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57879
장호원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민자영에게 찾아온 한 무당이 "반드시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며 대궐로 돌아가는 날짜까지 예언했다. 당시 분위기에서는 누구도 믿기 어려웠지만 놀랍게도 무당의 예언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청나라 군대에 의해 이하응이 체포되고 군란이 진압되자 세상은 다시 민자영의 소유로 전락했다.
이를 정확하게 예언한 무당은 진령군이란 군호와 함께 무한한 대가를 받게 되었다. 민자영은 인사권은 물론 주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도 때도 진령군의 조언을 따랐으니 진령군은 '비선실세'를 초월하는 실질적인 지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온갖 이권에 개입하고 청탁을 받는데다, 매관매직까지 서슴지 않는 진령군은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조정의 고관들도 진령군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뇌물을 바치고 의남매를 맺었으며, 심지어 양자로 입적되어 권력을 농단한 자까지 나타났을 정도였다. 진령군의 거처가 대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석영이 백성의 마음을 치료하고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다. 전 형조 참의(前刑曹參議) 지석영(池錫永)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 중략 - 신이 전국의 억만 백성의 입을 대신하여 자세히 진술하겠습니다. 정사를 전횡하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수탈하여 소요를 초래하고 원병(援兵)을 불러들이게 만들며 난이 일어나자 먼저 도망친 간신(奸臣) 민영준(閔泳駿)과 신령의 힘을 빙자하여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眞靈君)에 대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
아! 저들의 극악한 행위가 아주 큰데도 한 사람은 귀양을 보내고 한 사람은 문책하지 않으며 마치 아끼고 비호하는 것처럼 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어찌 풀리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상방검(尙方劍)으로 두 죄인을 주륙하고 머리를 도성문에 달아매도록 명한다면 민심이 비로소 상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숨어있는 우수한 인재를 모두 뽑아서 각각 합당한 직무를 맡기고 협력하여 충성을 바치게 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해질 것입니다." - 하략 -
<조선왕조실록> 고종 31년(1894) 7월 5일 3번째 기사
나라가 온통 결딴나는데도 진령군을 탄핵하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 간관(諫官) 가운데 하나가 진령군을 처벌할 것을 주청했다가 오히려 중형을 당하는 판이었다. 그렇다면 진령군은 실제로 영험한 신통력을 갖추었을까? 물론 아니다. 장호원에 있던 민자영을 찾아간 진령군이 재기를 확신한 것은 계산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예언(?)대로 민자영이 재기하는 날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하응에 의해 죽음을 당할 민자영이 보복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간단한 계산이지만 어지간히 담대하지 않고서는 입에 담기 어렵다.
환궁하는 날짜까지 맞추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당시 정국이 반전되는 것은 이하응이 눈엣가시 같았던 청나라가 개입한 탓이며, 민자영도 청나라에 도움을 청한 사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자영이 환궁하는 것은 시간이 문제였겠는데, 환궁한 다음 소문에 소문을 더한 결과 날짜까지 맞추는 신통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졌을 개연성이 높다. 또한 그렇게 되어야 민자영이 하늘의 선택을 받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민자영으로서는 굳이 따질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무당을 신봉하여 나라를 그르쳤던 민자영은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된다. 무수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것으로도 모자라 이하응을 제거하기 위할 목적으로 청나라에 개입을 요청한 것이 빌미가 되어 청일전쟁이 발발하였으니 그 죄과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1895년 8월 20일 새벽 일본에 의해 훈련된 부대가 경복궁을 포위하고 저항하던 근위군을 일축한 다음 일본에서 파견한 30여 명의 자객들이 난입하였다. 고종의 침전에 궁녀 차림으로 숨어 있던 민자영은 정체가 발각되자 밖으로 달아나다가 난자 당해 죽었다. 처참하게 난자당한 시신에 입에 담기 어려운 치욕이 가해진 다음 석유를 뿌리고 불 질렀는 바, 진령군의 신통력은 무당집 부엌에 있는 개다리 소반처럼 별무소용이었다. 진령군은 그런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는커녕 영원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고 홀렸을 것이었다.
무당에게 홀린 민자영은 열강이 노리는 격동의 시대에 무당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다가 처참한 죽음을 당했으니 민자영을 죽인 범인은 진령군이라고 해야 타당하다. 민자영은 대가를 받은 것으로 치부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로 인해 무수한 백성이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고 나라가 멸망한데다, 지금까지도 친일파가 떵떵거리게 만든 죄과는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다.
추가정보
http://www.seniorsinm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4528
인간의 마음이란 본시 유약하고도 간사하여 아직도 불안한 삶에 대한 자구책으로 무속의 힘에 기대는 경우가 빈번하다. 배척당한 무속인이었으나 사람들은 끝없이 그들을 찾았고 한 나라의 국모이자 명민한 여성이었던 명성황후조차 하나뿐인 허약한 아들이 몸져누울 때마다 무속의 힘에 기대 국고를 탕진하기에 이른다. 무속을 맹신한 명성황후를 자극하여 더욱 혜안을 흐리게 한 이가 곁에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진령군 여대감’으로 알려진 무녀 이씨이다.
진령군 즉, 무녀 이씨는 충주 사람으로 과부였다고 한다. 그녀는 임오군란 때 분노한 병사들에게 쫓기던 명성황후가 충주 장호원에 몸을 숨길 때 첫 인연을 맺는다. 권력을 잃고 목숨까지 빼앗길까 매일 두려움에 떨던 왕비에게 무녀는 직접 찾아가 곧 환궁할 것임을 예언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녀의 말대로 왕비는 피신한 지 오십 여일 만에 다시 권력을 되찾게 되었고 무녀 이씨를 신임하다 못해 직접 궁으로 데려와 곁에 두고 수시로 찾는다. 많은 관료의 반대가 있었으나 그럴수록 왕과 왕비는 더욱 그녀를 두둔하였고 이미 관왕묘(관우장을 모시는 사당)인 동묘와 남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운상제를 몸주로 모시는 무녀를 위해 또 다른 관왕묘인 북묘를 지어주기까지 한다. 더군다나 갑신정변 때 북묘로 몸을 피한 왕과 왕비는 그 후 무녀 이씨를 더욱 신뢰하다 못해 혈육처럼 의지하게 된다.
첫댓글 역사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러고보니 딱 맞아 떨어지네요 ㅋ
ㄹㅎ는 민자영의 환생이ㅜ아닐지
ㅂㄱ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적지않은 백성들은 아직 민비를 추앙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