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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선생님 운남성 차밭 답사 여행기 살짝 보기3 (페북에서)
21. 2011.12.07
중국 자사호紫砂壶의 고향 이싱宜兴의 사투리는 정말 어렵습니다. 원래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던지라 다양한 지역의 말과 말투가 규칙을 찾기 어렵게 섞여 있습니다. 지난날엔 오나라와 월나라의 교접지여서 말이 섞였고, 그 지역의 원주민인 산월山越족의 말도 섞인데다, 당나라 이후에는 신라말까지 섞이고, 송나라때는 남쪽으로 쫓겨내려온 북방계의 말까지 섞였으며, 태평천국의 중심지가 되어 다양한 지역의 말이 얹혀져 정말 배우고 익히기 힘든 말이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베트남전쟁 때 중국군의 암호를 다 풀어내는 미군에게 정보가 해독되지 않도록 하려고, 최후에 찾아낸 방법이 이싱사람을 불러다 본부와 전선 사이에서 통화를 시키니 더이상 비군이 그 '암호'를 해독할 수 없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바른손편의 연세 높으신 쉬한탕徐汉棠대사는 그 어려운 말로 말씀을 하시고, 당연히 그 말을 잘 알아듣는 현지의 도자행업협회 스쥔탕史俊棠회장은 알아듣는 표색도 없이 관심없는 듯 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잘 못 알아듣는 저는 못 알아들으면서도 잘 듣고 있는 표색으로 애매하게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몇마디밖에 못 알아들으며서 애쓰는 제가 대사님의 뜻을 더 잘 알아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저는 온 세포의 연합 총력을 모아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알아듣기 위해 앞뒤 문맥을 계속 비교하면서 듣고 있었거든요. 딴 생각할 겨를이 없는데다, 얘기를 들으면서 그 얘기를 비판적으로 들을 마음이 날 겨를도 없었거든요.
상대방도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경험상 대부분이 그걸 느끼는 듯합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서 반성되는 것은, 좀 더 배울 걸 하는 점과, 이렇게 집중하듯이 정성을 다해 살아오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다가오는 시간이 그리고 다가오는 인연이 더욱 몸서리쳐지게 소중해지는군요. 벗님들이 계셔 참 몸서리쳐지게 좋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더 고독해지는군요. 아무튼 그런 뜻에서 언제 좀 한가하게 만들어서 같이 신명나게 쉽게 신명날 곳으로 그냥 놀러갑시다.
사는게 팍팍할수록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늘어나는 듯합니다. 제 생각에는 인문학이 삶에서 자리를 잘 잡을 것같지는 않습니다. 많이 위축되었을 뿐 아니라, 중요한 부분이 과학의 위력에 밀려 거세당했다고 보는 탓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어릴 때 우리가 땅에 붙어 살 수 있는 이유를 큰 생명인 지구가 우리를 사랑해서 당신의 힘으로 잡아주기 때문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다니면서 그 힘의 이름이 중력이고 중력은 물리적인 현상이라고 되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지구는 큰 생명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물리적인 실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큰 생명이 그 위에 사는 생명을 사랑하는 힘은 그냥 물리적 규칙의 영역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제가 생각키에는 이런 물리적 규칙과 생명론적 규정이 충돌하지 않아도 될 것같은데, 이미 충돌은 가볍게 정리되고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듯 교체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보기엔 과학에 의해 인문이 살붙은 게 아니라, 인문이 강압을 받아 창씨개명을 한 것같아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인문을 부르짖어도 제대로 된 인문이 나올 수 있을까 싶습니다. 과학시대를 보충하는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지구가 큰 생명에서 물리적 실재로 이해되는 순간, 대생명을 사랑하고 대생명에 보은하는 일이 그냥 환경운동이라는 말로 대체되어버리네요.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생명이 환경이 되니, 이제 곧 부모도 환경이 될까봐 두려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 두려움은 어느 정도 현실이 된 것도 같습니다.
대생명과 대화하고 더 많은 생명과 함께하는 일이 과학에 의한 우주시대로 들어오니, 다른 별과 대화하고 태양의 생명됨을 느끼는 일에서 그냥 우리나 비슷한 급의 우주인이나 찾는 대로 관심이 옮겨가 버리네요. 생명의 규정도 '파쇼적'으로 밀어ㅜ쳐서 세포를 가진 유기체 정도로 바꾸고 말았구요. 이래도 될까요?...
저의 어린 시절은 나의 라임오랜지나무의 동산이었는데, 지금은 물리적 행동반경의 실험실에 갇혀버렸네요. 나의 큰어머니는 환경이 되고, 나의 큰아버지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항성이 되고 말았네요. 저의 어릴적 친구는 광물과 식물이 되었고, 바람과 물이란 이름은 같아도 그냥 하나의 현상이 되어 박제처럼 되어버렸네요.
우리 마을은 제 어릴 적 친구들에게 다시 친구가 되어 돌아가는 통로이고 싶습니다. 또 그 마을에서는 저도 다시 큰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돌아온 탕아가 되고 싶고, 큰아버지에게 매일 안부 인사 올리는 좋은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인간이 이루어낸 최고 수준의 과학도 존중하며 살거구요. 아무튼 길지도 않을 세월 하루라도 그렇게 살다가 매듭짓고 싶습니다.
아이고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미치도록 좋네요.이걸 하자고 이 발광을 했다는 게 한편으로 아프지만 한편으론 너무 행복합니다. 저 같은 못난 인간도 만들 수 있으니, 언젠가 다른 분들도 시간차는 조금 있겠지만 다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되고 그 마을이 별 특별한 마을이 아니 되고 그냥 하나의 마을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어 마음도 그리 가볍고 편합니다. 이름이 그래서 실험마을이랍니다.
그냥...서면 앉고 싶은 사람? 앉으면 눕고 싶은 사람? 누우면 자고 싶은 사람? 자면 죽고 싶은 사람? 왜?
22. 2011.12.09
난자오南诏의 뒤를 이은 따리大理 옛나라에는 모두 22명의 황제가 있었습니다. 모두 무덤을 남기지
않았고 불교국가였던지라 죽은 뒤엔 화장을 했으며 귀만 항아리에 담아 드넓은 얼하이洱海호수에
넣어 나라의 수호자가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또 그 가운데 20명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서 일찍 물러나 승려로서 구도자의 길을 걸었는데, 그들
의 승려생활은 전직 황제라는 신분과 관계없이 평범해서 다른 구도승들과 함께 맨발로 탁발을 했다
고 합니다. 황제의 자리에 있을 때에도 백성들이 은젓가락을 써야 구리젓가락을 쓰며, 백성들이 구
리젓가락을 쓰면 쇠젓가락을 썼다고 합니다(이 지역 사람들은 아직도 숫가락을 쓰지 않습니다). 또
황제인 남편이 자진은퇴하여 구도자가 되면 부인인 황후도 은퇴하여 바오투어도宝陀岛에서 비구니
로서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승려의 길을 가기 전에 두 사람은 해혼解婚을 했는데, 해혼은 이혼
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해혼이었습니다.
따리 옛나라의 이런 문화를 일군 것은 세습재상족인 고高씨였습니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따리
옛나라가 무너진 다음(13세기)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도 잘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다만 재상을 지낸
그들의 일부가 역사에 흔적을 남겨 그들의 눈을 짐작이나 하는 정도입니다. 그들도 황제들과 마찬가
지로 은퇴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그들이 머문 사찰이 샹윈祥云 수목사水目寺였습니다.
거기에는 그들이 세상을 떠난 다음의 흔적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수목사 부도입니
다. 그 부도들은 예사 부도들과 달리 그 아래에 깊은 석실을 달고 있는데, 그 석실의 구도는 제법 큰
편이고, 지금도 기회를 얻으면 들어가 자세히 볼 수가 있습니다. 고구려의 석실무덤과 꽤 닮아 있다
는 것은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토인비가 살아서 이 지역을 알았더라면, 그의 문명들에는 하나가 보태졌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눈은 내리고 그 부도가 한번 더 생각납니다. 대체 그 부도는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지...
-오늘은 난자오사학회의 고문으로서 글을 올립니다. 오늘이 정기학회인데 참석도 못했는지라...
윈난성에 사는 나시족의 김치통입니다. 물론 그냥 짠지가 아니고 미생물발효가 진행되는 김치를 담
는 도자기입니다. 저는 김치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중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문화권은 음식을 먹을 때 시간문화를 중심으로 삼는 듯합니다. 즉 음식을
내오는 순서와 음식을 섭취하는 순서가 매우 중시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에 견주어 북방계 기마민
족들의 음식은 상대적으로 공간문화를 중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음식을 어떻게 배치하느냐가
더 중요하게 고려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 음식은 그 가운데 후자에 속하는 듯합니다. 거기에다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이 얹히면서 우리
음식은 어떻게 내오느냐보다 어떻게 배치하느냐가 더 중요한 잣대가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즉 우
리의 식탁위에 어떻게 하나의 공간을 재구성하느냐가 중요하게 되었다는 뜻이겠죠.
이렇게 공간을 재구성하다보니, 계절의 순서와 맞지 않는 음식을 그 공간에 배치하기 위해서는 나름
의 방법이 필요했을 듯합니다. 발효도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짧게 이야기를 하다보니,
제가 보아도 논리적 비약이 심한데, 아무튼 제 생각에 김치는 우리만의 음식이 아니라 비슷한 문화
를 가진 문화단위들이 공통적으로 개발해온 게 아닌가 합니다. 고추가 우리역사 무대 위로 등장한
시기, 배추나 무우 등이 우리와 만난 시기 등을 감안하면, 김치가 우리의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우리
만의 것은 아닐 듯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윈난성의 소수민족들이 이런 발효음식을 먹어온 역사가 우
리보다 훨씬 기니 그 점도 생각해야 하겠구요.
김치로 대표되는 음식이 공간을 위해 시간을 활용하는 지혜와 연결되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물을 운용하는 데도 그런 차원의 발상이 있었겠구요. 이 점은 수행이라는 영역에서도
적용되었을 듯 합니다.
아무튼 김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지혜와 깊이를 가진 물건입니다. 작은 물건 큰 학문이
라 하기에 모자람은 없을 듯합니다. 이 내용 너무 주관적인데요...그냥 벗님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그
게 벗이 아닐까요?(@_@) — 함께 있는 사람: 김치통-발효
윗부분이 뚜껑이고 뚜껑 안쪽에도 벽이 있고 보이는 것처럼 뚜껑밖에도 벽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약간의 물을 부어 뚜껑의 아랫부분은 안팎으로 물에 잠겨 있습니다. 즉 물로 봉인이 되는데, 물을 통
해서만 미생물이나 공기가 통하게 되어, 매우 안정적으로 발효가 진행됩니다. 물론 안에는 다시 깨
끗한 마개가 있는데, 이 마개가 이중 필터의 역할을 합니다. 발효에 대한 오랜 역사와 인식의 깊이를
짐작하게 합니다. 담그는 김치종류로는 마늘, 무우, 파, 작은배추, 과일, 육류, 콩, 고추, 나물 등 매우
다양합니다.
나시족의 지혜라는 것이... 머리로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네요. ◉.◉(댓글1)
김치가 우리의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우리만의 것은 아닐 듯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외한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댓글2)
23. 2011.12.11
윈난 웨이산巍山고성 안 북쪽편에 있는 췬리群力소학교(초등학교)의 모습 가운데 일부입니다. 가운
데 걸린 문화와 도덕을 중시하는 표어가 한눈에 들어오는군요. 그들은 아직도 그들 민족문화의 관점
을 존중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 뜻을 실어펴는 것이 문화요, 남의 뜻도 실어펴게 하는 것이 도덕이다."
물론 이것만은 아니지만, 이것은 문화와 도덕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다섯 가지 교훈校训도 선입견 없이 보면 괜찮네요.
①스승을 존중하라
②부지런하라
③단결하라
④문명인답게 행동하라
⑤기강을 지켜라
이게 학생을 교육하고 그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이라면 애매하게 좋은 말을 쓰는 것보다 훨씬 나을
듯합니다. 교육은 구체성을 통해 교육받지 않으면 성급한 연역론자가 되기 쉽잖아요. 그래서 옛분들
은 소학이 중요하다고 했겠지요. 실험마을 학교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24. 2011.12.12
내가 버리는 것은 누구에겐가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버리고 싶어서 버리는 것이나 버릴
수밖에 없어서 버리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소중한지는 버리는 사람의 생각이지, 그것을 줍는 사
람의 생각과는 좀 다를 수 있을 듯합니다. 사실 거래라는 것도 버리고 줍는 과정을 특수하게 나퉈낸
게 아닐까요? 내 버릴 것 버리리면서 주울 것 줍고, 내 버린 만큼만 줍는 게 시장의 바탕일 터인데,
도덕이 없어지면 적게 버리고 많이 주우려들겠죠.
버린 것을 양으로 환산하고 줍는 것도 양으로 환산해주는 게 돈이라는 걸테죠. 그러니 돈은 자기가
버린 양이며 더하여 주울 수 있는 양을 표현하는 것일 따름인 것이죠. 주울 수 없는 만큼이거나 주울
필요가 없게 된 상황이면 그 돈도 버려야 할 꺼리인 거겠죠.
장사는 시장의 일이니 버린 것 맡아서 주울 사람에게 전해지도록 관리라는 시장지기인 것이니, 주워
가는 사람이 좀 나눠주면 그걸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이랍니다. 버릴 사람이 멀리 있으면 찾아가서
미리 주워와야 하고, 주울 사람이 멀리 있으면 거기까지 가서 나눠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인 거죠.
상속이 뭐랍니까? 버리는 거죠. 사회기부가 뭐랍니까? 버리는 거죠. 상속과 사회기부는 버리는 쓰레
기통이 달라서 붙은 구분인 거겠죠. 사람에만 국한한다면 나는 누군가의 쓰레기통이고, 누군가는 나
의 쓰레기통이겠죠. 사람이 좋은 쓰레기통이 되면 세상천지에는 쓰레기가 없어져 사람이 길을 가는
데 쓰레기때문에 가로막히는 일은 없겠죠.
윈난 이빵산 꼭대기 마을 한켠에 그렇게 써놓았군요.
"길에 쓰레기가 꽉 찼으니 위생에 주의하세요. 돼지똥은 농민에게 가장 좋은 비료이구요, 보리짚은
꽤 괜찮은 연료랍니다."
쓰레기라 해놓고 쓰레기가 아니랍니다. 사람에게 국한시키지 않는다면, 쓰레기란 버릴 것에 붙여놓
은 딱지이지, 누군가는 다 주워갈 물건이 아닐까요? 그래서 각각의 물건은 버릴 곳과 버릴 때가 있
을 듯합니다. 그러니 주울 곳과 주울 때도 나름 있을 듯하구요. 아무튼 내 손안에 든 것은 결국 언젠
가의 쓰레기니, 버릴 때 버릴 곳에 버릴 줄 알면 걸릴 게 뭬 있을까요? 너무 주우면 집이 쓰레기로
가득 쌓여 '세상에 이런 일이' 에 나오는 쓰레기 모으느라 잠잘 곳도 없앤 어느 노인과 같아지겠죠.
버릴 곳에 버리고 버릴 때에 버린다면 굶는 사람은 있을 수도 없겠죠. 가진 것 다 쓰레기니 사는 일
은 그것을 다스리는 일이 아닐까 싶어서 벗들께 타령 한번 했습니다. 저도 쓰레기 버리는 중이려니
하고 널리 헤아려 주시길....
어느 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이걸 안 하고 싶은데, 자꾸 하려고 합니다. 대체 어찌하면 안 할 수가 있나요?"
제 대답이 간단했답니다.
"그냥 안 하면 됩니다."
윈난성 홍허주红河州는 하니哈呢족의 주된 무대입니다. 하니족은 아직까지도 산상공동체를 유지하
며 살고 있습니다. 골짜기에서 시작해 산을 오르고 오르면 아무것도 없을 듯한 꼭대기에 느닷없이
꽤 거대한 마을이 나타납니다. 어떤 마을은 인구가 십만을 넘고 가장 큰 것은 수십만을 헤아리기에
마을이라기보다는 큰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경상도의 안동이나 전라도의 나주보
다 큰 도시가 산꼭대기에 들어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보름장은 늘 열리고 있습니다. 우
리 땅은 지세가 부드러워(지리산조차도) 오일장이 열리는데, 그곳의 경우 지세가 상대적으로 부드러
운 곳엔 칠일장이 그렇지 못한 곳엔 보름장이 열립니다.
장터는 마을의 한 가운데 있고, 그곳은 마을에서 가장 넓거나 가장 높은 곳입니다. 그들은 시장을 축
제로 생각합니다. 장이 열리는 날 마을의 대표는 가장 먼저 조상님들과 어머니 대지 및 아버지 태양
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나서 깃발을 세웁니다. 그는 긴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조상때부터 전해
온 장을 세우는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장의 규칙이나 거래에 대한 감사나 기원 등이 내용이기도 하
지만, 매달마다 달거리 노래를 부릅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장을 보러 옵니다. 소를 몰고 오거나 돼지를 몰고 오기도 하며, 나물과 곡식과
직물류 및 약재류를 들고 오기도 합니다. 그걸 돈으로 바꾸어서 그 돈을 가지고 필요한 것을 사가지
고 가는데, 일반적으로 그날 생긴 돈은 대부분 그날 쓰고 갑니다.
사진은 따헤이산大黑山 하니족 마을 장터에서 월남종 새끼돼지를 거래하는 풍경입니다. 특히 새끼
숫돼지를 거래하는 곳인데, 여기에서는 거래를 전후하여 특별한 일이 진행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새
끼숫돼지는 병없이 잘 크고 살도 잘 붙으라고 거세를 합니다. 거세를 하는 사람은 전문가이기도 하
지만 본인과 가족이 모두 건강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건강한 것으로 인정된 사
람이어야만 합니다.
아무튼 그곳의 풍경은 가관입니다. 수술을 마친 새끼돼지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너부러져있고, 수술
중인 돼지는 멱따는 소리를 지르고 있으며, 수술을 기다리는 돼지들은 겁에 질린 눈빛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습니다. 너부러져 있던 놈들 가운데 정신이 수습된 놈들은 다시 새 주인에게 이끌려 시장을
떠나 갑니다.
그런데 이걸 보면서 느낀 게, 우리도 언젠가 어디서 거세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지
금 우리가 사는 걸 보면 어딘가 그랬을 것 같단 생각을 지울 길이 없었습니다. 대체 이 찝찝한 느낌
은 뭘까요? 아버지 태양의 기운? 어머니 대지의 기운? 형제인 산과 들의 기운? 잊어버린 건지, 거세
당한 건지? 호연지기...호연지기라...태산을 옆구리에 끼고 북해를 건너뛸 호연지기라...!!
언어는 한선생님 전공 분야신데...나시족의 언어에서는 상형문자의 특성이 반영된 까닭도 있을 것인
데, 제가 알기로 삼인칭이 없습니다. '그'는 너의 너일 따름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삼인칭이 일반화
되는 것은 공동체보다 법률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뜻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꾸로 삼인칭이
뚜렷한 사회에서 주어가 없어지는 것은 무책임과 관념화를 보여주는 일면도 될 드싶습니다. 많이 생
각해볼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어'가 없는 게 유행이라는 것이 그 뜻이 아닌 말씀일 듯도
싶은데, 그냥 사족을 달아 보았습니다. 넓으신 마음으로...
글을 읽을 때, 검은색 문자로만 보아 버릇을 했더니 갇힌 글읽기가 되었습니다. 반성합니다!(댓글)
25. 2015.12.13
우리의 신화, 鬼 神 仙의 이야기와 나시족의 신화가 닮은 데가 참 많은 듯합니다. 예를 들어 태양신
아리, 고임의 신 바리, 차의 신 이우, 뒤끝의 신 앗싸, 환상의 신 엉터리, 순수의 신 머저리, 토지의 신
도치, 아침의 신 하치, 운명의 신 망타이, 높은 산을 관장하는 신 할라 등등..
동바만신원에 이런 모습의 신상도 있답니다. 재미있는 것은 신들에게 성별이 있어 그 성별에 따라
아뷔와 요뮈 등의 칭호가 붙는데, 대개 아비와 어미의 뜻으로 볼 수 있답니다.
이 신의 정체는 대체...?
26. 2011.12.14
노트로 작성하는데 잘 되지 않아서 또 이리 길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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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배운 노래말 가운데 첫머리가 이렇게 시작되는 게 있습니다.
"始见死生之柩极,有相无相发於中,允执其中"(간체자 판이라서 글자가...)
옮기자면,
"먼저 죽음과 삶의 기둥과 들보를 보라. 모습 갖추지 못한 것과 모습 갖춘 것이 모두 이 가운데서 펼쳐져나오나니, 마땅이 그 가운데를 제대로 잡을지라."
옛분들이 일반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사람에게는 성性과 정情이 있다고 했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스승님으로부터 이렇게 배웠습니다. 약간 제 방식대로 정리해보렵니다.
"性은 생명의 근원이니 그 성질은 안으로 수렴하여 갈무리하는 것이다. 情은 죽음의 표징이니 그 성질은 밖으로 내밀어 펼쳐내는 것이다. 삶의 모습은 이 두 극단(生死两端) 사이에서 이 단들의 함수관계와 밀치고 당기는 정도에 의해 정해진다. 일반적으로 수렴의 힘이 강하면 발산의 힘도 강하고, 수렴의 힘이 약하면 발산의 힘도 약하다. 다만 수렴의 힘이 약한데도 발산의 기운이 강하게 되면 삶을 굳게 보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 근원도 마침내 크게 허약해져 제 자리를 지키기 어렵다. 이에 수렴의 힘이 넉넉하더라도 발산의 힘을 잘 조절하면 삶을 굳게 지킬 수 있을 뿐더러 그 근원의 자리가 더욱 넓어질 것이다.
性은 삶의 들보가 되는 것이니 한 집에 한 들보가 있듯 한 생명에 부여된 존엄한 하나이고, 情은 그 기둥이니 한 집에 여러 기둥이 있듯 각 생명은 여러 모습의 여러 기둥을 가지는 바, 이것이 곧 죽음과 삶 사이의 들보와 기둥이다. 그리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相들이 생겨나니 이를 일러 理一分殊(이치를 따지자면 하나이나 모양새는 제각각이다)라 한다.
다만 요지는 하나이니, 도가의 사람들은 情을 누를만큼 눌러 생명의 근원을 잘 보존하라 했고, 유가의 사람들은 情을 펼치되 적절하고 알맞게 하여 생명의 근원에서 어긋나지 말라 했다. 즉 도가의 少欲과 유가의 发而中庸이 다 그것이다. 허나 실상에서 살피자면 둘이 다른 지침이 아닐 것이니, 펼침이 넘쳐나는데도 중용을 이루는 법은 없으며, 중용을 이루면서 펼침이 넘치는 일도 있을 수가 없다.
性과 情 가운데가 바로 삶의 함수관계요 그 함수관계의 고갱이가 바로 中이다. 이 중을 제대로 잡는 것이 공부이니, 이 고갱이를 잡지 못하면 삶은 곧 서양의 기계같은 허수아비짓이요 내 삶이 내 삶이 아니라 남의 것이 되고 만다. 이 두 가지가 만나고 헤어지는 때와 이치를 안다면 그 때 내가 내 주인이 되는 것이니, 공부는 네가 내 주인이 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그래서 道가 곧 道인 것이다."
줄이고 줄여 정리를 하기도 했지만, 적어보고 나니 정말 말씀 전해주신 것을 다 옮길 길이 없고 그래서도 안 되겠다 싶기도 합니다. 다만 벗님들께 약간이라도 옮겨드려 함께 하는 정리로 삶고자 했습니다. 그저 어제도 고마웠고 오늘도 고마우며 내일도 고마울 따름입니다.
-아라가비 元中 传述不作
사진은 잘 뛰는 말 한 마리인데, 글쎄 누구의 그림일까요?
여러 장으로 된 작품일까요?? 얼핏 찾아보니 말 그림을 무척 많이 그리셨더군요. http://bbs.ouc.edu.cn/Upl.../2007-10/2007101220363639197.jpg 이 그림이 옆에 있으면 딱일 것 같습니다.
27. 2011.12.15
"날 사랑하신 어머님의 바다를 한 해 동안 깊이 그려보니, 길러주신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길이 없
구나"라는 대련을 흰 종이에 소박하게 써서 애통하다고 하는 두 글자와 함께 대문 좌우로 붙인 채,
문고랑에는 어머님 가신지 일년이 되지 못했음을 밝힌 이 집! 진정한 나시족은 부모님이 돌아가실
경우 3년간 어떤 생계활동도 하지 않는답니다. 친척과 마을사람들이 그 집의 생계를 모두 돌보아 줍
니다. 그는 그 기간 그리움을 풀고 공부를 하며 자신을 키웁니다. 찬양의 노래를 익히고 다스림의 그
림을 그리며 못읽은 책을 읽습니다. 그러면서 일일신 우일신의 나날을 보냅니다. 이제 멀지 않아 자
신의 순서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되어 하늘에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벗들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하며, 뒷사림들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큰어머니인 대지께서 용납할 인간
이 되어야 하며, 형제인 풀과 나무가 받아들일 형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이를 지키는 나
시족의 기와지붕에 무엇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해독항암제인 와송瓦松이 슬그머니 피었습니다.
-이런 얘기 하면서 함께 일하시는 분들께 그런 시간도 못 드리는 게 죄송스럽기 그지 없네요. 다만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변명을 삼으려고 합니다.
해시계나 물시계가 전부이던 시절에, 아니 로마광장에 괘종시계가 울리던 시절에--- 누가 감히 시계
를 손목에 감고 다닐 생각을 했을까요? 몸이 신통찮아 시계를 잘 못 감고 다니지만, 손목시계를 볼
때마다 손목에 해그림자가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제 손목의 곤목시계는 비록 작아도
저는 그걸 볼 때마다 태양이 움직이는 것을 상상한답니다.
외국 한번 나가려면 남산 근처에 가서 교육도 받고 여권이라곤 달랑 단수여권이나 주던 시절에 공
간을 크게 이동하는 것은 참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태양을 손목에 감는 시대를 넘어 인간이 사는 전
지구를 호주머니나 가방에 넣고 다닙니다. 이동통신기기의 현재판 스마트폰(누가 그러시는데 제 것
은 스마트폰이 되다가 만 스마폰이라고 합디다)이 바로 주머니 안의 지구인 셈입니다. 그러니 조심
해서 가지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가 없답니다. 주머니가 무척 커졌다는 생각에 부담감이
큰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스마폰을 가지고 다미지만, 앞으로 혹시 스마트폰이라도 가지고 다닌다면
지구가 너무 흔들리지 않도록 더 주의하려고 합니다.
그런데....이거 스마폰에 이상한 프로그램 넣어서 한 일년 지나면 자동으로 자꾸 느려지게 만드는 것
아녜요? 왜 자꾸 느려지는겨...? 스마트폰이 아니고 스마폰이어서...아니면 스마도 안된 그냥 스폰이
어서 그러나...?
사진을 보세요...윈난성에서도 가장 골짜기인 뿌랑산에도 스마트폰인데 저만 스마폰 또는 스폰이여
요...정우남 동지님...! 아무튼 아무튼...지구는 하나인데 주머니 안의 지구는 사람마다 다르군요...많이
다르군요...그 지구가 무슨 일을 낼지....
직렬식의 시간경과 단계교육을 병렬식의 공간확장 선택교육으로 바꿔버린 통신기기, 한 세대가 지
나 그 결과가 나올텐데 조금..많이...걱정됩니다.
28. 2011.12.17
복지는 하나의 사람된 권리일 것입니다. 전면적인 복지는 현실성 여부를 떠나 누구도 부정해서는 안
되는 사람세상의 권리일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반대하자는 게 아니라, 반드시 물어보고 싶은게
있습니다. 복지가 권리라면 그에 상응하는 의무는 무엇일까요? 세금? 약간은 그럴 수 있지만 아니라
고 봅니다. 세금은 경제활동권리에 대한 의무이지 복지에 대한 의무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 세금을
가지고 복지를 하지만, 복지에 상응하는 의무는 다른 데 있다고 봅니다. 권리의 종합과 의무의 종합
으로 봐야 한다? 그렇지만 너무 포괄적이어서 답이라기보다 답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정리가 없이 복지의 권리를 이야기하다보면 엄청난 자기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고 봅니다. 또 복지망국이 허구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복지에 상응하는 국민의 의무는 구체적인 모습을 떠나 반드시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
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성실한 삶의 의무이고, 다른 하나는 건강과 문화적 진보에 대한 노력의 의
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이 낸 세금이 국민을 위해 쓰일 때, 국민도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노력은 해
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령화가 본격화된 사회에서 복지는 곧 파산과 망
국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 노력을 위한 제반 장치는 현명한 국가의 현명한 선택
일 것입니다. 병나면 고쳐주기 전에 병이 나지 않도록 도와줘야 하고, 국민도 이에 상응하는 실질적
자기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어쩌면 이 의무조차 하나의 권리처럼 갖추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장치는 의무적으로
활용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의무에 좀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이미 시급한
필요성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몸이 무너지고 정신이 무너지고 가족이 무너지고 교육이 쓸모
를 잃으면 전면복지는 현실적으로 도저히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노동에
서 해제된 연치높은 분들의 의료를 위해 국가의 전 수입을 다 쓰고도 결국은 부족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 앞으로 연구하고 또 연구할 부분이며, 이런 문제를 함께 풀어내야만
복지는 보다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시사뉴스를 보다 문득
생각나서 벗들께 횡설수설해 봅니다...그러고보니 수련과 운동과 금연과 봉사생활 같은 것과 그것을
쉽게 할 수 있도록 갖춰주는 것도 아주 좋은 의무 실행 및 그 기초장치일 거라고 생각되네요..차생활
은 말할 것도 없고...(^L^) 예를 들어 전면복지를 할 경우, 담배 팔고 술 팔아 국가가 얻는 엄청난 경
제적 이득조차 그로 말미암아 일어난 건강상실분을 의료건강복지화 하는 비용보다 훨씬 적을 걸로
봅니다. 문화와 가정교육을 파괴해서 얻는 사회경제적 효율이 이것을 보전해주는 복지비용보다 훨
씬 적을 것입니다. 그러니 복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생각하고 개념화하는 것도 이른 일은 아닐 듯
해서요...납세의 의무를 잘 실행하도록 세무기관을 두는 것처럼, 다른 차원에서라도 복지의무를 잘
지키게 하는 나름의 설계가 시급할 듯해서요....
복지는 수혜자를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이지, 늘 의존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장치는 아닐 것입니다....
29. 2011.12.18
한때 저에게서도 배울게 있다 여기시는 젊은 분들이 저를 찾아 오셨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야 그런 젊은 분들에게 내어줄 게 없는 사람이니 당연히 받아들여 제자를 삼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의 인연이란 예외가 있어서 딱 두번 그런 적은 있었습니다. 한번은 아주 젊었던 30년 전의 일인데 그것은 몸공부와 관련된 제한된 경우였고, 다른 한번은 10년 전에 제가 힘들어 보이는 게 안타까웠던 한 젊은이와의 인간적 인연이었습니다. 그밖에는 한번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자라고 게으르고 어리석은 사람으로서는 아찔한 일을 저지를 뻔 했던것이죠.
여기에는 사실 한 가지 까닭이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 나름대로 그런 마음을 내신 젊은분들께 몇가지 간단한 주문을 하는 절차를 거쳤는데, 그 과정에서 저의 스승께서 일러주신 기준들과 그 분들의 모습이 맞지 않았기에 저는 이처럼 그랬던 분들과도 벗으로 지낼 수 있는 즐거움을 얻게 되었답니다. 이제는 제가 생업에 종사하는지라 제 자신이 스승께선 일러주신 기준을 벗어났으니, 이런 간단한 기준의 일부를 공개해서 옛분들의 삶이 지혜로왔음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첫번째 이야기(계속 올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먼저 간단한 주문을 합니다. 예를 들어 "식사는 이런 것과 저런 것을 그렇게 드세요"라고 하면, 젊은분들이 다 긍정은 하는데 모두 토를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예 그리 하겠습니다"는 없고, 꼭 나름대로 "이래서 그렇게 하라는 거군요"라든지, "그렇게 하는 까닭이..?"라든지 등의 토를 달아서 똑똑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것은 사실 내가 스승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당신을 활용하겠다는 뜻인데, 그는 몰랐던 것이죠. 또 나는 당신을 못 믿겠다는 고백이고 그냥 당신은 참고사항이라는 고백인데, 그는 몰랐던 것이겠죠. 더하여 나는 진보하기 참 어렵고 진보를 사랑할 뿐 진보하기 싫다는 고백일 수 있는데, 그는 몰랐던 것이죠. 그밖에도 나의 현재 틀을 사랑하고 그것을 확장하고 싶으니 거기에 동의하고 도와달라는 뜻인데, 그는 몰랐던 것이죠.
「논어」에도 그런 구절이 있어 옮겨봅니다. 위정为政편의 아홉째 장인데, 좀 덜 심심하시라고 Leonard A. Lyall이란 사람이 옮긴 영어 구절로 올리고 제 토도 그렇게 올립니다.
" The Master said, If I talk all day to Hui, like a dullard, he never differs from me. But when he is gone, if I watch him when alone, he can carry out what I taught. No, Hui is no dullard!"
Why Confucius have said "he never differs from me"? Hui has never made any retort and add-particle.
며칠전 유사한 상황이 있어서 그냥 정리해보았습니다.
30. 2011.12.22
어느 분의 담벼락에 좀 극단적인 말로 낙서를 하고 말았습니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산다"고 말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이면 누구나 이상하게 여길 글을 올려놓고 나니 뭔가 해명을 좀 해야 할 듯싶습니다.
사실 말을 어떻게 한다고 해서 그리 쉽게 삶의 방식과 그의 존재 방식 및 삶의 방향 등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즉 살기 위해 먹는다고 말하거나 먹기 위해 산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갑자기 배고픈 철학자가 되거나 배부른 돼지로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은 먹는 것이 일차 목표이므로 먹는 것만 해결되면 행복의 기본조건이 마련된 것이고, 나머지는 추가로 주어진 것이므로 더욱 행복할 따름이라고 말입니다. 즉 그는 밥을 먹고 나면 이미 감사의 마음을 낼 수 있고, 그 이상으로 더 이뤄지면 더욱 감사의 마음이 충만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잘 살기 위해 먹는다는 분은 먹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게 되고, 먹는 것은 그리 감사할 꺼리가 아니며, 잘 사는 다른 무엇인가가 이뤄져야 비로소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산다는 것이 우리 삶에서 그리 쉽게 이뤄지겠습니까? 또 그게 어느 정도 이뤄질지라도 사람의 욕망은 끝간데가 없어서 늘 부족함을 느낄 것입니다. 국회의원이 대통령되고 싶어하고, 작은 재벌이 큰 재벌 되고 싶어하며, 작은 기억은 큰 가옥으로 바뀔 것을 염원하고, 백년을 살면 백오십년을 살고 싶어하며, 병이 없으면 펄펄날기를 원할 테니까요. 그래서 감사함보다는 늘 유감과 한탄 및 답답함이 많아질 가능성이 높겠죠. 감사생활보다는 원망심과 갈구함이 그 삶의 주조가 되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먹기 위해 산다고 해서 이뤄질 것이 안 이뤄지며, 잘 살기 위해 먹는다고 해서 이뤄지지 않을 것이 이뤄지겠습니까? 오히려 먹기 위해 사는 정도의 낙관심을 가지면 이뤄지기 어려운 것도 어쩌면 이뤄질 수 있다고 봅니다. 거꾸로 잘 살기 위해 먹는 정도의 관점이면 쉽게 이뤄질 것도 오히려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고 봅니다.
잘 살기 위해 먹는다는 사람이 식사를 할 때 밥을 가볍게 여겨 함부로 먹거나 별 생각없이 남기거나 하더군요. 먹기 위해 사는 사람에게야 밥이 곧 하늘이니 밥을 함부로 먹지도 않을 것이고, 생각없이 남기거나 버리지도 못할 것입니다.
잘 살기 위해 먹는 사람도 먹기 위해 사는 이의 관점을 배우고 익혀서 그 감사생활이 기초가 되고 이를 바탕으로 소학적인 공부와 도덕적이고 공동체적인 훈련이 될 때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런 뜻(잘 사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하는 뜻)을 밝힐 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저는 지금 아직 먹기 위해 살고 있기에, 함부로 벗들의 고매함을 모독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이 글을 올리는 제 마음이 여차저차 하다는 것을 널리 살펴주시고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잘 산다고 하는 우리의 생각과 관점이 불만을 양산하는 원망공장이 될까 하는 노파심이 좀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설마 밥을 뺏으려는 이들에게 저라고 무릎을 굽히겠습니까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저는 늘 말씀드리듯이 한끼 밥을 위해 언제든 1그램도 안되는 생각 속 장애물같은 자존심이라 불리는 무엇인가를 던질 수 있다고 봅니다. 부디 뼈까지 장삿꾼 다 됐다는 말씀을 하시지 말고 못난 벗의 못난 이야기라 여겨주시길....
그림은 잘 살기 위해 먹는다고 여기다 보면 오히려 정말 돼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찾아 올린 것입니다..그냥 재미있게 보아주시고, 이런 돼지는 잡아먹으면 맛있겠다 생각되실 경우, 맛있게 그냥 잡아드세요....! 훔친 돼지 아니랍니다.
3회분은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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