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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나타난 종말론
이재현목사
1 예루살렘의 최후 멸망:마24:15-21,29-31;막13:14-19,24-27;눅21:5-38
감람산 강화에 관하여 종말론적 관점을 배격하고, 교회시대 환난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일반적으로 무천년설이 취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1차적으로는 과거 예루살렘 파괴를 2차적으로는 미래에 있을 예루살렘 최후 멸망과 지구 멸망에 대한 ‘예언이중계시’예언의 복합성취1)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사건에 대한 바른 해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누가복음 19장 41-44절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AD 70년 로마의 디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79-812)에 의해 파괴될 예루살렘 멸망 예언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말씀이 또 기록되어있다. 누가복음 21장 20-24절 “20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1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22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23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이 사건은 언제에 있을 예언인가? 이 또한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인가? 그렇다면 누가복음에 동일 사건을 두 번 예언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과연 그러한가?
공생애 마지막 “1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하셨다(마24:1-2). 저 웅장하고 화려하고 압도하는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살상할 수도 없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조용히 와서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질문했고, 예수님이 답변을 하신 것이다(마24:3). 무천년주의자들은 현재의 기준에서, 과거에 있었던 사건으로만 주석하지, 미래에 있을 사건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종말에 대한 계시를 간과하고, 무시하고, 수장하고 있다.
누가복음 19장 43절이 AD 70년 티투스에 의한 예루살렘 초토화 사건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21장 20절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는, 다니엘 9장 26절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할 일’과 연결된 계시로서, 종말에 한 왕의 군대(적그리스도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할 사건에 대한 예언이며,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과도 동일한 사건이다(단9:27;마24:15). 23절에 ‘그 날에는 땅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로다’고 하셨다. 티투스에 의해 침공을 당하여 유대인들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기는 했지만, ‘(온)땅에 큰 환난’이 겸하여 있었던 일은 결코 아니다. 종말에 적그리스도에 의해 유대인들이 당할 핍박이면서, 그 시기에 있을 전 세계적인 환난 또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24절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는 말씀에서, ‘이방인’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혼선을 갖게 된다. 예루살렘은 현재 누가 점유하고 있는 것인가? 아직까지 이방인들의 점령 지역으로 남아 있는가? 1967년 6일 전쟁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예루살렘은 회복되었다. 이방인의 때가 지났는데도, 주님의 재림은 아직 없다.3) 왜 그런 것인가? ‘이방인의 때’에서 ‘이방인’은 계시록에 종말에 등장할 적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고, ‘때’란 그 자의 군대(한 왕의 백성)에 의해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 잡혀’가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슥14:2;계11:2). 적그리스도에 의해 ‘거룩한 성’이 7년환난 중 후 3년 반인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마흔 두 달 기간 점령을 당하게 된다(단7:25;계11:2;살후2:4). 이같은 지배 기간인 ‘이방인의 때’가 지나기까지 예루살렘은 이방인(적그리스도)에게 짓밟히게 된다. 종말에 있을 사건인 것이다.
이와 같이 누가복음 19장 43절은 과거 로마의 디투스가 행한 것이고, 21장 24절은 미래 ‘이방인’적그리스도를 상징한 표현, ‘한 왕’적그리스도를 지칭한 표현이 벌일 패악인 것이다(단9:26;계11:2). 그럼에도 누가복음 19장 43절과 21장 20절의 사건을 과거에 있던 사건으로 보려고하는 것은, 이 구절의 시점을 종말로 보지 않기 때문이고, 예루살렘에 세워질 제3성전에 대해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며, 적그리스도를 단일인격체로 보지 않고 사상상징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말에 적그리스도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한 것은, 제3성전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계11:2.참고/단9:27).
이러한 상황이하는 유추이다은 종말에 적그리스도가 최종적으로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게 될 것임을 알게 한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적그리스도는 그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으로 선포할 것이라고 하였다(단7:8,11:36;살후2:4;계13:5). 그렇기에 적그리스도는 예수님 재림 직전에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이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에는 “20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1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22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눅21:20-22). 적그리스도에 의한 예루살렘의 핍박을 예언한 것이다. 스가랴는 “1여호와의 날재림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2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슥14:1-2). 계시록에는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이방인’인 예루살렘 성전을 상징하는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후3년반 동안 짓밟으리라’고 하였다(계11:2).
결코 AD 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Titus에 의해 성취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초토화 시킨 예언이 아니다. AD 135년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Publius A. Hadrianus,76-138에 의한 유대인들 영구 추방에 대한 예언도 아니다.4) 스가랴 14장 1절 예언 초두에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고 하였다.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침공한 날은 ‘여호와의 날’이 아니다. 구약에 있어서 ‘여호와의 날’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누가복음 21장 35절에도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하였다. 예루살렘에 국한되지 않고, 온 인류가 종말재림에 당할 사건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스가랴에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재림의 날 임을 명백하게 밝혀 주고 있다(슥14:4). 사도행전에도, 이 천 여 년 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오백여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신 장소가 ‘감람원’ 즉 감람산이라고 말씀하고 있다(행1:11-12.참고/참고/고전15:6). 이곳에서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였다. 예수님인 재림할 때는 온 인류가 보도록 오신다(계1:7). 그러나 그의 발은 이스라엘 감람산에 임하신다. 그 이유는 이천 여 년 전 이스라엘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선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격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방인이 구원받는 교회시대이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재림이 자신들의 땅에 임하심을 보고, 그제야 메시아임을 믿게 될 것이다. 그렇기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발이 이스라엘 감람산에 하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누가복음 21장 24절에 ‘이방에 사로 잡혀 가겠고’, 스가랴 14장 2절에는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고 하셨다. 이 전쟁은 과거 로마제국이 아니다. 로마는 ‘이방 나라들을’ 모은 군대가 아니다. 종말의 때 예루살렘을 침공하는 세력에 대해 에스겔에는 ‘북쪽 끝에서 많은 백성 곧 말을 탄 큰 무리와 능한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략할 ‘마곡과 곡’의 군대도 아니다(겔38:2,15). 이들은 ‘북쪽 끝’이라고 예언되어 있는 ‘큰 무리와 능한 군대’를 의미하는 것이지, ‘이방 나라들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겔38:15). ‘이방 나라들’은 여러 나라의 연합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적그리스도를 돕는 ‘열 뿔’에 속한 군대들로 적그리스도 제국을 의미한다(계17:12). 이 ‘열 뿔’이 아마겟돈에서 예수님에 대적할 일에 대해 요한계시록에 ‘그들열 뿔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두 증인’ 순교자들로 ‘하늘 군대’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고 하였다(계17:14). 적그리스도 ‘짐승’을 따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로 이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예수님)와 그의 군대하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계19:19). 이들이 이방나라의 군대들이다.
복음서 감람산 강화 예루살렘 멸망은 주 재림에 있을 사건에 대한 종말 계시임을 알 수 있다.
2 가라지와 쭉정이:마3:12,13:25
‘곡식’과 ‘가라지’ 그리고 ‘알곡’과 ‘쭉정이’는 추수와 타작에 대한 비유이다(마3:12,13:25). 이 두 구절을 같은 비유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알곡이 곡식이고 쭉정이가 가라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개역 개정은 알곡과 곡식에 대하여, 영어성경 NASB로 볼 때, 밀을 뜻하는 ‘Wheat’로 동일하게 번역하고 있다. 알곡과 곡식을 같은 존재로 본 것이다. 원문에서도 ‘시투’σιτον로 같다. 그러나 쭉정이에 대하여 겉껍질, 왕겨를 뜻하는 ‘Chaff’로 번역하고 있지만, 가라지에 대해서는 잡초를 뜻하는 ‘Tares’로 번역하고 있다. 원문에서도 쭉정이는 쓸모없는 곡식을 뜻하는 ‘아퀴론’ἄΧρον, 가라지는 독보리라는 뜻의 헬라어 ‘지자니온’ζιζάνιον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영어와 헬라어는 곡식과 알곡을 구분하는 단어가 없기에 한 가지로 기록되었지만, 가라지와 쭉정이는 분명하게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곡식과 가라지는 아예 씨가 다르다. 벼와 피와 같다. 이것은 믿는 자와 안 믿는 자의 비유이다. 그러나 알곡과 쭉정이는 씨가 같다. 정미를 해보니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있는 것도 있다. 이것은 성도간의 비유이다. 똑같은 신앙을 가진 줄 알았는데 거짓 믿음을 가진 자가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곡식과 가라지는 추수 때에 갈라지고, 알곡과 쭉정이는 곡식 단을 별도로 타작할 때 나뉜다. 즉 추수보다 더 마지막이 타작인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추수는 탈곡까지 마쳐야 끝난다.
지금은 영적으로 볼 때 추수의 시기이면서 타작의 시대이다. 믿지 않는 자에게 고난을 받아 하나님을 떠나는 것보다, 믿는 자간의 시험으로 교회를 떠나는 것이 더 많다. 타작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무섭게 때리고 부숴야 한다. 이와 같은 시련과 고통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 모습이다. 알곡과 쭉정이가 나뉘는 것이다. 알곡은 끝까지 남아 생전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살아있는 그대로 재림의 예수를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잘 믿지 못하고 신앙을 지키지 못한 쭉정이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쭉정이가 처할 곳인 ‘꺼지지 않는 불’과 가라지가 거두어져 ‘풀무 불’에 던져지게 되는 것은 같은 지옥을 상징한다(마3:12,13:42). 이러한 엄중한 결과를 놓고 보면서, 종말의 시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는지 바로 알아야 한다.
마르틴 니뮐러Martin Niemoller,1892-1984목사는 독일교회가 히틀러에게 부역하였을 때, 정권에 교회가 무릎을 꿇지 않기 위해 맞서 싸웠던 분이다. 그는 1934년에 그가 목회하던 베를린 근교 달렘Dahlem에 있는 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예언적 설교를 했다. “우리 교회 전체와 지역사회는 유혹자의 ‘체’에 던져졌으며, 사단은 체를 흔들고 바람이 불고 있으며, 이에 우리는 알곡인가 쭉정인가 분명하게 (자기 정체성을) 나타내야 한다.” 여기서 ‘체’는 곡식 중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농기구를 말한다. 니뮐러 목사는 “하나님은 사탄에게 자유로운 손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지 흔들어보도록 사탄에게 허락하셨다. 사탄은 그의 체를 흔들고 있으며, 기독교는 사방팔방으로 던져진다. 고난받을 준비가 안 된 사람, 자신의 경주와 그의 만족을 위해 좋은 것만을 얻으려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시간의 바람에 의하여 쭉정이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라고 했다.
오늘날 성도에게 경각을 주고 있다(참고/마24:48;벧후3:4-5).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교회 근간인 5대 사명 예배, 전도, 교육, 봉사, 친교가 흔들이고 있다. 특히 방역지침으로 행해지는 공적예배 금지로 예배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쭉정이는 곡식에 포함되지만, 종국은 가라지와 같다는 것을 상기 해야 한다. 가라지와 쭉정이는 종말의 신앙에 대한 계시임을 알 수 있다.
3 장차의 박해:마10:1-39;24:8-13,32-34;막3:12-19,6:7-13,28-30;눅6:12-16,9:1-6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며, ‘가면서 전파하여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셨다(마10:1-2,7-8,16). 그리고 “17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하시며,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에, 세상의 핍박을 있을 것이지만,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10:17-20). 예수님 공생애 시작 후 얼마되지 않은 때로 보인다.
그리고 이어서 “21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장차’는 어느 시점에 해당되는가? 20절까지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신 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21-22절도 정도의 차이일 뿐 교회가 당하는 환난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23절 이런 박해가 있을 때, ‘인자가 오리라’는 것은 지금에 있을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을 교회시대로 본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이미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구절과 연결해야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는가?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과 함께 예수님 종말장으로 불리는 누가복음 21장 12-19절에 “12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13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15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19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셨다(눅21:12-19). 그리고 예수님은 “29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12-19절까지 박해를 뜻하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고 하신 것은, 23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와 같은 맥이다. 12-19절까지의 일들이 실제 일어나면, 모든 동네를 돌기도 전, 즉 주께서 다시 오심이 임박함을 알라는 경종이다. 병행 본문인 마태복음 24장 8-13절, 32-34절, 마가복음 13:12-19절, 28-30절과도 한 계시이다.
주님께서는 공생애 초창기에 이미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종말의 계시까지 말씀해 주신 것이다. 장차의 박해를 통해 종말의 믿음을 경성하게 된다.
脚注)
안토니 A. 후크마(Anthony A. Hoekema)는 ‘예언적 원근 통시법’(Preophetic Foreshorten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시간적으로 장소적으로 다른 사건을 하나의 사건으로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적 원근통시 법…구약의 선지자들이 종종 그랬듯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그는 가까운 미래의 사건 과 머나먼 미래의 사건을 함께 매우 인접해 있는 사건들로 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멀리 있는 것과 가 까이 있는 것을 통시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런 소망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이해한다면 근접한 미래에 있게 될 핍박은 머나먼 미래에 있게 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핍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 다.”(Hoekema Anthony A. The Bible and The Future; 「개혁주의 종말론」 류호준 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 회, 1998,p.171-172). 조지 E. 래드(George E. Ladd)도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다. “원근통신(遠近通信)이란 예언자의 현재 및 근접 미래와 궁극적 종말 사건이라는 두 개의 초점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을 말한다. 예언의 목적인 미래의 프로그램이나 차트를 만드는 것은 두 완성을 통해서 현재를 조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언 당시 와 궁극적 미래가 연대기적인 구분이 없이 역동적인 긴장이 존재하는 것이다.”(George E. Ladd, A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John(Grabd Rapids:Eerdmas, 1972),p.13). 성경은 기록 당시의 역사적 상황 에서 적절한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동시에 재림 직전과 직후의 미래가 묘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 와 미래가 혼합된 원근통신의 원리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감람산의 강화문’(Olivet Discourse,마24:3-51;막 13:3-37;눅21:5-36)으로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끝날 에 관한 예언을 예수님께서 함 께 말씀하신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더 응용하여 적용한다면, 요한계시록 17장 8절 ‘짐승은 전에 있다가 시 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는 말씀에 등장하는 자를. 다니엘 8, 11장 등 에 등장하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요한계시록 13, 17장 등에 등장하는 ‘일곱 머리 열 뿔 짐승’ 즉, 적그리스도와 연결하는 것이다.
2) 베스파시우누스(Flavius Vespasianus,재위69-79) 황제 아들로 뒤를 이어 로마 10대 황제에 오른다(재위79-81).
3) 누가복음 21장과 병행 본문인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을 종말장으로 보는 입장에서이다.
4) 제1차유대-로마전쟁(제1차유대독립전쟁,66-73)으로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진압된 전쟁을 말한다. 제2차유대-로마전쟁(제2차유대독립전쟁,132-135)은 하드리아누스가 바 코흐바 반란(Bar Kokhba revolt,132-135)을 진압한 전쟁을 말한다. 이 전쟁에서 로마는 유대인들을 영구 추방하고, 유다아(Judea)로 부르던 지명을 시리아 팔레스티나(Syria Palestina)로 바꾸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