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42
7월5일[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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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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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MrF64_102a4 (김대환 비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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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주님께서 반드시 내 인생 여정에 동반하심을 굳게 믿습니다!>
때 이른 불볕더위에 한 며칠 주방장 역할을 해보니, 조리 노동자들의 삶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를 뼛속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머릿속은 차려내야 할 메뉴 거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는 강도 높은 노동으로 몸은 상습 피로에 시달립니다.
아침 식사 끝나면 삭신이 노곤해지고, 체력이 바닥을 쳐서, 잠시라도 머리를 바닥에 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점심 식사 두 시간 전에는 몸을 일으켜야 합니다.
매일 누군가의 소중한 끼니를 책임져야 하는 이 땅의 수많은 조리 노동자들의 삶이 더없이 감사하면서도, 짠한 마음이 온몸으로 느껴졌습니다.
오늘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불과 25세의 젊은 사제였던 그가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그 나이에 그토록 주님을 향한 열렬한 신앙심을 지녔다는 것, 보기조차 끔찍한 사형 집행인의 날카로운 칼날 앞에서도 그리도 의연하고 당당했다는 것, 참으로 놀랍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실감합니다. 신앙의 깊이는 나이나 연륜에 비례하는 것도 절대 아님을 깨닫습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내가 어디를 가든 나와 항상 함께하신다는 주님 현존 의식입니다. 그런 의식의 소유자는 죽음도 전혀 두렵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대대적인 종교 박해가 없는 이 시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지니셨던 순교 영성을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의 힘겹고 부담스러운 일들을 짜증내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것, 바로 이 시대 순교입니다.
매일 직면해야 하는 결코 나와 호의적이지 않은 관계나 사건들을 그저 담담히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이 시대 순교입니다.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주님께서 반드시 내 인생 여정에 동반하심을 굳게 믿는 것, 이 시대 순교입니다.
김대건 신부님 관련 글을 읽다 보면 그는 분명 환난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 환난이 김대건 신부님에게 인내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지니게 도와주었습니다. 그 희망은 그를 부끄럽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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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 시대 순교>
순교의 영예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니 엄청 웃기는 일인데... 젊은 시절, 신앙생활에 푹 빠져 살던 때, 저는 ‘어디 순교할 기회가 없나?’ 하며 여기저기 샅샅이 살피고 다녔습니다. ㅋㅋㅋ
순교의 기회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왜 내가 ‘병인박해 때 태어나지 않았는가?’ 하며 아쉬워했습니다. 순교의 영예를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시대가 협조를 해줘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순교는 그리스도인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입니다. 순교는 작고 나약한 한 인간이 크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온전히 합일하는 축복입니다.
순교는 보잘 것 없는 인간 존재이지만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은혜로운 사건입니다. 순교는 인간의 극점이 하느님임을 엄숙이 선포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결국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완벽히 모방하는 일, 완전한 그분의 제자로 거듭나는 일입니다.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신앙은 얼마나 확고했는지 주변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스물다섯, 참으로 꽃다운 나이이며 아까운 나이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요즘 스물다섯들은 아직도 제대로 서지도, 아직 제 앞가림도 하기 힘든 실정입니다. 그런데 스물다섯의 신부님께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남기신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의 부활신앙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게 이런 형벌을 주신 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관장님께서 제게 내리시는 이 형벌을 통해서 저는 더욱 하느님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관장 나리를 더 높은 관직에 올려주시기를 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저는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기에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이제 곧 영원한 생명이 제 안에서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하느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보기만 해도 끔찍한 휘광이의 칼날 앞에서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담대히 하느님의 신앙을 증거하신 김대건 신부님의 신앙 앞에 참으로 큰 부끄러움을 느끼는 하루입니다. 아주 작은 시련의 파도 앞에서도 이리저리 갈대처럼 흔들리는 제 나약한 신앙을 크게 반성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비롯한 수많은 한국 순교자들의 피가 우리 안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놀랍고도 위대한 순교 영성이 우리 한국 교회 역사 안에 자리 잡고 있음에 큰 자부심을 지녀야겠습니다.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영예로운 순교영성을 오늘 내 삶의 자리에서 실천해야겠습니다.오늘 이 시대, 내 삶 안에서 순교자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이 시대 순교는 죽을 각오로 현실의 고통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적당히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 살기로, 목숨 걸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일상의 비루함과 나 자신의 한계와 작은 고민거리들을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는 일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매일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더없이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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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XiVRV3nK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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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님의 마지막 편지, 마지막 마음>
오늘은 한국의 첫 사제이신 김대건 신부님의 신심을 기리는 날입니다. 무엇보다 김대건 신부님의 신자들에 대한 사랑을 느껴보려면 그분이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신 이후 여러 언어를 배우신 신부님은 총 21통의 편지를 남기셨는데 19통을 라틴어, 1통을 한문, 마지막으로 1통을 한글로 쓰셨습니다. 이 중 마지막으로 감옥에서 신자들에게 쓰신 한글 편지에 김대건 신부님의 신자들에 대한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1. “세상에 한 번 태어나 우리를 만들어내신 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세상 태어난 보람이 없다.”
예수님께서 가리옷 유다에게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뻔했다고 말씀하신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신부님은 먼저 자신을 창조한 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세상 태어난 보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헛되고 헛된 세상 것들이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을 볼 때 가장 가슴이 아프다고 하십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강한 열망이 나타나 있습니다.
2. “자기를 만들어내신 하느님을 알아 입교 영세했다 할지라도 주님의 제자답게 살지 못하면 이 또한 세상에 난 보람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배은망덕하게 되어 오히려 세례받지 못한 사람보다 못한 처지에 떨어진다.”
신부님은 세례를 받았다 해도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오히려 “주님과 원수가 되어 영원한 벌을 마땅히 받게 된다”라고 하십니다. 농부가 고생하여 농사를 짓는데 열매를 맺지 못하면 농부는 밭을 갈아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이 맺어야 하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3. “부디 지금의 박해에 굴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다져 밤낮으로 하느님께 빌어 세속과 육신가 마귀를 대적하고 이 고난을 참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너희의 영혼을 구해라!”
당시 신앙의 목적이 명확하였습니다. 바로 세속과 육신과 마귀를 이겨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열매를 맺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기도와 말씀, 성사생활을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오며 온전한 의탁으로 예수님과 일치하여 이미 패배한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시련의 시기를 당하여 여러분은 마음을 다져 힘을 다하고 역량을 다하여 마치 병기(묵주, 성서 그리고 성사생활)를 다 갖춘 건장한 군사처럼 싸워 이길지어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소유욕과 육욕, 그리고 교만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기도록 주님께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열매를 맺지 않는 신앙인은 세례를 받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요즘 삼구(三仇: 세속, 육신, 마귀)에 대해 아는 신자가 얼마나 됩니까? 거의 없었습니다. 김 신부님이 순교하신 해가 1846년 병오박해이니 200년도 안 되어 김대건 신부님이 가장 강조하셨던 교리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 교리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악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지 모릅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젊은 야망의 증권 중개인 조던 벨포트가 만연한 부패와 사기에 가담한 기업 스트래튼 오크몬트의 창업자가 된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영화 내내 조던은 자신의 무모한 행동과 행동의 불법성에 대해 자주 경고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습니다. 그는 세속, 육신, 마귀에 있는 그대로 노출되었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결국 그는 감옥에 가게 되고 그의 제국은 무너지고 부와 가족과 자유를 잃습니다.
조던은 인류가 맞이하게 될 미래입니다. 조던에게는 적어도 세속, 육신, 마귀의 삶이 잘못된 것임을 말해주던 이들이 있기는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내와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교회 안에서조차 그것이 잘못임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세속, 육신, 마귀의 교리가 사라진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보낸 당신 유일한 편지에서 그분은 돌아가시기 직전 세속과 육신과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만을 바라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이 가르치시려는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로만 김대건 신부님을 존중하지 말고 진심으로 그분을 존경한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계승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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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구 사제 모임을 마치고 멀리 남부에서 온 신부님들이 뉴욕에서 며칠 더 머물렀습니다. 제가 뉴욕에 있기 때문에 잠시 뉴욕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야기를 듣고 나름대로 신부님들이 뉴욕에서 머무는 동안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였습니다. 숙소는 신문사에 마련하였습니다. 첫날은 부르클린 다리를 건너보고, 밤에 야경을 보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손님들이 오면 모시고 다녔는데 모두들 좋아하였습니다. 둘째 날은 ‘타임 스퀘어’를 중심으로 ‘센트럴 파크’까지 걸어보려고 하였습니다. 뉴욕의 맛과 멋을 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들이 원하는 것은 조금 달랐습니다. 먼저 아침미사를 같이 할 수 있는 성당을 원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날은 ‘예수성심 대축일’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사제성화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퀸즈성당에 부탁을 드렸고, 우리는 ‘예수성심 대축일’ 미사를 함께 봉헌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제가 주일 미사를 봉헌하는 ‘부르클린 한인성당’에도 가보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신부님들에게 제가 미사를 봉헌하는 성당을 보여주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성당에서 조배하였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멋있다고 하였습니다. 저의 기대와 예상을 벗어난 신부님들은 뉴저지에 있는 ‘뉴튼수도원’엘 가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뉴욕에서 2시간 넘게 이동하는 거리에 있는 수도원입니다. 원장 신부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본인은 독일로 성지순례 중이라고 하면서 그래도 수도원 방문을 환영한다고 하였습니다. 수도원에서는 신부님들을 위한 식사를 마련해 주었고, 부원장 수사님께서 뉴튼수도원의 ‘역사’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뉴튼수도원에는 ‘마리너스’ 수사님의 무덤이 있습니다. 마리너스 수사님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의 주인공이었습니다. 6.25 전쟁 당시 화물선의 선장이었던 수사님은 흥남부두에서 피난민 1만 4천명을 배로 탈출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12월 23일에 흥남부두를 출발한 배는 12월 25일 성탄절에 무사히 거제도로 입항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였던 선장님은 미국으로 돌아와 수도자가 되었고, 평생 뉴튼수도원에서 지내다가 선종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신부님은 ‘성극 모세’를 관람했던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성극을 보기 전까지는 모세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성극을 보면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던 고뇌에 찬 인물이었음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다시 지팡이가 되는 것을 보면서 주교님의 지팡이는 악의 유혹을 물리치는 도구임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10가지 표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는데 마지막 표징은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결국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은 놀라운 업적과 능력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였음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저도 지난 5월에 ‘성극 모세’를 보았지만 그런 묵상은 못했습니다. 다만 모세와 예수님의 삶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세가 두 팔을 벌리면서 바다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나갈 수 있었는데 이는 사제가 미사를 마치면서 팔을 벌려 강복을 주면서 교우들을 파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면서 온갖 어려움을 이겨냈듯이 우리들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반드시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성극이 주는 교훈이라고 하였습니다. 피정 중에 강의를 듣는 것처럼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천상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뉴욕에 머물렀던 ‘사제들’을 보았다면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난 ‘사제성화의 날’에 서울대교구 교구장인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사제들에게 있어 결코 변할 수 없는 본질적인 측면은, 오늘의 사제나 내일의 사제 모두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제는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맡겨주신, 성사를 집행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입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제 한명 한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또 하느님께서는 그 사제 한명 한명을 통해 교회와 신자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소중한 소명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고, 부르심을 받들어 가슴 벅차오르게 응답했던 그 체험과 열정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어제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봉헌하였듯이, 오늘의 사제들도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가 보여주었던 ‘수선탁덕’의 길을 충실히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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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한국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울술라 사이에서 출생하셨다. 6살 때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시 남곡리의 골배마실로 이사를 하고 1836년 은이공소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해 12월 모방 나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오르니 16세였다.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1845년 1월 조국에 몰래 입국하였다가 다시 4월에 주교와 신부를 영입하기 위하여 10여 일의 항해 후 상해에 도착한다.
1845년 8월17일 상해 근처 김가항에서 페레올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니 한국교회 최초의 사제가 되었고 그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해 10월 12일 주교와 신부를 모시고 충청도 나바위에 무사히 입국하였다. 8개월 동안 국내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중 1846년 6월 5일 몰래 출항하려다 황해의 순위도 부근에서 체포되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군문 효수 형을 당하니 그의 나이 26세에 불과하였다. 1925년 비오 11세에 의해 로마에서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에서 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복음: 마태 10,17-22: 박해를 각오하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싸움을 준비시키신다. 그분 때문에 신앙 때문에 제자들은 부당한 대우와 형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신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17절)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 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처벌할 것이다. 사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9-20절)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위안을 주시는 말씀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셨다. 즉 사도들은 하느님의 영 없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21절) 한 집안의 가족들이 서로 다툴 것이다. 이것은 꼭 가족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부모와 친척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에는 사람들이 일치하고 있었지만, 이 믿음 때문에 사악한 믿음과 충돌한다는 뜻이다. 그 사악한 믿음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절) 앞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은 아마 이러한 사람들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시작은 많이 하지만 끝에까지 가는 이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은총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우리의 마지막을 생각하라고 하신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절)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신앙을 묵상하고 항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인간의 본 모습을 잘 깨닫고, 알고 사랑한 분이시며, 하느님께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한 죽기까지 효애를 드린 분이시다. 끝까지 항구한 분이시다. 우리도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같은 항구한 믿음과 온갖 박해도 이길 수 있는 주님의 은총을 청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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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17-22)
이 말씀은, ‘무조건’ 박해가 일어날 것이라는 예고도 아니고 예언도 아닙니다.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하다보면 박해를 받을 수도 있고, 순교를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박해가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의 바로 뒤에,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마태 10,2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박해가 일어나면 피하지 말고 받아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피할 수 있으면 피하여라.”, 즉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 가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피할 수 있는데도 피하지 않고 박해를 받는 것은, 그래서 신앙생활도 못하고 신앙인으로서 살지도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증언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박해가 오히려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박해를 받더라도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멈추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스테파노 순교 후에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 초대교회 신자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중요한 모범이 되고 교훈이 됩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사도 8,1ㄴㄷ)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4)
신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박해를 피해서 다른 지방으로 옮겨갔는데,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사도들은 숨어 있었을까? 사도들도 돌아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다.”(사도 8,14)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전파한 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사마리아의 많은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8,25)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신앙을 증언하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인간적인 말재주’로 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라는 말씀은, 신앙을 증언하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인간적인 말재주로 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라는 뜻이기도 하고, ‘말’로만 하지 말고 ‘성령으로 가득 찬 삶’으로 증언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했는데, 더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서 깊은 산골 같은 곳으로 옮겨 갔고, 교우촌을 만들어서 생활했습니다. 그때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선교활동을 할 수가 없었는데도, 새 신자가 계속 늘어났습니다. 그것은 신자들의 삶을 보고 조선의 백성들이 감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박해받고,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기쁨’에 가득 찬 모습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의 모습 자체가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 되었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기쁨’ 가득한 모습은 곧 ‘성령’으로 가득 찬 모습입니다.>
가족이 가족을 죽게 하고,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항상 그렇게 된다는 뜻은 아니고, 박해 때에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고,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신앙을 버리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가족의 박해는 정말로 참기 힘든 고통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상황도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중요한 말은, ‘내 이름 때문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라는 뜻인데, 만일에 신앙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이라면 그런 극심한 고통을 참고 견딜 이유가 없지만, 신앙 때문이라면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구원의 은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인내하면서 박해의 고통을 감수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에서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박해를 막아 주시겠다는 약속도 아니고, 박해를 받더라도 죽지 않게 해 주겠다는 약속도 아닙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이 약속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지금의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약속 덕분에, 박해를 감내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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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치 예언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가신 다음에 제자들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았는데, 특별히 유다교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잡혀가 신문을 받았습니다.(사도 5,27; 6,12 참조) 사도행전은 이러한 제자들의 역경을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제자들의 증언은 오히려 복음을 선포하는 계기가 되고, 복음은 온 지역으로 퍼져 나갑니다. 박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업적을 이어 가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와 함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이는 한편으로 제자들이 박해를 받을 때에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씀이면서 그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업적이, 복음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여기에 쓰인 “너희 아버지의 영”은 신약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쓰입니다.
영에 대한 표현 가운데 하느님 아버지와 이루는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자주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나 ‘너희 아버지’로 표현합니다. 유다교에서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관계는 이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발전하고, 이는 그리스도인들을 나타내는 특징이 됩니다. 좋은 때든 나쁜 때든, 행복할 때든 불행할 때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과 함께하십니다. 이것이 신앙인에게는 가장 큰 힘이자 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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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윤기성 미카엘 신부님]
오늘 우리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모든 성직자를 위해 신부님의 전구를 구합니다.
성 김대건 신부님께선 1821년 솔뫼에서 태어나 16살에 모방 신부님의 추천을 받아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떠나십니다.
약 10년 후 사제 서품을 받고 1년 1개월 동안의 사제 생활 후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십니다. 신부님의 옥중서한을 살펴보면 40여 차례의 고문들 속에서도 오히려 큰 어려움에 처해 있는 교우들을 걱정하며 더욱 굳건해지도록 마음을 쓰시는 목자로서의 신부님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 강론을 통해 신부님의 편지에 드러난 그분의 마음을 살펴보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누어 보려 합니다.
먼저 신부님께선 비유를 통해 교우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을 격려하십니다. 마치 곡식을 온갖 노력을 기울여 심고 가꾸는 농부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이라는 땅에서 우리를 심고 가꾸셨으니, 수확 때에 잘 영근 벼가 되어 그분의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영근 벼가 된다는 것은 박해라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또한 신부님께선 어려움 중에서도 굳건히 성장해 온 교회의 역사를 들어 예수님께서 언제나 교회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교우들에게 심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세우신 성교회를 어려움 중에서도 성장하도록 보살펴 주셨으니, 한국 교회도 친히 작은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도록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박해 중에서도 오직 하느님만을 신뢰하며 하느님의 보살핌에 한국 교회를 맡기는 신부님의 강인함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근본 원리를 물질에서 찾는 물질주의와 그 물질을 소비함으로써 존재적 갈증을 풀려는 소비주의의 큰 물결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소명에 응답하며 살아갑니다.
사회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수없이 많은 메시지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소명에도 응답해야 합니다.
즉, ‘소비하면 행복해진다’는 메시지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사랑하고 용서하며 또 자신을 내어주면 행복하다’라는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박해라는 어려움은 아니지만, 이런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는 한국 교회가 하느님의 보살핌을 신뢰하며 이 도전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영성을 배워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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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한국인으로서 첫 번째 사제이신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십니다. 고국을 떠난 지 9년 만인 1845년, 중국 상하이 근처 김가항에서 사제품을 받고 귀국하여 1년 남짓한 짧은 사제 생활 끝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하신 분입니다.
참으로 고귀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김 신부님은 서양 학문을 체계적으로 배운 최초의 한국인이었지요.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회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오직 하나만을 택하고 맙니다. 바로 하느님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순교의 칼을 당당히 받았던 그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끝까지 사제의 길을 지킬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서 솟아 나오는 것입니까?
물론 본인의 신심과 열정에서 나왔겠지만, 그 뒤에는 많은 교우가 드린 기도의 힘이 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사제는 신자들의 기도를 통해 성장하고 자신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제들의 힘과 능력, 용기는 신자들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제들이 순수함과 열정을 잃지 않도록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부족한 사제의 노력과 능력을 메워 줄 영적인 힘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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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님]
지난 5월 제주교구로 성지순례 갔다가 용수성지에 들렸습니다. 성지 마당에는 작은 목선 하나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배는 길이 13.5미터, 너비 4.8미터로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신부님이 타고 입국하신 라파엘 호를 복원한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5년 8월 17일에 중국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조선교구 3대 교구장이신 페레올 주교님에게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주 후에 주교님을 비롯한 13명의 일행과 함께 라파엘 호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그런 작은 배로 망망대해를 건넌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모험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김 신부님 일행은 40여 일의 항해 도중, 여러 번 폭풍우를 만나 침몰의 위기를 넘기면서 9월 28일에 제주도 용수리 해안에 표착하였습니다.
김 신부님은 불과 몇 달 전에도 조선에서 구입한 라파엘 호를 타고 상해로 가는 길에서 그런 고생을 하였습니다. 라파엘 호는 1845년 4월 30일에 제물포를 출발하여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였는데, 사흘 동안 밤낮으로 계속된 큰 폭풍우 때문에 김대건 신부님과 동행한 신자들은 죽을 고생을 하였던 것입니다.
신부님은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혀 어찌할 줄 모르는 신자들에게 성모님 상본을 보이면서 믿음을 잃지 말라고 계속 격려하셨다고 합니다.
사실 성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1836년 4월, 15세의 나이로 모방 신부님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되어 그해 12월 고국을 떠나 다음해 6월, 마카오에 도착하여 사제수업을 시작한 이래로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실 때까지 수고와 어려움으로 점철된 삶을 사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처형 직전에도 군중을 향해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 행복을 찾으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고난으로 점철된 삶에서도 김 신부님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조선교회에 대한 사랑은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굳건한 믿음과 사랑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께서는 믿는 이들의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시어 환난 중에도 인내와 끈기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십니다.(제2독서) 또한 예수님께 대한 충실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에게 해야할 말을 일러주십니다.(복음)
지금 우리는 과거처럼 박해를 두려워할 필요 없이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에 대한 도전은 황해의 노도처럼 거세고, 온갖 유혹은 보이지 않는 오랏줄처럼 우리를 옭아매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제들이 더욱더 성령께 의탁하면서 김대건 신부님께 전구를 청하여 굳건한 믿음과 사랑으로 무장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위협하는 거센 파도와 힘차게 싸우고 교묘한 유혹의 올가미를 결연하게 벗어던지며 주님의 복음을 확신 있게 선포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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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억하며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784년 최초의 영세자를 탄생시킨 한국천주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1794년 12월23일 비로소 한국 땅에 처음으로 주문모 신부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 후 1835년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님은 방인 성직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1836년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최방제는 그곳에서 병사하였고 김대건과 최양업은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은 서양 학문을 정식으로 익힌 첫 조선인으로서 최고의 지성인답게 당시 조선 왕국의 국가 정세와 교회 사정 및 민생상태에 관하여 예리하게 관찰하였습니다. 두 분은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유창한 라틴어로 써서 스승 신부님들께 보고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2년부터 1846년까지 21통의 편지를 썼는데 대부분 사제 서품 전에 쓴 것이고 그중 한문과 한글로 쓴 편지가 각각 한 통씩이고 그 외에는 모두 라틴어로 썼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1842년부터 1860년까지 19통의 편지를 전부 라틴어로 썼는데 사제 서품 후에 쓴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1845년 8월17일에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그해 10월에 배를 타고 조선의 충청도 해안에 상륙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846년 5월12일 순위도에서 잡혀 9월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가운데 서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하였지만 아깝게도 겨우 13개월 동안만 사제로 살았습니다. 그나마 2개월은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황해바다 위에서 보냈고 또 4개월은 감옥에서 지내다가 순교하셨으니 사목활동은 거의 하지 못하였습니다.
한국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1784년, 지금부터 약 239년 전입니다. 당시 사회는 유교 사회였고 양반과 상놈이 구별되는 철저한 계급사회였으며 조상 제사에 대한 관습과 예절이 철저했던 때입니다. 이때 천주교회의 기본 교리는 신분 계급과 조상제사라는 두 부분에 큰 충돌을 가져왔습니다.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양반 상놈 차별을 거부하며 우상 숭배의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큰 죄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03년 동안(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 산발적인 박해 속에 살아야 했고 그 와중에 한국인 첫 사제가 나왔지만 13개월 만에 목자를 잃고 만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생각은 분명 다릅니다. 지나고 보니 신부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신앙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출생하신 솔뫼, 순교하신 새남터, 묻히신 미리내는 오늘도 우리에게 신앙의 표징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신부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몫을 여전히 하고 계십니다. 신부님은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상에 대한 희망이 신부님을 지켜 주었습니다.
오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편지를 한 통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 그분의 믿음과 하느님과 그 백성을 위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하였는지 묵상하고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스물한 번째 편지는 옥중에서 쓰신 마지막 회유문(1846년 8월말) 입니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님의 은총으로 세상에 나고 주님의 은총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님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을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은혜를 배반하니 주님의 은혜만 입고 주님께 죄를 더하면 아니 남만 못하리.
이러한 어려운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공덕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성녀의 자취를 가르쳐 성교회의 영광을 더하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의로운 아들)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다) 하실 때를 기다리라.” 하시며 주님께 대한 믿음을 더하기를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큰 어려움도 역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너희가 감수 인내하여 주님을 위하고 오직 주님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하느님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큰 사랑과 믿음을 지키라는 간곡한 호소를 담았습니다. 혹 우리에게도 힘에 겨운 일이 생긴다면 더 큰 믿음으로 주님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농부가 수확을 기다리며 온갖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듯이 우리도 참고 견디며 천상 것에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17-2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1-4)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의 여정을 보면,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어려운 일이 생기기도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실망과 좌절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고 그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따라서 다가오는 예기치 않은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주님의 안배와 섭리를 찾기 위해 기도하고 간구할 때 새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삶은 하느님의 뜻과 세상의 일이 서로를 거스를 때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 속에서, 억울함 안에서, 생각하지 못한 난관 앞에서 끝까지 견디며 하느님을 먼저 선택하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더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만하면 됐지.’ ‘나도 사람인데’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는 이에게는 이것이 유혹입니다. 사실 천상을 바라보고 사는 이에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인내가 행복입니다. 언젠가 천국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 흘리는 수고의 땀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도 눈물과 피로써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면서 걸어가셨는데 우리가 아무런 수고 없이 공짜로 천국을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인내에 인내를 더 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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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때 저의 나약함과 재능 부족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힘없는 저의 모습에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왜 저를 이렇게 힘없고 보잘것없이 만드셨냐면서 하느님께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한때’라고 말하는 이유는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약함과 재능 부족이 오히려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가장 강력한 힘을 드러내셨을까요? 빵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실 테고, 병자의 병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실 때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아닙니다. 가장 강력한 힘을 드러내셨을 때는 바로 십자가에서였습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 구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십자가에 못 박하신 그 장면은 가장 무능해 보이는 순간이며, 가장 나약해 보이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가장 큰 힘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가장 나약하고 부족함을 느낄 때가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쓰실 때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불평불만을 하며 그분의 손길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나약함과 부족함 자체를 볼 것이 아니라, 그분의 능력을 믿고 더 의지해야 할 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성장해 갑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나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지우고, 대신 세상 것에 관한 관심과 믿음으로 하느님과 아무런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성인께서는 아주 짧은 사제 생활을 하셨습니다. 1845년 8월 17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그해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문초를 받으면서 보여준 신부님의 모습에 조정에서는 회유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께는 세상의 기준보다 하느님의 기준이 더 중요했습니다. 특히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느님 나라 안에서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잘 아셨기에 어떻게든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하느님께 철저하게 의지하셨습니다.
신부님을 비롯한 많은 성인성녀들의 희생과 노고가 있었기에 지금을 사는 우리가 편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순교의 영광이 가장 큰 힘을 드러내는 증거임을 지금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을 통해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후손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도 성인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장 큰 힘을 세상에 남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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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라!>
마태오 8,28-34 (마귀들과 돼지 떼)
예수님께서 호수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가라!>
빛께서
말씀하시니
어둠아, 가라!
믿음께서
말씀하시니
불신아, 가라!
희망께서
말씀하시니
절망아, 가라!
사랑께서
말씀하시니
증오야, 가라!
진리께서
말씀하시니
거짓아, 가라!
모음께서
말씀하시니
분열아, 가라!
이음께서
말씀하시니
단절아, 가라!
낮춤께서
말씀하시니
오만아, 가라!
품음께서
말씀하시니
독선아, 가라!
비움께서
말씀하시니
아집아, 가라!
섬김께서
말씀하시니
억압아, 가라!
살림께서
말씀하시니
죽임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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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
-섬김의 사랑, 영광의 희망, 인내의 믿음-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오늘 우리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봉헌합니다. 1845년 8월17일 상해 부근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았으니 조선교회에 첫 사제입니다. 이어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성 김대건 신부의 나이는 만25세입니다. 참으로 꽃다운 한창 젊은 나이에 순교했고 저는 성인보다 무려 3배나 더 살고 있습니다.
만25세 나이로 순교했으나 성인의 삶은 참 판란만장했고 치열했으며 용감했습니다. 말 그대로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승리의 순교자의 삶이었습니다. 우리의 순교적 삶에 무한한 영감과 힘을 줍니다. 성덕의 삶은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의 ‘삶의 양’이 아니라 하루하루 어떻게 살았느냐의 ‘삶의 질’에 있음을 봅니다. 성인의 마지막 1986년 8월26일 순교 얼마전 쓴 옥중편지는 얼마나 꿋꿋하고 박식하고 신심 깊고 효심 깊었는지 언제 읽어도 감동적입니다. 끝부분만 인용합니다.
“저는 감히 주교 각하께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부탁드리옵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못 본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 만나 보았을 뿐 또 다시 홀연 잃고 말았으니, 각하께 간절히 바라건대,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십시오. 이제 저는 진심으로 각하의 발 아래 엎디어, 저희 사랑하올 부친이요 공경하올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의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이후 천당에서 뵙겠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옥에 갇힌 탁덕 김 안드레아.”
제2독서 및 성인의 옥중편지 후 이어지는 응송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그대로 성 김대건 순교자의 고백처럼 생각됩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 4,7-8ㄱ)
성가 287장 5절까지 이어지는 ‘최민순 작사, 이문근 작곡’의 가사와 곡도 불후의 작품으로 부를 때마다 감동입니다. 최민순 시인 신부님의 가사가 참 아름답고 깊습니다. 시간되면 5절까지 불러보며 내용을 음미하기 바랍니다. 우선 1절만 인용합니다.
“서라벌 옛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 옷자락 어둠이 짙어갈 때
진리의 찬란한 빛 그 몸에 담뿍 안고
한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순교적 삶을 살라고 우리를 분발케 하는 순교성인들입니다. 어떻게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첫째, 항구히 주님을 섬기는 사랑의 삶입니다. 성인들은 한결같이 항구히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신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주님만을 섬겼습니다. 이래야 갈림이 없는 하느님 중심의 내적일치의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즈카르야 예언자가 줄기차게 말씀하신 것은 주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고 주님을 사랑하여 섬겨야 하는데 요아스 임금과 유다의 대신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고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예언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거슬러 증언했지만 그들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를 유혹하는 배금주의, 물질주의, 소비주의, 극단의 이념들, 참으로 다양한 형태의 우상들입니다.
참으로 일편단심 주님을 섬기는 삶이 참 자유요 행복인데 예나 이제나 우상들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는데 세상 “맛”에 따라 살아가니 세상 우상들의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힌 즈카르야 예언자의 경고는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 너희가 잘 될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마침내 요아스 임금은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 즈카르야를 죽입니다. 즈카르야의 마지막 임종어가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참으로 시종여일, 죽는 그날까지 주님을 섬기는 삶에 항구하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둘째, 언제나 주님께 희망을 둔 희망의 삶입니다. 주님께 희망의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 희망을 둘 때 한결같은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강조하는 바도 희망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샘솟는 희망입니다. 바로 주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주님께 희망을 두는 삶입니다. 이런 희망이 있어야 유혹에도 안 빠지고 타락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존엄한 품위를 견지할 수 있습니다.
셋째, 끝까지 견뎌 인내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사랑에서 희망이요, 희망에서 인내의 믿음입니다. 주님께서도 걱정하지 말라며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이어 주님은 끝까지 인내의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입니까?
1.늘 주님을 한결같이 섬기는 사랑의 삶입니다.
2.언제나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둔 희망의 삶입니다.
3.끝까지 견뎌 인내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결국은 하느님께 대한 끝까지 한결같은 신망애의 삶입니다. 이래야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하느님 중심의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5,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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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오늘 복음(마태10,17-22)은 '사도들의 파견 사화로써 박해를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길, 신앙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박해가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박해를 각오하고, 그 박해를 견디어 내라고 하십니다. 그 박해를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박해를 각오하고, 이 박해를 끝까지 견디어 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신부님은 1821년 충남 솔뫼에서 태어나셨고,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 땅으로 이주하여, 열여섯 살인 1836년에 용인 은이라는 곳에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나 신학 공부를 마치고,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하이 금가항 성당에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아 한국 천주교회의 첫 사제가 되신 분입니다. 하지만 신부님께서는 이듬해인 1846년 9월 16일 서울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십니다.
26살의 젊은 나이로 장엄하게 순교하셨습니다. 일 년 동안 사제로 계시면서, 1846년 4월 8일 용인 은이에서 마지막 미사를 하시고, 6월 5일에 백령도에서 체포되어, 9월 16일 군문효수형으로 장엄하게 순교하셨습니다. 이렇게 신부님께서는 끝까지 박해를 견디어 내시고 구원의 길로 들어가셨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 앞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때의 박해 상황이 있다면, 우리는 견디어 낼 수 있을까? 신부님처럼,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처럼 그 모진 박해를 이겨낼 수 있을까?
무엇을 빼앗기거나, 해가 될 듯한 말 한마디만 듣거나, 혹은 자존심이 상하면 쉽게 넘어지고, 미사에 나오지 않는 우리가 아닌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나 많은 순교자는 칼(죽음)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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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hKQWXIFv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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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22)
가장 아름답고
가장 진실하고
가장 위대한 것이
진리를 찾아가는
우리의
용기와 실천임을
배웁니다.
관념적 깨달음이
아닌 영원한
진리를 만나는
은총의 역사가
우리 곁에
있습니다.
고정된 관념을
부수니 참된
행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새로움은
산고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합니다.
신앙의 탄생은
그 자체가
가장 소중한
탄생이 됩니다.
일상적인 것이
사실은
가장 신앙적인
것이 됩니다.
삶의 터전
삶의 자리에서
새로워지는
신앙의 꽃입니다.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는
신앙은 새로운
생명력을
켤코 불어
넣을 수 없습니다.
실행을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참뜻입니다.
절실성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는
우리 삶입니다.
환희와 확신은
보편적인 진리를
강하게 체험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가장 순수한
사람의 모습에서
참된 하느님의
구원은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으로
다가옵니다.
몇 마디의
언어가 아닌
믿는 만큼
살게 되는
마음의
구원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의 삶을 통해
사제직의 소명이
진정 무엇인지를
다시 되새겨봅니다.
긴 잠에서
깨어나
복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나눌 때입니다.
마지막 호흡
마지막 고백이
하느님을 향한
절실한 감사이길
기도드립니다.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가르침은
끝까지 견디는
것이며
끝까지 구원의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것이
가장 절실한
구원의 정신임을
믿고 실행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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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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