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거리고 싶은 것이다 / 허 연
환희의 기억이 별반 없는 나는 주로 밤이면 내가 살아온 길을 신랄하게 아파했다 그런 날이면 아주 일찍 죽은 자들은 지금쯤 다시 살아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성의 있게 이름을 불러 보곤 했다 어머니, 누님 구자이모 아랑삼촌 명환이 문성이 따지고 보면 이건 나를 부르는 소리다 죽은 나를 돌려 세우고 살아났으면 무언가 새로 켜기를 기대하는 것 끄지 말고 켜기를 사실 열매가 떨어지는 것도 그 열매에서 싹이 나오는 것도 다 내 잘잘못이었다 요즘에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두 번 죽는 일이다 나는 지속되고 싶은 게 아니라 두근거리고 싶은 것이다
— 《맥》 2024년 가을호 ----------------------------
* 허연 시인 1966년 서울 출생. 연세대 대학원 언론학 석사, 추계예술대 박사학위 1991년 《현대시세계》 등단.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산문집 『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등 2006년과 2008년 한국출판학술상, 2013년 시작작품상, 2014년 현대문학상 수상 현재 <매일경제신문> 문화부 선임기자
********************************************************************** 허연 시인에게는 환희를 불러오는 기억이 별반 없다고 한다. “내가 살아온 길을” 생각할 때면 ‘신랄한 아픔’이 그를 엄습했다는 것이다. 그 아픔은 “아주 일찍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지금 여기 다시 살아오기를 기원하며 그들의 이름을 정성껏 “불러 오곤 했다”는 것이다. 시인이 부르는 이름을 보면, 그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처음 부르는 사람은 어머니인 것. “명환이 문성이”가 누구인지 필자는 물론 알 수 없지만, 시인이 무척 아꼈던 이들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이들을 아프게 기억하고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는 행위가 결국 “나를 부르는” 일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죽은 이들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삶이 죽은 이들처럼 죽어버렸다는 것 역시 뼈아프게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죽은 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자신의 이름을 돌려 부르는 행위이며, 결국 그것은 내가 여기 살아오기를 기원하면서 이루어지는, “죽은 나를 돌려 세우”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새로 켜기를 기대”하면서 살 때 진정으로 산 다는 것이다. 전등불이나 라디오에 전기가 들어와 작동하듯이 말이다. 그것은 “두근거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지속될 뿐인 삶을 사는 일은 “두 번 죽는 일”과 같다.
시인은 이렇듯 무언가 새로운 것이 그에게 자극을 가해 심장이 두근거리게 되기를, 그리하여 죽은 ‘내’가 되살아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나’의 재생은 아픔을 무릅쓰고 일찍 죽은 자들을 기억하여 재생하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만남은 나를 죽게 만든 나의 잘못을 인식하면서 이루어진다. 시인에 따르면 “열매가 떨어지는 것도/그 열매에서 싹이 나오는 것도 다 내 잘잘못”인 것, 이는 ‘나’에 의해 죽음과 재생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인식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두 번 죽”지 않고 “죽은 나를 돌려 세우”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다고 결심하듯 생각하는 것이다. 그 되살림은 앞으로만 나아가는 현대적 시간의 흐름에 거슬러서 기억을 활성화하면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성혁 (문학평론가) / 《시로여는세상》 2024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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