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요맘때쯤 우리 조상들은 지천에 흔한 미꾸라지를 푹 고아 몸을 보했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미꾸라지로 끓인 추탕은 서민들에게 단백질과 칼슘을 손쉽게 보충해주는 고마운 보양식이었다. 미꾸라지를 주재료로 한 것은 타 지방의 추어탕과 같지만, 서울에서는 유독 추탕이라고 부르고 요리 방법도 많이 다르다. 이제 제대로 된 서울식 추탕 맛을 내는 곳이 드물어 점점 먹기 힘든 음식이 되고 있다.
서울 다동의 먹자골목엔 서울식 추탕으로 유명한 ‘용금옥’이 있다. 높은 빌딩과 대비되는 오래된 한옥으로, 점심시간마다 추탕을 찾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나무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군데군데 걸려 있는 빛바랜 사진들이 이 집의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마당과 방을 개조해 약 40여명이 앉을 수 있는 규모로, 아담하지만 회전율은 빠른 편이다.
오픈 주방에서 추탕 끓이는 얼큰한 냄새가 풍겨와 주문을 하기도 전에 군침을 삼키게 된다. 식사 메뉴는 오로지 추탕 한 가지이고 전류, 수육, 낙지데침 등 몇 가지 술안주 메뉴가 있다. 추탕을 주문하면 “통으로 드릴까요, 갈아서 드릴까요?” 묻는다. 미꾸라지를 갈아서 달라는 손님이 훨씬 많지만 서울식 추탕의 정석을 즐기고 싶다면 통으로 먹어 보길 추천한다.
이 집 추탕은 뚝배기에 바글바글 끓여 나온다. 송송 썬 대파와 풋고추를 얹고 국물을 휘 저어 한입 뜨면 잘 끓인 육개장 같은 깊은 맛이 느껴진다. 된장과 들깨를 푼 남원식이나 고추장 베이스의 원주식 같은 다른 지방의 추어탕과는 확연히 다르다. 국물이 전혀 텁텁하지 않고 입에 착착 붙는다고 할까. 얼큰한 육수 속엔 호박, 버섯 등 채소 건지가 푸짐하게 들어 있어 달큰한 향마저 감돈다. 통미꾸라지는 크기에 따라 아홉에서 열 마리 정도로 꽤 넉넉히 들어 있는데, 보기에는 좀 그렇지만 막상 입에 넣으면 살이 스르르 녹아버리고 뼈도 꼭꼭 씹어 먹을 수 있을 만큼 보들보들하다. 굳이 갈아서 먹을 필요가 없을 정도다. 곁들여 나오는 부드러운 식감의 노란 국수사리를 국물에 풀어 호로록 먹고, 밥 한 공기 말아 뚝딱 하면 속이 든든해지고 기운이 쑥쑥 난다. 이 맛에 이곳이 그 옛날 문인, 예술인, 정치가의 사랑방이 되지 않았나 싶다.
▲ 대표 신동민씨
그날 쓸 미꾸라지는 아침에 삶는다
용금옥은 1932년 서울 무교동에서 시작되었다. 손맛 좋기로 소문난 창업주 홍기녀씨(작고)는 서울식 추탕으로 메뉴를 걸었고, 소문난 맛집으로 키워냈다.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은 1960년대 중반으로 홍씨가 안집으로 사용하던 한옥을 식당으로 만들었다. 1982년 홍씨가 73세를 일기로 작고한 뒤 막내며느리인 한정자씨가 용금옥을 돌보다가 통인동으로 분가해 나가고 홍씨의 맏며느리 셋째 아들, 신동민(55)씨가 1997년부터 대를 이어 84년 된 용금옥의 맛을 지키고 있다. 신씨는 학창 시절 주말마다 할머니의 식당, 용금옥에서 추탕을 먹었다. 매주 토요일 10여명에 달하는 손자들을 불러 1000원짜리 신권으로 용돈을 나눠 주던 할머니 홍기녀씨는 통이 크고 손도 큰 여장부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의 손맛에 익숙해진 신씨는 “할머니가 내던 추탕의 맛을 가급적 그대로 이어나가고 싶어요”라면서 점심시간 내내 주방에서 불 앞을 지키며 손님상에 나갈 추탕을 직접 끓여낸다. 그 옛날 흔하던 자연산 미꾸라지로 끓인 것에 비할 순 없지만 신선한 재료와 청결한 관리만큼은 자신한다.
“재료가 신선하면 거기서 반은 먹고 가는 거죠.” 신씨는 직접 시장에 나가 미꾸라지부터 최상급으로 골라온다. 자연산을 구할 수 없어 아쉽지만, 중국산 치어를 가져와서 국내에서 키운 이식용 중 좋은 것을 고른다. 미리 넉넉히 삶아 냉동해 두고 사용하면 편하긴 하지만 맛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날 쓸 미꾸라지를 매일 아침 삶는다. 미꾸라지를 씻을 때 산것에 소금을 뿌리니, 호박잎으로 닦느니 말이 많지만 이 집에선 산 채로 일단 데치듯 삶은 다음 일일이 깨끗이 닦는다. 그 다음 통으로 나갈 미꾸라지는 따로 건져서 중간중간 찬물을 부어가며 먹기 좋게 부드러워질 때까지 한 시간 정도 삶아 준비한다.
육수는 여느 서울식 추탕집들과 달리 오로지 곱창만으로 맛을 낸다. 깨끗이 손질한 곱창에 조리용 술과 대파를 넣고 푹 우려낸다. 곱창 육수 솥은 일 년 열두 달 불이 꺼지지 않는다. 육수를 뜨고 남은 것에 다시 곱창과 물을 더해 붓고 고아내니, 오래전 육수가 조금씩 남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곱창 육수에 버섯과 애호박, 느타리버섯, 목이버섯, 두부, 유부, 간마늘 등을 넣고 고춧가루를 빨갛게 풀어 얼큰한 육개장처럼 끓이다가 미리 삶아 놓은 통미꾸라지를 살포시 넣는다. 갈아 놓은 미꾸라지는 채소와 함께 푹 끓여도 괜찮지만 통미꾸라지는 자칫 살이 으깨지기 쉽기 때문에 따로 삶아 넣는다.
광복 전부터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던 용금옥은 광복 이후에도 정치인, 예술인 등 수많은 유명 인사들의 단골집이 되었다. 이런 배경으로 1991년 ‘용금옥 시대’라는 책까지 출간되었다. 이 책은 항일투사이자 시인인 이용상 선생이 평생 용금옥을 출입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한 책인데, 용금옥을 출입하던 수주 변영로, 월탄 박종화 등 많은 문인과 예술가와 정치인에 관한 야사가 실려 있다.
용금옥의 일화는 수도 없지만, 1973년 남북조절위 제3차 회의에 참석한 북한의 박상철 부주석이 남쪽 대표단에 “용금옥은 아직 잘 있습니까?”라고 물어서 신문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서울 방문 시 이틀 연속 용금옥에 들러 추탕을 먹은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꼭 먹고 싶어해서 병원으로 포장해간 음식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우리나라 현대사와 함께 해온 노포(老鋪) 용금옥. 하지만 금이 솟아나는 곳이라는 상호처럼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다. 좁은 가게에 외상까지 많이 주니 무슨 큰돈을 벌었겠는가. 용금옥이라는 이름을 지은 홍씨의 남편은 계산대 옆에 있던 외상전표를 모두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고 유족들은 그 유언을 정확히 따라주어 단골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용금옥은 세월 따라 젊은이들, 특히 여성 손님들도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주중에는 근처 사무실 손님들로 빼곡하고 주말에는 가족 단위로 이곳의 추억을 찾아온다. 손님들이 원하지 않아 터를 옮기거나 넓히지도 못하고 있다.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쌓인 스물세 평(76㎡)의 공간에서 신동민씨는 자신을 그곳의 선장이라고 여기며, 아침 9시 반에 출근해 밤 10시까지 용금옥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