸. 양가 시댁 어른한테 꾸러미 하나라도 선사해야 할 듯 싶어서 아내한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아내는 두 손을 크게 저으며 과잉반응했다. '그럼 사둔댁은 가만히 있겠어요? 또, 딸이 아닌 며느리네는 어쩔 것인데요? 그런 거 주고 받지 않기로 했잖아요? 서로가 부담 주는 일은 하지 말자고요.' 아내의 단호한 거부에 나는 아뭇 말도 하지 않았다. 물건이 오고가기 시작하면 그것은 허례허식이 되어서 자꾸만 가액이 커지고, 부담도 늘게 마련이다. 안 주고, 안 받기를 내가 먼저 실천하는 것도 빈자(貧者)의 지혜라고 여긴다.   추석은 해마다 있었다. 올 초가을에도 추석 명절이 며칠 안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가위는 나한테는 또하나의 고문이다. 왜 고문일까라는 질문을 남긴다.  그 하찮은 자존심도 이제는 별로 남아 있지도 않은데도 말이다. 인생 헛살았다. 잘못 살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는 요즘이다.   빈자(貧者)가 되니 별 것을 다 철학(哲學)한다.                                                           2015.9.22. 화요일.   오랜 만에 잡글 하나 올립니다. 그냥 헛소리 하는구나 하는 정도로만 읽어 주시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