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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해발 4,810m의 몽 블랑 산기슭에 자리한 샤모니의 정식 명칭은 샤모니 몽 블랑(Chamonix-Mont-Blanc)이다. 언제나 만년설이 쌓여 있는 이곳은 1924년 첫 번째 동계 올림픽이 개최되기도 한 겨울 스포츠의 도시이다. 동계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알프스의 멋진 산맥을 보고 싶어하는 관광객들이 많이 방문한다.
몽블랑의 가장 큰 빙하인 '메르 드 글라스(얼음의 바다)'에서 발원하는 아르브 강 양안, 해발 1,037m의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험준한 브레방 산맥과 루즈 산맥의 여러 봉우리들이 북서쪽으로 강의 우안 위로 솟아 있으며,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몽블랑 산(4,807m)을 포함한 눈덮인 산맥이 남동쪽의 좌안 위로 솟아 있다. 최고봉을 포함해 산괴의 반 이상이 프랑스 영토에 속한다.
인구 만명 정도인 이 곳을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유는 알프스 촤고봉인 몽블랑 때문이다.
샤모니에 사흘간 머물면서 몽땅베르 트레킹도 하고 브레방 전망대,에규 드 미디 전망대도 갔지만 1600m이상은 내내 안개,구름,비바람으로 볼만한 사진 한 장 건질 수 없었다. 샤모니 시내로 내려와 딱 30분 구름속에 일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고 아침,저녁 무렵에도 잠깐만 주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보여 드릴 게 얼마 없어 몽블랑 소개를 좀 길게 하려한다.
브레방 올라가는 곤돌라승강장 부근에서 바라본 몽블랑 일원
몽블랑은 아직 구름속에 있어 보이지 않고 몽블랑에서 내려온 보송빙하가 보인다.
오른쪽 눈덮인 평평한 몽블랑 닮은 봉우리는 돔 드 구떼
플랑 드 레귀(2317m)에서 몽땅베르역(1913m)으로 가는 이름난 트레킹 길이 하얀 눈 아래로 나 있다.
왼편 위 유명한 '에규 드 미디' 전망대가 보인다.
몽블랑 정상까지 두 발로 직접 오르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더라도 바로 눈앞에서 몽블랑을 볼 수 있는 곳, 전망대 ‘에규 뒤 미디’다. ‘에규’란 돌출한 바늘 모양의 봉우리란 뜻으로 3842m 정상까지 케이블카가 연결되어 있다
몽블랑 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가운데 평평한 봉우리)
저녁 식사하러 나왔다가 이 모습을 보곤 언덕쪽으로 급히 올라가 몇 커트 찍었다.
왼쪽부터 그랑 샤모즈(3445m),블래티에르(3522m),뒤 플랑(3673m) 그리고 언덕 건너 에규 디 미디(3842m)
저녁 식사후 돌아오는 길에
보송빙하가 26년전 처음 볼 때 보다 많이 짧아져 있다.
브레방을 배경으로 한 성 미셸 성당
우리 숙소와 40m 거리에 있다.
프랑스어로 '몽(mont)'이 산을 의미하고 '블랑(blanc)'이 흰색을 뜻하므로 몽블랑은 '흰산'이나 '백봉'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이태리어로는 '몬테비안코'라고 부르는데 뜻은 몽블랑과 같다. 몽블랑은 그야말로 눈부시게 하얀 산이다. 상대적으로 저지대인 알프스 초원 지대의 녹색과 대비되어 햇빛을 받아 선명한 하얀 빛깔을 뽐내며 반짝이고 있다. 멀리서 보는 알프스 산군에서 몽블랑은 순백의 보석으로 치장한 모습으로 최고봉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몽블랑이 이렇게 하얀 이유는 빙하들이 몽블랑을 약 100㎢의 면적에 걸쳐 덮고 있기 때문이다.중앙의 얼음 돔으로부터 빙류가 고도 1,490m 아래까지 내리 뻗고 있다.17세기초에는 빙하들이 샤모니 계곡의 바닥까지 전진해 경작지와 거주지를 파괴 또는 매몰시켰다. 그 이후 빙하들은 주기적인 전진과 후퇴를 되풀이하고 있다.
등반사에서 몽블랑 정상의 초등은 세기의 등정 시비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1786년 초등이 이루어진 이후로 진실은 100여년 후에야 밝혀지게 된다. 이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자료들을 정리해 본다.(능선따라가 이 사건을 아주 재미있어 해서)
유럽인들은 중세를 비롯 오랜 세월 동안 '알프스에는 악마가 산다'고 믿었다. 프랑스에 위치한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 역시 '마의 산' 이라고 불리며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스위스 제네바의 부유한 귀족 청년이자 천재 학자인 소쉬르가 브레방(2,525m)의 정상에 올랐다가 거대한 성처럼 우뚝 솟아있는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의 장엄함에 감동하고 만다. 그는 몽블랑에 오르리라는 꿈을 꾸게 되고 올라갈 루트를 찾기위해 수년간 노력했지만 실패한다. 결국 처음으로 오르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상금을 주겠다고 공언했다. 1760년의 일이다.
하지만 현상금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23년 동안 몽븡랑 정상에 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이전에도 알프스 자락을 오르내린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대체로 수정 채취업자, 영양 사냥꾼, 약초꾼, 군인, 수도승 같은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종교적,군사적 목적이나 생활의 방편으로 마지 못해 산에 올라야만 했던 이들이다. 그런데 다른 이유는 없고 오직 산에 오르기 위하여 산에 오른다니 , 그것도 대악마가 버티고 있는 몽븡랑에 올라야 한다니 선뜻 지원자가 나섰을 리 없다.
소슈르가 상금을 내건 지 23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산에 오르는 사람이 없이 세월만 흘렀다.
1783년 마침내 부우리라는 사나이가 등산대를 짜서 몽블랑에 도전했다. 그러나 이 첫 모험은 나쁜 날씨탓에 실패했고, 1785년의 두번째 모험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이 두번의 도전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등산대원 중에 끼어있던 의사 파까르가 이때 겪은 일들을 밑거름으로 하여 뒷날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을 다졌기 때문이다.
파까르는 이후 작심하고는 한달동안 매일 브레방에 올라 망원경으로 몽블랑 일대를 바라보았으며, 또 한달동안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나간다.
샤모니 마을에는 파까르 말고도 쟈끄 발마라는 사나이가 몽블랑에 오르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험한 바위산을 오르내리면서 수정을 캐며 살았는데, 몽블랑에 올라 단번에 많은 돈을 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1786년 8월 7월 오후 3시. 파까르와 발마는 샤모니 계곡을 벗어나 몽블랑으로 향했다. 그들은 밤 9시쯤 2,392m 높이에 닿아 비박(bivauac;천막을 치지 않고 그냥 자는 것)했다. 다음 날은 새벽 4시 30분부터 등반을 시작해 다섯 시간 만에 보송 빙하와 타꼬나 빙하가 합치는 곳을 지났다.
자일도 없이 크레바스(Crevasse;빙하나 눈쌓인 벌판이 갈라진 큰 틈새)를 건너고, 8월의 뜨거운 햇빛에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눈덩이 위를 지났다. 뒤이어 눈쌓인 벌판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언덕이 나타났다. 그들은 그 곳을 두 시간 만에 빠져 나갔다. 요즘처럼 아이젠도 없이 어떻게 그 미끄러운 눈 언덕을 뚫고 지나갔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언덕을 올라 거센 바람이 몸을 날려 버릴 듯이 몰아치는 눈벌판을 1km쯤 걸어갔다. 그곳의 높이는 3,900m였다. 무릎까지 눈에 푹푹 빠지는 곳을 러셀하며 한 발 한 발 떼어 놓는 강행군이었다. 앞장섰던 발마가 지쳐 쓰러지자 파까르가 그의 짐을 받아 앞으로 나섰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그들은 눈벌판을 벗어났다. 그다음은 산등을 따라 길게 이어진 바위 사이로 몽블랑의 북동쪽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이 길은 눈벌판에서 몽블랑 꼭대기에 이르는 루트가운데 가장 어려운 곳이었다. 하루 종일 햇볕 들 틈이 없이 얼음에 덮인 이곳 역시 자일과 아이젠 없이 가까스로 넘어섰다.
발마와 파까르가 4,810m의 몽블랑 꼭대기를 밟은 것은, 1786년 8월 8일 오후 6시 32분으로, 2.392m의 비박했던 곳을 떠난 지 14시간 30분만에 이룩한 일이었다. 그들은 파까르가 지팡이로 쓰던 긴 막대기를 세우고 거기에 빨간 천을 매달았다.
두 사람은 먹을 것이 떨어지고 잠이 모자란 데다 동상과 고산병까지 겹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끝내 달빛 속을 4시간 30분이나 헤치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들이 몽블랑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당시만 해도 세상을 뒤흔들만한 빅뉴스였다.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온 그들을 둘러싸고 빗발치듯 질문을 던져댔다. " 악마를 만났는가?" " 거기 용이 또아리를 틀고 있지는 않던가?"
발마와 파카르는 기진맥진한 채로 대답했다.
" 아무것도 없소, 저 위엔 눈과 얼음과 바위뿐이요" " 엄청나게 추워서 동상에 걸렸소"" 하지만 경치만은 정말 멋졌소!" 알프스에 대한 중세적 환상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애초부터 파까르는 상금에는 관심이 없었고 성취욕과 호기심이 충족된 것만으로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발마가 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초등의 영광까지도 양보하지만 초등의 영광과 상금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발마는 정상에는 자기 혼자 올랐으며 파까르는 피로와 설맹과 동상으로 정상에 서지 못했다고 떠들고 다녔다. 발마가 의도적으로 퍼트린 소문이 기정사실화 되어가는 분위기에서 파까르가 본인의 등정성공을 주장했으나 민중들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당시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3년전이였으므로 민중들의 상류사회에 대한 불만이 터지기 일보직전인 시기였다. 지식인이고 상류계층 의사인 파까르를 민중들은 싫어 했다.
이 가설이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프랑스의 대문호 알렉상드르 뒤마의 역활이 크다. 파까르가 죽은지 몇 년 뒤인 1832년 샤모니를 찾아온 뒤마는 당시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유명 노 가이드 자크 발마를 만나 그의 영웅담을 경청한 다음 그 것을 글로 써서 발표하였다. 대문호에 의해 각색된 몽블랑 모험담이 얼마나 커다란 대중적 파급력을 발휘했을지는 불문가지다. 덕분에 샤모니 광장에 세워진 기념 동상의 주인공은 드 소쉬르와 자크 발마였다. 가브리엘 파까르의 이름과 역활은 역사에서 깨끗이 지워진 것이다.
이후 몽블랑 등정 100주년을 기념해 샤모니 중심기에는 소쉬르와 발마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로부터 150년뒤 진실이 밝혀졌다.
독일인 겐스도르프가 파까르와 발마의 몽블랑 등정 광경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며 세밀하게 그렸던 스케치 원본이 세상에 공개됐다. 그리고 영국 출신 산악인 프레쉬필드는 오랜 추적 끝에 소쉬르의 증손자가 보관해 오던 소쉬르의 미공개 일기에서 진실을 찾았다. 당시 파까르는 드 소쉬르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몽븡랑 초등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는데 소쉬르가 그것을 고스란히 일기에 적어놓은 것이다. 소쉬르의 일기에 따르면 파까르가 먼저 정상에 올랐을 뿐아니라 정작 상대방의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은 자크 발마였다고 한다. 그 결과 파까르는 진정한 몽블랑의 첫 등정자로 인정받게 되었고 초등 200주년이 되던 1986년 파까르의 동상도 발마의 동상 50m 뒤쪽에 세워지고 그 거리에 그의 이름을 명명했다.‘의사 파까르의 길’
발마와 소쉬르의 동상
몽블랑 전망으로 이름난 브레방은 구름속에
파까르의 동상
자크 발마와 가브리엘 파까르가 몽블랑을 정복했다는 소식은 유럽에서 큰 화제가 됐다. 등산에 대한 관심은 엄청나게 높아졌다. 이후 자그마한 산간 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샤모니 몽블랑은 등반가와 관광객으로 북적이게 됐다. 기술과 장비도 하루가 다르게 좋아져 등산가들은 다투어 알프스의 험난한 봉우리들 - 몬테로자 ·융프라우 ·아이거·그랑드 조라스를 차례로 정복해 갔다. 1865년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봉우리 마터호른을 정복한 뒤, 눈을 아시아로 돌려 히말라야 산맥에 도전함으로써 등산의 역사를 화려하게 펼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알프스는 이제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세계 등반사는 몽블랑 초등(1786년)을 근대 등반의 시점으로 보고 드 소쉬르를 과학적 근대 등반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드 소쉬르는 다만 상금을 내걸었을 뿐인 학자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듬해인 1787년 발마를 가이드로 하여 등반대(소쉬르는 무게가 68kg이나 나가는 이불과 장작, 전원이 잘 수 있는 대형천막, 크레바스를 건널 때 사용할 몇 개의 사다리를 준비해서 20명의 짐꾼에게 지게 했다.)를 조직하여 직접 몽블랑 정상에 오른다. 몽블랑 재등기록이다. 드 소쉬르는 정상에서 기압계를 이용하여 고도를 새로 측정했다. 그리고 3년 동안 제네바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알프스 지역을 여행하거나 산에 올랐다. 이미 알프스에 너무 깊숙히 빠져버린 그는 어렵게 얻은 교수직마저 미련없이 내팽개치고는 곧 ‘알프스 여행기(1796년)’라는 4권 짜리 대 저작의 집필에 몰두했다. 집필에만 무려 17년을 쏟아 부은 이 책은 18세기 알프스 지역에 관한 최고의 자료로 손꼽히며 특히 자연 경관에 대한 묘사들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빙하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몽블랑의 높이가 지난 수년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 봉우리의 공식 높이는 4,808.72미터. 2013년에 측정한 4,810.02미터와 비교해 1미터 이상 줄어든 셈이다. 이처럼 몽블랑이 점점 낮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빙하학자는 기후 변화로 인해 빙하의 녹는 양이 급격히 늘어난 것을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1787년 소쉬르가 측정한 순수한 암봉의 높이는 4,792미터였다)
1787년 재등정 동판화
풍속화 속의 일행은 모두가 긴 알펜스톡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끝에 갈고리가 붙어 있는 곳으로 보아 이것이 원시적인 형태의 피켈이 아닌가 짐작한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모습은 3m 정도의 긴 나무막대를 여러 명이 잡고 가는 모습이다. 이것은 소쉬르가 말한 ‘이동식 스틱’으로 한 줄에 여러 명이 묶고 등반하는 안자일렌(Anseilen)의 시초라 생각되는데, 긴 막대는 로프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라고 본다.
1808년 여성 최초 몽블랑 등정한 마리 파라디스.치마복장으로 등정했다.
등산은 알프스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그래서 '등산'을 가리키는 '알피니즘(Alpinism)'이란 말은 '알프스(Alps)'에서 나온 것이다. 등산의 역사는 어느덧 200년을 넘어섰다.
4,000m급 알프스의 봉우리들은 물론이고, 히말라야 산맥의 8,000m가 넘는 봉우리 14개를 비롯한 지구 위의 이름 높은 산봉우리들이 모두 사람에게 정복된 오늘날, 등산 방법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준비물을 가지고 몇 달에 걸쳐 산을 오르던 이른바 '대 원정시대'는 끝나고, 지금은 한두 사람이 가벼운 차림으로 하루 혹은 며칠에 산을 오르는 '알파인 스타일'등산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알파인 스타일이, 사실은 등산이 맨처음 시작된 때의 방법이라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1902~1904년 사진
뒤에 보이는 그랑 조라스(알프스 3대 북벽중 하나)를 보니 플랑 드 레귀 인근의 메르 드 글라세(빙하의 바다)를 건너는 중이다.
메르 드 글라세는 거대한 협곡 전체가 빙하로 표면이 흙과 바위로 덮여 있지만, 그 아래는 온통 얼음이다.
폭 2km,길이 14km,얼음 두께 200m로 프랑스 최고의 빙하이다.
위키 백과에서 빌려온 사진이다.
몽블랑과 보송빙하,그 아래의 샤모니
첫댓글 역시 산악 모델은 능선따라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