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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쪽코스 - 태청풍경관광지역
도교사원, 강남식물구, 노산에서 가장 뛰어난 바다와 산의 기암을 볼 수 있는 이 코스는 노산의 동남쪽에 있다. 태청만, 태청궁, 명하동, 상청궁, 용담폭포 등이 이곳에 있으며, 면적은 4.2평방Km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면만 바다이다. 기후가 온화하여 숲이 울창하고, 여름에도 그리 덥지 않으며,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아서, ‘小江南’이라 부른다. 태청만 일대에는 종려나무, 洋玉蘭, 變葉木, 紅楠 등 강남에서 자라는 170여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서 江南植物區라 부른다. 기복이 심한 태청만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을 뜷고 도교사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태청궁이 있다. 태청궁은 산을 뒤로 두고 넓은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앞에는 海印寺遺址가 있으며, 釣魚臺, 八仙墩, 張仙塔이 있다. 이 코스를 답사하려면 청도시내에서 출발하여 도착하기 전에 먼저 다음과 같은 몇 개의 다른 볼거리를 구경하는 것이 좋다.
가. 石老人
청도시내의 동쪽에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면만 바다인 곳에 마치 노인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은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것을 ‘石老人’이라 한다. 전문가들의 고증에 따르면 이곳은 원래 바다쪽으로 튀어나온 산이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파도가 산자락을 때려서 구멍이 뚫어졌고, 나중에 꼭대기 부분의 돌다리가 무너져 내리면서 육지와 분리되어 지금과 같은 모양의 石老人이 생겨났다고 한다. 지질학상 이러한 현상을 海蝕柱現象이라 한다.
石老人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전설이 있다. 아주 오랜 옛날에 부녀가 이곳에서 고기를 잡고 살았다. 어느 날 늙은 아버지가 병이 들자 딸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용왕에게 발견되었다. 용왕은 처녀의 미모에 반해서 게장군에게 새우병사를 인솔하고 가서 용궁으로 처녀를 잡아오게 했다. 딸이 돌아오지 않자 늙은 아버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세월이 흘러도 딸이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는 점차 굳어져서 돌로 변했다고 한다.
1985년 청도시정부는 석노인 일대의 4.4평방Km를 관광지로 개발했으며, 1992년에는 국무원의 비준을 받아 국가급관광지로 지정했다. 석노인관광지의 면적은 육지를 포함하여 10.8평방Km이며, 그 지역은 동쪽의 中韓鎭 石老人村 동쪽 경계선에서, 서쪽의 남경로와 동해로의 경계선, 그리고 북쪽으로는 금가령 남쪽, 남쪽으로는 해변에 이르기까지이다. 이 지역은 종합복무구역, 별장구역, 해양공원과 해상관광구역, 맥주문화성, 휴양건강구역, 골프장 등의 기능별 소구역으로 나뉜다. 전체적인 계획에 따르면, 이 지역에 청도최대의 해수욕장인 석노인해수욕장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5성급 호텔과 골프장, 해양공원, 국제맥주센터 등을 건설하는 한편, 특색있는 고급건물을 지어 주거지와 식생활, 관광, 오락, 쇼핑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종합타운을 건설할 것이라 한다.
나. 크고 작은 福島
南窯半島에 있는 大福島와 小福島는 청도시내에서 노산남쪽코스로 가다가 반드시 보고 가야 할 곳이다. 大福島의 원래 이름은 ‘徐福島’이며 徐福이 바다로 출발한 곳이라 한다. 일본인들은 서복이 이곳에서 출발했다는 말을 듣고, 차에서 내려 양손을 합장하고 경의를 표했다. 서복이 배를 타고 불발한 곳이 어디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청도시에서는 2곳을 예상지로 골랐다. 한 곳은 膠南縣에 있는 徐山이다. 琅琊臺 부근에 있는 작은 산인 서산은 대해와 아주 가깝고 넓은 해변이 있고, 또 서복이 이곳에서 배를 타고 떠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산의 이름을 徐山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노산 부근에 있는 바로 이 大福島 즉 徐福島이다. 이 부근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 ‘登瀛’인데 그것은 서복이 이곳에서 배를 타고 瀛洲로 갔다는 의미라 한다.
그렇다면 徐福이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필자와 성이 같아서 좀 뭣하긴 하지만, 아무튼 희대의 사기꾼이자 대항해가였던 이 사나이는, 기록에 따르면 지금부터 2000여년전에 2차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따라서 모두 같은 곳에서 출발을 했는지 다른 곳에서 출발을 했는지에 관해서도 알 수는 없다. 서복의 이름은 원래 서시였으며, 자는 君房이었던 진나라 琅琊사람이다. 서복이 바다에서 신선을 찾았다는 최초의 기록은 《史記》에 나오며, 후대의 기록은 모두 그것을 바탕으로 삼았거나 연역을 한 것이다.
이 고사는 중국과 일본이 모두 중시하는 것으로, 두 나라의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했다. 서복이 바다로 나갔다는 것에 관해서는 호를 ‘抱朴子’ 또는 ‘千歲翁’이라 했던 琅琊人 安期生이 항상 해상에서 약을 샀다는 기록에서도 나온다. 진시황이 琅琊에 와서 안기생을 만난 적이 있다. 진시황과 안기생은 3일동안 밤낮으로 이야기를 했고, 진시황이 그에게 금은보화를 보냈지만, 안기생은 일체를 거절하고 한 권의 책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안기생이 전해준 책에는 천년이 지난 다음에 봉래산에서 나를 찾으라는 글귀가 있었다. 진시황이 서복을 보낸 것은 안기생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안기생과 서복이 짜고서 진시황을 속인 것이 분명하다.
나중에 한무제 때 어떤 사람이 황제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신은 늘 해상에서 생활을 합니다. 안기생을 자주 만나는데 그는 참외만한 크기의 대추를 먹고 삽니다”
당대의 대시인 이백은 ‘왕옥산에 사는 맹대융에게(寄王屋山人孟大融)’라는 시에서 천재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렇게 읊었다.
我昔東海上, 嶗山餐紫霞.
내가 전에 동해상에서 살았는데, 노산에서 저녁노을로 밥을 지어먹었다네.
親見安期生, 食棗大如瓜……
안기생을 만나서는, 오이만한 대추도 먹었지.
제나라 사람 서복은 진시황에게 글을 올려 바다에 봉래, 방장, 영주라는 삼신산이 있고, 그곳에 가끔 신선이 올라오는데 동남동녀 3천명을 데리고 가서 신선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진시황은 안기생과 서복에게 속아서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서복이나 인기생과 관련된 이 한 편의 코믹드라마같은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 때 진나라와 쌍벽을 이루었던 제나라 사람들의 자존심이 서린 복수담이 아닐까한다. 무력에는 굴복하겠지만, 지혜로는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자존심이 진시황이라는 권력자를 바보로 만들었고, 그 민담이 사료를 수집하러 다니던 사마천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역사의 기록에 남긴 사마천의 의도는 또 무엇일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 의문은 다른 기회에 풀기로 하자.
바다에 신선이 살고 장생불사약이 있다는 말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로, 《史記 封禪書》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威王, 宣王, 燕나라의 昭王 때에도 사람을 보내 바다에 있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찾게 했다. 이 삼신산은 渤海에 있으며, 사람들이 찾아가기에 그리 멀지 않다. 순풍을 타고 가면 쉽게 갈 수가 있다. 일찍이 그곳에 다녀온 사람들에 따르면 그곳에는 여러 신선들이 모여 살고 불사약이 있다고 한다.”
조금 더 실감나는 이야기를 해보자. 삼신산에는 신비한 것이 많아서, 다행히 찾아가더라도 쉽게 오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삼신산에는 모두 흰색인 짐승들이 황금과 백은으로 지은 궁궐을 지키고 있어서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구경만 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또 삼신산은 물속에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면 바람이 불어 잡아당기기 때문에 갈 수가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면 서복이 삼신산에 갔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서복은 진시황의 징벌이 두려워 자기가 가기는 했지만 불사약을 얻을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댄 것이다. 서복의 황당한 이야기는 《史記》에 2곳이나 나온다.
《淮南衡山列傳》에는 서복과 진시황의 대화내용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온다. 서복이 바다에 있는 大神과 만나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너는 황제가 보내서 왔느냐?”
“그렇습니다.”
“무엇을 바라는가?”
“해가 갈수록 젊어지는 약을 원합니다.”
“당신들이 가져온 예물이 너무 적어서 보여 줄 수는 있지만 가지고 가지는 못한다.”
서복이 죽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요청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어떤 예물을 가지고 오면 될까요?”
“젊은 남자나 여자와 온갖 일을 다 할 수 있는 기능공들을 데리고 오면 약을 주겠다.”
진시황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3천명의 동남동녀와 기술자를 오곡과 함께 배에 실어 서복에게 주고, 다시 바다로 가게 했다. 그러나 서복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史記 秦始皇本紀》에는 떠 다른 기록이 있다. 서복이 바다로 갔지만 신약은 구해오지 못하고 돈만 많이 쓰게 되자 진시황을 속이며 이렇게 말했다.
“봉래산에서 약을 구했습니다만 돌아오는 길에 큰 물고기나 나타나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좋은 활과 고기를 잡을 수 있는 도구를 준비해서 보는 즉시 잇달아 활을 쏘아 주십시오.”
진시황이 그 말을 믿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람을 시켜서 커다란 어구를 가지고 바다로 가게 하겠다. 연궁을 쏘아 잡으면 되지 않겠는가? 琅琊에서 북쪽으로 榮成山에 이르기까지 물고기 보이지 않게 하겠다. 그물을 치고 있다가 큰 물고기가 나타나면 홀로 쏘아 잡으면 바다 서쪽으로 물길이 열릴 것이다.”
서복과 함께 갔던 동남동녀와 기술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사기에는 ‘來源廣澤’이라는 4글자를 남겼다. 고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곳이 일본이라고 한다. 기록에는 瀛洲로 갔다고 한다. 《括地志》에는 “영주는 동해(즉 황해)에 있다. 진시황이 서복에게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게 한 곳이다. 그 후에 그곳에 수 만가구가 형성되었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會稽에 장을 보러 오기도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史記 正義》에는 오나라 사람의 《外國圖》를 인용하여 “瀛洲는 琅琊에서 1만리를 더 가야 한다.”라고 하였다. 영주까지의 거리는 얼마인가?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영주는 오늘날의 일본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이나 중국에는 서복이 동남동녀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일본에는 서복의 사당이 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하나도 없다.
당시의 항해술에 관한 연구가 있으면, 과연 서복이 어디까지 갈 수 있었을까에 관한 의문도 풀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서 가장 의심이 많았던 진시황이 과연 서복과 같은 사기꾼에게 그리 쉽게 속았을까? 넘치는 정보시대인 지금 우리도 당대에 벌어지는 일을 모른다. 그래서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하지만 끝까지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제나라는 맨 마지막으로 진나라에게 멸망했다. 동서의 양웅이 결승전을 치르다가 진 것이다. 아마도 오랫동안 산동지역 사람들은 진시황이라는 인물을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다. 진시황도 그것을 잘 알아서 점령지 가운데 산동지역의 순시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였다. 그는 2차례나 산동지역을 순시했다. 그것이 안기생과 서복이라는 사기꾼을 등장시킨 소재가 되지 않았을까? 일찍부터 신선사상이 횡행하던 이곳 사람들은 진시황을 희화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황당한 꿈을 연결한 것이 아닐까? 늘 엉뚱한 상상으로 기록된 역사를 의심하는 버릇이 있는 나의 버릇이 나온 이야기이다. 특히 나와 종씨인 서복이 등장한 이야기이므로 길게 늘였다.
다. 靑蛙石
노산 남쪽코스로 가다가 보면, 八水河 입구가 나온다. 도로 왼쪽은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고, 오른쪽은 바다쪽으로 높은 절벽이다. 아래로 내려보면 해변에 청개구리가 엎드린 듯한 커다란 바위가 있다. 지나는 길에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절묘하게 청개구리와 닮은 바위를 보고 놀란다. 여기에서 조금 더 앞으로 가면 太淸宮이 나온다.
라, 太淸宮
太淸宮은 ‘下淸宮’이라고도 하며, 현지인들은 ‘下宮’이라 한다. 노산의 동남쪽에 있으며 앞에는 大海가 있고, 북쪽으로는 7개의 산봉우리가 있다. 총면적은 3만평방M이며, 건축면적은 2500평방M이다. 三官殿, 三淸殿, 三皇殿이 主殿이며, 그 부근에 關岳祠, 東西客堂, 坤道院 등으로 구성된 150여간의 건물이 있다. 大殿 앞에는 모두 山門이 있으며, 便門이 있어서 서로 통한다. 푸른 숲에 묻힌 청색벽돌과 회색기와로 지은 건물은 그윽하고 아름답고, 기본적으로 송대의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어서, 바닷가와 노산의 특색을 살린 隱者의 거처로 적합하다.
太淸宮은 노산에서 가장 큰 도교사원이다. 《太淸宮志》에 따르면, 太淸宮은 BC140년인 漢武帝의 建元 원년에 江西省 瑞州府 高樂縣 사람인 張廉夫가 三官廟를 지었던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張廉夫는 자가 靜如, 호를 樂山이라 불렀으며, 漢文帝 9년에 출생했다. 관직은 上大夫에 이르렀지만 사직을 하고 도를 닦았다. 玄字를 깊이 연구하여 濟南山에 들어가 도교를 열었고, 노산 남쪽의 해변에 초옥을 짓고 三官大帝의 神位를 모셨다. 2년후인 건원3년에 다시 三淸神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 三淸神은 玉淸元始天尊, 上淸靈寶天尊, 太淸道德天尊을 가리킨다. ‘太淸宮’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렇다면 태청궁의 역사는 2천년이 넘는다. 唐代의 李哲玄이 동쪽으로 여행을 하다가 노산에 이르러 三皇帝의 神像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三皇庵’이라 불렀다. 太淸宮은 이로서 처음으로 일정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五代時代 後唐의 同光 2년인 AD924년에는 驅虎庵을 짓고 老子像을 모셨다. 송태조 乾隆 원년인 AD960년에는 劉若拙이 태청궁의 대전을 중수할 때, 새로 三官殿을 짓고 三皇殿을 중수했다. 태청궁의 현 모습은 이 때 이미 완성되었다.
太淸宮은 나중에 全眞道의 隨山派가 차지했다. 全眞道 北七眞 가운데 한 사람인 劉處玄이 金의 明昌 원년인 AD1195년에 노산의 太淸宮에서 경전을 강론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태청궁에서 개종을 하게 되면서, 北七眞이 隨山派의 祖廟가 되었다. 그가 죽은 후, 수많은 도사들이 명성을 듣고 찾아와, 이곳에 은거하며 수련을 했고 저서를 남겼다. 徐復陽, 張三豊, 齊持, 王良輝, 韓謙讓 등이 차례로 태청궁의 주지가 되었으며, 태청궁은 노산에서 가장 유명한 도교의 사원이 되었다.
마. 海印寺遺址
명의 萬曆 년간에 이르면 태청궁의 도교가 일시적으로 쇄락을 하게 된다. 남경 報恩寺의 憨山和尙이 이 틈을 타서 태평궁을 훼손하고 海印寺를 짓게 되자 스님들과 도사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憨山和尙과 耿義蘭이 태평궁을 놓고 쟁탈전이 벌어지자, 관청에서는 즉시 金鑾殿을 허물어 버렸다. 노산의 도교는 배타성이 아주 강해서 다른 종교가 노산에 들어오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全眞敎天下第二叢林’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명대의 유명한 스님이었던 憨山和尙은 일찍이 노산의 명성을 듣고 처음에는 華嚴寺 옆에 있는 那羅延窟에 거처를 하다가 烟霞岺으로 옮겼다. 태청궁이 제대로 수리를 하지 않고 지내자, 감산화상은 돈을 모아 그 앞에 절을 짓고 海印寺라 하였다. 태청궁의 도사들은 크게 화가 나서 상경하여 憨山和尙의 행태를 고발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해인사는 없어졌다. 감산화상은 명대에 불교의 일대종사였지만, 결국은 이렇게 패배를 하고 말았으니, 노산의 도교가 얼마나 강력한 세력을 가졌는지 알 수가 있다.
해인사유지는 태청궁 남쪽에 있으며, 현재는 비석만 남아 있다. 遺址의 남쪽에는 당시에 감산화상이 직접 심었다는 편죽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해인사유지는 태청궁 삼청전 앞의 산문에 있으며, 거대한 돌기둥과 돌다리가 남아 있다. 그 사이에 ‘海印寺遺址’라는 비석이 감산화상의 모습인 것처럼 숨어 있다. 비석 옆에는 작은 글씨로 “명의 만력13년에 감산대사가 궁 앞에 해인사를 새웠지만 성지를 받들어 사찰을 허물고 궁을 복원했다.”라는 글귀가 있다. 비석 주변에 넓은 땅이 있어서 해인사가 있었던 곳이라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 땅바닥에 누워있는 돌기둥은 길이가 2M 둘레가 0.5M이며, 정교하게 조각이 되어 있어서 당시에 해인사가 큰 절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유지는 명대에 벌어졌던 불교와 도교의 한바탕 싸움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청대에 卽墨의 한 문인이 이런 시를 남겼다.
樓閣當年亦壯哉, 香臺此日盡成灰.
雲封古偈埋黃土, 雨洗殘鍾長綠苔.
蓮社已同流水散, 山花自向夕陽開.
至今夜日潮聲急, 飛錫猶疑過海來.
그 때 누각도 장엄했겠지만,
향대는 그 날로 모두 재가 되었지.
게송소리는 구름에 싸여 황토에 묻히고,
남은 종에 낀 이끼마저 빗물에 씻겨버렸네.
연꽃은 흐르는 물 따라 흩어졌지만,
산꽃은 석양을 바라보고 핀다네.
오늘밤 파도소리 다급하니,
혹시나 큰 스님이 바다 건너오려는지.
바, 三官殿
太淸宮 동쪽에 3채의 건물로 된 院落이 있다. 正殿은 홑처마에 맞배지붕형식으로 벽돌과 나무를 이어서 지었다. 正殿 안에는 가운데에 天官大帝, 왼쪽에 地官大帝, 오른쪽에 水官大帝를 모셨고, 그 오른쪽에는 雷神普化天尊, 오른쪽에는 眞武大帝를 모셨다. 벽에는 도를 지키고 법을 수호하는 四大元帥를 그린 벽화가 걸려있다. 三官殿 동쪽에는 청대의 한림 尹琳基가 지은 翰林院이라는 2채의 객사가 있다.
정전 앞에는 붉고 흰 두 그루의 耐冬나무가 있다. 耐冬은 名山茶, 曼陀羅, 玉茗 등으로 부르는 山茶科에 속하는 식물이다. 山茶라는 원예품은 여러 종류가 있다. 노산의 내동은 그 일종이다. 耐冬의 꽃은 붉은색과 흰색이 있는데 그 가운데 흰 꽃은 아주 보기 드물다. 동쪽에 있는 붉은 꽃이 피는 내동은 높이가 9M이며 둘레가 1.8M이고 수령이 6백여년이다. 11월 상순에 꽃이 피고 이듬해 6월 중순에 꽃이 진다. 눈이 하얗게 내리는 겨울에도 타는 듯 붉은 꽃이 피어있다. 화심은 황금빛이고 잎은 푸른 노산에서 진귀한 고목이다. 蒲松齡의 《聊齋志異》에 나오는 《香玉》이라는 소설에서는 태청궁의 백목단과 내동이 변한 선녀가 주인공이다. 옆에 새겨놓은 2개의 女人像은 서로 다른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여인은 봉건제도에 반대하고 사악한 세력에게 반항하는 정신을 나타낸 것이고, 붉은 옷을 입은 花神인 ‘絳雪’은 진홍색의 눈이라는 뜻으로 이 나무를 가리킨다. 나무 앞에 세운 비석에 새긴 ‘絳雪’이라는 2글자는 나무와 함께 감상할만한 뛰어난 글씨이다.
서쪽에 있는 흰 꽃이 피는 내동나무는 수령이 400여년이며, 매년 개화기가 되면 백설이 내린 것과 같아서 옆에 있는 紅耐冬과 좋은 짝을 이룬다. 옛날에 노산의 태청궁에 黃生이라는 독서인이 이곳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선녀처럼 아름다운 2명의 아가씨를 만났다고 한다. 한 여자는 백목단이 변한 香玉이라는 선녀였고, 다른 한 여자는 홍내동이 변한 絳雪이라는 선녀였다. 향옥은 원래 청루의 기생이어서 명랑하고 사랑스러웠으며 총명했다. 강설은 내향적이고 우아했으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 황생은 향옥을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정은 갈수록 깊어갔다. 강설은 향옥의 자매이자 친구였으므로 세 사람은 함께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하루는 향옥이 눈물을 흘리며 그들이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통한 마음을 안고 그들은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그들은 슬픈 이별을 했다.
원래 卽墨縣에 살았던 藍氏라는 사람이 태청궁에 놀러왔다가 백목단을 보고 마음에 들어 그것을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갔다. 남씨의 집으로 옮겨 온 백목단은 하룻밤이 지나자 점차 말라서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황생은 슬픔과 후회가 말로 다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사이에도 강설은 여전히 황생을 찾아와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짓기도 했다. 그들은 어느 날 향옥의 묘를 찾아가 한바탕 슬프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마침내 그들의 슬픈 이야기를 들은 花神이 감동을 받아서 향옥을 다시 태청궁으로 돌려보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황생과 향옥은 여전히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한다. 강설도 그들과 함께 어울려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三官宮에서 서쪽으로 가면, ‘蓬仙橋’가 있고, 돌계단 옆에는 마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龍頭楡’라는 느릅나무가 있다. 이 나무의 높이는 18.2M이며 둘레는 1.3M이고 수령은 1,100년이나 된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느릅나무이다.
좀 웃기는 이야기를 한 마디 보태야겠다. 태청궁 앞에 가면 사진을 붙인 자기소개서를 들고 관광객이 오면 안내를 자청하는 남녀가 수두룩하다. 어떤 사람은 영어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일어를 한다고 한다. 한국말을 한다는 사람도 더러 있다. 각자 자기가 공인가이드라고 자랑아 대단하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수준이라는 것이 너무 보잘 것 없다. 궁금한 것이 많은 나는 하나라도 들을 게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가운데 제법 똘똘해 보이는 여자를 선택했지만, 실망을 하고 말았다. 그 사람에게 들은 것은 앞에서 말한 龍頭楡에 손을 대고 기원을 하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뿐이다. 혹시나 태청궁을 가보고 싶은 독자께서는 차라리 필자의 이 글을 자세히 읽고 가는 것이 더 좋다.
사. 三淸殿
태청궁의 중간에 있는 장방형의 원락이 삼청전이다. 정전과 2개의 배전으로 구성된 삼청전은 벽돌과 나무로 지었으며, 홑처마에 맞배식 지붕을 하고 있다. 정전 안에는 중앙에 元始天尊, 왼쪽에 靈寶天尊, 오른쪽에 道德天尊을 모셔두고 있으며, 문 오른쪽에는 王靈官이 있다. 정전 앞에는 2채의 配殿이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이 華帝君, 南極長生大帝, 太陽帝君을 모신 東華殿이고, 서쪽에 있는 것이 西王母天尊, 斗母大天尊, 太陽妙果素月天尊을 모신 王母殿이다. 삼청전의 출구로 나오면 촉한의 명장인 關羽와 남송의 민족영웅 岳飛를 모신 關岳祠가 있다. 여기에서 관우는 漢關壯繆公으로, 악비는 守岳武穆公으로 신과 동격이다. 삼청전 앞에는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샘이 있다. 태청궁에 있는 도사들은 이 샘을 ‘神水泉’이라 부른다. 아무리 가물어도 이 샘물은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아. 三皇殿
태청궁의 서쪽에는 2채의 殿堂이 있다. 主殿은 삼황전으로 천, 지, 인 삼황을 모시고 있으며, 配殿은 救苦殿이다. 모두 홑처마에 맞배식 지붕으로 지었다. 주전에는 軒轅大帝, 神農大帝, 伏羲大帝를 모시고 있으며, 좌우 양쪽으로 역대의 十大名醫를 봉공하고 있다. 救苦殿에는 救苦天尊을 모시고 있다. 대전 양쪽에는 石刻이 있는데, 징기스칸이 邱處機에게 성지를 내린 것을, 北七眞 가운데 한 사람인 馬鈺이 다시 제자인 李道謙에게 전하면서, 직접 쓴 글씨이다.
가장 유명한 邱處機는 호를 長春子라 했기 때문에, 邱長春 이라 부르기도 한다. 19세에 崑崳山에서 공부를 시작했던 그는 나중에 노산의 太淸宮에서 도학을 강론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론을 들으러 왔다고 한다. 금의 大安 원년인 AD1209년 구처기는 교서에서 노산으로 다시 옮겼다. 그는 노산에서 각처에 있는 道觀과 명승지를 찾아가 詩詞를 남겼다. 神淸宮 동쪽에 있는 長春洞은 그가 수련을 한 곳이며, 鶴山에 있는 ‘仙鶴洞’이라는 3글자는 그가 손으로 쓴 것이라 한다. 上淸宮에는 그가 남긴 ‘靑玉案’이라는 詩詞가 있다. 華樓山, 白龍洞, 太淸宮에도 그가 남긴 詩刻이 있다. 上淸宮 남쪽에 있는 ‘邱長春墓’는 그의 衣冠을 묻은 곳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의 무덤은 북경의 白雲觀에 있다고 한다.
구처기는 몽고의 태조인 징기스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원대에는 도교를 숭상했기 때문이다. 징기스칸은 구처기를 존경하여 長春眞人이라 불렀으며 國師로 받들었다. 도교 가운데 全眞派의 주요 인물은 모두 노산에서 수행을 했다. 玉淸宮, 神淸宮, 華樓宮, 白雲洞, 凝眞觀 등의 도교사원이 모두 元代에 건설되었다.
징기스칸이 나라를 세운 다음 구처기는 징기스칸의 초대를 받아서 원정길을 동행했다. 《元史》에는 이러 기록이 있다.
“구처기는 매번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정치의 방안을 물으면, 敬天愛民이 근본이라고 대답했다. 長生久視의 도를 물으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태조는 구처기의 말을 깊이 새겼고 ‘天賜仙翁’이라 불렀다. 징기스칸은 구처기가 입은 옷과 패물을 달라고 했지만 얻지 못하고 虎符(일종의 兵符)를 하사하고 ‘살아있는 신선’이라 칭했다.”
지금 태청궁의 三皇殿 아래 복도에는 이런 내용을 새긴 비석이 벽에 새겨져 있다.
“원태조 징기스칸이 계미년(AD1283년 9월 24일)에 聖諭를 반포하여 邱長春眞人에게 상을 내리고 그 사실은 노산의 태청궁에 새겨두어 그 공로를 세상에 알린다. …… 금호부를 하사하면서 진인이 있는 곳에는 짐이 함께하는 것과 같다. 邱神仙이 중국땅에 있다고 하니, …… 신선이 있는 곳이라 들었다”
이 비문을 보면 징기스칸이 입을 열면 구처기를 진인이나 신선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元代에는 도교를 숭상하여 全眞七子가 모두 존경을 받았다. 전진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長生子 劉處玄은 元世祖 쿠빌라이로부터 明德眞君에 봉해졌으며, 雲岩子 劉志堅이 華樓山에서 30년 동안 수련을 하다가 죽은 다음에는 元代의 大學士 趙世延이 직접 비문을 지어 바치기도 했다.
태청궁 안에 있는 2그루의 古柏은 태청궁을 창건한 漢代의 張廉夫가 직접 심은 것이라 하여 ‘漢柏’이라 부른다. 이 잣나무는 원래 한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 거대하게 자랐는데, 다른 잣나무가 그 위에 다시 자라나서 흡사 두 마리의 용이 서로 휘감고 있는 것과 같아 蟠龍이라 불렀다. 나중에 불에 타서 훼손되었는데, 얼마 후에 이 고백의 허리 부분에 새로 넝쿨이 자라나자 원래 나무도 생기를 찾았다. 따라서 원래의 잣나무 두 그루와 나중에 기생하게 된 오배자나무(鹽膚木)가 한 두름으로 살게 되었다. 붉은 오배자나무 꽃과 녹색의 잣나무 잎이 서로 잘 어울리고, 침엽수와 활엽수가 공생을 하는 기이한 모습이 연출된 것이다. 삼황전 안에는 또 하나의 방이 있고, 그곳에는 耿義蘭의 조각상이 있다. 태청궁의 도사들 가운데 제사를 받아먹는 것은 耿義蘭 뿐이다. 오늘날의 태청궁으로 중수를 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서이다.
태청궁 주변에는 邱處機가 깎았다는 벼랑이 있고, 康有爲가 진시황이 노산을 찾아온 것을 기념하는 시를 써서 새겨 넣었다. 連環洞과 북두성에 제사를 지낸 拜斗臺가 이곳에 있는데, 이곳에서 바다에 뜬 밝은 달을 구경하는 것은 嶗山十二景 가운데 하나로 ‘太淸水月’이라 한다.
자. 八仙墩
태청궁 연해에서 산길을 따라 동쪽으로 약 6Km를 가면 노산의 동남쪽 바다로 불쑥 나온 산자락이 있다. 이곳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파도가 높다. 수천만년 동안 파도에 마모되어, 바다가 있는 남쪽으로 떨어져 나와, 마치 거대한 건물을 세워 놓은 것처럼 벼랑을 만들었고, 그 주변에는 십여개의 거대한 石墩이 남아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八仙이 바다를 건너기 전에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노산의 산봉우리는 대부분 화성암이지만, 유독 嶗山石만은 變質岩이다. 八仙墩과 절벽에도 세로로 홍색, 백색, 회색, 청색을 띤 줄이 있고, 그 사이에는 화려한 비단처럼 반점이 있다. 명대의 대학사 高宏圖는 아홉 번이나 노산에 와서 八仙墩과 노산을 보고 “천하에서 가장 기이하고, 가장 아름답다(第一奇, 第一麗)”라 하였다. 嶗山十二景 가운데 하나인 ‘海嶠仙墩’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 말이다.
嶗山石에는 두 그루의 오래된 내동나무가 있는데 張三豊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팔선돈과 남북으로 마주하는 곳에, 널찍한 돌이 수면으로 노출되어있는데, 용왕이 돈을 햇볕에 말리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또 張三豊이 이 돌 위에서 코를 골고 잤는데, 주변을 깨끗이 하지 않아서 엄청나게 지저분했으므로 이 돌을 ‘랍탑석(邋遢石)’이라 한다는 말도 있다.
張三豊은 이름이 通이고, 자는 君實이었다. 또 다른 이름은 全一이었으며, 三豊은 호이다. 그의 행적은 《元史》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도가에서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는 남송의 理宗 淳佑 7년인 1247년에 태어났으며, 원의 延佑 원년인 1314년에 終南山 으로 들어가 도가의 진전을 얻었다고 한다. 10년 후에는 武當山으로 들어가 9년 동안 수도를 한 다음에 大道를 이루었으며, 內家의 무술인 무당권법의 창시자가 되었다. 嶗山石 부근의 바다에는 마치 탑을 세워놓은 듯한 큰 돌이 있는데, 그곳에 장삼풍의 뼈를 간직해두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어서 ‘張仙塔’이라 부른다.
태평궁과 嶗山石 사이의 해변에는 釣魚臺라는 石臺가 있고 그 위에는 ‘一字詩’라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가 새겨져 있다. 비록 장난스럽게 쓴 것이지만, 주변의 풍경을 나름대로 잘 묘사한 시라는 생각이 든다.
一蓑一笠一髥叟, 一丈長竿一寸鉤.
一山一水一明月, 一人獨釣一海秋.
도롱이 하나에 밀짚모자 하나를 쓴 노인 한 사람이,
일 장짜리 낚싯대에 일 촌짜리 바늘을 끼우고,
산 하나, 물 하나, 명월 하나를 벗 삼아,
홀로 바닷가에서 낚시를 한다네.
아. 龍潭瀑布
용담폭포에는 노산십이경 가운데 하나인 龍潭噴雨가 있다. 용담폭포는 노산 남쪽의 바다와 가까운 곳에 있으며, 발원지는 해발 500M 정도에 있는 北天門이 동서로 갈라지는 곳이다. 八河水라 부르는 8갈래의 개울물이 구불구불 3Km정도 남하하여 잣나무가 우거진 곳 가까이에 있는 절벽에서 폭포가 된다. 폭포 아래는 맑은 쪽빛의 용담이 있다.
용담폭포는 물줄기가 두 줄기로 나누어져 8자 모양을 이룬다. 높이는 약 30M정도로 오랜 세월 동안 쉼없이 쏟아지고 있다. 비거 온 후에 산에 물이 많아지면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이 벼랑 밖으로 튀어 올라 은색의 꽃송이가 휘날리는 것과 같고, 물줄기는 백룡이 등천을 하는 것과 같다. 태양을 등지고 천천히 하늘을 쳐다보면 일곱 색깔의 무지개가 영롱하다. 천둥을 치는 것과 같은 물소리는 멀리 산 입구에서도 들린다. 옛 시인은 그 장관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百尺峭壁高無己, 左右靑山相近比.
一練高掛懸崖巓, 玉龍倒噴西江水.
餘波流沫隨風飄, 如抛珍珠墮還起.
只見泉源直上通, 仰視去天不違咫.
백 척의 벼랑은 높기도 하고,
좌우에는 청산이 나란히 누워있네.
한 줄기 높이 걸린 벼랑 꼭대기에서,
옥룡이 뒤집어지며 강물을 뿜는구나.
스러지는 파도는 거품이 되어 바람에 날려,
진주알을 던져놓은 듯 다시 일어나는구나.
원천이 곧장 위로 통하지 않는가 바라보자고,
하늘을 쳐다보니 지척간이로세.
용담폭포는 上淸宮와 明霞洞을 찾아가는 길에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이다. 해변도로를 따라 연도의 산과 물, 그리고 기암괴석을 구경하는 것이 절묘한 매력이기 때문이다.
자. 上淸宮
上淸宮은 노산의 八河水에 있다. 이곳은 全眞道의 華山派를 받드는 곳으로, 노산에 있는 많은 도관들 가운데 유일하게 叢林廟가 있는 곳이며, 邱處機, 劉處玄, 李志明 등의 유명한 도사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上淸宮은 깊은 산 속에 있기 때문에 아주 조용하고 분위기가 그윽하다. 그리고 이름난 꽃과 오래된 나무가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정원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가 가운데 하나는 늙어서 가지가 이리저리 찢어져 있어서 마치 교룡이 몸을 비틀고 있는 것과 같다. 둘레가 무려 7M나 되고, 동쪽으로 뻗어나간 가지에는 유방모양의 樹瘤(혹)가 있어서 대단히 희귀한 모습이다. 은행나무는 白果樹, 公孫樹 또는 活化石이라고도 한다. 상청궁에 있는 은행나무는 청도에서 가장 유명하다. 樹齡이 1000년 정도나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지에 난 3개의 혹은 식물전문서적에도 기록되지 않은 희귀한 것이라서 많은 학자들이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이곳을 찾아 관찰을 한다.
또 명초에 상청궁에 白牧丹 한 그루를 심었는데 어떤 세력가가 이것을 훔쳐갔다고 한다. 백년이 지난 어느 날, 상청궁에 있던 도사의 꿈속에, 흰 옷을 입은 소녀가 나타나 문을 두드리며, “나 지금 왔어요, 나 지금 왔어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다음날 일어나 마당에 나갔더니 정말 백목단이 있던 곳에서 새싹이 돋아났다고 한다. 이 사실에 관한 淸初의 기록이 있다. 蒲松齡은 上淸宮에 왔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香玉》이라는 소설을 지었다. 현재는 이 나무가 없어지고, 최근에 다른 종자를 얻어서 다시 심었다.
정원에는 또 玉蘭과 紫薇 등의 오래된 나무가 있어서 꽃이 피는 시절에는 향기가 진동을 한다. 청대의 尤淑孝가 상청궁에 왔다가 남긴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水復山深路欲窮, 上淸接引盡天工.
烟林回合靑筇轉, 樓閣參差碧漢通.
兩道流泉穿鐵岩, 千年老樹自窮隆.
雙橋坐立忘歸處, 暮色悠然百虛空.
개울 건너 또 개울 깊은 산 속 길도 끊어진 곳,
하늘 맞닿은 곳에 상청궁이 있구나.
우거진 숲을 지나면 푸른 대나무 흔들리는 곳,
하늘로 솟은 누각은 은하수로 통하겠지.
두 줄기 샘물은 쇳덩어리 같은 바위를 뚫지만,
천년 고목은 절로 자라기를 멈추네.
쌍둥이 다리에 걸터앉아 돌아갈 곳을 잊은 것은,
저녁노을이 허공에서 아득하기 때문이라오.
상청궁 남쪽에는 邱處機의 衣冠塚이 있는데, 전에는 이것을 ‘邱祖墓’라 하였다. 서쪽과 남쪽에는 尤淑孝의 시에 나오는 ‘朝眞’과 ‘迎仙’이라는 두 개의 작은 돌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서 은은히 풍기는 솔향기를 맡아보는 것은 또 다른 맛이다.
차. 明霞洞
상청궁에서 산길을 따라 1Km 정도 올라가, 해발 650M 지점에 이르면 玄武峰이 나오고, 그 아래쪽에 화강암으로 둘러싸인 곳에 明霞洞이 있다. 뒤에는 거대한 소나무가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으며, 앞에는 절벽이 돌출해 있어서 높은 축대를 쌓은 것과 같다. 그 아래에는 가로세로로 깊은 골짜기가 나있고,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간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한쪽면만 바다를 바라볼 수가 있다. 아침저녁으로 해가 뜨고 질 때는 노을이 찬란하게 비쳐서 온 산을 붉은 비단으로 뒤덮는 것과 같다. 이 광경이 嶗山十二景 가운데 하나인 ‘明霞散綺’이다.
노산에 ‘洞’이라는 이름이 붙은 도교사원은 雲洞과 이곳 明霞洞 뿐이다. 이 두 개의 사원은 노산의 동쪽에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상에 있다. 따라서 북쪽에 있는 雲洞을 ‘後洞’이라 하고, 남쪽에 있는 明霞洞을 ‘前洞’이라 한다.
明霞洞은 天然石洞으로 내부가 높아서 사람이 서서 다닐 수가 있으며, 면적은 10평방M이다. 금의 大安 년간인 1162년에 이 동굴에 건물을 지었다. 청의 강희 년간에 이 동굴이 번개를 맞아 절반이나 땅 속에 묻히게 되자, 邱處機가 대안 3년인 1211년에 새겼다는 ‘明霞洞’이라는 3개의 글자가 나타났다. 또 孫紫陽과 관련된 기록도 있다. 孫紫陽은 이름을 玄淸이라 했던 山東省 壽光人으로 어려서 양쪽 눈을 실명하게 되자 스님이 되었다. 20여년 후에 明霞洞에서 수련을 하면서 치료를 하지 않았는데도 시력을 회복하게 되어 그 명성이 조정에도 알려졌다. 명의 嘉靖 27년인 1558년, 손자양은 북경으로 가서 全眞道의 본부였던 白雲觀에 머물며, 明世宗을 배알하고, 護國天師府左贊敎에 봉해지면서 노산 출신의 도사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明霞洞에 있는 지금의 廟觀은 원래 ‘斗母宮’이라 불렀으며, 동굴 입구의 오른쪽에 있다. 元代에 처음 지은 이 건물은 全眞道 金山派의 祖庭이다. 명대에 건물을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지금의 明霞洞으로 고쳤다. 명의 隆慶 년간인 1567년 ~ 1572년 孫紫陽이 중수를 하면서 三淸殿을 짓고, 淸末에 觀音殿을 지었다. 모두 나무와 벽돌로 지었으며, 검은 통 모양을 한 기와로 지붕을 덮은 맞배식 건물이다. 지금 명하동의 면적은 2천평방M이며, 32개의 방이 있고, 건축면적은 200평방M이다. 산사태로 觀音殿이 무너졌던 것을 다시 수리했다. 산문에 걸린 明霞洞이라는 편액은 淸末의 翰林 林王서가 쓴 것이다.
명하동과 함께 이름을 얻은 것은 명하동 보다 높이 있는 玄眞洞이다. 높이 2M인 원형의 玄眞洞은 윤이 윤 정도로 벽이 매끄럽다. 명대의 도사 장삼풍이 이곳에서 수련을 했다고 한다. 동굴 입구에 있는 12자의 유려한 글씨는 장삼풍이 썼다고 한다. 현무봉 정상에는 ‘天池’라는 石坑이 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부근에 있는 筆架山, 鐵佛澗, 萬年船과 같은 것도 구경을 하는 것이 좋다.
첫댓글 게장군에게 새우병사..재미있는 고사입니다.묵계님의 조상과 관련있는 글이라 재미가 한층 더 있습니다...진시황을 상대로 천하의 사기술을 발휘한 서복을 조상으로 두셨으니, 묵계님도 그럴려나..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