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망 / 김분홍
그곳이 허전했다 속을 채우고 싶었지만 채워지지 않았다
중심을 채울 수만 있다면 초록은 허전을 탐색하는 일에 몰두했다
널브러진 관계마다 악성 댓글이 주렁주렁, 혈흔이 흥건해도 바닥엔 탈출구가 없다 매지구름을 봉합하는 남자 불끈 쥔 주먹은 물려받은 음낭처럼 울분을 쏟아내는
호두의 구린내가 욕망을 채우는 일에 집중하고 소문을 껴입은 그녀가 생각을 비웠다
불판 위 조개를 닮은 그녀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을 때 그녀도 한때의 실수였을까 앞섶을 칭칭 감은 피망의 배가 부풀어 올라요 볕이 시드는 식탁에 앉아 입덧이 없는 그녀는 냉장고를 채우고 냉장고는 그녀를 채웠다
피망의 시간은 위태로운 거래
파란을 부추기는 씨앗이 배를 품고 있다
⸺ 《상상인》 2022년 1월호(통권 3호) -------------------
* 김분홍 시인 1963년 충남 천안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과 및 방송대 국문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창과 전문가과정 수료 2015년〈국제신문〉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눈 속에 꽃나무를 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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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비추는 사물들
「피망」에서는 시 제목처럼 ‘피망’에 삶의 어떤 국면이 유추된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피망은 임신한 여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문을 껴입”고 사는 이 여성에게 “악성 댓글이 주렁주렁” 달린다는 표현을 보면 이 여성은 유명한 연예인일 수도 있겠다. 여하튼 그녀가 남자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시에 따르면 “속을 채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피망의 초록색은 그 “허전을 탐색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나타난 우울한 색이다. 남자는 이 여성의 허전함을 이용하여 그녀의 “매지구름을 봉합”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집중”할 뿐이다.
결국 그녀는 구설의 ‘불판’ 위에 놓이게 되고 “불판 위 조개”처럼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파란을 부추기는 씨앗”을 배에 품게 되어 “앞섶을 칭칭 감은 피망의 배가 부풀어” 오르기까지 한다. 그 씨앗은 결국 그녀를 파란에 빠뜨리고 말 것이니 시인은 “씨앗이 배를 품고 있다”고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읽어보았을 때, 이 시는 사물의 어떤 면모나 속성을 통해 어떤 상황에 놓인 삶의 국면을 상상하는 김분홍 시인의 시작법을 잘 보여주는 시라고 하겠다.
- 이성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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