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로 밀폐된 마당을 쓸고 물을 끼얹어 짙은 회색의 시원함을 느낀다
현관문 틈틈이 쌓인 먼지를 닦고 항아리에게 세례하던 물 한바가지를 끼얹어 봄을 붙인다
이방 저방 쓸고 닦고 한참을 분주하게 움직인 덕분에 작은 방 한쪽 벽에 붙들린
이름없는 화가가 그려놓은 모과에서 향기가 난다
창문너머 장독대를 올려다보니 어느결에 아지랑이는 사라지고 그림자가 진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두 아들녀석 손을 잡고 버스 두 정류장을 걸어 저녁 장보기를 간다
괜시리 나른하다고 투정하는 남편을 위해 가난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가 통통한 생닭 한 마리와 전복대신 통통한 굴 한바가지를 사들고 와서 용봉탕을 끓였다
제 시간에 들어와 밥부터 찾는, 매일 사랑해를 연발하는 장부앞으로 상을 놓아주고 두 아들과 둘러 앉아 부드러운 살을 탐하고 국물까지 훌훌 마셔대다가 문득 안양동생이라는 전화가 생각나서 말을 한다.
큰 아이가 먼저 반응을 보인다.
‘어, 엄마도 그 전화 받았어요?’
‘언제 그런전화 또 왔었니?’
‘전에 내가 받았었는데’
‘그런데 왜 엄마한테 얘기 안했어?’
‘... 그냥... 엄마 걱정할까봐서’
그제서야 남편이 끼어든다
‘응 별거 아냐. 전에 무역부 있을 때 경리부 직원이었어. 얼마전에 우연히 만났어’
‘아니 그럼 직장으로 전화하지 집으로는 왜 해 직장있을 시간인거 알면서’
‘신경쓸거 없어. 그때 환율이 매일 달라서 환차익 얻느라고 걔 도움 많이 받았어
지금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더라구... 자 자~ 국물에 밥 말아먹자 맛있지‘
유치원생 아들도 느끼는 감정을 아내는 모를까 얼렁뚱땅 넘기려 한다
연중계획에 없는 외출을 준비하면 넥타이도 챙겨주고 양복색에 어울리게 양말도 갖춰주고 다림질을 못하게 하는 남편 말을 무시하고 기어이 다림질해서 셔츠를 입혀 보낸다. 무슨일로 어딜가느냐 언제 오느냐 누구랑 가느냐 하는 따위의 말을 삼가하고 더 잘 챙겨서 완벽한 모습으로 내 보내준다. 귀가가 늦어도 혹간 날을 넘겨서 일찍 들어와도 내색을 하지 않는다. 매일 닦아놓는 구두이지만 외출시엔 한 번 더 구두코를 문질러 반짝반짝하게 만들어 신도록 한다.
봄맞이 항아리 닦듯 그리 다듬어 놓고 스스로 그 모습에 의기양양한 생각을 한다
녹음 푸르른 광풍의 시간이 지나고 갈대 꽃 피던 어느 날
꼬치요리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밀가루 옷입히고 계란물 입혀 지지미가 한참인데
안방에서는 희희락락 남편의 웃음소기가 높다.
살며시 방문을 열고 바라보는데도 전화통화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다
한참을 보고 있자니 뒷통수가 무색했나보다
힐끔 돌아보더니 나중에 통화하자며 끊는다
'왜 끊어. 더 하지'
'홀시아버지를 모시는데 힘들다고 이야기 하는거좀 들어 주느라구, 신경쓸거 없어'
'기막혀라. 나도 홀시아버지 모시거던. 나한테는 힘든 얘기 하지 말라며'
'아이 이사람아 당신하고 같냐. 신경쓸거 없어 그냥 동생이야'
슬슬 화가나자 도리어 침착해지고 또박또박 존대어를 쓴다.
'그래요? 그럼 나두 소개시켜주세요 별거아닌 동생이면 나하고는 친구 되겠네요'
'허참 별거 아니래두'
'한가지 물어 봅시다. 지금 이시간 그 여자의 남편도 집에서 아내의 전화통화를 듣고 있을까요?'
'정신 나갔냐 그럼 난리나지'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내 집 내 앞에서 조심성없이 통화를 할 수 있는거지?'
'당신도 질투같으거 하냐'
'허허, 이보세요 나두 여자거든요'
감정을 노출하고 아웅다웅 하고나니 남편은 한동안 뜸하다
행길에 바람 서성이고 낙엽 뒹구는 휴일 어느 날
남편은 직장 상사가 일이 있어 강화를 가는데 운전좀 해 달란다며 묻지도 않는데 외출의 변을 남기고 차려준대로 입고 나간다.
잘 견뎌오던 마음이 들끓는다
커다란 통에 담요를 놓고 수도꼭지 틀어놓고 질겅질겅 밟아대며 빨래를 해도 끓는다
음악도 시끄럽다
같은 유치원 자모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모처럼 칼질을 하자며 돈까스 전문점으로 향한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신명이 났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재즈로 들으며 당당히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분위기 좋은 찻집에서 비싼 커피를 시키고 입학할 아이들의 미래를 이야기해도 마음은 흔들린다.
버스 정류장 서너개를 지나쳐 바람에 기분을 날리자며 타박타박 걸어서 집으로 왔다
놀랍게도 남편은 일찍 귀가를 했다.
'밤 새고 올 줄 알았더니 일에 차질이 생겼어'
아무렇지 않은척 시침떼고 묻자 눈길 내리고 밍끈 웃는다
‘당신 자꾸 신경 쓰는거 같아서 점심 같이 하고 헤어지기로 하고 일찍왔다’
‘바 보’
첫댓글 15매 아주 짧은 단편입니다. 처음 써보는 소설구성인데 평을 부탁 드려요
미안합니다. 꾸벅^ 나무 늦게 이글을 보았습니다. 글올리는 사람이 없으므로 대체로 이방은 그냥 지나치거던요. 이렇게 잼있는 글한편이 올라있는걸 이제야 발견했습니다. 암튼, 긴가민가 바람든 남편과 아내의 심경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아쉬운것은 결말인데요. 지나치게 너그러운척 하는 아내 태도도 조금은 식상하구요. 그러나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