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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기독교 사회복지의 개념과 성서적 근거
Ⅰ. 들어가는 말
기독교의 본질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10:27)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뿐만 아니라 실천을 하는 데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일차적 목적은 복음 전도와 영혼 구원에 있기 때문에 사회봉사에 대한 의무는 이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올바른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사회봉사는 단순히 복음 전도와 영혼 구원이라는 교회의 일차적 목적을 위해 보충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라기보다는 그 결과로서 마땅히 나타나야만 하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2:26)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가 이웃을 위해 지역사회에서 어떠한 사회복지 활동을, 어느 정도 행하는가 하는 점은 교회의 건전성과 건강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다.
21세기를 맞이한 오늘의 한국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20%를 상회하는 큰 세력으로 부상했으나 한국사회에서 기독교가 미치는 영향은 매우 미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사회복지 활동에 대한 여러 통계자료를 보면, 타종교나 일반 민간단체들의 활동과 비교할 때 오히려 활성화되어 있어 기독교 사회복지활동은 매우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자체의 사회복지 활동은 매우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이 교회의 사회적 영향 상실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인하며, 교회가 사회복지 적 활동을 등한히 한 결과가 자연스럽게 사회적 공신력의 상실로 연결된 것이다.
Ⅱ. 기독교사회복지의 개념
1. 사회복지의 개념
인간의 생활에서 사회복지라는 용어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국가와 학자에 따라 심지어는 각 개인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기 때문에 어떠한 합의된 정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첫째, 어원적 개념을 살펴보면 ‘사회복지’는 ‘사회(social)’라고 하는 개념과 ‘복지(welfare)’라는 개념의 합성어이다. ‘welfare’는 ‘wel’과 ‘fare’의 복합명사로서 ‘평안히 잘 지내는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 ‘social’이란 형용사를 붙이면 ‘사회적으로 행복한 생활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복지’는 인간생활의 이상상태를 의미하는 개념인 동시에 그 이상 상태를 지향하는 실천 활동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둘째, 사회복지를 한정적인 개념으로 보면, 사회복지의 대상을 보다 한정된 ‘사회적 약자’와 ‘사회적 낙오자’에 두고 그 구제 ․ 보호 ․ 예방 ․ 회복 ․ 원조를 행하는 시책과 방법체계로 이해하며, 개인들이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할 수 없거나 자체내부의 자족으로부터 지원을 받거나 문제 해결할 자원이 없는 경우에 한해서 수반케 되는 것으로 지금까지의 사회복지사업의 개념이 이에 속한다 할 수 있다.셋째, 최근의 사회복지는 사회발전의 과정 속에서 광의(廣義)나 확대(擴大)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다. 광의의 사회복지는 사회성원 일반을 대상으로 하여 그 생활의 각 측면에 나타나는 비복지(diswelfare)를 다루거나 해결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며, 공중위생과 의료, 사회보험과 고용정책, 사회사업 등을 포괄적으로 표시하며, 광의의 사회보장과 동의어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광의(最廣意)의 사회복지란 인류사회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고 그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 박애정신, 인도주의, 또는 생존권의 사상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보완적 개념에서 제도적 개념으로, 자선에서 시민권으로, 특수한 서비스에서 보편적 서비스로, 최저조건에서 최적조건으로, 개인적 개혁에서 사회적 개혁으로, 자발성에서 공공성으로, 빈민복지에서 복지사회로 사회변화에 따라 개념도 변화하고 있다.
2. 기독교사회복지의 개념
1) 기독교사회복지의 정의
기독교사회복지란 기독교의 근본정신인 이웃사랑과 봉사와 헌신을 통해서 세상 가운데 열악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물질적,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양적 질적으로 완화시키고 생활상의 곤란을 개선시켜 줌으로써 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성서적 정의를 실천하며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려는 기독교인들의 제도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이자 가치체계를 말한다.
교회가 기독교사회복지를 실천함에 있어서 서로 다른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교회는 구제기관이 아니다. 그러나 구제는 교회가 수행해야 할 근본적 의무 가운데 하나이다. 교회는 봉사기관이 아니다. 그러나 봉사는 교회가 수행해야 할 근본적 사명 가운데 하나이다. 교회는 사회복지기관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복지는 교회가 수행해야 할 근본적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2)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 사랑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예배: Worshipservice)이며, 이웃사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봉사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복음주의적 신학의 영향과 열정으로 지금까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예배드리고, 또한 복음을 전파하며 선교하는 방향으로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되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언제나 우선이 되었고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적 책임과제는 언제나 부차적이며 등한히 여겨지고 소홀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문제는 교회와 국가 혹은 교회와 사회에 대한 관계에 대하여 성경적인 바른 이해와 해석이 이루어지지 못한 원인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한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지지 못하고 별개인 것으로 생각해 온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정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관하여는 눅10:25-37의 선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의 말씀과 마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영생과 직결된 중요한 사회봉사적 책임과 또한 종말론적인 신앙의 핵심이 바로 섬김의 삶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서의 봉사 혹은 섬김은 이웃을 섬기는 봉사로 나타나야 하는데, 한국교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리고 하나님 사랑을 우선시 하였고, 또한 이웃사랑은 그리스도인의 한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서의 개인 윤리적 과제라고 보았기에 교회적인 차원에서의 중요한 사회적 책임으로 여기지 않았던 신학적 오해와 잘못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한국교회의 갱신의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하며, 새로운 의식과 책임이 필요한 부분이다.
Ⅲ. 기독교사회복지의 성서적 근거
1. 구약성서에 나타난 사회복지
율법서의 핵심정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회악으로 말미암아 자유와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빼앗겨서는 안 되며, 또 빼앗아서도 안 된다는 선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가난한 자, 이방인, 노예였다는 엄연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소외되고 약한 빈자들에게 사랑을 갖고 관심을 기울이도록 명령받았다.
레위기 19장에서 하나님은 성도들의 거룩한 삶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거룩이란 추수 때에 가난한 사람에게 자애로움을 나타내는 것, 일꾼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 재판 과정에서의 공정성, 다른 사람에 대한 사려 깊은 행동, 이주자에 대한 평등, 정직한 상행위와 모든 사회적 사건 등에 대한 철저한 실천적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1) 가난한 채무자를 위한 복지
고대사회의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는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던 높은 이자 즉 고리와 관련된 문제였고, 채무자가 이자나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에 채무자와 그의 가족을 노예로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출애굽기에는 채무자들을 착취하지 말고 보살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나타나 있다.(출22:25~27) 또한 하나님은 지나친 담보 요구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 일교차가 심한 동방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 기온이 떨어진 저녁에 커다란 천 조각으로 된 웃옷이 몸을 보호하는 이불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옷까지 전당잡는 것을 금지하였다.(겔18:7~9, 12~13) 레위기에서는 극빈자들의 생존을 위해 부자의 자발적 배려를 명령하고 있다.(레19:9~10; 25:35~37)
2) 이방 나그네를 위한 복지
이방나그네란 일시적으로 잠시 머무는 외국인과는 대조적으로 다른 민족 사이에서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 대부분은 사유재산도 없고 보호받을 후견인도 없었으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생활하였다. 이스라엘은 과거 애굽에서 그들이 받았던 압제와 학대를 생각하며 이방나그네들에게 호의를 갖고 선대해 줄 것을 명령받았다. 출애굽기에는 나그네를 핍박하지 말고 안식일에는 휴식하게 하라고 규정하고 있다.(출22:21; 23:9,12)
3) 가난한 자를 위한 복지
출애굽기에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동시에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방법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의 근저에는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시고, 가난한 자들의 보호자이시며,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출22:25~27; 23:6, 10~11)
4) 과부와 고아를 위한 복지
과부와 고아는 비록 환경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존귀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심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생활 가운데 억울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이들 과부와 고아의 보호자이심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들을 해롭게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복수를 행하는 잔혹한 동형복수법보다 더 무서운 징벌로서 복수를 행하신다.(출22:22~24)
5) 안식년
안식년에 자연적으로 성장하여 열매 맺는 수확물은 그대로 두어 가난한 자나 동물의 식물이 되게 함으로써 모든 피조물이 안식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레25:4-7) 안식년은 히브리 달력의 7년 주기의 마지막 해이다. 이 해는 땅을 쉬게 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주고, 채무를 면제해 줄 뿐 아니라.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고, 또한 이들이 터 잡고 살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신15:12~14)
6) 희년
희년은 본래의 자기 땅으로 돌아가라는 토지회복제도이다. 희년이 선포되면 토지나 가옥을 팔았던 농민들은 그 기본재산을 다시 돌려받게 되며, 몸을 팔아 노예가 되었던 사람도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다. 이 희년사상은 안식년과 더불어 빈부격차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데 의도가 있었으며 종들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세습적인 노예제도를 방지하려 하였다.(레25:9~10)
7) 예언서에 나타난 사회복지 사상
율법서에 나타난 사회봉사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취적 봉사에 근거하고 있다면, 예언서에 나타난 사회봉사는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에서 왕정이 수립된 후 종교, 정치, 경제, 사회면에서 극도의 타락과 혼란의 시대에 등장한다. 그들은 사회적 불의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이기주의에 빠져 있던 당시 사회 지도층의 약자에 대한 무관심과 불의를 고발하고, 약자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지배하는 미래를 예언했던 자들이다.
가나안 정착과 왕정체제의 수립, 도시문화의 발달은 가진 자로 하여금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를 낳았다. 예루살렘의 귀부인들은 사치를 일삼았으며, 귀족과 고관들은 밤새 술이나 퍼마시는 향락주의자들이 되었다.(사5:11) 그리하여 당신의 사회풍조는 사회부조나 부의 공평분배, 형제애를 완전히 도외시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본분과는 어긋나게 지도자들은 오히려 그들을 온갖 형태의 경제적 억압에 예속시켰으며,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약탈하는 공식문서와 그 해석들을 남발하여 올바른 소송절차를 왜곡하고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희생자로 만들었다.(사10:1~2)
당시 지도자들의 부패, 매수된 재판관, 식탐에 물든 부패한 궁정예언자와 사제들의 불의는 그들의 식탐과 소유욕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예언자들은 교역과 생산으로 일어난 경제발전을 부인하거나 문제시하지는 않았다. 문제시한 것은 적은 노동과 노력으로 쉽사리 큰 수익을 얻는 상황, 부당하게 축적되는 자본과 재산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경제체제였다. 사제와 궁정예언자들은 착취자들의 돈에 매수되어 종교적 허례허식과 위선을 낳았고,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암5:24) 만드는 대신 제사를 반복해서 드리는 것을 제일로 여겼다. 일상생활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면서도 제사만 중시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이 땅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불의와 조화될 수 없음을 말하며,(사3:15)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예배는 겉치레의 단식과 고행이 아니라 가난하고 압제 당하는 자의 인권을 세워주는 것이라고 선포하였다.(사58:6~7)
부정과 부패는 비단 지도층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 전체에 만연되었다. 백성들도 포악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다.(겔22:29) 이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을 가장 강하게 호소한 예언자인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불의에 대해 이렇게 질타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하였음이라.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암2:4~8)
예언자들은 모든 설교에서 경제적으로 약자에 내몰린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는데 그 초점을 맞추었다. 가난한 자들은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와 같은 빈민이었고, 예언자들의 중심사상은 사회정의를 망각한 이스라엘의 종교에 대한 비판과, 의와 사랑의 하나님은 그러한 불의에 의한 희생자를 구제하신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입각한 메시야 통치를 예언하고 있는데,(사61:1~3) 이 메시야 통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구현되는 나라를 뜻한다.
2. 신약성서에 나타난 사회복지
기독교 복음의 출발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친히 이 세상에 인간의 육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하나님의 사건에 있다.(요1:1~14) 또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5:17)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의 삶과 죽음은 구약성경 율법서의 약자 보호로서의 사회봉사와 예언서의 공의실현으로서의 사회봉사를 성취함으로써 교회 사회봉사의 시금석이 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회복지 사상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 대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중하셨다. 대부분은 갈릴리에서 보냈으며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 이방인, 환자를 사역의 중심에 두셨다. 갈릴리 지방은 옛날부터 외국과 연접해 있기 때문에 베니게나 수리아 그 밖의 외국군에게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고, 앗시리아 문물이 쏟아져 들어와 갈릴리 인들은 혼혈종이 많았다. 또한 수리아 일변도의 정책을 따르다 보니 정책 뿐 아니라 앗시리아의 우상들을 입수하게 되었고 글자 그대로 “어두움의 백성”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은 약한 여자, 세리, 환자, 문둥병자와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결코 예루살렘의 권세자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시간을 배려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갈릴리의 경제, 문화적으로 약한 무리들을 위해 일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사역의 내용과 그가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서는 누가복음 4장에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그리스도인들의 복지활동은 그리스도의 복음(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임으로 이 귀한 사랑과 실천이 분리되어서는 의미가 없고, 인간의 책임으로 이뤄져야 한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약2:14~26)
예수 그리스도의 복지활동에 관한 교훈으로 표준이 되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이다.(눅10:25~37) 여기에 나오는 율법사와 예수의 대화 내용에서 예수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동시에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을 때 어떤 이웃에게 어떤 사랑을 베풀 것이냐 라는 문제가 생기는데 가장 가까이에서 긴급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구호를 베푸는 것이 이웃사랑의 방법임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예수는 ‘양과 염소 비유’(마25:31~46)를 통해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환자를 돌보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며, 옥에 갇힌 자를 방문해서 위로해 주는 것이 복지활동의 방법 및 대상임을 교훈하는 동시에 사회복지활동 행위의 유무를 구원 및 심판, 영벌 및 영생의 결정으로 그 필요성을 강력히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는 또한 이 세상의 샬롬(평화, 화평)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사9:5, 미5:5, 슥9:9, 눅2:14) 이 메시야 왕국은 계약법에서 구현되는 정의와 예수의 공동체에서 구현되는 코이노니아(koinonia)의 실재를 통전하는 개념이다. 즉 메시야 왕국의 평화는 사회의 불의로 인한 불일치, 갈등 등을 극복하여 완전성을 이루는 것이다. 단순히 전쟁, 분열, 갈등이 없는 상태가 평화가 아니라, 정의와 코이노니아가 넘쳐서 완전함을 이루는 역동적인 샬롬의 실재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샬롬의 본래적 개념은 집합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개인과 가족, 가족과 가족, 주민과 주민, 이웃과 이웃끼리 샬롬이 있을 때 그 사회는 공생의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다. 이것은 바로 기독교사회복지가 교회의 목회전략으로 코이노니아를 전재해 나갈 때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오늘의 사회문제해결과 사회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2) 초대교회와 나눔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의 코이노니아는 곧 초대교회의 부활공동체의 오순절 성도의 교제로 확산되었다. 기독교의 공동체는 모든 것을 나누는 공동체, 즉 참여가 극대화되는 공동체의 구조를 가지며 이것이 예수의 형태로 그의 공동체에서 형성되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들의 말씀에 큰 은혜를 받은 믿는 무리들이 서로 연대하고 친교하며 자기희생과 너그러움을 통해서 빈민들의 고통을 해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사도들이 말씀에 더욱 정진하게 하기 위해 구제업무를 담당하는 전담요원을 선출했는데 이로 인해 집사제도가 탄생하게 된다.(행2:44; 4:32~34) 이처럼 초대교회는 지역사회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와 자매로 인식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도우면서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사역은 그리스도 사역과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3) 바울의 코이노니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초대교회에서 강조된 요보호자들에 대한 관심은 바울에 의하여 더욱 분명하게 강조된다. 그는 헌금의 사용을 구체화하는 실제적인 동의어로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나눈다는 의미에서의 바울의 훈계는 성서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고전12:18~19; 25~26; 16:2)
로마서에서는 사회복지를 행함에 있어 실제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직분을 주시고, 서로가 자기에게 맡겨진 직분에 충실하고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서로 하나가 되어 이루시길 원하고 계신다. 믿음의 형제들인 동료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길 서로 먼저하여 주의 뜻을 행하는 것이므로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롬12:7~13)
Ⅳ. 맺는 말
오늘날 사회복지란 국민의 생활상의 곤란과 다양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나 사회가 각종 재화서비스 그리고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노력을 말하는데, 교회가 사회복지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소 양립적인 면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1:28)는 명령에 근거하여 경제적 성공은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한 반면, 빈곤은 음주, 나태, 방탕 등의 행위 결과로 보아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뜻으로 보았다. 즉 빈곤의 원인을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찾기보다는 개인적 특징에서 찾고 있다. 또한 사회복지사업을 실시하면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고 복지혜택에 영속적으로 종속하게 된다는 비판도 있다. 이러한 견해는 노동지향적인 사회문화를 창조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빈민들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해서 교회가 한편으론 사회복지사업의 주체로서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반사회복지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교회가 실시하는 사회복지사업은 사회정의나 사회개혁의 차원이 아니라 자선사업의 차원에서 주로 실시가 되고 있다.
기독교사회복지의 발달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사회복지가 점차 세속화되어 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다. 세속화에 관한 논쟁은 기독교계 전반에 걸쳐 제기되지만 사회복지 내지 사회봉사 분야에 있어서도 세속화는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의 세속화(secularization)란 인간생활의 여러 가지 요소들(의견 , 관습, 사회형태, 사물, 인간)이나 혹은 인간생활의 그 모든 것들이 종교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게 되는 과정을 가리키며, 성역(聖域)으로부터 속역(俗域)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
교회는 사회복지사업의 많은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특히 자선사업의 경우 대부분 기독교 단체와 많은 관련을 가져왔다. 그러나 오늘날 정부가 주관하는 복지사업이 급격히 성장함에 따라 기독교와 관련된 사회복지기관의 수는 상대적으로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소위 ‘사회복지의 세속화’를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사회복지가 세속화되어감에 따라 교회가 사회복지 분야에서 수행해 온 주도적인 역할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축소되어 정부가 주도하는 공공복지역할 을 보완해 주는 역할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현상과 관련해 니버(Niebuhr)는 교회는 사회복지를 낳고 키운 어머니였는데 어머니로서 책임을 포기했기 때문에 세속화를 초래하였다고 말했다.
사회복지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세 가지로 분류되기도 한다. 첫째는 전통적 선교관이다. 전통적 선교관에서는 교회와 사회를 이원적으로 파악해 교회는 전도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선교사역에서 복지사업을 배제하려고 한다. 둘째는 통전적 선교관이다. 통전적 선교관에서는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실천이라는 두 요소는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고 양자는 마치 마차의 두 바퀴와 같다고 주장한다. 복지사업을 전도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입장이다. 셋째는 선 성장-후 복지사업이란 입장이다. 먼저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을 하고 그리고 난 후에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길 때 교회가 복지사업을 고려하겠다는 주장이다. 한국의 경우 초기 외국 선교사들의 활동이 활발했을 때 통전적 선교관을 갖고 있었으나 그 후 지나친 복음주의의 영향 때문에 전통적인 선교관을 갖게 되었다. 최근에는 교세 확장을 무엇보다도 앞세우는 대교회 지상주의가 범람하여 선 성장-후 복지사업이라는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를 취하는 교회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본회퍼가 그의 옥중서신 가운데서 가르쳐 주고 있는 ‘교회는 남들을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라는 가르침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탈세속화란 이미 세속화되어 버렸거나 세속화되어 가는 세계를 다시금 종교에 의해 결정되도록 변화시켜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탈세속화 작업을 기독교가 주체가 되어 이루어 나갈 때 세계는 기독교화 되어지는 것이다. 성경적 정의에 따라 기독교가 주체가 되어 실시하여 오던 사회복지가 기독교계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점차 국가나 비기독교적 기관들이 주체가 되어 수행되어질 때 사회복지는 성경적 정의가 아닌 세속적 정의에 의해 수행되어지기 때문에 사회복지는 세속화되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복지를 다시금 기독교계가 주체가 되어 성경적 정의에 따라 실천해 나아갈 때 사회복지는 탈세속화 되어지는 것이고 기독교화 되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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