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잡지 백조
1922년 1월 박종화(朴鍾和) · 홍사용(洪思容) · 나도향(羅稻香) · 박영희(朴英熙) 등이 창간한 잡지이다. 편집인은 홍사용, 발행인은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외국인을 택했는데, 1호는 아펜젤러(미국인 선교사, 배재학당 교장), 2호는 보이스 부인(미국인 선교사), 3호는 훼루훼로(망명한 백계 러시아인)이다.
격월간으로 계획된 것이나 발간이 순조롭지 못하여 1922년 5월에 2호, 1923년 9월에 3호를 내고 종간되었다. 발행 동기는 휘문의숙(徽文義塾) 출신의 박종화 · 홍사용과 배재학당(培材學堂) 출신의 나도향 · 박영희 등의 문학 청년들의 사귐에서 비롯되었다.
3 · 1운동이 실패한 뒤 절망적 상황에서 이들 뜻이 맞는 젊은이들이 모여 문예와 사상을 펼 수 있는 잡지를 만들고자 하였다. 마침 김덕기 · 홍사중과 같은 후원자를 만나 문화사를 세웠고, 문예잡지 『백조』와 사상잡지 『흑조(黑潮)』를 간행하기로 하였으며 그 제일보로 『백조』를 창간하였던 것이다.
대체로 시 분야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주요 작품들은 시 분야에서 이상화(李相和)의 「나의 침실로」(제3호), 박영희의 「꿈의 나라로」(제2호) · 「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제3호), 박종화의 「흑방비곡(黑房悲曲)」(제2호) · 「사(死)의 예찬(禮讚)」(제3호) 등이고 소설 분야에서 나도향의 「여이발사」(제3호), 현진건(玄鎭健)의 「할머니의 죽음」(제3호), 박종화의 「목매는 여자」(제3호) 등을 들 수 있다.
『백조』의 문학적 경향을 흔히 낭만주의적인 것으로 이야기하나, 그것은 시 분야에 국한된 일이고 소설 분야에 있어서는 역시 당시의 유행하는 사조(思潮)인 자연주의적인 성격이 짙다. 당시의 동인지는 어느 뚜렷한 문학적인 주의나 사조에 의하여 뭉친 동인이기보다는 문학 동호인의 친교적 성격이 강하였던 만큼 무슨 주의 일색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들은 흔히 ‘백조파’로 묶어서 지칭하고 있는 바 그들의 문학적 경향은 서구의 낭만주의와는 달리 병적이고 퇴폐적인 면이 강하였다. 이는 3 · 1운동이 실패한 뒤 허탈한 느낌에서 문학을 시작한 청년 작가들의 정신적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요컨대 이들 ‘백조파’ 시의 특징은 애수 · 비탄 · 자포자기, 죽음의 동경, 정신적 자폐증 등의 감상적 경향을 제대로 시로써 승화하지 못한 채 격정적이거나 애상적인 어투로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창조] [폐허]에 이어 1922년 1월 1일 창간됐던 [백조]는 1923년 9월 3호를 내고 말았지만 ‘백조시대’를 이룩했을 만큼 우리 초창기 문단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창조]가 나온 것이 1919년 2월 동경에서였고 [폐허]가 나온 것은 1920년 서울에서였다. 그러나 2년 후 나온 [백조]는 그 부피나 장정 등에 있어 [창조] [폐허]를 크게 능가할 뿐 아니라 육당, 춘원의 계몽주의 시대를 벗어나 서구문예사조인 탐미주의나 낭만주의의 꽃을 피웠다는 점에서도 그 문학사적 의의는 크다.
예술을 위한 예술, 문학을 위한 문학에서 이때까지 풀어보지 못한 정열을 그대로 현실의 협잡물 없이 마음껏 불붙여 보고 싶었던 것이다. ‘현실의 협잡물’을 없애려던 [백조]의 정열은 3회 출간 당시 가입한 김기진(金基鎭) 등의 프로문학 즉 경향문학에 밀려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