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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옛 터전
"강쇠야, 너는 운봉어르신네 모시고 먼저 가거라." "성님은 이 새북에 어디 가실라꼬요." "내 가는 데 알아 뭘 해." 환이는 다른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강쇠를 깨워 이르고 길을 떠났다. 희미한 초승달이 떠 있는 새벽길을 사뭇 걸어간다. 그는 떠날 때 화엄사에 와 있는 혜관을 만나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발길은 엉뚱한 곳을 향해 가는 것이다. 날이 밝기 전에 환이 당도한 곳은 평사리 마을 삼신당이 있는 숲속이었다. 숲속에서 빠져나온 환이는 불타 없어진 누각터에 가서 우두커니 마을을 내려다본다. 희미하게 보이는 강줄기, 강 건너편 산허리가 강물처럼 희미한 하늘 아래 누워 있다. 마을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환이는 조막손이 손가 얼굴을 생각한다. 새벽길을 헤치고 이곳까지 뭣하러 왔는가. 그것에 대해선 도통 생각이 없다. 발이 제 혼자 왔겠지 뭐 하는 투로. 손가의 얼굴을 자꾸만 생각한다. '계집이 있을까, 자식새끼가 있을까, 술은 얼마나 펴마시는고? 옳지! 그자를 한번 찾아가서 술을 마시자. 그자는 강쇠놈보다 더 못견딜 거야. 말을 시키다 시키다 안 되면 술상을 때려엎을 거야,' 환이는 누각터에서 초당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임실의 지삼만이? 그 새낀 배신을 할 놈이다. 물건은 쓸 만하고 큰데 돌아설 게야. 후회하고 마음 아파하고 그럴 놈은 아니지... 일은 그런 자가 쳐낼텐데 아깝군. 죽여버릴까?' 환이는 대숲 속을 헤매고 있었다. 대숲에서 허물어진 담장이 보인다. 환이는 허물어진 담장을 넘어선다. 별당에 불이 켜져 있었다. 환이는 연못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사방에는 옥색빛 아침이 일렁이고 있었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환이는 허물어진 담을 넘어 몸채 안족으로 돌아간다. 아침이 왔는데 기동하는 사람이 없다. 행랑 쪽으로 돌아간다. 마구간에는 말이 없다. 외양간에도 소가 없다. "누, 누구요." 환이 돌아본다. "아, 아." 중년을 넘어선, 그러나 훨씬 더 늙어 보이는 육손이가 벙어리처럼 소리를 낸다. "아, 아, 니, 니는," "오래간만이네." "구, 구천이--" 육손의 두 어깨가 축 늘어진다. "있기는 누가 있이꼬? 곱색 서방님밖엔," 그러다가 다시 겁에 질린 것처럼 환이를 쳐다본다. "서방님이라니 장가도 갔단 말이가?" "가, 가기사 갔지마는... 쑤, 쑥대밭이제. 어, 어서 가라고, 거, 거지가 됐다는 소문이더마는," "..." "좀 있으믄 식구들이 일어날 긴데, 식구래야 머..." "옛날엔 나그네를 괄시하지 않았네." "그, 그래서 너 겉은 놈 두었다가 패가망신 안 했나!" 육손의 눈에 분노가 떠오른다. "너도 여직 연명한 걸 보면 의리 있는 놈은 아니지. 하하, 하하하..." "죽으로 왔나? 미쳤나?" "미치지도 죽지도 못하고, 저기 저 마루에 가서 얘기나 좀 하지." 환이는 육손의 겨드랑을 껴안 듯, 육손은 뿌리치려고 몸을 흔들었으나 환의 힘은 반석 같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공포의 빛이 육손의 얼굴에 떠오른다. 마루 끝에 나란히 앉는다. "어짤라꼬 여긴 왔노." 비실비실 묻는다. "불을 싸질러볼까 싶어 왔더니," "무슨 억하심정으로? 지은 죄도 많으믄서..." "..." "집구석이 콩가리가 됐는데, 그 많은 땅도 남으 손에 넘어가고오, 하기사 뺏은 재물이니께 차라리 속시원할 때도 있지마는... 멀리 멀리 가서 돌아오지나 말 일이제." "아마 돌아올걸 미친놈..." "누구 얘길 하는 것꼬?" "길상이놈," "뭐이라꼬?" 환이는 일어선다. "잘 있게." 몸을 돌려 걸어나간다. "이보라고! 길상이가 우쨌단 말고!" "겁나서 그러나? 하하 하하핫..."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모습도 사라졌다. "저기이 구신이까? 구신한테 홀린 길까? 아이구 모리겄어. 콩가리 콩가리 집안이고... 죽을라나? 와 눈에 헛것이 보일꼬?" 멍청하게 서서 중얼거리던 육손이는 벌렁벌렁 활갯짓을 하며 마을로 내려간다. 육손이 환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실은 정신이 온전하지는 않았다. 순이가 죽은 뒤 순이와의 사이에 낳은 계집아이를 애지중지 길러왔었는데 그 아이를 서울서 내려왔던 홍씨가 잔심부름 시키겠다 하며 데려간 것이다. 그 후 반정신이 나간 사람이 된 것이다. 육손은 논둑길을 벌렁벌렁 걸어간다. "한복이이--" 이른 아침부터 논갈이를 하고 있던 한복이 돌아본다. "니 방금 구천이 못 봤나?" "구천이가 누군데 그러요." "아아, 아 참 니는 잘 모르겄구나. 그라믄 누구 이 길을 안 가더나?" "아무도 안 가던데요." 한복이는 딱하다는 듯 육손이를 쳐다본다. "서울 간 딸 소식 들었소?" "들으나마나." 했으나 육손이는 걸핏하면 벌렁벌렁 두 팔을 휘저으며 마을로 내려왔고 상대편에서 딸 얘기를 안 하면 그 자신이 꺼내는 것이다. "니는 이분에 생남했다믄?" "야." 어제도 물어본 말이었고 한복이도 어제처럼 짤막하게 대답한다. "참말이제 하늘도 무심쿠나. 샐인 죄인 아들도 딸 낳고 아들 낳고 땅 사고 집 장만해서 사는데..." 갑자기 심술이 치미는 듯 육손이 내뱉는다. 한복이는 말없이 가래질을 시작한다. 또 다시 외로워진 육손이 우두커니 하늘을 보다가 "아무튼지간에 생각해보믄 그게 다 구천이놈 때문이제. 내가 이리된 것도 물줄기로 찾아올라간다 칼 것 같으믄... 최참판댁이 안 망했으믄 내가 이리 될 리가 없고오. 그만 아까 그놈의 애목이라도 물어씹을 거로 그랬나? 하기사 구신이제, 구신." 논둑길을 되잡아서 걸어나오는 육손이, 보리쌀 든 사기를 이고 우물길을 가던 봉기 마누라와 마주친다. "육손이 팔자 늘어졌구마." "뭐라꼬요?" "아침부터 놀러 댕기는 팔자가 좀 좋은가?" "할일이 있어야제요. 주인 없는 집," "주인이 없긴 와 없노." "있으나마나, 참 두리어매," "아아니 시집가서 자식 놓고 사는 사람, 뉘집 애 이름이가? 두리, 두리, 와 카노?" "야, 그러사 머, 그런데 말입니다. 구천이 가는 것 안 봤소?" "머라 카노? 이 사람이 환장을 했나? 뜬금없이 구천이라니?" "아, 구천이요. 길상이가 올 기라 카더마요." "쯔쯔," 혀를 차면서 지나치러 하는데 치마꼬리 잡고 따라가는 애처럼 육손이는 봉기 마누라의 하얗게 된 얹은머리를 쳐다보며 따라간다. 밭둑에서 송아지가 운다. 육손이는 봉기 마누라 뒤를 따라가다가 송아지를 우두커니 바라본다. 봉기 마누라가 우물가에 갔을 때 복동이네(서서방의 자부)가 물을 긷고 있었다. "일직구마요. 벌서 보리를 곱찍었십니까?" 중년티가 완연한 복동네가 안쓰러워하며 묻는다. "누구 해줄 사램이 있어야제." "좀 편할 나인데," "무신 대복으로? 아직이사 곰뱅이가 성한께... 너거는 지난 장에 무명을 많이 냈다믄서?" "많이 내기는요, 열 필 냈지요. 김훈장댁에서는 열다섯 필 내고," "그 댁 자부는 아금발라서 어정개비 서방 데리고 이럭저럭 사는구만." "사램이 용해서 그렇지, 농사 지으니께 반년 양도는 되는 모양이더마요. 남자 손떠배기 없는 우리네보담이야," "요새도 그 집에 순사가 찾아오는가?" "머 그런 말은 안 합디다." "보래?" "야?" "아까 최참판네 육손이가 구천이를 못 봤느냐고 날보고 묻더라. 영 사람이 돌았는가배. 너 씨압씨맨쿠로 또 한 사람 미친 모앵이다." "구천이를 보았느냐고 물어요?" "응." 북동네는 물을 긷다 말고 봉기댁네를 빤히 쳐다본다. 봉기댁네는 보리쌀을 씻고 돼지밥통에 뜨물을 부은 뒤 "여기 물 한 바가지 부어주라." "야." 복동네는 급히 물을 길러 보리쌀 사기에 붓는다. "참 이상도 하지." "뭐가?" "구천이 말을 한께, 실은 나도 보았소." "머라꼬? 구천이를 보았다고?" 보리쌀을 헹구다 말고 복동네를 쳐다본다. "보았소. 긴가민가 하고... 하도 세월이 오래라서 믿기지도 않았는데, 그러니께 육손이도 보긴 보았구마요." "미친 소리 마라. 구천이가 지금꺼지 살아 있을 리가 없지. 헛것이다." 봉기 마누라는 일소에 붙인다. 이 무렵 환이는 마을 어귀 영산댁 주막을 찾아가고 있었다. 가는 도중 환이는 낯선 농부 한 사람을 만났다. 험상궂게 생긴 사내였다. 사십쯤 보이는 건장한 몸집의 사내는 거름바지게를 짊어지고 가면서 눈을 치뜨고 마주친 환이를 쳐다보았다. 흐리멍덩했던 눈에 별안간 살기가 떠올랐다. 낯선 사람에 대한 적의였던 모양인데 적의치고는 치열하다. 그 농부말고 주막에 이르기까지 환이는 아무도 만난 사람이 없다. 마을은 조용하고 너무 조용하여 그림 같았고 빈터처럼 설렁해지는 기운이 사방에 감돈다. 산천에는 봄빛이 완연하건만, 산은 푸르고 강물도 푸르고 매끄럽게 흐르고 있었건만 영산댁 주막도 낡고 헐거워 보였다. 엉성하면서도 굴간같이 어두운 느낌이 든다. "어여 오시시오." 그럴 나이도 아닌 텐데, 머리도 아직은 까만데 그러나 영산댁은 할망구가 다 된 것처럼 국솥에 불을 지폈는가. 머리에 불티가 앉아있고 눈까풀이 무겁게 처져서 영산댁은 구천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러크름 일찍 어디 가신다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가겟방 주모 자리에 가서 앉는다. "어디랄 것도 없고 해장이나 합시다." "그러시오." 몇몇 해나 도배를 아니 했던지 술청의 벽면도 그렇고 술판도 기름때에 절어서 거무칙칙하다. 나무통에 꽂아놓은 싸구려 주석 숟가락마저 을씨년스럽다. 시래깃국 한 대접과 탁배기 한 사발이 술판에 나왔다. "주모는 혼자 사시오?" 두 허벅지에 주먹을 짚고 앉아서 술과 김이 피는 해장국을 노려보듯 하고 앉았던 환이 눈을 들어 영산댁을 쳐다보며 묻는다. "혼자여라우." 툭 내쏘듯 "함께 살아도 편허질 않고 혼자 살자니 적막강산이고 참말이제 워찌 살아야 헐지 모르겄어라우." "주인장은 죽었소?" "야아, 뒤졌제라. 조선팔도 다 댕기면서 계집질 노름판, 그러크름 하고서 멩대로 살 것이오? 법으루 만낸 서방도 아니지만... 잡것..." 치맛자락을 걷어 힝 하고 코를 푸는데 콧물은 눈물과 엇비슷한 것, 짐승궂다. 외로움에 찌들고 세월에 찌든 모습이 낡고 때묻은 입성같이 처량하다. 영산댁은 빈 사발에 술을 채워준다. "주모는 이곳에서 오래 살았소?" "하모니라우. 오래됐제요. 내 각시 시절에 청보따리 하나 끼고 와서 여그다가 주막을 차렸인께로 반평생인디, 워째 사람의 맴이 늙은께로 그런가 요새는 아침 저녁으로 뵈는 산천도 늙은 것 같들 않겄소잉?" "산천이 늙는다... 그럴 법도 하군. 늙기는 늙을 게요. 하하하하..." 웃으면서 환이는 옛날에 보기보다 영산댁이 수다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어여 술이나 드시시오. 국이 다 식겄는디," 환이는 해장국 한모금을 마시고 술을 들이켠다. 들이켜면서 바위를 치며 쏟아져내리는 폭포 생각을 했고 술판에 내려놓은 뒤 묻는다. "동네 인심은 전과 같소?" "말도 마시시오, 모두 뜨내기판인께로, 늙어서 죽고 의병 나가서 죽고, 조가놈 등쌀에 죽고 쫓겨나고, 옛 얼굴을 보기도 심드는디, 무슨 놈의 조석변동인지 땅 임자 작인이 조석으로 베끼니 이래 가지고는 마을인들 되겄단 말씨. 소문 들은께로 조가놈이 여거 옥답 몇 마지기를 읍내 왜놈헌티 기부혔다는 말도 있고 그러니 왜놈지주가 오죽헐 것이며 또 작인이란 작자는 어디서 굴러온 돌멩인지 뉘 알겄어라우? 동네가 아주 망해버린 거여." "망해버렸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일껏 설명을 했건만 환이는 맨 마지막 말만 들었는지 되물었고, 일껏 설명을 한 영산댁도 자기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한 듯 환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금매 동네가 아주 망해버렸다 그 말 아니여라우." "왜 그렇게 됐소?" "아아 나라가 망혔인께로 자연고로 동네가 망허는 게 이치일 것이요만 여거 사정은 좀 다르단 말씨." "어떻게?" 영산댁은 빈 술잔에 술을 부어놓고, "망한 사단을 찾는달 것 겉으면 오랜 이야긴디 그걸 워찌 다 말헌다요? 한마디로 이 동리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최참판네 녹을 먹고 살았다 쳐도 과언은 아니여라우." "최참판이 아니라 최임금이었구먼." "말이 그렇다 그거 아녀? 아무튼지간에 동네 기둥이 뚝 뿌러졌는디, 그 댁 서방님이 비명횡사한 게 그것이고오, 다음에는 최씨네 핏줄이 끊어진 것디, 여식아이가 하나 있었지만 여자가 사람이간디? 자식이 어미 성씨 따르는 법은 없인께로. 그 차중에 괴정이 돌아서 마을을 싹 쓸어부맀고, 참말 대들보가 뿌러졌지라우. 최참판네, 그댁 마님이." 환이는 가만히 술잔을 들어올린다. "그렇기 되고 본께로 까마구 까치집 채듯이, 천하강산에 혈혈단신 나이도 미성한 여식 하나 남았으니, 아 세상에 조간가 뭔가 만석살림 침 한 방울 안 흘리고 먹어치웠당께로. 허지만 세상에는 공것이 없어야. 하늘이 씨퍼렇기 내려다보고 있는디 그 살림을 부지할랍디여? 그것도 왜놈을 앞장세우고 또 그자는 의병들헌티 당한 것을 핑곌 삼고 또, 또 죄 없는 사램꺼지 의병으로 몰아서 잡아죽이고 잡아넘기고, 도척이 겉은 인심 아니고 멋이겄소? 아무리하면 그, 그러크름 혀서 뺏은 살림이 오래 갈랍디여?" 흥분하여 지껄이다가 영산댁은 갑자기 눈알이 횡해진다. "손님은 어디서 오는 길이여라우?" "어디랄 것도 없고 정처없이 떠도는 사람이오." "그렇담 이 동네 최참판네 형편은 영 모르겄소잉?" "소문쯤이야 들어 알지요." "아아, 알고 기셨어라우."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영산댁 얼굴에 활기가 떠오른다. "금매 모릴 사람이 없을 것이요이. 이약도 하 많고 그 거궁한 살림이 일패도지, 최씨 가문이 끊겼으니 말이요이." "요즘 그 댁 형편은 어떤가요?" "말도 마시시오. 헌디 그 댁이라니? 이 근동서는 그 댁이라 말허는 사람 아무도 없단 말씨. 도적놈에다 역적놈인디." 영산댁은 화를 낸다. "아아, 그럼 조가놈." "그 집구석 이야그라면 말도 마시시오. 서울로 거산해 가다시피허고, 곱새아들 하나가 남아서 하인놈 침모 그리고 맹추라는 덩신겉은 종년 하날 데리고 거궁한 집을 지키는디 여름이면 풀이 우묵장성이라 구랭이가 우굴부굴허고 대샆에서는 귀신이 난다는 말도 있는디 흥, 얼마 전에 곱새아들 혼사가 있었지라우." 영산댁 얼굴에 비웃음만도 아닌 묘한 웃음이 지나갔다. 영산댁 입에서 말은 이미 나오게 되어 있는 것, 새삼스러운 말도 아니었으니 환이는 술잔만 기울인다. 실상 영산댁의 넋두리 섞인 그런 얘기를 들을 이유도 없었다. "그 곱새아들이사 무슨 죄 있간디? 몸이 병신이제 맘은 백옥 겉다 허든디. 내가 왜 이 집 주인이겠느냐면서 오히려 하인 행셀 허고, 그러니 그 집구석 하인이나 종년은 팔자 늘어졌지라우. 방구들에 똥을 싸도 말헐 사램이 없인께로. 혼사헌다고 금년 봄 들어서 묵은 때를 좀 벗깄일 것이요만," 환이는 자신이 주막에 죽치고 앉아서 왜 떠나지 못하고 있는가하고 생각한다. 해장술 한두 잔 들이켰으면 길을 떠나야 한다. 서울로 가게 되어 있는 혜관을 만나야 한다. 낡아 기울어져가는 옛 주막에 앉아서 다 알고 있는, 아니 그 숱한 얘기 속 인물의 한 삶인 자신이 그런 얘기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마을 근황에 대해선 혜관이 더 잘 알고 있고 소상한 보고도 받은 바 있지 않은가.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아아 그렇지라우. 아무리 재물이 좋다고는 혀도 헛다리 짚은 거란 말씨. 빈한한 선비집 딸이라 허는디 아 글씨 명색이 선비랄 것 겉으면 아무리 지체가 높다 헌들, 신랑이 병신인 것은 두고라도 조가네 역적, 도척인헌티 딸 줄 것이요? 그쪽도 창자가 썩은 선비일시 분명코. 시애비나 시에미 되는 조가 내외들도 아들을 강아지만큼도 생각 안 허는디 그래 며느리라고 떠받들 것이요? 이야그를 들은께로 혼삿날 받아놓고 곱새아들이 그랬다는디, 머리 깎고 중이 될려 해도 육신이 온전찮으니 내가 어디로 갈꼬, 허면서 한탄을 혔다 그러더랑께." "얼굴이 관옥 같다든가? 허허헛..." "손님도 아시기는 아시누마. 암은이라우. 얼굴이사 하눌의 선관이제요. 헌디 손님?" "..." "얼굴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아까부텀 어디서 본 듯허다는 생각을 혔는디 이제 본께로." "어디서 나를 보았소?" "본 게 아니라 닮았어야." "..." "꼭이 닮은 건 아닌디, 비슷이 역력허당께로?" "..." "최참판네, 목 졸리서 죽은 그 양반 말씨, 어딘가는 몰러도 비슷이 있단 말씨." 환이 얼굴이 순간 새파래진다. 입술까지 새파래진다. 희미한, 아주 희미한 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번진 채 얼굴이 굳어져버린다. '그럴테지. 비슷한 데가 있구말구. 한뱃속에서 나온 처지니까.' "손님, 워째 그런다요?" 환이는 빤히 쳐다볼 뿐이다. "손님, 내가 못할 말 혔소?" '어지간히 점은 잘 찍었네. 길목서 술장사 수십 년 이력이 있으니 눈이 맵긴 맵군.' "목 졸리 죽은 사람을 닮았다 한께로, 맴이 안 좋았어라우?" '한데 영산댁, 구천이를 몰라보니 허허헛, 늙긴 늙었군. 허허헛...' 머슥해져서 영산댁은 술잔에 술을 채워주고 환이는 꺼뭇꺼뭇한 점이 박힌 술사발을 들면서 영산댁을 빤히 쳐다본다. '참 요상한 사람 보겄더라고? 누구간디 최참판네 사랑양반을 닮었이까?' "아따아! 이판사판 술이나 한잔씩 하고 가자고." 주막에 새 손님이 들어온다. 두 사람은 억실억실하게 생긴 장골들이요 한 사람은 나이 티가 나는, 곱상한 얼굴이다. "무신 바람이 불었당가?" 술판을 닦으며 영산댁이 말했다. "올 바람이 불었제." 퉁명스러운 음성과 함께 중년사내 셋은 땀냄새를 풍기며 술청에 오른다. "어디 갔다오는 길이라? 아침부텀서," 술시중을 들면서 영산댁이 물었다. "밥맛 떨어지는 데 갔다오누마." 윗마을 오서방의 대답이다. "밥맛 떨어지는 데랑이?" 술을 벌떡벌떡 들이켜고, 세 사내는 해장국을 훌훌 마신다. "제에기, 영산집이 탕수국 묵을 나이도 아닌 긴데 국맛이 와 이렇소?" "국맛이야 춘하추동 그 맛이제. 내 짐작허니 혓바닥에 바늘 돋쳤는개비여." "혓바닥에 바늘도 돋칬일 기구마는." "밥맛 떨어지고 혓바닥에 바늘 돋쳤다 허는디 노름판서 밤샘혔당가?" "제에기 물어도 쌌는다. 관가 송사라!" "그건 또 무신 말이다요?" "그 빌어묵을 우가놈이, 그 빌어묵을, 그만 질근질근 씹어묵고 싶다마는, 하 참, 사람 악한 거는 범보다 무섭다 카이." 오서방은 속이 타는지 술을 바싹 마른 입술을 열고 들이붓는다. "웟따매 갈증은 이쪽서 나는디, 무신 이야그라?" "우가 그놈이 난데없이 오서방을 의병질했다고 찔렀던 기라." 오서방 대신 그의 처남 끝봉의 말이었다. "오매, 우가 그자가 사람치고는 말자라 혀도 세상에 그럴 수 있는감?" "우가놈이 찌른 건지 다른 누가 찌른 건지 그거는 확실찮은 얘기구마. 우리 눈으로 본 게 아닌께." 곱상스레 생긴 오서방의 외사촌형 전서방이 말을 막는다. 오서방의 수염이 푸들푸들 떤다. "아 그놈 아니고 누가 했겄소? 지리산 중놈이 했겄소?" "허허 설사 그렇더라도," "그 목을 쳐죽인 놈이 며칠 전에, 아 영산댁도 내 말 좀 들어보소. 그놈이, 그 목을 쳐죽일 놈이 우황 든 소를 속임수를 써가지고 팔라 안 카겄소? 그래 이 사람아 장사꾼이 사간다믄 모리까 하기야 속을 장사꾼도 아니지마는, 다같이 땅 파묵고 사는 농사꾼한테는 그러지 말게, 아 그랬더니 이놈이 티끌이를 잡아서 쌈을 걸어오는기라. 마치 내가 훼방을 놔서 소를 못 팔기라도 한 거맨치로. 그래서 대판으로 싸웠는데 나중에 들은께 흥정이 안 됐다 커더마. 봉사한테 판다믄 모리까. 이놈이 그래서 나한테 앙심을 품은 모앵인데 온 세상에 잠자다가 날벼락을 맞아도 푼수가 있지 언제 내가 의병질을 했던고?" "흐흥, 전에도 그런 사람 하나 있었지야. 눈밖에 난 사람이면 의병질혔다 그 한마디로, 죽고 사는 게 그자 손가락 끝에 매이지 않았더라고?" "아 설사, 설사 말이오. 이분에 내가 읍내 주재소까지 가서 총을 맞아 죽었다 카더라도 내 하나 죽으믄 그만이다 생각느다믄 어리석은 일이라. 내 자식새끼들이 있는데 애비 원수 안 갚을 기든가? 한조 아들네미도 지, 진주서 헌헌장부로 커가지고 아배 원수 갚을 기라고 칼을 갈고 있다는 소문 못 들었던가? 천하 없이도 지은 죄는 남 주는 거 아닌께. 아, 아니고 말고! 이, 이놈을 그만, 맷돌에다 갈아마시도 맴이, 어이구! 우가놈 이놈아!" 그 동안 어지간히 참은 모양이다. 술이 들어가자 둑이 터진 듯 울분이 솟구치는가. 오서방은 바싹 메마른 입술에 거품을 물고 허공에다 주먹질한다. "허허어, 그럴 기이 아니라고.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캤는데," "그러는 기이 아니라고요? 형니임! 지렝이도 밟으믄 꿈틀거리는데 하물며 사람이, 그것도 생사가 걸린 모함을 받았는데도요?" "사람 영악한 거 범보다 무섭다 안 했나? 그놈 건디리봐야 물구신맨치로 감고들 긴데, 일 없이 풀리나온 것만도 잘 된 일이라 생각해야제." "하모요. 잘 된 일이라 생각해야제." 끝봉이 사돈뻘 되는 전서방 말에 맞장구를 친다. 외사촌형과 처남이 설동하여 읍내서는 말발이 선다는 허주사의 보증을 얻어서 겨우 끌어내온 오서방인 만큼 두 사람은 제발 성가신 일이 다시 없기를, 그것만을 바라는 마음은 일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잘 된 일이긴 머가 잘 된 일이오? 아 그래 내가 의병질을 하다 붙들려갔단 말이요?" "허허어. 이런 세상을 살자 카믄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흥챙이가 돼야, 참말로 칼날 같은 세상인 기라. 임금님도 들어내고 총칼이 소리치는 세상인데 우리 겉은 농사꾼이야 그저 죽은 듯이 들엎으고 있는 기이 상수라. 도적을 피하믄 강도를 만낸다는 말도 있듯이, 참말이제 옛적에야 아무리 수령관속이 백성을 수탈한다 캐도 우리네 상사람끼리는 할말 하고 살았는데, 그뿐인가? 동네에는 법이 있어서 사람 같잖은 놈은 동네에 살지도 못했고."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으며 전서방이 말을 끊자 끝봉이 받아서 "살도 못했지요. 동구 밖으로 쫓아내믄 그만이었인께. 사람짓 못하믄 맞아죽어도 말을 못하지 않았소? 세상이 이렇기 되어가다가는, 참말이지 이렇기 되어가다가는 조상 산솔 파헤치도 꿀묵은 버부리놀음 안 하겄소?" 한동안 세 사람은 풀이 죽어서 말이 없다.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나그네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을 리 없다. "동네 인심이 너남지간 없이 날로 야박혀가는디 그 중에서도 우가하고 마당쇠하고가 젤로 큰일이란 말씨. 에지간히 나쁜 축에서는 걸맞지 않더라고? 성씨부텀 그렇제 우가는 외양간에 살어야 허고 마가는 마구간에 살어야 하는디 그래야 쓸 것인디 푼수없이 사럼집에 산께로 그런 횡패 아니더라고?" 풀이 죽었던 세 사람이 피시식 웃는다. "우가도 우가지마는 속으로는 숭측한 독사뱀이 들앉았다 카더라도 우선 외면 치레만은 하는 놈이니께, 마당쇠 그놈의 행실이야 들내놓은 거고, 옛적 겉으믄 당산나무가 성가싰일 기고 볼기짝에는 멍 가실 날이 없었일 긴께." "볼기짝에 멍 가실 날 없어도 제 버릇이야 남 주겄소." "영락없는 되놈이라 카이. 마당쇠 그놈 모양을 보라고?" 전서방은 붕어 물 먹듯 담배를 피우고 처남 끝봉이와 매부 오서방 둘이서 말을 주고받는다. "나쁘기로는 우가 그놈 곁방 나앉으라 하겄지마는 천치 겉은 데가 있어서," "칠푼이니 망정이지. 그 차중 우가놈맨치로 재주꺼지 피운다믄 동네 사람 다 잡아묵게? 하야간에 마당쇠 그놈 가진 거라고는 똥창에 똥밖에 없일 기구마. 그 주제에 꼴에 꼴방망이 차고 남해 노량간다고 제 제집만은 오금덩이겉이 우둔다 카이 한 가지 볼 점은 있는 모양이제?" "그놈도 미친놈이고, 서서방맨치로 미친놈 자꾸 생기겄소." 누이를 좀 위하라는 매부의 압력으로 받아들인 오서방 시뿌드드해서 말대꾸. "허기야 마당쇠헌티는 과한 마누라 아니더라고? 제집이 그만헌께로 동네서 원성도 덜 듣는 거 아닌게라우." "세상에는 호랑이 잡아묵는 담보가 있다 카더라만 마당쇠 그놈한테도 무서븐 거는 하나 있지." 끝봉이 쓴웃음을 띠고 "순사 말이라?" 영산댁 말에 모두 웃는다. 붕어 물 먹듯 곰방대를 빨고 있던 전서방도 웃는다. "주모, 여기 술이오."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영산댁이 허둥대며 환이 술잔에 술을 붓는다. "순사만 보믄 꽁지에 불 붙은 거맨치로 그 덩치 하고서 도망가는 꼴이라니, 며칠 몇 밤 부엉이새맨치로 숨어 있는 꼴이라니, 가관이제. 오서방 잡을라꼬 순사가 왔일 때만 혀도 허 참 그자가 먼지 뛰더라니까." "그란혀도 마당쇠 아낙이 며칠 동안 애먹었어라우. 어지 저녁때 게우 시루봉에서 찾았다잖여? 아그 달래듯기 달래서 데리왔단께." "미련한 놈이, 하기는 순사라도 그만큼 겁내니께 논골 장서방도 그 원수는 면할 수 있었을 기라." "그런달 것 겉으면 논골 장서방이 순살 물러딜이서 마당쇠를 내쫓았다 그 이야기라?" "장서방이 무슨 권세 있다고? 흥." "그렇담 무신?" "새로 된 땅 임자가 머 왜놈이라 카든가, 왜놈 첩년이란 말도 있고, 그거야 머 자세히 아나마나, 하야간에 세도를 가진 놈이겄지. 순살 불러들일래믄," "그도 그렇겄소. 순사 말이 났인께로, 아 금매 지난분에 마서방, 순사만 보면 꽁지에 불 붙은 거맨치로 달아나는디 워째 그런당가? 허고 물었더니 항우장사라도 우쩔 기든고? 화등잔 겉은 문서 있는 제 땅도 뺏들어가는 왜놈이니께, 총 한 방이믄 그만이라요. 내 이 눈으로 푹 꼬꾸라져 죽는 꼴을 봤이니께, 아무리 내 심이 항우장사라 캐도 총 앞에서는 벨 수 없는 기라요. 아 지리산의 생이틀 겉은 호랑이도 총알에는 못 당하니께, 허질 않겄소? 그 말 듣고 한참 웃었제라우." 시름을 잊은 것은 아닌데 모두 웃는다. 화제에 오른 마당쇠, 성은 마가요 이름은 당쇠라 해서 마당쇠인데 환이 주막으로 올 때 만난 그 사내가 마당쇠이다. 이야기를 더 거슬러올려 본다면 십 년 전, 호열자가 퍼졌을 그 무렵 그러니까 죽은 최참판네 김서방이 마름 장서방 집에서 만난 일이 있는 바로 그 농부다. 참판네 마름이믄 천하 제일이오! 떼거지라니! 없는 놈의 이름도 성도 없다 말이오! 하며 험상궂은 얼굴에 눈을 까뒤집고 덤비던 사내, 해면 해마다 약정한 대로 수곡을 낸 일이 없고 그럴 때마다 땅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은 거품을 물고 울부짖고 어느놈이 죽는가 사는가 보자! 동네가 떠나가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괭이를 둘러메고 논으로 달려가던 사내, 논둑에서 몇 날 몇 밤을 지새우며 누가 논을 떠메고 갈 듯이 지키던 미련한 마당쇠였었다. 그 마당쇠가 논골에서 순사에게 쫓겨난 것이다. 그러나 마당쇠의 뚝심은 최참판댁으로 밀고 들어갔고 화장작같이 안마당에 드러누워 이치가 안 그렇소오! 최참판네서 땅만 팔지 않았다믄 와 내가 쫓겨났겄소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마침 마을을 떠나는 작인이 있어 결국 평사리에서는 혹을 하나 붙이고만 셈이다. "흥, 가리늦기 이기이 무슨 고생일꼬. 아무튼지간에 동네에 남아날라 카믄 우가놈 겉이 영악하든가, 마당쇠 겉이 미련하든가 둘 중 하나라. 이차에 그만... 생각을 고쳐묵고 저븐 생각도 들고, 부산 겉은 도방에나 나가서," 오서방 탄식에 끝봉이 "부산 가서 머 해먹고 살라꼬." "산 입에 거미줄 치겄소. 선창가에서 짐이라도 날라주믄 설마 밥이야 안 굶겄지요." "내 고장도 인심이 이러크름 신산헌디 객지서 어느 누가 타관사람 반기겄으라우?" "도방이니께... 남이야 밥을 묵던 죽을 묵던 참견이야 안 하겄지요. 안 한 의병질 했다고 찌를 놈도 없일 기고 사람이 하루를 살아도 마음을 놓고 살아야지." "그럴 바에야 부산 갈 것 없고 더 멀리 만주 땅에나 가지 머." "살자니 그렇고 더나자니 또 정처없고 참말이제 우쨌으믄 좋을지 모리겄소."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여. 절에 가면 편헐랑가 혀도 가보면 그렇고, 참고 살아야제. 부모 산소의 풀은 베야, 안 그렇더라고?" "그러시오. 우짠지 동네에 들어가기가 싫구마요." "싫으나 좋으나 할 수 없제." 전서방이 곰방대를 털고 허리춤에 찌르며 일어섰다. "빌어묵을, 제집자식만 없이믄 그놈을 그만, 내 죽고 지 죽고." 전서방은 오서방을 떼밀고 나가고, 끝봉이 술값을 내면서 처음으로 그곳에 외간 사람이 있는 것을 깨달은 듯 환이를 힐끗 쳐다본다. "..." 자석처럼 끌어들이는 그 눈매, 끝봉은 까닭도 모르고 허둥대며 주막을 나간다. 허둥지둥 두 사람 뒤를 따르다가 '가만있자아?' 걸음을 멈춘다. '가만있자, 가만있자... 누구더라? 저게? 마, 맞다! 최참판네 머슴놈 구천이다아!' 긑봉은 오던 길을 되잡아 주막을 향해 사뭇 달려간다. '허 참 뜬금없이, 그자가 여기 머힐라꼬 나타났이꼬? 죽었다 카더라마는 설마...' 그러나 끝봉은 자석같이 잡아끄는 그 눈을 똑똑히 기억한다. 끝봉이 주막 앞에까지 갔을 때 끝봉이 돌아올 것을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환이는 문 쪽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쫓는 처지도 쫓기는 처지도 아니었는데, 원수도 친구도 아니었는데, 끝봉이로서는 어리둥절한 대결이다. 말한 마디가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환이에게 잡힌 눈을 빼내지 못해 숨이 가빠온다. 얼굴이 벌개진다. 환이 미소지으며 술잔을 드는 순간 끝봉은 물러섰다. 미소짓던 얼굴, 악귀 같은 얼굴, 끝봉은 몸서리를 치면서 헐레벌레 걸어간다. 저만큼 개울가를 따라서 걸어가는, 무명 두루마기에 갓 쓴 전서방과 동저고릿바람인 오서방 뒷모습을 향해 끝봉은 급히 걸어간다. "사돈," "와 그라요." 전서방이 돌아온다. "오서방!" "야?" 오서방도 돌아서서 기다린다. "거 희한한 일이 다 있구마." "머가요?" "주막에 말이다. 혼자서 술 마시고 있는 사람 안 있더나?" "야." "누군지 아나?" "우찌 알겄소." "구천이다. 최참판네 머슴 구천이란 말이다." "머라 카요?" "사돈, 틀림없는 구천이오. 이 눈으로," "허허어, 신소리 그만허소." 전서방은 일소에 붙인다. "틀림없는 일이라요. 나도 하 이상해서 주막에 도로 안 갔십니까? 가서 똑똑히 봤단 말입니다." "사람을 잘못 보는 수도 있인께." "허허어 참, 내 말이 안 미더브믄 사돈이 가서 한분 보소." 전서방은 팔자걸음을 휘적휘적 걸으며, "가서 볼 것도 없고, 설사 거기 있는 살매이 구천이라 캐도 우리하고는 아아무 상관없는 기라요." "야, 그거사 그렇십니다만," "구천이가... 그거는 아마도 처남이 잘못 보았을 기요.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만무 아니요." "아아니 그거는," "구천이가 죽은 지 언제라꼬요? 지리산에서 최참판네 사랑양반한테 총 맞아서 죽은 걸 모릴 사램이 없지요." "그것은 헛소문인 기라. 말짱 헛소문," "허허어 남우 일에 와 이래쌌는고?" 그러나 세 사람은 구천이가 죽었느니 살았느니, 아니라니 기라니 계속 말씨름을 해가면서 마을로 들어갔을 때 정자나무 아래 예닐곱 명의 사내들이 둘러서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와 이러요?" 끝봉이 기웃이 들여다본다. "설사 구신이라 카더라도 보기는 본 거라요. 무신 돈 나오는 일이라꼬 내가 거짓말을 하겄소." 기운이 한푼 없다는 시늉으로 팔을 젓는, 얼굴이 싯누런 육손의 목소리다. "아무래도 육손이 니 딸네미를 서울에 뺏기고 보니, 하기야 그럴기다. 정신이 온전찮으니께 이것저것 헛갈리는 기라." "내만 보았소? 내만 보았다믄 나도 믿지 않겄소만 서서방네 자부도 보았다 안 카요." "그러시... 그기이 정말이라 칼 것 겉으믄 생각해볼 일이제. 그놈이 어디메쯤 갔는지는 몰라도 다리몽댕이 성한채 돌리보내는 거는 아닌데," 저승꽃이 피고 쪼글쪼글 주름져서 늙은이 티가 완연한 봉기는 하얀 혓바닥을 내둘러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말했다. "그거라믄 내가 알구마요." 끝봉이 어깨 너머 얼굴을 내민다. "알다니?" "어디메쯤 간 기이 아니라요. 바로 영산집 주막에서 술 처묵고 있더마요." "그기이 정말이가?" "거 보소. 내가 헛것을 본 기이 아니라요." 육손의 얼굴에 기운이 돌아온다. "허 참 요상한 일이 다 있네. 거짓말 겉네." "방금 주막서 만내고 온 기라요." 끝봉이 그들 사이에 끼여들려고 발돋움을 하는데 옆에 있던 전서방이 옆구리를 찌른다. "...?" "가는 편이 좋겄구마는," 눈짓을 한다. 시꺼먼 수염에 온통 얼굴이 가려진 사내가 괭이로 땅을 툭툭 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오서방의 많찮은 수염이 푸들푸들 떤다. 중풍 든 사람처럼 입술이 비틀어지며 얼굴 근육 전부가 실룩실룩 움직인다. "야. 가, 가입시다." 전서방과 끝봉이 양편에서 오서방을 떼밀 듯,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뜬다. 음흉스럽게 빛나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괭이 든 사내는 그들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퉤! 퉤퉤퉤." 하며 가래침을 뱉고 씨익 웃는다. 그러는 새 모인 사람들 속에서 봉기는 나잇값을 하느라고 일장연설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한분 생각해보는 기이 좋을 기구마. 와 우리가 오늘 이지겡으로 살기가 답답해졌는지를. 그거는 날아가는 새 잡고 물어봐도 알 기구마. 그거는 으흠! 그거는 두말 하믄 입 아플 기고, 그거는 최참판댁이 망한 때문이다. 어째서 망했노! 할 것 같으믄, 아무아무 땜에 그랬다 할 수도 있지마는, 그러나 시초는 구천이라, 머슴놈 구천이가 별당아씬가 하는 제집을 업고 달아나지만 안 했이믄 아무리 망했다 망했다 해도 이 지겡까지는 안 됐일 기라. 이 동네가 아주 풍지박산이 된 것도 자초지종..." 하는데 어디서 난데없이 "그렇구마. 최참판네만 안 망했으믄 왜놈한테 땅을 팔았이까! 내가 순사놈한테 쫓기서 논골을 나오지도 않았일 기고오!" 우레 같은 마당쇠의 음성과 함께 험상궂은 얼굴이 사람을 헤치고 들어선다. "듣고 본께 일리 있는 말이라. 별당아씨라는 여자가 살림을 차고 앉았이믄 왜놈 세상 되었다고 이리 허망하까?" "그라고오, 또오 한 가지이, 우리가 아무리 무식한 농사꾼이지마는 조상 대대로 지키온 기이 삼강오륜이라아. 알겄나아!" 봉기 자신도 모르면서, 그러나 신이 나서 목을 뽑는다. "그, 그렇고말고," 어물쩍거리는 장단이다. "그러니 머슴놈 구천이는 남으 제집을 돔바갔으니 옛 법에는 장살감이라! 그렇나 안 그렇나!" "그, 그도 그렇자." "지금이사 양반의 세도가 땅으로 뚝 떨어졌고 거기다가 이 동네는 양반이 모두 집을 비우고 없는 기라. 하니께 우리도 삼강오륜을 지키온, 상놈일지라도 천민은 아니고 보믄 종질하든 구천이놈 작살을 못 낼 것도 없다, 내 말은 그거라." "작살뿐이겄소오! 맷돌에 갈아부리지" "그럴 거 없이 당산나무에 매달아서 몽둥이질이나 몇 분 하고." 심약한 편의 제안이다. "아무튼지간에 그놈이 달아나기 전에 잡기부터 하는 기이 좋겄소," 해서 봉기가 앞장선 한 무리의 마을 사람들은 손에 손에 몽둥이를 들고 주막으로 달려간다. 점심때가 가까워지는 시각이다. 뿌연 햇살이 섬진강 물결 위에서 희번덕이고 있었다. "구천이 네 이노옴! 이리 나오니라아!" 주막 앞에 이른 마을 사람들, 그 중에서 봉기가 혼신의 힘을 모아 외쳤다. "뭣이랑가? 오매! 이게 워찌 된 영문이요잉?" 영산댁이 치마끝을 밟아서 휘청거리며 일어섰고 환이는 잠자코 허리끈을 졸라맨다. "구천이 네 이노옴! 이리 못 나오겄나아!" 이번에는 합세한 고함이다. 그 중에서 마당쇠 음성이 유독 짐승 울음같이 굵고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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