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그리움으로 떠난 르와르 여행 세번째
🚩Chateau de Chenonceau(쉬농소성)
프랑스 르네상스의 보석이라고 불릴 만큼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 성은 대대로 성의 영주가 여자였던 것도 특이할 만하다. 슈농소 성의 주인은 6명의 여인들이 성주였기에 ‘여섯 여인의 성’으로 불리는데, 여성주 중에서도 앙리 2세의 왕비였던 카트린 드 메디치와 왕의 연인이었던 디안 드 프와티에의 사랑과 증오가 긴 매듭으로 얽혀있다.
쉬농소성은 앙리 2세가 그의 애인이었던 디안느 드 푸와티에에게 선물한 것이었는데 앙리 2세가 죽자 왕비였던 카트린느 드 메디치가 디안느로부터 이 성을 빼았고 그녀를 쇼몽성으로 쫓아 버렸다. 앙리 2세로부터 슈농소 성을 선물 받은 디안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s)는 ‘달의 여신 다이아나’로 비유될 정도의 절세미인이었다.
지적이며 정치적이었던 디안은 앙리 2세의 평생친구로, 연인으로 그의 인생에 영향력을 끼치며, 왕비에 버금가는 정치권력을 누리며, 1553년에는 왕비 다음 서열인 발렝티누아 공작부인(duchesse de Valentinois)의 작위를 받기도 한다.앙리 2세는 디안을 위해서 아네 성(Chateau d'Anet)을 지었고, 왕실 소유의 아름다운 슈농소 성(Chateau de Chenonceau)도 디안에게 선물로 주며, 왕실보다 이곳에서 디안과 머무르며, 마상 창시합(기마대장,몽고메리장군과의 시합에서)에서 창에 눈이 찔려 죽을 때까지 25년을 그녀와 함께했다.
반면 앙리 2세의 왕비인 카트린 드 메디치에게 디안은 삶의 고통이요, 시련이었다. 카트린 드 메디치는 이탈리아 메디치가문의 자손으로 1519년에 태어나 출생 직후 부모를 잃고 피렌체의 정치상황에 의해 수녀원에 감금되기도 하고 추방을 당하기도 하며 어린 시절부터 시련 속에서 살았다. 그녀의 오랜 삶은 고통은 1559년 앙리가 마상시합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자마자 그녀가 지배권을 장악하고, 디안이 왕을 만나는 것을 제한시키며 막을 내리게 된다. 앙리 2세가 부상으로 생사의 고통에 시달리는 10일 동안 왕을 간절히 보고싶어 한 디안을 못보게 하는 것으로 카트린은 바로 복수의 칼을 빼들었고, 왕이 디안에게 선물했던 물건들의 목록을 작성하게 해, 디안에게서 모든 것을 반환받았다.
또 왕이 죽었을 때에는 장례식에도 초청하지 않았다. 이어 디안을 슈농소 성에서 추방하고 초라한 쇼몽 성(Chateau de Chaumont)에 머물게 한 후 자신이 슈농소 성에서 살았다. 디안은 쇼몽에 잠시 머물다 아네에 있던 자신의 성에서 외부와 일체의 접촉 없이 조용하게 말년을 보내다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슈농소 성은 1513년 샤를 8세,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때 재정관을 지낸 토마스 보이에(Thomas Bohier)와 그의 부인인 카드린 브리소네 (Katherine Briconnet)가 요새화한 마르케 가문의 옛 물방앗간 자리에 4개의 탑을 갖춘 단순한 장방형의 아성으로 지어졌고, 마르케 탑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세워졌다.
성의 건축은 토마스 보이에가 직무에 바빠 참여하지 못하고 그의 부인인 브리소네의 지휘하에 섬세하면서 우아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1521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보이에는 1524년에, 부인은 1526년에 세상을 떠나 이 성에서 오래 살지 못했다. 성에는 이들 부부의 이니셜인 토마스 보이에를 뜻하는 이니셜 ‘TB’와 카트린 브리소네의 이니셜인 ‘KB’가 성의 곳곳에 새겨져 성의 첫 주인을 기리고 있다.
이들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인 앙투안 보이에 (Antoine Bohier)가 유산으로 물려받지만 공금횡령으로 거액의 벌금을 물게 되면서 빚더미에 앉게 되고, 결국 1535년에 성을 프랑수아 1세에게 양도하였다. 프랑수아 1세의 뒤를 이어 1547년 왕위에 오른 앙리 2세가 사랑하는 여인 디안 드 푸아티에게 사랑의 증표로 슈농소 성을 선물로 주었다. 디안은 이곳에 머물며 1556년-1559년 사이에 다리를 지었고, 그 후 앙리 2세가 세상을 떠나자 왕비인 카트린 드 메디치가 살았다.
그녀는 두 연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새로이 손질을 하며, 다리 위로 웅장한 갤러리를 건축했다. 갤러리는 흑백 바둑판 위 바닥에 들보가 밖으로 노출되어 있다. 카트린은 죽을 때 이 성을 앙리 3세의 미망인 루이즈 드 로렌(Louise de Lorraine)에게 소유권을 넘겨주었고, 다시 앙리 4세가 그의 연인 가브리엘 데스트레(Gabrielle d'Estrees)에게 주었다.
이어 많은 예술가들과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 루소, 몽테스키외와 두터운 친분을 맺으며 후원하던 뒤팡(Dupin)부인이 18세기에 성주가 되었다. 슈농소 성은 민중에게도 존경을 받던 뒤팡 부인의 명성 덕택으로 프랑스 대혁명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성의 마지막 여주인은 플루즈(Pelouze) 부인으로,그녀는 세월에 낡아가는 슈농소 성을 복원하고 관리를 해 지금의 슈농소 성으로 남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