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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2-34 때에
아브라함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방 지도자들에게도 알려졌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 왕과 일대일의 우호조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렇게 그의 생애 말년에 어느 정도 정착하여 살게되는데 그가 일생을 통하여 해온 바 대로 여호와를 섬기며 예배드리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였습니다.
1. 본문 22절 앞부분은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입니다.
1) 모세는 이 언약이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체결되었다는 것을 기술함으로 여러 가지로 어수선했던 동요가 지나간 후에 이 거룩한 사람에게 마침내 안일한 기간이 허용되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방랑자로 생활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일정한 거처도 없이 이리 저리로 이사하면서 60년 동안이나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가 거의 죽음에 이르는 시기까지 그렇게 우거하는 자로서 지내게 하셨지만 아비멜렉 왕 밑에서는 그에게 조용한 정착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모세가 제시하려고 의도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지금까지 지내온 것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상당히 긴 기간동안 어떻게 한 곳을 그렇게 점유할 수가 있었는가 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적인 상황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떠나보낸 직후에 그렇게 평온한 정착이 허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런 큰 문제를 해결하느라고 겪은 그에게 위로가 제공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겪었던 불편한 생활에서 긴장을 풀고 조금은 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더욱 더 용기를 얻고 자기 어린 아들 이삭을 교육시키는 데에 더욱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
2) 그러나 그 언약은 어느 면에서나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간접적인 방법으로 시련을 겪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지역에는 자신이 싫어하며 뜻이 맞지 않은 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왕은 공개적으로 아브라함에 대하여 품고 있던 의심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의 왕이 자진하여 기꺼이 나그네를 찾아가서 그와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은 가장 높은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대두되는 것은 다른 동맹국들 가운데서 체결되었던 관례대로 그들이 공정하고 동등한 조건으로 이 언약이 체결되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왕에게 조금도 구애됨이 없이 마땅한 경의를 표했다는 데에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왕이 아브라함과 상의하려고 그 자신의 위험을 조금이라도 격하시키려고 했다는 말은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무엇을 하려고 의도했는가? 실제로 그가 아브라함에게 그런 자유로운 거처를 허락하면서도 그를 맹세로 왕 자신에게 구속시켜 놓고 있으려는 심산이었습니다.
2. 본문 22절 뒷부분은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입니다.
아비멜렉은 다정스럽고 온화한 말로 대화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혀 아브라함을 비난하지도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해야 될 의무를 아브라함에게 소홀히 했던 것에 대해서도 전혀 불평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진지하게 그와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원한다는 말 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아브라함을 경계하여야 하겠다는 마음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가 이 떠돌이 나그네에 대하여 언제 이런 의심을 품게 되었으며 두려움을 갖게 되었는가? 입니다. 둘째로는 이와 같이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을 어째서 의심하며 두려워하게 되었는가? 입니다. 먼저 이방인들은 이유 없이 걱정하며 심지어 평온한 시절에도 놀란다는 점입니다. 그 다음으로 아브라함이 경의를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그의 집에 거느리고 있는 종들의 수효만 해도 웬만한 민족만큼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덕성이 그토록 큰 위엄을 풍기게 했을 것이라는 점이 있습니다. 그 사실에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이 이 일에 대하여 자기 자신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건을 해결할 방법을 가장 잘 아시는 여호와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유도하여 그분의 종이 쉴 곳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의 은사가 우리를 대항하고 있는 이 세상 사람의 적개심을 자극시켜서 우리 자신들에게 그런 겸허함으로 대하게 하시면 그들이 우리에게서 잘못된 점을 찾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3. 본문 23절은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만약 네가 거짓말하면’ 이라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인들 중에는 말의 불완전한 형식이 맹세를 할 때에 흔히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은 ‘만약 네가 너에게 한 약속을 어기면 우리는 우리사이에 하나님이 심판자로 좌정하시어서 약속을 어긴 죄에 대하여 그분이 직접 보복해 주시도록 부른다’ 는 말입니다. 그러나 ‘거짓말하다’는 말은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공정하지 않게 그리고 기만적으로 거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그 말을 마치 ‘너는 딴 마음을 품고 나와 내 자손들에게 절대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는 의미로 언급되어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또한 그 자신의 친절한 행동들을 나열하여 더욱 더 효과적으로 아브라함이 좋은 신의를 가지고 실천하도록 고무시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기서 인간적으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아비멜렉은 만약 그가 이미 받은 혜택을 다시 보답하여 갚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배은망덕한 행위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헷섿) 은 누구에게든지 온순하게 또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동정을 간청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왕적인 권위를 주장하려고 왔기 때문입니다.
4. 본문 24절은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입니다.
비록 그는 보다 강력하며 정당한 주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선하고 온후한 사람의 의무로서 해야 될 것을 전혀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모든 의무에 대하여 언제나 준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 안에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올바른 것이 요구될 때 그들이 그것을 행하는 일을 주저하거나 시무룩하게 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언약들이 하나님의 성스러운 이름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아야 되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맹세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꺼이 자신을 그분의 소명의 법칙들에 복종시키고 있습니다.
5. 본문 25-26절은
“(25)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26)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입니다.
이 불평이 정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그가 피해를 받았다면 왜 그가 일반적인 치료방법에 의존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왕이 인정 있는 사람이며 자기 자신을 정중하게 그리고 존경하면서 대해 주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가 왕이 자기 권리를 정당하게 옹호해 줄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가 왕에게 문제를 야기 시키는 것보다는 이미 받은 피해를 묵살하고 넘어 가려고 하려면 지금에 와서 마치 왕이 그것에 대한 죄를 지은 자처럼 왕에게 그 잘못의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왕의 지나친 관용으로 말미암아 그 피해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알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태도와 의향에서 그가 원인 없이 그를 충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추론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서 거룩한 사람의 겸손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노력과 근면으로 발견한 우물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피해의 막대함이 그가 투쟁을 하면 그가 정당화 시켰을 상황에서도 전혀 투쟁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그곳의 정착인들이 아브라함의 생명에 대하여 노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가 그토록 극심한 피해를 끈질기게 견디었지만 전혀 뜻밖에도 자기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는 상황이 제공되자 그는 장차 있을지 모르는 공격에 대비하여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아브라함이 조금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조금 이완되자마자 여호와께서는 다시 그를 참으로 혹독하게 단련시키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가 물을 구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은 그 지역에서 그렇게 가벼운 시련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대중적인 자산인 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직접 팠던 우물물을 인하여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적잖은 시련이었습니다.
6. 본문27절은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입니다.
맺어진 언약이 일반적으로 평등한 자들 사이에서 체결된 것과는 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지위를 생각하고 복종하는 표로 자기 양떼에서 선물을 취해서 그랄 왕에게 바칩니다. 그것을 라틴 사람들은 세금이나 공물을 바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하며 히브리인들은 선물을 바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강력한 압력을 받기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왕이 자기 권위로 그를 강제로 하게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진하여 경의를 표하면서 그곳을 통치할 자인 그에게 선수(先手)를 쓰고 있습니다.
권력을 행사해 보고자 하는 욕망이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지배적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아브라함의 겸허한 행동에 보다 더 찬사를 보내야 마땅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속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절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명령을 받지 않고도 자기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마땅히 해야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자기 능력껏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문제가 야기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의 통치권이 하나님에 의하여 자기에게 위임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다른 사람을 주로 인정하고 복종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그곳을 소유하는 시기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 일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그가 순례자에 지나지 않지만 단지 기대 속에는 그곳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약속된 것이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때가 오기까지는 그곳의 정착지를 값을 치르고 정당하게 구입했습니다.
바로 그 후에도 그는 자기 아내의 무덤에 대한 값을 지불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그 땅을 합법적으로 다스리는 자리에 세움을 받기 전에는 그곳 사람들과 조약을 체결하는 일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의 허락을 받거나 값을 치르고 그들 가운데서 거할 수 있었습니다.
7. 본문 28-30절은
“(28)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언약의 다른 주요한 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브라함이 우물물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게 하려고 우물에 관하여 그 자신을 위한 조항을 피력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는 가운데 양 일곱 마리를 놓고 명예로운 선물을 받고 왕이 우물파는 것을 인정하고 결재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그곳 주민들이 개인이나 나그네가 우물을 파는 것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를 야기시킬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왕의 공식적인 권위로 그 일에 관여하고 있으니 만큼 아브라함의 평화는 보장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8. 본문 31-32절은
“(31)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32)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입니다.
모세는 이미 한 번 그곳을 이 이름으로 불렀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예변법(豫辨法)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름이 주어진 때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려졌는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두 사람이 거기서 맹세했기 때문에 불리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을 ‘맹세의 우물’ 이라고 번역합니다.모세는 분명하게 그 말을 맹세하는 점에서 뽑아 내오고 있습니다. 사실상 모세는 그 말의 어근을 ‘우물’ 에다 국한시키지 않고 오직 그 언약 전체를 뜻하고 있습니다.
9. 본문 33절은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입니다.
여기서는 언약이 맺어진 후에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누렸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편안한 생활이 허락되었다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나무를 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안정되고 조용한 정착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전에 그가 나무를 심었다는 내용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랄 왕에게 안정될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개선된 조건 하에서 생활을 누리고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는 말은 즉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예배를 새롭게 설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자기 종을 줄곧 천신만고의 험난한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그의 말년에 조금 휴식을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그분의 백성을 그렇게 다루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여러 가지 험난한 역경으로 시달림을 당하고 나면 마침내 자유롭게 숨을 내쉴 수 있는 상황을 그들에게 허락하십니다. 개선되고 정착된 조건 그것이 하나님을 불렀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듯이 보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든지 이런 종교적인 의무를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참된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공언하는 데에 어떤 위험으로도 절대로 동요되지 않고 해냈습니다.
10. 본문 34절은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입니다.
1)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 때문에 그곳 주민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거주하는 데에 그의 편의가 증가됨에 따라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공공연히 하는데 더욱 더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욱이 왕의 보호하에서 더 안전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생활 역시 하나님에게서 받았다는 사실을 사람들 앞에서 터놓고 간증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동일한 이유 때문에 여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주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는 이 세상 왕을 신뢰하지 않고 또 어떤 새로운 언약에 몰두하여 매달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 것에 의지하면 영생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에서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제유법(提喩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간구’라고 이름을 달리하고 있는 이유는 그 말의 형태가 통합적인 성격을 띄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일상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2) 끝으로 아브라함이 전에는 전혀 안정된 거주를 해보지 못했던 땅인 ‘여기 불레셋 족속의 땅에서 우거하게 되었다’ 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사실에서 우리는 그의 마음이 편안한 이곳의 상태에 아주 고정되었다 할지라도 이전에 하나님께서 직접 400년의 기한이 차기까지는 그의 후손과 함께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아예 생각지도 않고 그저 육신의 안일한 생활에만 집착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의 예배와 일상생활이 여전히 그 지역 주민들과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그래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삶을 영위했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