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국공합작과 남경국민정부의 성립
<개요>
5·4운동 이후 중국공산당의 창당이나 중국국민당의 개진과 개조는 1920년 초반 노동운동의 활성화나 코민테른의 중국혁명에 대한 지원과 더불어 대중적 반제·반군벌운동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특히 1924년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의 제1차 국공합작의 성립은 이후 북양군벌의 타도를 위한 북벌과 대중운동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북벌과정에서 서구열강이나 군벌세력과 타협하게 된 국민당과 장개석은 급진화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대한 반격에 나서게 됨으로써 국공합작을 붕괴시키고 남경국민정부를 성립시키게 된다. 1928년 남경국민정부의 성립에서 전면 항일전쟁이 시작되기까지의 10년간은 ‘황금10년’의 시기로 일컬어지며, 국민정부는 관세자주권의 회복이나 국내의 경제건설 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다른 모든 정당과 정파의 정치참여를 배제한 국민당의 ‘이당치국’은 오히려 심각한 당내분열과 그로 인한 작은 전쟁으로 제약을 받게 된다. 또한 ‘안내양외’로 집약되는 국민당의 대일정책과 공산당토벌 우선정책도 날로 가열화되는 일본의 침략 이란 형세하에서 점차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제1차 국공합작과 국민혁명(國民革命)>
1. 손문의 활동과 광동군정부(廣東軍政府)
◈ 제1차 광동군정부(1917)
▶ 손문의 중화혁명당 재건(1916. 1919년 중국국민당으로 변경)
- 비밀결사적 혁명당으로의 복귀와 손문의 절대적 지도권 확립
- 以黨治國論的 論理의 모색
◈ 제2차 광동군정부(1920)
▶ 광동정권을 장악한 진형명(陳炯明)의 도움
▶ 손문의 북벌지향과 진형명의 연성자치주의( 聯省自治主義 ) 대립
▶ 1922년 6월 진형명의 쿠데타로 붕괴
◈ 제3차 광동군정부(1923)
▶ 1922년 12월 군벌과의 연합으로 진형명 축출
▶ 1923년 3월 광주에 대원수부(大元帥府) 설치
▶ 서남군벌· 客軍과의 연합에 기초한 군벌정치적 행태의 한계
2.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
(1) 배경
◈ 5·4운동 이래 반제국주의 인식의 확산
◈ 손문의 정치 활동 : 진형명의 쿠데타(1922. 6.)로 드러난 한계
◈ 소련-코민테른과 중국 혁명
▶ 코민테른의 <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관한 결의>(1920)
▶ 중국공산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1922. 7.)
: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결의
(2) 제1차 국공합작의 성립 과정
◈ 黨內合作 : 陳獨秀 등 공산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의 국민당에 입당(1922)
◈ 중국국민당의 改進(1923. 1.)
◈ 손문-요페(Joffe) 공동선언(1923. 1.) : 소련의 국민당 원조
◈ 중국국민당의 改組와 제1차 전국대표대회(1924. 1.) → 국공합작의 정식 성립
▶ 黨 조직의 개편 : 볼세비키式 당 조직. ex. 전국대표대회 - 중앙집행위원회
▶ 三民主義의 재해석 : 反제국주의를 표방하는 민족주의, 노동자-농민의
권리와 생활을 보장하는 민권주의와 민생주의
→ ‘新삼민주의’
▶ 3大 정책 : 聯蘇, 容共, 扶助農工
▶ 황포군관학교의 설립(1924. 6.) : 소련의 군사고문 파견과 재정 지원.
국민당의 黨軍. 校長은 蔣介石.
▶ 국민당 우파의 반발 : 西山會議派의 결집
3. 북벌과 남경국민정부의 성립
(1) 국민정부의 성립과 장개석(蔣介石)의 대두
◈ 손문의 사망(1925. 3)
◈ 廣州국민정부의 성립
▶ 1925년 7월 군정부를 국민정부로 개편
▶ 국민정부의 지도 체제 : 왕정위-장개석 연합 체제
▶ 국민혁명군의 조직 : 장개석의 黨軍을 중심, 호남, 운남, 광동,
복건의 군벌군 참여
◈ 중산함(中山艦) 사건(1926. 3) 이후 장개석의 군·정 장악
(2) 제1차 북벌(北伐)과 국민정부의 분열
◈ 북벌의 개시 : 장개석(국민혁명군 총사령)의 지휘 아래 1926년 7월 북벌 개시
◈ 북벌의 진행
▶ 공산당 주도의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전개
▶ 국민혁명군의 순조로운 북벌 진행
◈ 국민정부의 분열
▶ 무한국민정부(武漢國民政府)의 성립 : 1926년 12월 국민당의 反장개석 세력, 호남·호북의 군벌,
공산당 등이 무한으로 국민정부 이전
▶ 남창국민정부 : 1927년 1월 국민당의 親장개석 세력이 南昌에 국민정부 수립
(3) 국공합작의 붕괴
◈ 장개석의 4·12정변과 ‘淸黨’ → 남경국민정부 성립 (4. 18)
◈ 노동운동-농민운동의 격화(‘過火’)와 무한국민정부의 ‘分共’ 결정 (7. 15)
◈ 무한-남경 국민정부의 ‘合作’
<남경국민정부의 시대(1928-1937)>
1. 남경정부의 수립과 訓政體制
(1) 남경정부의 수립과 헌정체제
◈ 제2차북벌의 재개 (1928. 4.)와 완수
▶ 북경 입성 : 1928년 6월 북경에 무혈 입성. cf.장작림의 폭사 사건
▶ 장학량(張學良)의 역치(易幟)(1928. 12)
-> 북벌통일의 완성과 남경정부의 수립
(2) ‘以黨治國論’과 훈정의 실시
◈ 孫文의 三序論과 ‘以黨治國論’ : ‘軍政’ → ‘訓政’ → ‘憲政’
- 장래 민주적 정치체제 수립은 약속하나, 당장은 국민당의 일당독재 합리화
- 국민당대표대회가 국회를 대신하여 국민정부의 통치권 장악
◈ ‘훈정강령(訓政綱領)’과 ‘훈정시기약법(訓政時期約法)(1931)’
▶ 1928년 6월 15일 군정 종식 선언과 1928년 10월 3일 ‘훈정강령’ 발표
▶ 1931년 5월 ‘훈정시기약법’
▶ 공산당은 물론 국민당에 비판적인 정당·정파의 정치 활동 봉쇄
- 민주·인권운동의 탄압
(3) ‘안내양외(安內攘外)’의 對日政策
◈ 국민혁명시기 일본의 山東출병 → 제남(濟南)사변 (1927. 5. / 1928. 5.)
◈ 만주사변과 ‘滿洲國’
▶ 만주사변 : 1931년 9월 18일 → 유조호(柳條湖, 혹은 柳條溝)사건(9·18사변)
▶ 제1차 상해사변 : 1932년 1월 28일 →
▶ ‘滿洲國’(일본의 괴뢰국) 성립: 1932년 3월 부의(溥儀)의 집정(執政) 취임
◈ 노골화되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국민정부의 타협정책
▶ 동북 장악 이후 화북지역으로 진출하는 일본의 침략에도 항일요구를 억압,
실력양성을 주장
▶ 외교에 의한 일본 압박 추진 →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1933. 3.)
▶ 홍군(紅軍) 토벌에 최우선권을 두면서 그것을 위한 통일과 단합을 요구
2. 남경국민정부의 경제건설
(1) 화폐제도의 통일
◈ 중국 근대 화폐제도의 문란
◈ 폐량개원(廢兩改元, 1933. 3.)
◈ 폐제개혁(幣制改革, 1935. 11.) : 법폐(法幣)에 의한 관리통화제도 수립
(2) 관세자주권(關稅自主權)의 회복과 경제건설
◈ 관세자주권의 회복 : 1928-30년간 각국과의 개별 교섭을 통해 관세자주권 회복
◈ 이금(釐金)의 폐지 : 대신 이름만 바꾼 통세(統稅)로 內地流通稅 부활
(3) 경제건설과 그 성과 : 각종 산업진흥정책의 추진
◈ 장(蔣)·송(宋)·공(孔)·진(陳) 4대가족의 경제적 이권 독점
◈ 국민정부의 재정지출에서 군사비의 비중은 압도적(60% 이상)
◈ 대도시·도시계급 위주의 경제정책, 자연재해 등으로 농촌은 파산상태로 빠짐
▶ 양자강 중하류 유역에 제한된 국민정부의 영향력
▶ 1929년의 세계대공황의 여파 - 1930년 양자강 범람 등 자연재해 빈발
◈ 근대적 도시문화의 발전
▶ 대중적 소비문화의 발전
▶ 근대적 도시외관의 형성
▶ 근대학술의 발전 : 중앙연구원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