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5일(금)
* 시작 기도
주님...
주님을 따라가야 함에도 내 맘과 내 정욕대로 살았던 나의 모습을 고백합니다.
날마다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갖는다 하면서도 육신의 정욕이 나를 이끌었습니다.
이런 나를 주님의 공의로 심판하여 주옵소서.
지금 당장 나를 지옥으로 던진다 할지라도 이 죄인은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두 손으로 입을 가릴 뿐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내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옛 사람으로 행하던 나의 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기 원하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의 긍휼을 베푸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히 9:1-10
제목 : 하나님과의 사귐은 두려운 떨림과 끌리는 매혹이 매력입니다.
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 나의 묵상
지금까지 구약의 제사장직과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비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월등히 우월함을 역설하였다.
또한 구약의 옛 언약과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새 언약을 비교하면서 새 언약으로 인하여 옛 언약이 낡아지고 쇠하며 없어졌음을 기술하였다.
이제 9장에서는 옛 언약의 제사제도 그리고 성소와 관련하여 그것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첫 언약(구약의 옛 언약)에도 예배의 규칙과 땅에 속한 성소가 있었다.
첫 장막이 마련되어 그 안에는 촛대 떡상 떡이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성소라 한다.
또한 성소 뒤에 휘장으로 가려진 곳을 지성소라 하는데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두른 언약궤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언약의 두 돌판이 들어 있다.
언약궤 위에는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케루빔)들이 있는데 지금 굳이 이처럼 화려한 기물들을 세세히 말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모든 것이 잘 구비된 그곳에 구약의 제사장들이 날마다 그 첫 장막에 들어가서 제사를 행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장막인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혼자서 일 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들어가서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는 제사를 드렸는데 피를 가지지 않고는 그것을 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첫 장막이 존속하는 한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을 성령께서 보증인이 되셔서 확실히 보여주신다.
성령께서는 율법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신다.
그것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만 성령은 그 뒤에 숨어있는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신다.
유대인들은 첫 장막의 지성소를 완전한 것으로 여겼지만 성령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열리지 않았음을 증거하신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약의 첫 장막인 성소는 히브리서 기자가 이 글을 쓰는 당시까지의 비유이다.
그 당시까지는 제사와 첫 장막인 성소의 시대이다.
이 장막에서는 예물과 제물이 바쳐졌지만 이것들이 제사에 참여하는 자 곧 섬기는 자의 양심을 온전하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오직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여러 가지 씻는 예식들로서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 곧 새로운 질서가 세워질 때까지만 맡겨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질서가 세워진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의미한다.
이렇게 초림하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어 눈에 보이는 성소에서 제사를 드리던 시대와는 달리 하늘의 성소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는 시대이다.
오늘 본문은 구약 시대 성소와 그 안에 있던 기물 그리고 제사 예법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성소와 화려한 기물들에 현혹되어 그것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구약의 제사장들이나 백성들의 모습이 아니라 거기에 감추어져 있는 참된 의미를 알아야 할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5절에서 기자가 이것들에 관해서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다고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금촛대와 온갖 금으로 둘러싸여 있는 언약궤와 같이 엄청난 화려함에 눈과 마음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그 뒤에 감추어져 있는 참된 의미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볼 것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는 것이다.
옛 언약은 새 언약의 비유로서 모형과 그림자이다.
첫 장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기물들은 그 자체로 귀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완전한 성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모형과 그림자이다.
그림자의 역할은 그 뒤에 실체가 반드시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실체가 나타나면 그림자는 사라진다.
구약시대의 성소와 거기서 드리는 제사예법은 그림자이므로 실체가 나타나면 없어져야만 한다.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그 때까지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의 지성소는 하늘 지성소의 그림자이며 대제사장 홀로 1년에 한 차례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목적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하늘 지성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구든지 들어가며 죄 사함만 아니라 하나님과 그 아들 그리스도와 함께 사귐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제는 그림자로서의 성소가 아니라 하늘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열려졌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참된 예배로 주를 경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마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구약시대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던 휘장, 사실 그것은 천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천 조각이라도 그것을 짜서 만든 휘장은 두 마리의 말이 양쪽에서 그것을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을 만큼 견고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천 조각이다.
그런 천 조각이 성소와 지성소를 무려 1,500년 가까이 가르고 있었다.
그리고 1년에 단 한 차례 대제사장만 들어가서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자리가 된 것이다.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피를 흘리심으로 하늘 지성소를 가리던 강고한 휘장이 찢겨졌다.
대제사장들은 지성소에 들어갈 때 죽음에 대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귐이 아니라 그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그 휘장이 찢어져 둘로 나뉘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고 그가 어떤 상태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하늘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모태신앙이어서 어려서부터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래서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본 일도 없고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의 특징은 이 세상에 살면서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처럼 율법에 얽매인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사도 아무 때나 할 수 없고 손 없는 날을 골라서 해야 한다.
집에 못 하나도 마음대로 박지 못한다.
집 안에서 장롱을 옮기는 것조차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그것도 무당에게 가서 방향을 받아서 그 방향으로 옮겨야 한다.
자녀들 결혼시키는 것도 사주니 점이니 하면서 날을 잡고 신랑감 신붓감을 고르기도 한다.
아무렇게나 자유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들은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사망의 권세 곧 사탄에게 사로잡혀 살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바로 이러했었다.
제사는 율법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율법대로 행해지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이 온전한 것이 아닌 것은 제사의 주인이요 제물되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다.
그리고 당신이 대제사장 아니 큰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과 분리된 우리를 다시 하나로 연합하게 해 주셨으니 이제 우리는 그것을 누려야 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사귐이다.
이 사귐 안에는 두려운 떨림과 끌리는 매혹이 있다.
그저 구약의 대제사장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운 떨림이며 거기로부터 오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끌리는 매혹이다.
예배는 율법에 의한 의무가 아니다.
주님과의 교제와 사귐이다.
이것은 공동체 예배 뿐 아니라 나 혼자 주님을 만나는 묵상이든 예배든 모두가 동일하다.
개인적으로 주님과 만나는 사귐이 없이는 공동체 예배에 교제와 사귐이 있을 수 없다.
주님과 직접 만나는 교제와 사귐이 공동체 예배를 성공시키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주님과의 교제와 사귐을 갖는다.
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이 결코 아니라 이 자리가 없으면 나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육신으로 있는 자리가 아니라 영으로 주님과 함께 사귐을 갖는 자리요 카이로스인 하나님의 시간으로 영원에 잇대어 있는 시간이다.
이 자리가 나의 죄를 깨닫게 하는 비참한 자리요 나의 무덤이지만 바로 이 자리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와 무덤에 계실 때 아버지의 영광의 빛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도 죽기에만 합당한 나의 죄됨을 인정하며 주님과의 영생의 교제를 나눌 수 있음이 그저 감사 또 감사할 뿐이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인함임을 고백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영혼이 주님의 은총을 입어 율법에 갇혀 있던 자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자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 비록 주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여 내 마음대로 자행자지했던 자였으나 주의 심판을 통하여 복음을 듣게 하시고 율법에 얽매였던 자에서 주님을 힘입어 참 자유를 누리는 자로 바꿔주심에 그저 한없이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흐르나이다.
나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경배와 찬양 그리고 영광을 받으소서.
오늘 하루도 오직 주님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영생의 복이 충만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