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3일 저녁, 부산 영도에 침입한 일본군 1진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여태껏 조선 땅에서는 볼 수 없는 이질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우선 1진을 지휘하는 고니시 유키나가는 무사가 아닌 상인 출신이었으며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세례명은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그의 휘하 장수들도 천주교 신자였으며 사병 중에서도 2천명 가량이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고니시는 포르투갈의 신부 세스페데스를 초청해 1593년 12월에 처음으로 천주교 신부가 조선땅에 발을 들여놓게 되지요. 세스페데스는 일부에서 황당하게 주장하듯 포교를 위해 조선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세스페테스가 작성한 기록에는 일본군 부대 순회일정과 고니시 장군과 마련한 영내 예배, 군사들의 고해성사에 관한 것과, 일본병사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고생하는 일을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과 관련된 사항은 간접적으로 들은 전투상황 뿐입니다.
이 밖에도 고니시의 부대에는 조선사정에 밝은 겐소라는 중이 일본의 전시외교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죠.
고니시는 여러모로 조선으로의 출병에 적극성을 보이는 장수는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탄압을 받은 바 있는 천주교 신자였고, 무사 계층에게 호감을 가지지 못한 상인출신이었죠. 그런데도 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 고니시를 1군으로 조선에 내보내었을까요. 그의 지략이 뛰어났다는 점도 있었지만 여기서 '일본내의 불만 세력들을 해외원정으로 무마시킨다.'라는 원칙도 상당히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평양에서 멈춰버린 고니시의 진군
고니시의 1군은 승승장구하여 6월 15일에 평양을 점령합니다. 단 두 달만의 일이었지요. 선조는 국토의 끄트머리인 의주까지 피신에 명나라에 망명할 논의까지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니시는 진군을 멈추고 7월 17일 조명 연합군이 처음으로 평양을 공격할 때까지 무려 한달 동안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설1 - 보급에 차질을 빚었다. : 고니시가 평양을 점령할 무렵 이순신 함대는 일본군 함대를 계속 격파시켜 나가며 서해방면으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의 계획을 무산시켜 버립니다. 게다가 각지에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은 고전하고 있었죠. 이로 인해 수륙양면에서 보급을 받지 못해 평양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이 가설은 한가지 중대한 약점이 있습니다. 일본군이 평양을 점령할 당시 그곳에는 조선군이 후퇴하며 고스란히 남긴 양곡 수십만 섬과 무기까지 비축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가설2 - 고니시는 전쟁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 앞서 말한 고니시의 성향으로 인해 전투에 소극성을 보였다고 볼 수 있지요. 실제로 고니시는 일본장수 중 처음으로 강화회담을 제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불리한 입장에 있었을 때였고 굳이 전쟁의 승기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망설인 것은 의문입니다.
고니시는 더 이상 진출했다가 명나라 군대가 투입되는 것이 두려웠을지 모릅니다. 그에 앞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고니시가 '조선 정벌은 끝났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왕이 무사히 도피했는데 전쟁이 끝났다니요?
일본은 당시 전국시대의 혼란이 끝나고 지방 영주시대를 겨우 벗어나려는 시기였습니다. 이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영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 영주가 지배하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이를 지키기 위해 성곽을 높게 쌓아 올렸고, 땅이 점령당하면 영주는 할복을 하던 도피를 하던 간에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어집니다. 무사집단에서는 자신들의 우월감으로 인해 신의를 얘기하며 영주의 복수를 위해 끝까지 항전하기도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그저 '또 주인이 바뀌었다'라는 인식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습니다. 아무리 땅이 외적에게 점령당해도 군주가 있는 한은 그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의식이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초기에 일본군은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영토만 점령하면 백성들은 그저 따라온다는 의식을 가지고 유화정책을 펴기도 했지요. 하지만 동시대의 일본에 비해 민족의식이 높아 조직적으로 의병을 조직해 싸웠던 조선민중의 존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마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의식의 차이로 인해 고니시는 평양에서 더 이상 진출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고니시는 후에 명의 심유경과 짜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짜 항복문서를 작성해서 강화를 맺으려고 할 정도로 소극적으로 전쟁에 임하다가 2군사령관으로 내려앉기도 합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야스에게 대항해 서군의 주력으로 참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싸웠지만 패배한 후 처형당합니다. 그가 신봉하던 천주교도 박해 당해 결국 일본에서는 천주교의 저변이 확대되지 못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