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8일 부활 제5주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4,1-12)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If you know me, then you will also know my Father
말씀의
초대
교회 공동체가 커지자 사도들은 공동체 안에서 봉사할 사람
일곱을 뽑는다. 그들은 모두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였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이 더욱 자라나면서 예루살렘 공동체가 점점
성장한다(제1독서). 교회의 기초와 사명에 대한 가르침이다. 주님께서는 살아 있는 돌이시다. 신앙인들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
쓰이도록 해야 하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어야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시기에 앞서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통해서만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 있으며, 당신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다고 선언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몇 달 전 벗들과 처음으로 대만을 여행하였습니다. 관광지
가운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이 '지우펀'이라는 옛 광산 마을입니다. 바다가 멋지게 내려다보이는 높은 지대에 옛 골목과 집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풍치가 그윽한 곳입니다. 전통 찻집에서 좋은 사람들과 우롱차를 마시며 창밖으로 바라본, 막 해가 질 무렵의 바다 경치는 절경이었습니다.
또한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면서 등이 하나씩 켜지는 골목길은 낭만적이면서도 정취가 배어 있었습니다. 제가 오래전부터 지우펀에 가고 싶었던 것은 대만의 역사 영화
'비정성시'(悲情城市)의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제주 4·3 사건'이나 '5·18 민주화 운동'의 비극과도 비교되는 대만의 '2·28
사태'를 주제로 한 이 영화를 1990년 극장에서 본 기억이 매우 큰 체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지우펀 마을은, 시대의 폭력으로 고통
받고 희생되었으나 이제 숭고한 희생자로 기억되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지금 그곳은 아름다운 관광지로, 느긋한 분위기의 차 한 잔이
어울리고 젊은이들의 즐거운 수다가 골목을 채우는 곳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여기저기서 '비정성시'란 현판을 보기도 합니다.
때가 차서 지난날의 비극의
흔적이 현재의 행복에 자리를 내놓는 것은 순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비극을 망각하고 왜곡하는 것이 지금 행복을 가져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일 것입니다. 기억의 맥박을 잃지 않는 것이 오히려 희생의 자리에서 생명과 번영을 길어 낼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이 폭력의 악순환이 아니라 화해와 평화의 열매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980년의 광주를 민족의 십자가로 기억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기억만이 화해와 생명을 가능하게 합니다. 기억하지 않는다고 비극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폭력이 순환할 수 있는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김준태 시인의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의 한 대목을 떠올리며 민족의 십자가 광주를 기억합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하느님 나라의 지도
-조재형
신부-
본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강론할
때, 강론대가 왼쪽에 있었기 때문에 주로 왼쪽을 보고 강론을 했습니다. 한 교우가 오른쪽도 보면서 강론을 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안 그러면
다른 성당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사제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용인 쪽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었습니다. 주인이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점심만 먹으러 갔는데 동동주를 공짜로 주셔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를 치료하러 치과에 가도, 머리를 손질하러 미장원에
가도, 약을 사러 약국에 가도 신자들이 하는 곳엘 가면 아주 친절하게 대해 줍니다.
신학생 면담을 하러 신학교에 갔습니다. 3학년인 신학생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신부님, 사제가 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사제 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건강입니다. 아무리 의욕이 앞서도 몸이 아프면 제대로 사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운동을 열심히 하고, 체력을 키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운동은 거의 체육학과 수준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지식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 철학, 성경,
심리학, 교리 교수법을 충실히 배우라고 했습니다. 군대 갔다 와서 좀 힘은 들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기도입니다.
정해진 기도 시간에 충실하고, 시간을 더 내서 따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건강해도, 지식이
뛰어나도 금세 지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적 독서를 하고, 가능하면 일기를 좀 쓰라고 했습니다. 건강과 지식은 눈에 보이는데 기도는 분심도
들고 어렵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일들에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돈 버는
일, 명예를 얻는 일, 권력을 얻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소중한 일에는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돈을 10년 동안 벌 수 있어도 돈 번 10년 동안에 잃어버린 건강은 다시 살 수 없는데도 우리는 건강보다 돈을 버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곤 합니다.
소중한 일이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가족을 돌보는 일,
건강을 돌보는 일, 이웃과 신뢰를 쌓는 일, 명상과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일 등이 있습니다. 바로 인생을 주도적으로 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주도적인 삶을 살면 여유가 생기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생기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끊임없이 주도적인 삶을 사셨다고
하겠습니다. 제자의 배반에도, 유다인들의 조롱에도, 하느님의 무심함까지도 예수님은 반사적 반응을 보이지 않고 주도적 삶을 사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하지만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너희에게
평화를 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과감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음식을 나누는 일, 재산을 관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욱 소중한 일을 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우리는
오직 기도와 전도하는 일에만 힘쓰겠습니다.” 그리고 재물과 음식을 나누는 일은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에게 맡기게 됩니다.”
그러자 하느님의 말씀은
널리 퍼졌고 예루살렘에서는 신도들의 수효가 부쩍 늘어났으며 수많은 사제도 예수를 믿게 됐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재물과 권력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래서 영원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지도’입니다. 지도에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의 길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어느 길이 가장 빠르고
손쉬운 길인지, 어느 곳에서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가게가 있는지, 어느 곳에서 피곤한 몸을 쉴 수 있는지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머무를 곳에 미리 가 볼 것이다. 그곳은
머무를 곳이 참으로 많다. 이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너희가 들어갈 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가 가야 할 하느님 나라의
지도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과 기적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표시된 지도입니다. 우리의 지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한 번뿐인 우리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최후만찬을 하신 다음, 그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한 후, 제자들이 예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지닌 의미를 명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죽음을 넘어 당신이 가신 저승으로 제자들을
데려가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듯이,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도 그분이 하신 실천을 하여 하느님 안에 함께
살아 있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떠나가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천 안에 부활하여,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시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 하신
말씀과 실천을 회상하면서 제자들이 도달한 결론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는 말씀도 같은 결론을 표현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하느님에 대해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제자들은
그분을 예언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예언자는 하느님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믿고, 또 가르친 하느님은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믿던 하느님과는 달랐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성전의 제사의례에 충실하여. 하느님의 분노를 사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하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을 당신 생명의 기원이라 믿었기에 예수님은 그분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실천을 위해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행세하던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도 예수님은
자비하신 하느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가슴에 품고, 하느님을 부르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신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분의 믿음이 옳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였기에, 인간의 죽이는 힘이 그분을
말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사실을 깨달은 초기 신앙인들은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들은 대로,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는 말도 남겼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하느님에게 도달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진리였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도 행복할 것을 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이나 권력을 좇아 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과 더불어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웃은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은 모두
같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가진 자녀들이었습니다. 형제자매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보여준 하느님의 진리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본 신앙인들이 그분의 입을 빌려 하는 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이 말씀하셨다는 그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고도 말합니다. 예수님은 짧은 기간 동안 이스라엘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치고, 가르친 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 신앙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세계로 나갑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살아서 하신 일을 더 넓은 여건에서 새롭게 실천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 안에 성령으로 살아 계신 예수님이 새로운 실천을 하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의 창의력을 존중하는 하느님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한 실천을 배워서, 자기들의 시대와 문화에 합당하게
실천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실천을 넘어서 모든 시대, 모든 문화권 안에 그분을 살아계시게 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더
큰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이 종교적 의무 수행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의무수행을 위한 미사, 의무수행을 위한 기도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창의력을 동원하여 자비로운
하느님의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며 삽니다. 예수님은 의무수행을 요구하는 율법과 제도는 철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떤
불행도 하느님이 주시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인간의 내면을 깊이 보았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만든 법과 제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봅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하였던 것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입니다. 그분은 그 하느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곧
당신 생명의 기원으로 믿었습니다. 법과 제도를 강요하며, 벌주는 하느님을 믿던 유대인들의 눈에 예수는 탈선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축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십니다. 사실 인간은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시선입니다. 인간을 불쌍히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진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또한 성숙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 이로운 것만 추구하지 않고,
이웃을 위해 자기가 손해도 보고, 희생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만을 위한 울타리 안에 갇혀서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고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기도하고 수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자비로운 눈으로 보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분의 시선과 그분의 마음이 자기 안에 스며들어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
전에 갑곶성지에 있을 때, 비가 엄청나게 왔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당의 지하에 물이 가득 차게 되었고, 또한 성지의 마당은 바닷물이 역류해서 온통 물바다가 되었지요. 쏟아지는 비가 참으로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가 온다고 해서 제가 이렇게 말했을까요?
“왜 이 비는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나를 힘들게
하는 이 비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또 이런 일도 생각납니다. 직원들과 함께 어디를 놀러갔다가
글쎄 새 똥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때 기분이 얼마나 안 좋았겠습니까? 즐거운 야유회를 간 것인데, 뜻하지 않게 하늘에서 새 똥을 맞았으니까요.
그때 혹시 제가 이렇게 말했을까요?
“이 새는 나한테 무슨 불만이 있다고 나를 향해 똥을 쌀 수
있지? 이 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저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고 또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날씨나 새를 제가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향해서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의 말을 종종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연이나 동물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서, 왜 사람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할까요? 사람은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는
사람을 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조정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람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을 만났는데, 이 분께서는 절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하시더군요. 그 이유를 물으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던 어머니가 교회를 가시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랍니다.
그렇게 열심히 당신을 섬기던 어머니를 데려가는 하느님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서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내가
조정할 수 있는 분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충분히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힘으로 우리를 조정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더 큰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조정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쫓아서 우리 역시 사랑의 삶을 살아야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길로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통해서만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이러한 분을 또한 이분이 사랑하는 나의 이웃들을 왜 부족하고 나약한 내 힘으로 조정하겠다는 욕심을
부릴까요?
이제는
조정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주님의 사랑에 온전히 내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있는 의탁과 굳은 믿음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시듯, 우리 역시 주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 밖에서 행복을 찾지만
이는 어리석은 짓이다. 행복은 자기 자신 안에 있고 매일 매일의 사고방식 속에서 나온다.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면 행복할
텐데!(‘그럼에도, 행복하라’ 중, 앤드류 매튜스)
행복하게 살고 있는 부부에 대해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다. 즉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의 배우자를 만나기 전에도 행복했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는 없다!
누군가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내 생각에는 아마도 영화나 노래에서 나온 것 같다.
영화나 노래의
주인공들은 흔히 이렇게 속삭인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나는 너무 외롭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어. 하지만 당신이 내 삶을 바꿔놨어!”
이런 것이 근거 없는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노래나 영화와는 다르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난 그저 불행하기만 했어. 하지만
당신을 만나고 나서 내 인생은 정말 비참해졌어!”
이래야 맞는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에게 끌리고,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에게 끌린다. 당신이라면 기분이 아주 좋은데 ‘우울해하고 있는 사람을 좀 만나봐야겠어’라고 생각하겠는가! 절대 그럴 리 없다! 당신은 우울한
사람 대신 또 다른 행복한 사람을 만나고 싶을 것이다. 유유상종이다. 그러니 긍정적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싶으면 당신이 먼저 웃고 다녀야
한다.
당신이 기분이
좋지 않거나 우울할 때에는 누구도 당신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 당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스스로 그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당신이 밝은 면을 보기 시작하면 주위에 행복한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만약 당신을 짜증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화를 내지 말고 다르게 대응해 보자. 굉장히 즐거워하거나 기뻐하는 것은 어떨까? 자신의 인생이나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정해진 규칙이 적으면 적을수록 행복해지기가 더 쉽다.
공감이 가는 글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행복하세요~~~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인영균신부- 여러분, 요즘 평안하십니까? 평범한 우리의 일상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큰 파장이 일어납니다.
호수처럼 잔잔하던 우리 삶에도,
무던하던 우리 삶에도 요즘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큰 바윗돌이 우리 삶에 떨어졌습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 운동이 우리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부터 지금까지 큰 파장이, 큰 파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세월호 참사 때문입니다.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것도 어린 학생들이 우리 눈 앞에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통해하고 있습니다.
벌써 부활 5주일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큰
파장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보통 사람이었던 사람들이 하느님을
굳건히 믿는 이들로 변했습니다.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부활은 어떻게 보면 제자들에게 ‘회심의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에 세월호 사건은 과연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뜻을
알려고 해야 합니다.
잔잔한 일상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큰 표징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삶, 우리 일상의 삶을 다시금 진지하게 돌아보게
합니다.
세월호의 아이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악마의 소리같은 선내
방송 때문에 모두 갇혀 깜깜한 물속에서 죽었습니다. 아니 집단 살해당했다는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생명은 변화이며 움직임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우리를 움직이지 않도록 마비시키는 악마의 소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최고다, 물질이 최고다는
소리입니다. 이전에 이런 광고가 유행했습니다. “부자되세요!!” 과연 우리는 이런 광고 소리에서 자유롭습니까? 많은 경우 돈을 하느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돈은 권력입니다. 돈은 힘입니다. 물신입니다. 물질이 신입니다.
사실 세월호의 아이들은 돈 때문에 살해당했습니다. 돈 앞에서 인간의 진실과 생명이 무시되는
현실입니다. 우리 사회는 ‘돈의 먹이사슬’에 얽매어 있습니다.
(청해진 회사.. 돈.. 선원들… 해경… 그 위로 위로… 정치자금… 뒷돈거래…)
오늘
제자들은 예수님께 두 가지를 묻습니다.
하나는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 모두의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다시금 생각하게 우리를 각성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은 우리가 걸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던 길을 멈추면 길도 없는 것입니다. 진리는 찾는 것입니다. 진리를 향한 여정이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움직이면 생명의
고동 소리를 느낍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방향도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침묵 시위를 하면서 이런 문구를 들었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이건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우리도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부활의 삶이 아니라 죽음의 삶입니다.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 하느님을 향하여 매일 매순간 움직입시다. 사람들이 물신을 섬길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하여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도록 합시다. 여기에는 용기와 믿음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회심의 길을 걷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며
이렇게 격려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예수님을 통하여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명하시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알맞은 사랑을 주셨고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은 이 세상에 국한 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생명에 이르는 길도 알려주시고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시간 주님을 차지하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성가 34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를 마음을 다해 부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고 선언하셨습니다. ‘길은 말씀으로 안내되고, 진리는 옳고
바른 이치이며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생명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진리 안에서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수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아버지와의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종점이 아니라 종점에 이르는 길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직접 보내주신 구원의 길잡이 이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걸으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누릴 천상복락의 행복을 예수님 안에서 찾고 있는지 생각해 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희생의 길이 남이 걸어야 할 길이 아니라 바로 내가
걸어야 할 길이라고 인식한다면 여기서부터 이미 천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예수님의 길이 나의 길임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진리 같은 분, 진리와
비슷한 분이 아니라 진리 자체 이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고(요한17,17)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요한1,14)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하여 전달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모든 것은 옳고 그릇됨이
없다는 것을 믿습니까? 예. 믿는다면 말씀을 듣고 믿고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면서 왜 따르지 않아요? 아마도 지금
당장은 화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이 더 매력적이고 마음을 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거짓이라면 그것은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반면 진리는 영원합니다. 진리는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입니다. 다수결에 의해 변할 것 같으면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깨우치는 진리, 사람이 알아야 하는 진리이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가
커감으로서 이런 저런 불평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과부들의 배급문제가 대두됩니다. 이때 사도들은“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하고 선언하고 공동체 안에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봉사자
일곱을 뽑았습니다. 사도들은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 ‘말씀과 기도’를 부여잡았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마음에 불평과 불만이 도사리고 있다면 진리의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을 차지하면 곧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계시하고 그 진리를 믿음으로써 받아들여 실현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요한복음17,3절에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으로 바뀌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곧 그 삶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사실 영생은 예수님과 함께 지금
여기서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영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6,51).하고 선언하셨습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의 빵이신 성체를 통하여 영적생명의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자주 모심으로써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영생을 지금 여기서 누리게 됨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시대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아니라‘돈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처럼 잘못 살고 있습니다. 물질을 다른 모든 것에 앞세우는 현실입니다. 돈만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돈이 되면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답게 살기를 포기합니다. 돈 때문에 가정이 파탄 나고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단절되며 형제간의 관계도 소원해 지고 이웃 간의 관계도 냉랭해집니다. 우리에게는 부모에 대한 효가 있었고, 형제간의 우애가 있었으며 이웃 간에
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생명보다 물질이 우선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부작용이 얼마나 큰 아픔을 주고 상처를
낳는지 ‘세월호’침몰사고를 통해서도 뼈저리게 느낍니다.
잃어버린 생명과 평화와 화목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이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실천하게 될 때 부모와 자녀, 형제간,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어렵고 힘에 겨울수록 진 말씀과 기도에 충실해야
합니다. 물질은 하느님을 섬기는 도구입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둘 때 물질도 빛을 발하게 됩니다.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겨 하느님을 등지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길을 다니다 보면 공사장이 많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보통 푯말이 붙게 됩니다. “공사 중! 통행에 불편을 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그런데 흔히 보게 되는 이 푯말 밑에는
낙서가 씌여집니다. 뭐라고 쓸까요? “잘 알면서 왜 그래.” 불편을 주는 것 알면서 왜 그러냐고요?
인생여정에서 잘 알지만 생각처럼 안
되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야말로 선한 결심을 해도 작심삼일이고 마음이 흔들비쭉입니다. 어떤 이는 성격의 문제로 인하여, 인간관계의 문제로
인하여 그리고 질병이나 경제적인 문제로, 술, 도박 등 잘못된 습관으로 인하여 고민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좋은 것 같은데 속을 보면 누구나
자기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들을 한 가지 이상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들로 좌절하고 낙담하며 슬퍼하고 힘에 겨워합니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그런 문제들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며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기회가 됩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면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은총이 됩니다.
자신의 지혜와 삶의 방법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게 되면 놀랍게도 주님은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주님은 우리의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주님을 믿고 믿는 대로 행하게 되면 “주님의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됩니다”(요한 14,12).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여정은 모두
공사 중입니다. 잘 알지만 안 되는 것들을 고치는 중입니다. 아무쪼록 그 공사가 마무리 될 때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하나가 되어 아버지 집에 거처할 수 있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통하여 진리요, 생명을 만나길 기도하며 최민순 신부님의 ‘오늘 나의 길에서’라는 글로 마감합니다.
“주여 오늘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고갯길을 올라가도록 힘을
주소서.
내가 가는 길에 부딪히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 가게
하소서.
넓은 길 편편한
길
그런 길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주와 함께
가도록
더욱 깊은 믿음을
주소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한14,12) -김대열신부-
우리가 믿음이라는 말을 쓸 때는 그
믿음에 상응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저 세례를 통해 얻은 신자라는
이름이 아닌,
구체적으로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길을
걷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여, 야고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2,17)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 (야고보서2,26)
이상의 말을 모르는
신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대로
흔들림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하고 용서하고 욕심, 욕망 버리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실수 없이 옳은 길만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아니 어느 누구도 그분의 뜻대로 완벽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쉽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 수 있다면, 성인, 성녀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겠지요.
행동이 따르지 않는
약한 믿음이라고 스스로를 너무 책망하지 마십시오.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당신이 가르쳐주신 길을 따르라 하신 것은, 삶은 끊임없는 자기 싸움과 함께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많은
넘어짐과 다시 일어섬의 경험 없이는 참된 뉘우침과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 안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죄를
인정하고 끝까지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하루 아침에 우리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루 아침에 완전한 회개도
불가능합니다. 하루 아침에
완전한 사랑을 만들고 지속할 수 없습니다. 하루 아침에 완전하고 변함없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삶 전체를 놓고
조금씩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깨닫고 실천으로 나아가는 길이 바로 신앙의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세 특성
-이수철신부-
.
오늘은 믿는 이들의 '교회 공동체의
세 특성'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 가정공동체에
모두 적용되는 특성입니다.
.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공동체를 떠난 고립단절의 상태가 바로
지옥입니다.
좋든 싫든 내 몸담고 있는 엄연한
현실의 공동체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최근 강론 대목도
생각납니다.
.
'하느님의 백성 안에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일 개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교회'인 '사람'들에
속해 있습니다.
교회 없는 그리스도인이란 단순한
관념(idealistic) 같은 것일 뿐입니다.
실제가 아닙니다.
홀로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홀로인 그리스도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하기 위해
하늘에서 떨어진 수퍼 히어로와 같이 분이 아니십니다.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를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
그렇습니다.
.
우리 모두 수도자이기 이전에 이미
성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 수도공동체는 성교회의
모델입니다.
수도공동체를 떠 받쳐 주는 삼대
지주가 기도와 일, 성독(Lectio Divina)입니다.
기도에는 신비가, 일에는 전문가,
성독에는 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
이 세 요소가 균형잡혀 있어
'함께 기도하는 전례공동체', '함께
일하는 공동체',
함께 주님과 깊은 친교를 나누는
'말씀 공동체'가 될 때 비로소 온전한 이상적
공동체입니다.
.
하느님 역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공동체 하느님이십니다.
감사하게도 오늘 말씀의 배치가 참
절묘하여
공동체의 세 특성과, 공동체 내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이 잘 드러납니다.
.
첫째, 우리 교회 공동체는 '함께
성부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전례공동체'입니다.
.
오늘 2독서, 베드로 1서의 말씀에서
착안했습니다.
우리 가톨릭의 영성은 전례공동체
영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여 우리 수도자들은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함께 성전에 모여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성무일도의 전례공동기도를 바칩니다.
.
더불어 위로 하느님과 소통이요 옆으로
형제들과의 소통으로
살아있는 온전한 성부 하느님의
공동체가 되고,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가가
되며 사제적 백성이 됩니다.
.
베드로의 말씀처럼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우리 모두 영적 집을 짓는 데 필요한 살아있는 돌이 되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됩니다.
.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말씀처럼
'우리는 선택된 겨레이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
바로 이게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으로서의 우리의 신원이요,
자랑스럽고 영예스러운 우리의 특권적
직무입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 거룩한 사제단이
되어
성부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미사를
봉헌하며 감격스럽게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
둘째, 우리 공동체는 '함께 성자
예수님과 깊은 친교를 나누는 말씀 공동체'입니다.
.
오늘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에서
착안했습니다.
말씀이신 성자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
오늘 복음의 장면을 보십시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
주님과의 대화를 통해 주님과의 친교를 깊이하는 제자들입니다.
.
똑같은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의 친교를 깊이하는
최고의 수행이 바로 말씀 공부인 성독(렉시오 디비나)입니다.
.
성독을 통해 복음의 제자들처럼 우리
모두 주님께 배우고 새로운 진리를 깨달아 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주님을 아는 '지식의 학자'가
아니라 가슴으로 주님을 아는 '사랑의 학자'입니다.
.
늘 읽어도 늘 새롭고 감사한 다음
복음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뵌 것이다.“
.
이런 주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셨으니
세상에 무엇이 부럽고 부족하겠습니까.
성자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성부
하느님 중심의 우리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
서로 마음이, 취향이, 성향이 맞아
일치의 공동체가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의 주님 방향이 같아
비로소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
우리 모두에게 하늘 아버지께 활짝
열린 '하늘 문'은,
아버지의 생명과 진리에로 인도하는
구원의 길,
'하늘 길'은 오직 하나,
우리 공동체의 중심인 성자
그리스도뿐입니다.
.
새삼 렉시오 디비나의 말씀 공부를
통해
말씀이신 성자 그리스도와 깊은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말씀의 공동체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
셋째, 우리 공동체는 '성령의
분별하에 함께 일하는 공동체'입니다.
.
오늘 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착안했습니다.
공동체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땅에서 하늘을 살아야 하는 우리
공동체입니다.
.
하느님과 기도가 우선이지만 일과 돈도
현실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입니다.
우리 삶은 하늘에서 뜬구름 잡는
영성이 아닙니다.
.
말씀은 물론이지만 빵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땅에서 하늘을 살아야 하는 우리
공동체입니다.
.
바로 이상과 현실, 기도와 일의
균형과 조화의 분별의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열두 사도의
분별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주신 분별의 지혜임이
분명합니다.
.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려 공동체의 분열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열두 사도의 대처가 참으로 지혜롭고
기민합니다.
.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
모두가 다 잘 할 수는 없습니다.
식탁 봉사와 기도와 말씀 봉사를 나눈
것은 얼마나 지혜로운 조치였는지요.
이 말에 온 공동체는 동의하였고
공동체 분열의 위기를 모면하게 됩니다.
함께 성령의 분별하에 일하는
공동체입니다.
.
일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일의 목적은 각자 맡은 일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
오늘 부활 제5주일, 부활하신 주님은
말씀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세 특성을 명쾌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1.성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거룩한 사제단으로서의 '전례기도 공동체'입니다.
2.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깊은 친교를 나누는 '말씀의 공동체'입니다.
3.성령의 분별하에 함께 '일하는
공동체'입니다.
.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
말씀 중심의 공동체, 함께 일하는
공동체로 잘 성장,
성숙되어 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시편33,22참조).
.
아멘.
< 내 마음의 평화에 대한
책임 >
-전삼용신부-
20년 전 ‘그렘린’이란 영화를 꽤 흥미롭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교훈도 꽤 있고 오늘
복음과도 잘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빌리는 말단
은행원입니다.
그의 아버지도 조금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발명품을 만들어내는 발명가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줄 성탄 선물을
찾다가 차이나타운 골동품 가게에 들러 아주 귀여운 모과이라는 동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사려고 하지만 주인은 팔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과이를 키우려면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에 팔 수
없습니다.”
모과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3가지를 꼭 지켜야 하는데,
빛을 보면 안
되고,
물을 주어도 안
되며,
12시 이후에는 절대 음식을 먹여서는
안 되는 조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모과이를
사게 됩니다.
너무나 귀엽고 순하며 이 세상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존재이기에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빌리는 이 선물을 받고 매우
기뻐합니다.
옆집에서 놀러 온 아이에게도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금기사항을 모르던 아이는
그만 물을 모과이 몸에 엎지르고 맙니다.
물이 쏟아진 모과이의 등에서는 또
다른 모과이들이 물방울 숫자만큼 튀어나옵니다.
처음 모과이와 생긴 것은 비슷하지만
조금은 거칠고 못돼서 몰래 자신들의 숙주인 모과이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악하기도 해서 빌리의 시계를
멈추어 놓아 12시 이후에 자신들에게 음식을 주게
만듭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빌리는
12시가 안 될 줄 알고 그 못된 모과이들에게 음식을
줍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음식을 받아먹고는
푸른 괴물인 그렘린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들은 힘도 세고 영악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고 심지어 살인까지 하기도 합니다.
마을은 온통 그렘린에 의해 아수라장이
됩니다.
이젠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빌리는 경찰에게 알리지만 경찰도 너무 강력해진 그렘린 군단을 처치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들의 번식력이 너무나 좋기
때문입니다.
그렘린들은 나중엔 풀장에 뛰어들어 그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고 이젠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마을이 지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대소동이 벌어졌지만 너무나도
약한 모과이와 빌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빌리가 자신이 벌여놓은 일을
자신이 수습하겠다고 결심하면서부터는 상황이 좀 바뀝니다.
그렇게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모과이는 빌리가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옆에서 도와주며 그들을 완전히 퇴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모과이와 빌리는 머리를 써서
그렘린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죽여 버리고,
마지막 남은 그렘린 대장을 죽이는데도
모과이가 커튼을 걷어 빛을 들어오게 함으로써 마지막 하나까지 처치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고 하시는데,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들은 모두
삼위일체에 관한 내용입니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겠다는 필립보의
질문에 예수님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느냐?”며 당신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고 하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분이 만들어놓으신
길,
즉 모범을 따르는 것이 생명에 이르는
진리라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분이 어떻게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하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지,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평화는 아무 일도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온 평화를 책임감 있게 유지해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계신 평화인
하느님 아버지를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바로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뜻 안에 있게 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곧 평화이시기에 그분을
당신 안에 고이 모시고 있는 것이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리스도를 당신 마음 안에
모시고 계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의 ‘종’으로써 그분의 뜻에 온전히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입니다.
아기에게 평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밖에는 없듯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수 있는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곧 우리 안에 계시며
평화과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 안에 평화를
주셨더라도 내가 그 평화를 유지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그 평화는 걷잡을 수 없는 전쟁으로
바뀌어버립니다.
내 안에 평화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아기를 잉태하면 그 아기는 아무 힘도
없지만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된다는 기쁨과 평화를 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평화는 내 안에서 완전히 나의 영향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아기를 잉태하면 그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마치 모과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지켜야 하는 규정들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들을 조금씩 소홀히 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신부님을 찾아 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마당엔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엔 수십 마리의 잉어가 놀고 있었습니다.
그 신부님들은 그 잉어들이 겨울을
어떻게 나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연못이 얼어버리면 먹이를 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물고기들은 겨울잠을 잔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깊은 곳에 모여서 몇 달 동안을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얼음이 녹을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봄이 와서 얼음이 녹으면
그들이 다시 나오는데 하도 먹지를 못하여 힘이 없어서 먹이를 던져줘도 제대로 입도 벌리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음식을 주던
그리스도 아닌 다른 것에 음식을 주던 두 가지 중 하나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른 것에 양식을 주면
줄수록 그것이 너무 강대해져서 평화는 그것들에 짓눌리게 됩니다.
평화를 유지하는 길은 나를 평화롭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물과 음식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물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고,
음식은 그 옳지 못한 것의 배를
불리는 것입니다.
일단 그것이 배불러지면 더 이상 내
안의 대소동은 우리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평화와
싸우는 내 안의 적이 생겨나지 않도록,
겨우내 음식을 먹지 못하여 음식을
주어도 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도록 만들어 놓아야 평화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란 말이
있습니다.
로마의 평화란
뜻인데,
기원전 1세기 말부터 약 200년간 지속된 로마의 평화시대를
의미합니다.
‘로마의
평화시대’란 적이 없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적은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있던 성벽도
헐어버렸습니다.
어떤 민족도 로마에 감히 도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로마의 힘이 강대했기 때문에 성벽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3세기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로마에 성을
쌓았습니다.
왜냐하면 로마가 서로 갈라지고
약해지면서 그 힘이 축소되는 동시에 이민족들이 호시탐탐 로마를 침공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도 항상 싸움이
있습니다.
평화가 우세할 수도 있고
걱정,
근심,
두려움,
긴장감이 더 우세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편에 양식을
주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결국 나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둘의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누군가 하나에게 전혀 양식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힘도 없어 평화를 깨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켜야만 하는 내 안의
그리스도.
그분의 뜻만 따라서 그분이 내 안의
왕으로 굳건하게 계신다면 담을 쌓을 필요도 없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 평화를 얻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그 양식이 오로지
그분 뜻을 따르는 것에만 사용되지 않고 다른 세력의 힘을 키워주는 데에 사용된다면 다시 전쟁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평화를 유지하는 법은 절대 그리스도의
뜻 아닌 것에 양식을 대어주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유지하고 키워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입니다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요한 복음 13-17장은 예수님이
지상을 떠나기 직전 제자들에게 하직하는 말씀을 담고 있어서 흔히 ‘고별설교’로 불립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비장미 넘치는
말씀을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토마스와 필립보가 질문을 하고 예수님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학 양식으로 볼 때
'대담'(對談)이라 부르며, 적의를 가진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논쟁'(論爭)과 구별됩니다.
요한
14,1-3에서는 예수님이 먼저 가서 제자들이 장차 머물 자리를 마련하고 제자들을 부르러 오겠다는 말씀을 합니다. 요한 복음의 대표적인 사상을
흔히 '현재적인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종말은 미래에 이루어질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의 결단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면 하느님의 구원도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1-3절의 말씀은
요한복음에서도 특이하게 '미래적인 종말'을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곧 밝혀집니다. 4-7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자신을 통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대화가 이루어지던 바로 그 시점에서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알고, 마음을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역시 현재의 결단(4-7절)이 미래 사건(1-3절)의 좌표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곧 유일한 구원의 길일 수
있겠습니까? 8-12절에 이제까지 누구도 들어보지 못했던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필립보가 예수님의 "나를 알면 나의 아버지도 알 것입니다"
라는 자신감 넘친 말씀에 고무되어 하느님을 한 번 보여 달라고 청합니다. 필립보는 아마 '하느님을 본 사람은 누구라도 당장 그 자리에서
죽는다'는 구약성서의 보도를 잠시 잊었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을 보았으면 하느님을 본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곧 하느님이라는
엄청난 발언을 합니다. 세상에, 자기가 하느님이라니요? 유다인들이 악에 받쳐 펄펄 뛰었을 겁니다.
사도 6,1-7은 예루살렘에서 생긴 최초의 그리스도 교회에서
일어났던 한 가지 사건을 다룹니다. 그리스 말을 쓰는 과부들이 박대를 당했다는 내용입니다. 그 일을 계기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
봉사자들(부제들)을 세우게 됩니다. 그들의 활약에 힘입어 예루살렘 모교회는 더욱 커집니다. 1베드 2,4-9에서는 '돌'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처지를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석공이 쓸모가 없어 버리는 돌처럼 가치 없어 보이지만 실은 가장 중요한 모퉁이 돌이 된다고 합니다.
이는 시편 118,22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상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두 본문은 공통점을 가집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입니다.
이는 요한 복음 1장 로고스 찬가(1,1-18)에서부터 나오는 정체 고백으로 요한 복음을 관통하는 사상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자신이시니 따로
하느님을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14,8-12).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 자신이시니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은 구원이요 그분을 거부하는 것은
심판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가 아닌가에 따라 그 자리에서 구원과 심판이 결정나는 셈입니다. 먼 장래에 온다는 종말의 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어쩐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종말이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삶의 승부를 걸어야겠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묘미는 아마 거기에 있을 겁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한분도
신부-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 안 된다.'
'어른들이 숟가락 들기 전에 먼저 숟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 등등 어렸을 때부터 가정교육을 통해 배운 여러 가지 예절과 가르침의
말들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고리타분하고 쓸데없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자녀들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기 힘듭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맞고 부모님들은 틀리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난 후에
마음속으로부터 어렸을 때 들었던 그 말을 공감하고 깨닫게 됩니다. "아! 그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미 수 천년
전부터 세상살이에 회자되어 왔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혹은 은연중에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나는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고 "나를 믿으면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귀가 닳도록 말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그말을 온전히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필립보는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 말씀을 통하여 참된 자녀로서의 삶의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보다 그저 세상적인 것을 먼저 추구하고
세상 말을 듣고 살아갑니다. 그게 지금 현실에서는 더 맞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녀가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행적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어쩌면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을 뵈올 때에야 비로소 회개하고 믿음을 제대로 갖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지금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 버린 후에야 하느님을 찾고 세상에만 매달려 살았다는 것을 후회합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참된 자녀로서 당신의 말씀에 순명 하며 살아가길 그토록 원하고 바라십니다. 모두가 다 잘되라고, 잘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역사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선택된 민족'이며 '왕의 사제들'(제2독서)인 우리는 '지금' '여기서' 참된 믿음과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 듣지 못하고 하느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하지만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참된 복음 말씀을 지켜
나간다면 먼 훗날 우리가 하느님 앞에 훌륭한 모습으로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건장하고 훌륭한 성인(成人)이 되어 있는 자녀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살아 있는 돌
-이용화
신부-
오늘은 부활 제5주일로 성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계시는 예수님과, 그리스도의 삶을 증거하는 사도들을 통하여 참다운 스승(사부)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요즘
우리가 염려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참다운 스승들이 이 땅에서 점점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참다운 스승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미래에
희망의 빛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철학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는 이 시대에 참다운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일침을 가한다.
복음에서
복음사가인 요한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작별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불안과 긴장이 감도는 저녁 만찬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마시오!”라는 위로의 말씀으로 말문을 여신다. 이 말씀에서 제자들을 보살피고 걱정하시는 참된 스승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그분은 의구심에 있는 토마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기신다. 이 말씀의 요지는 당신 자신은
‘생명(生命)’으로 이끄시는 ‘진리(眞理)’그 자체이며,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이처럼
믿는 이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끈다는 것은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이심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의구심을 가지는 제자들에게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참된 스승은 말과 행실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독서는 잘못된
식량배급으로 인해 불만이 고조된 초기 공동체의 모습과 그 안에서 지혜롭게 활동하시는 사도들의 활동을 묘사하고 있다. 사도들은 식량배급만을 전담할
일곱 사람을 선발하여 문제를 지혜롭게 처신하고,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전파에 전념하신다. 제2독서는 서간으로 새 영세자들에게 준 교훈과 권고의
말씀이다. 베드로는 주님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귀한 돌이므로, 영세를 받은 여러분은 신령한 집(교회)에 쓰일 산 돌과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사제가 되라고 권고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남에게서 ‘스승’ 소리 듣기를 좋아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인간적으로 스승이 될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교만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참된 스승은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는 ‘양(量)’에 있지 않고 알고 있는 지식을 얼마나 많이 실천 하냐는 ‘질(質)’에 있다. 우리의 주변에서
이러한 참된 스승들을 찾아 볼 수 있을까? 참된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삶에 매료되어 그분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나의 작은 스승이며
그리스도들이다. 참된 스승이신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모습을 닮은 작은 그리스도, 살아있는 돌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사는 삶, 하느님의
나라
-김태윤 신부-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며 건강한 삶,
영원한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진리자체이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요,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입니다.”(사목헌장
39항)
이 나라를
차지하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그리고
예수님은 이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평화를 빌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용서의 열매요, 사랑의 승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회학자가 95세
이상된 노인 50명을 대상으로 조사연구를 했습니다.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가지 대답
중에서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였습니다.
첫째, 늘 반성하며 살겠다.
둘째, 좀 더 모험을
하겠다.
셋째, 내가
죽은 뒤에도 남을 만한 일을 하겠다.
한 평생의 삶을 산 인생의 막바지에 선 노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이기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분주하게 정신없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생각하는 삶을 살겠다고 한 대답이나, 안전하긴 했지만 도전하지
못했던 삶을 돌아보며 모험적인 삶을 살겠다고 한 대답들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또한 자신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좁은 삶을
돌아보며, 죽은 뒤에도 모두에게 의미있게 남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대답 모두가 소중한 울림으로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들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삶, 사랑으로 이어지는 삶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반추하는 삶이요, 도전하는 삶입니다.
신앙자체가 도전이기도하고 모험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목숨까지 바친 사랑의 삶으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요,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요한 11,25) 알렐루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백승옥 신부-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믿는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또
그리스도이시라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실 약속된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의심 없이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씀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눈으로 보면 믿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당시에도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날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 때 베드로 사도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이런 확신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믿음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믿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의 질문이나 필립보가 예수님께 질문한 것과 같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답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 봅시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접 주님을 뵈올 수는 없지만
그분의 행적은 예수님이 분명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합니다. 사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는 사람 중에도 주님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행적만을 살펴보아도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은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믿고 실천할 때 깊어집니다. 세속에 대한 열정보다 주님의 말씀에 더욱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드러나는 생명과 진리의
길
-함영권 신부-
이제 봄은 가고 여름이 오고 있고, 부활 축제도 지나가고
연중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절과 축제가 가고 오는 까닭은 세월에 따라 한 켜씩 더해 가는 인생이라는 우리 삶의 이야기를 해마다 다시
찾아오는 시절과 축제라는 거울에 비춰서 돌아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때에 맞추어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 함은 삶 안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나
아닌 다른 것과의 만남의 의미를 들여다보는 일일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우리 인간의 만남에서 드러나는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세상의 질서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때에 맞추어 가만히 들여다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를 가능케 하는 그 ‘무엇’을 세상의 원리라고
부르고, 원리를 이해하는 방식을 ‘가치’ 라고 부릅니다. 가치가 세상의 원리를 따라서 가는 것을 세상의 법칙, 또는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만남이라는 말 안에 함축됩니다. 세상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만나고 우리가 그 세상을 찾아가서 만나는 것이 그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세상을 만나는 과정을 우리는 삶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을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 세상의 원리이시고,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심으로 인간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즉, 우리 앞에
드러난 세상의 원리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은 생명이라는 원리로써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생명의 원리를 자신의 삶 안에서 펼쳐
보이심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과 하느님의 뜻을 묻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진리이며, 생명이며, 길” 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가 우리 삶 안에서 지켜내고 드러내야 할 가치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하는 가치는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 안에서 드러낼 때만 지켜집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만남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하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구현할 때에만 가능한 조건부적인 만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길
-김규엽 신부-
세상에는 길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대문을 나서면
골목길이 있고, 차들이 다니는 도로가 있습니다. 산에는 등산객들을 맞이하는 산길이 있고, 들에도 들길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길도 있습니다. 바다에는 바다 사람들이 아는 뱃길이 있고, 하늘에는 국제 항공법으로 정한
비행기들의 항로가 있습니다.
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길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의 삶의 길입니다. 인간의 삶의 역사를 '여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인생행로'라고도 합니다. 이 길은 한 인간의 삶의 행동
양식과 사고 양식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삶의 길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체적인 모양새가 다른 것처럼 각자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은 다
다릅니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다르기에 사회적으로 가는 길도 모두 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의사로서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고, 평범한
샐러리맨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도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각자의 길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삶으로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빛나는
얼굴을 마주 대하기 위해 예수님의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길을 가고, 불교도들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각자의 불성을 추구하는 길을 갑니다.
그 외의 종교들도 각자의 종교적 모토를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지표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사랑의 삶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구나'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는 사랑의 삶을 실천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은은하게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타인들에게 삶의 길을
제시해 줄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거쳐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들도 하느님께로 이끌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본향을 주신
하느님
-박영수 신부-
약속을 하지 않아도 가끔씩 이런 일, 저런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분들과 같이
행구동에 있는 노천 카페에 300원 짜리 커피를 마시러 간적이 있습니다. 초봄의 날씨라 조금은 쌀쌀했는데 많은 분들이 점심을 먹고 와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교회 및 신앙생활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 한 분이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제게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맙고 가슴이 벅찬지를 모릅니다. 가끔씩 저는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제가 교회
밖에 있다면 어떠한 생각과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면 두렵기까지 합니다" 가끔 그분의 신앙고백을 생각하며 하느님을 믿는 한 신자이며
동시에 한 사제로서의 삶을 묵상하곤 합니다.
노인분들 말씀 중에 "에이구, 사는게 죄죠 뭐"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젊어서 무엇인가를 추구하면서 긴 시간을 보내 왔지만 연세가 드시고 보니 추구하였던 것에 대한 무의미를 깨달아 하시는 말씀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아직은 젊어서 깨달은 말은 감히 못하고 "사는 것 모든 것이 기적이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기적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어떤 현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심없이 산과 들을 보면 생성소멸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 자연속에 어우러진 우리의 삶도 기적입니다. 누가 우리 한명 한명을 이렇게 태어나 이러 저러한 모습으로 여기 있게 하는 것일까요?
모든 것은 갈 곳이
있습니다. 창조된 모든 것 중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요. 동해바다의 물도 밤 낮으로 바뀌고, 뜨고 지는 해와 달도 언젠가는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토마는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하며 종착지를 모르는 인간의 불안을
고백합니다. 갈곳은 있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몰라 불안해 하던 인간의 역사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시며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느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으로
인해 우리의 운명은 새로운 에덴동산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희망으로 채워줍니다. 우리의 본향이 부활이기에 말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