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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주부터
바보스런
너무 순박했던 그래서 답답하기만 했던
내 23년의 청춘
난 스스로 '노력하면 언젠가는 그대가 오리라'는
말을 굳게 믿어왔다.
실제로 울 아빠를 내 상징으로 표본으로 삼아왔다.
아빤 노력과 성실로 성공한 삶을 사셨고
내 눈엔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외가 있단 것도
그리고 그 '예외'가
나란 것도 알게 되고
어느 날 그런 한심한 날 발견하게 되었다.
난 그저 묵묵히 최선을 다하면
그 성실만을 내 무기로 살면 언젠가
내 묵은 때를 벗고
내 주위에 깔려있는 수많은 스타계열에
내 이름 석 자도 오르리라 믿고
지금 이 무명의 설움을 벗어버리리다
라고 생각해왔다.
'성실과 노력'은 내가 자신 있게 내세울 무기였지만
세상은 과정보다는 실력이 우선이었다.
그랬다.
난 그 가장 중요한 '실력'만 빼고 나머지 불필요한 것만 연마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보
멍텅구리
숙맥
천치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부족한 면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격'이다.
내성적, 소극적
참 답답했던 나
내 주위 사람들은 이런 날 어떻게 봐왔을까.
난 운동도 사생활 특히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건 그들과 '노는 관심사인 주파수'가 달랐기 때문이다.
내 동기 중 유일하게 나만 주전대열에 끼지 못하는 농구실력으로
운동의 대화에 난 외톨이였고
돌멩이도 씹어 먹을 새파란 혈기짱일 나이에
여친 하나 없이 지내는 재미없는 생활
그런 반면 내 동료 스타군단들은
그 시대 최고 스타대우 받는 냥
명문여대 재벌 딸들의 물질적 공세와
아낌없는 염문설???
철없던 난 그들의 모든 것들이 정말 부러웠다.
'학점은 인기 순이란 것'도
난 대학을 서울로 오면서 다부진 꿈을 가졌는데
비록 공부로 대학에 온 건 아니지만
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냥
운동에도 공부에도 욕심을 갖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남들이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면 난 강의시간에 충실했고
강의과제와 시험에 내 자투리 시간도 남김없이 투자했다.
그리고 남들보다 약한 체력을 보강하기 위해
운동시간보다 한 두 시간 일찍 나와 체력보강운동을 30분 정도 하는 등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가며 노력하기에 애를 썼지만
정말 누가 봐도 학교생활이라곤 손톱에 때만큼도 안 한
단지 '스타'란 이유 하나로 나보다 더 나은 학점을 주고받는 교수도 선수도 미웠다.
때론 왕따 취급도 당해야만 했던 시절
친구들이 날 무시할 정도로 처신을 잘 못한 건 아니고
다만 그 당시 그들과의 관심사가 다르니
당연 이야기꺼리가 다른 것뿐이었다.
더 억울한 건
관심사가 다른 건 절대 아니다.
다만 자신 없고 용기 없는 내 소심했던 성격 탓이었다.
이랬던 내가 바꼈다.
완전히 180도로 바꼈다.
어떤 특별한 계기로 변활 가진 것이 아니라
일제의 억압 같은 내 마음 속 응어리가
3-1절 만세를 부르는 것 같이
잠재되어있던 내 또 다른 모습이 하나하나 양파 껍질 벗듯
나를 변화시켜 나갔다.
아주 무서운 기세로 '샌님'에서 '카사노바??'로
실은 이랬다.
대학 3학년 초만 해도
난 신입생 환영회 때
꼭 있어야할 여자 파트너가 없어
2학년 땐 친구의 여친을 빌리기도 하고
3학년 땐 헌팅이라도 하려
이화여대 정문에 서서 3시간 동안 단 한 명의 여학생에게 말도 못 걸고
헛수고 한 적도 있었고
매년 급구해서 어찌어찌해서 위기를 모면해왔다.
이랬던 내가 변화된 시점은
첫사랑을 만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여자도 남자인 나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걸 느끼고 난 후
생각해보니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팬으로 알던 여학생 아이들에게만은
자연스레 대활 했던 것
이윤 잘 몰랐지만
그들에게선 여자로서의 매력을 잘 느끼지 못해서가 아닌 듯 싶다.
얼굴이 못나선 결코 아니고
당시 내 어린 마음의 내 생각엔
나에게 먼저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여자보다는
내가 먼저 좋아하는 맘으로 다가서야
비로소 이성조건의 매력을 갖추게 된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개념으로 판단한 듯싶다.
여자에 대한 대화도 공포스러움이 점점 사라지면서
내 주변 상황도 변해갔다.
어느 날
가을 문턱에 서있던 차갑지만은 않은 날 저녁
난 저녁식사 후
숙소 앞 전화박스로 향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대중화 되지 않은 터라
난 주로 전화키드를 사용했다.
그때가 '정기연-고전'이 있기 며칠 전
[연고전이란
1년에 한 번 있는 양 대학 간의 스포츠 축제이다.
일 년에 여러 번 전국대회가 있지만
우리 이 정기연고전을 최고로 친다.
그래서 1백일 합숙훈련(일명 '지옥훈련'이라 함)을 한다.
외출도 휴일도 없이 그 한 경기만을 위해서 초점을 맞춘다.]
난 집에 안부전화를 자주 했는데
그날도
전화하러 전화 부스로 카드 한 장 들고
종종걸음을 했다.
내 걸음보다 먼저 도착한 여대생
그녀 역시 전화카드
옆 동전 전화 부스에는 초가을 스산한 바람만 맴돌다 나간다.
"엄마 나 지갑에 차비가 없네.. 어떡해?"
자세히 듣진 못했지만
차비 땜에 걱정하는 듯했다.
어두웠지만 무거워보이는 책 배낭과
과제물로 보인 두꺼운 여러 권의 책
난 순간 빵집 안에 있는 '이상민'[현재 KCC선수/1년 후배]을 보고
상민이에게로 가 돈 천원을 빌렸다.
"야! 천원 있음 줘봐. 이따 주께"하고 빼앗다시피 돈을 갈취?했다.
무슨 일인가 얼떨결에 돈을 건네 준 상민의 얼굴이 선하다.
난 다시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갔는데
아직도 수화기를 들고 어쩔까 하고 있더라.
난 주저 없이 그녀를 불렀다.
"저기요" 난 무어라 불러야할지 몰라
식당에서 종업원 부를 때처럼 그녀를 불렀다.
"..."
어둑한 저녁
차들만 쌩쌩 달리는 대로변
'누가 날 부르나'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에고 @@
나는 한 번 더
다시
"저.. 여기여"
아까보다는 좀 더 자신 있고 크게 불렀다.
통화에 열을 올리며 뒷모습만 보이던 여대생은
짜잔!!
드뎌 앞모습을 공개하더라.
하지만 어둡기만 한 조명
저승사자처럼 그늘에 가려진 어두운 얼굴
불행 중 다행이라던가.
난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난 그저 그녀의 딱한? 사정을 해결해주고만 싶었을 뿐
그러나 그 대상이 내 또래의 여대생이라
말 걸기가 조금 어렵다는 거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여잔 내게 '외계인'과 같은 존재였는데
난 떨리는 맘으로 말을 건넸다.
"저..여기...차비요"
약간은 당황한
그러나 금세 상황파악을 한 듯
돈을 받으며
"고마워요.. 연락처와 이름을.."
난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니요. 됐어요. 그냥..."
난 말꼬리를 흐리며 그 자리에 있는 게 괜스레
부끄부끄
나 스스로 그것을 선행이라 여긴 걸까.
돈을 건네 준 후 그녀가 어떻게 된 줄 모른다.
전화 부스로 몸을 숨기듯 그 자릴 피했다.
그리고 며칠이 흘러
황당한 사건이 생겼다.
이야기 전개 전 부연설명
연-고전은 젊음의 축제
이날이 되면 신촌일대는 가족이 된다.
아침에 교내 체육관에서 모든 선수들이 '연세찬가'로 맘을 잡고
학교 버스로 잠실 올림픽 경기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1년을 준비한 젊음 대격돌이 약 두 시간 동안 펼쳐지고
승리를 거머쥔 우리는 '승전고'를 알리러
신촌으로 향한다.
버스는 우릴 싣고 이화여대로
이대 정문에서 20여 명의 선수전원들이 하차를 한다.
연대가 고대를
신촌이 안암골을 물리쳤단 것을
농구팀만의 자축행위인
행렬 도보를 이대 정문에서 연대 정문까지
행군을 30여 가지 축하송 메들리를 부르며 행진한다.
당연 행군로는 찻길이며 우리 뒤를 따라오는 모든 차들은
추월도 경적도 울리지 않는 배려로 우릴 축하해준다.
그럼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린 고대로부터 승리를 거머쥐고
매년 해 왔듯이
이대 정문에서 내려 전 선수가 4열종대로 행진을 시작했다.
노래가 한 곡이나 끝났을까
뒤에서
"잠깐만요"
라는 여자 목소리가 우리의 축하송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우린 일제히 시선이 그녀에게로 꽂혔는데
그녀는 그 많은 스타 선수들을 제치고
내게로 왔다.
이런!! 그녀는 며칠 전 '천원녀'였던 것
그녀는 날 알아 봤던 것이다.
난 예상치 않았던 그 상황에 적지 않게 놀랐고
그녀 역시 떨고 있음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가방 속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손을 떨고 있었으며
내게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은 떨어지지 않아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그녈 볼 수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찾고 있던 지갑이 있었고
지갑에서 꺼낸 건 '천원'짜리 지폐 한장이었다.
그녀는 내게 고맙다며 돈을 건네줬고 난 홑주머니도 없는 유니폼 바지허리 밴드에
돈을 접어 꽂아 넣고
아무 답변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릴 황급히 떠났다.
왜?
난 당시 여친이 있었기 때문인 것
난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건
당연하게도 한 여자밖엔 쳐다보지 못한다는 거다.
난 천원녀가 어쩌면 그 계기로 나와 뭔가가 이루어지기를 바랬는지는
그 상황에서 별 것도 아닌 돈을 갚으러 용기를 낸 것만 봐도 알겠지만
난 초심처럼 그녀를 뒤로 하고 그 자릴 떠났다.
음..
내게 많은 걸 기대하시나본데
이게 끝이걸랑요.
난 행렬로 돌아가고
내게 지금 울 카페 운영자님들처럼
내 입에서 뭔가 흥미꺼리를 내심 기대하더라.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에게 미소만 지어보였다.
그러나 희한한 일은 22년 동안 침묵을 지키던
내 이성 만남의 기회가 첫 사랑녀와 만남을 갖게 된 후
봇물 터지듯 사방에서 터졌다.
내 이상녀도
천원녀도
이후 수많은 기회가 첫사랑녀와 헤어진 후에도 계속 되었다.
비단 이성 뿐 아니라 동성친구들도 하나 둘 늘어갔는데
이제부터 내 제2의 인생 이야길 하겠다.
변해야만했다.
변해야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함이 내 잘못이라는 걸 알았다.
답답하기까지 한
소극적인
내성적인
이런 내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이 내 목표가 되었고
꼭 풀어야할 숙제가 되었다.
쉽지만은 않았다.
23년 동안의 습관 보다 아니 몸에 밴 또 다른 나를 지워야하기에
강자 앞에선 약자 약자 앞에선 강자
이것이 살면서 터득한 생존법칙처럼 여겨온 것만은 사실이다.
나만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었다.
그랬던 난
이 모든 고정관념처럼 여겨왔던 것에
난 정면 대응했다.
때는 대학 4년 졸업반
실업팀에 겨우 스카웃된 나
동료친구들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미
여러 대학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았듯
그들 역시 여러 실업팀에서 이미 스카웃되어 거액의 계약금과 함께 팔려나갔을 적
난 마음 조리다 간신히 날 좋게 본 실업 최강 기아자동차로 가게 되었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대학팀 동료선수와 헤어짐으로써
날 모르는 전혀 새로운 세상에서
내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기로 했다.
정말 좋은 기회..
만약 대학시절 때 날 변화시켰다면
팀 동료들과 어쩌면 좋아질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더 나빠질 수도 있겠거니 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좋은 기횐가
내가 이런 모습을 저런 모습을 보여도
보이는 모습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세상
난 대학팀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날 난 이전과 180도 다른 날 선보였다.
내성적 이여서 친구와 어울리지 못했던 날
매순간 기억하면서
너무나 서먹하지만
너무도 익숙하지 못한 날
채찍질하면서 날 변화시켜나갔다.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안녕하세요'가 아닌
주위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게, 그러나 너무 크지 않아도 자신 있어보이게끔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테크닉은 늘어갔다.
인사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내 생활 모든 면에서
날 적응시키려는 생활은 끝없이 계속 되었다.
날 변화시키려면
내 인생에서 버려야할 것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난 내가 강자 앞에선 약자라고 말은 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나
융통성이 없었다고나 할까
난 동료친구들보다 늦게 시작한 운동
그 세계에는 반사회[사회란 집단생활의 축소판이라 말하고 싶다]
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아부 잘하는 자가 생활이 편하다'라는 것
내 친구들은 이미 초등학교 때 운동을 먼저 시작하면서
모든 걸 겪어서일까
선배 비위를 너무 잘 맞추는데 그 솜씨가 환상적이더라.
어느 정도였냐면
다 같이 쉬는 시간
난 휴식으로 잠을 청하고 내 친구는 선배 비위를 맞추고 노는 상황에
선배가 간식거리를 같이 놀고 있는 여러 명이나 되는 내 친구들은 놔두고
잠을 자고 있는 날 깨워 심부름 시키는 건 예사더라.
'아부' 난 이런 눈에 속이 훤히 보이는 행동을 못해
대학 졸업할 때까지 늘 피해 보며 살았다.
난 아부 대신 날 걸핏하면 아무 이유 없이 내 머리 뒤통수를 때리는 선배에게
다른 곳을 패도 좋으니 머리만 때리지 말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 시절 운동세계를 모른다면 내 행동에 뭐가 잘못인가 하겠지만
선배 말은 곧 '법'이었던 그 당시
내 언행은 그 선배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 선밴 그날 이후 내 머릴 때리는 횟수는 적어졌지만 다른 일로 날 더 괴롭혔다.
아마도 내가 괘씸했다고 느꼈나보다.
이것뿐만 아니라 내 돌발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이후 난 이런 저런 사건을 거치면서
내 문제점을 알게 되었고
난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서야 내게 변화를 주지 않으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도태되겠구나 싶어
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23년 간 내 몸에 배어있던
나만의 세계를 지우기에 노력한 결과
뜻밖에 내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난 세상 사람들 속에서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 성과는 바로 나타났다.
과 친구가 한 사람을 소개시켜줬는데
카가 자그마치 178이나 되는 직업이 수퍼모델이었고
그에 이어 난 사회 각양 각체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를 쌓아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날 거부하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난 사회에 잘 적응해갔다.
이후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컨츄리꼬꼬가 구성되기 바로 전 솔로로 활동하던 (탁)재훈형을
내가 96년 선수생활을 은퇴하고
선수시절 선배가 '연예인 농구단 감독'임을 알고
빽으로 들어가서 알게 되었고
그런 여기서 나의 '인라인'을 살짝 공개하면
대학 1학년 때 내 동기인 허진규와 탤런트 '이종원'이 1편의 의자 밟고 넘어가기로 인기 급상승했던
'리복'광고 후속탄에 출연한 경험이 있는 난 cf출신
대학 4학년 때 '마지막 승부'에 '장동건'과 같은 편으로 카메오로 출연했던 나
95년도에 각종 경기에 우승을 했던 우리 기아자동차를 취재하러
당시 리포터였던 '박진영'과 인터뷰 전에 개인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있고
96년도엔 '연예인 농구단'에서 '탁재훈과 이장우, 배구선수 김세진' 등과 매주 만나 운동과 음주가무를
2002年度엔 기내에서 꼬신? '이휘재', 내게 먼저 연락해 도움을 주겠다는 '박찬호'
2005년엔 '김미화누나와 김근태 장관'
그리고 만난 적은 없으나 내 글로 노래를 선물해 준 '드렁큰타이거' 내 목소리를 대신 해 준 '박해일'
내 기사를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님께 읽어주셨다는 '김구라'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99년엔 약 1년 정도 같은 헬스클럽에서 매일 같은 시간에 운동하던
어떤 누가 봐도 잘 생긴 청년과 운동하던 나
그가 바로 '원빈'
난 당시 TV와 안 친해서 누가 누군지 모르다가 유학 후 알게 되었다.
이밖에도 내 칭구들은 참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 중학교 2학년 내 짝꿍으로 다시 만나게 된 수재들 모임(나만 빼고)
99년 어느 날 내가 일하던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전종익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그를 찾고 싶어 모교 '대성중학교'에 간 적이 있을 정도로 보고 싶었던 놈
그는 내게 좀 특별한 친구였다.
난 초등학교 1, 2, 3학년 과정만 제대로 배우고 4, 5, 6학년 과정은
농구 땜에 제대로 한 번을 공부 못하고 중학교에 들어가서 6백 명 중 4백 등이란 성적을 받고
난 1학년 땐 조금 성적을 올리는데 그쳤으니
2학년 1학기 동안엔 무려 상위권 등수까지 올리게 해준 '자극제' 역할을 해 준
전교1등을 도맡아 한 짝꿍 종익이한테서 연락이 온 것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녀석은 '서울대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헌법재판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에 있었던 것
내 중학교 동창이자 이 녀석이 만나던 친구들과
내가 유학을 마치고도 얼마간 계속 만남을 가졌는데
이놈들도 심상치 않은 직업을 갖고 있었다.
서울대 법대와 의대를 나와 의사와 판사가 되고 회계사와 박사도 있었지만
그 중 내 직업이 가장 빈약했지만
난 당시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해질 수 있었나 싶다.
아마도 시각적 차이에서 나오는 착각?이 아닌가 싶다.
그들이 아무리 빵빵한 직업을 가졌을지라도
나와의 키 차이 때문에
난 항상 그들을 내려다보았고
반대로 그들은 날 올려다봤기 때문이리라 예측해본다.
그건 그렇고
난 성격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이렇게 내 주변엔 큰 변화가 생겼고
지금은 카페 친구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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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희들도 영광의 인물인 승일씨와 친구가 되었지요
맞아요. 승일님의 친구가, 누나가 된 것이 영광이지요^^
ㅋㅋ 왜이렇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쓰시는지.. 다시 읽어도 잼나요 ~~~ㅎㅎ
저두요. 읽을 때마다 넘넘 잼나요~~ㅋㅋ
변해야만 산다.. 변함으로써 많은 다른 변화가 따라오는 걸 보여주시네요. 저도 그 변화의 용기를 배우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