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의 내력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고향 야마구치현(구 쵸슈번)은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가장 중요한 두 번(쵸슈번, 사츠마번(현 가고시마현))중 하나이다.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고 이후 일본의 근대사를 좌지우지한 현이다.
쵸슈번 출신으로 메이지 시대 정치를 좌지우지한 인물중 한국인에게 가장 유명한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로, 아베 신조의 친가쪽 고조부 오오시마 요시마사와 외가쪽 사토 노부히로는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스승(요시다 쇼인) 밑에서 공부를 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1954~2022
1954년 야마구치현 출생
1993년 중의원, 제 90, 96, 97, 98대 총리
친가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 1924~1991
1958년 중의원, 1974년 농림대신, 1977년 내각관방장관, 1979년 통상산업대신, 1982년 외무대신
기자로 활동하다 1956년 외무성에 들어가 비서관이 되었고, 1년 후인 1957년부터 총리실 비서가 되어, 당시 총리가 된 장인 기시 노부스케를 보좌했다.
1958년에는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총리였던 장인의 후광을 업고 당선되었다.
1967년 11월에 농림정무차관, 1974년에 미키 다케오 내각의 농림대신, 1977년 후쿠다 다케오 내각의 내각관방장관으로 활동하였다.
1979년~1981년에 자민당 정조회장, 스즈키 젠코 내각의 통상산업대신, 1982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차기 총리대신으로 꼽혔으나 1990년 갑작스런 췌장암 진단을 받고, 1991년 사망한다.
할아버지
아베 간(安倍寬) 1884~1946
1937년 중의원
야마구치현의 대지주 출신으로, 이를 기반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현재의 아베 신조와는 정치관이 다른 반전 평화주의자였으며, 이는 아들인 아베 신타로에게까지 이어진다.
아베 신조의 극우 성향은 외가인 기시 노부스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무척 청렴하였다고 하며, 기시 노부스케가 사위감으로 아베 신타로를 소개받았을때, '아베 간의 아들이라면 걱정할게 없지'라고 했다고 한다.
고조부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1850~1926
초슈 사무라이, 육군대장, 제3사단장, 자작
1894년 청일전쟁의 도화선 역할.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게 동학군을 진압할 군대의 파병을 요청하자, 일본군이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톈진 조약을 명분으로 들며, 1894년 5월 6일 전격적으로 제물포에 상륙한다.
예상과 다른 흐름에 조선 조정은 급히 동학군과 화약을 맺어 해산시키고, 청군과 일본군에게 모두 철군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오오시마는 6월 21일 8,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고종을 협박하여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독단으로 파기하고, 일본군이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청일전쟁의 공으로 남작 작위를 받아 화족이 되었고, 이후에 자작 작위를 받았다.
기록은 찾지 못했으나, 사진상으로 보아 '대훈위 이화대수장' 훈장을 대한제국으로 부터 받은 것으로 보인다.
외가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
1896년 야마구치현 출생
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 상공부대신, 제56, 57대 총리
사토 가문의 데릴사위였던 친아버지의 본가인 기시 가문에 양자로 보내졌고, 양아버지의 친딸이자 자신의 사촌인 기시 료코와 결혼했다.
1936년에 만주국 정부의 산업부 차관이 되어 산업계를 지배하였고, 이때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도조 히데키를 만나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940년 귀국하였고, 1941년 도조 히데키가 총리가 되면서 도조 내각에 상공대신으로 취임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구속수사를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기시 노부스케와 도조 히데키
1957년에 일본 총리가 되었으나 1960년 미일안보조약 비준을 강행하면서 대규모 군중 시위 등 혼란이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주도면밀한 정치가로 쇼와의 요괴(昭和の妖怪) 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과거 만주국 인맥을 활용해 만주군 경력이 있는 당시 한국 대통령 박정희와 인연을 맺었고, 이후 1965년 한일수교 당시 막후에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0.26 사태로 암살당한 박정희의 국장 때에도 참석하였다.
기시 노부스케, 박정희, 당시 총리 이케다 하야토, 1961년
참고로, 박정희는 1961년 미국을 방문하던 길에 일본에 들렸고, 이케다 하야토 총리, 기시 노부스케, 일본군 수뇌부 출신들 및 정계 유력인사들과의 자리에서 유창한 일본어로 다음과 같이 말하여 동석한 일본 정객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경험도 없는 우리한테는 그저 맨주먹으로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욕에 왕성합니다. 마치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청년 지사와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품고 그분들을 모범으로 삼아 우리나라를 빈곤으로부터 탈출시키고,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또한,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사관생도 시절 교장이었던 나구모 신이치로(南雲親一郞) 전 일본군 중장에게 큰절을 올렸다.
박정희는 나구모 신이치로 중장에게 '교장 선생님 덕택에 일본 육사를 나왔고 이제 한국을 대표해 일본 총리를 만나게 됐다'고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술을 따랐고, 이를 본 일본 요인들은 박수로 화답하였다
외종조부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1901~1975
제61, 62, 63대 총리
1974년 노벨평화상
젊은 시절에는 주로 철도국이나 운수통신성 등 교통 부문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직 추방 없이 중의원에 무난하게 당선되었고, 이후 먼 친척(고모의 사돈)인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눈에 들어 관방상을 맡으면서 인생의 전성기가 열렸다.
형인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를 할 때는 대장상을 맡았다.
기시 노부스케와 사토 에이사쿠
1964년 총리에 취임하였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협상하여 1972년 오키나와를 돌려받았다.
이때 '핵무기를 만들지도, 갖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라는 비핵 3원칙을 대대적으로 선언했고, 이 공로를 인정 받아 197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총리 재임기간은 역대 총리중 3위로, 재임기간 1위는 외종손인 아베 신조이다.
첫댓글 대단한 인물 이군요.그러나 한번 생각을 해봐야 하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는데...
한국과는 인연이 나쁜 집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