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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10일 한강기맥에 위치한 계방산 눈꽃 산행에 나섰다. 기상 예보는 강원도 중부지방에 오전에 비나 눈이 온다고 하였다. 그러나 계방산에 내리는 것은 비가 아닌 눈일 것이다. 계방산의 입구인 해발 1089M의 운두령에 오르면 분명 눈발이 휘날릴 것이다.
산악회 버스가 산 구비를 감돌아 구름도 쉬어 넘는 운두령에 올랐다. 여기는 백두대간에서 뻗어나간 한강기맥의 등줄기이다. 오대산 두로봉에서 시작하는 한강기맥은 계방산과 용문산을 지나 두물머리의 청계산에 이르러 끝을 맺는다.
해발 1,577M의 계방산은 눈꽃 산행지로 인기가 높은 산이다. 안내산악회에서도 겨울 산행으로 태백산에 이어 두 번째로 손꼽는 산이다. 한강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계방산은 남한에서는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 설악산(1,708m), 덕유산(1,614m)에 이어 다섯 번째로 높은 산이다. 그런 만큼 겨울이면 언제든지 하얀 설경을 기대해볼 만한 산이다. 환상적인 설경이 3월 초순까지 이어지는 까닭에 눈꽃 산행을 즐기는 등산인 들에게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계방산의 북쪽에는 수달이 서식하는 깊고 푸른 을수골이 있고, 남쪽에는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험이 높다는 방아다리약수와 신약수터가 있으며 노동계곡 아래에는 반공소년 이승복 생가 터와 기념관이 있다. 그러기에 관광을 겸한 산행지로도 인기가 높은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등산객이 그만큼 많을 수밖에 없다. 계방산 산행 인파에서 태백산 눈꽃 축제에 버금가는 열기가 느껴진다.
운두령에 내려 스패츠와 아이젠을 차고 바람막이 방한모를 썼다. 계방산 출발지인 운두령은 해발 1,089m나 되는 고지이어서 정상에 오르기가 비교적 쉽다. 운두령에서 계방산으로 이어지는 절개지에는 철도 침목으로 나무계단을 놓았다. 20여M 길이의 나무 계단을 올라서자 곧바로 가벼운 내리막과 오르막의 평탄한 능선길이다.
산행을 즐기는 등산객을 위해 다듬어 놓은 능선길이 편안하다. 산 능선에 늘어선 참나무를 베어내고 가지런한 산길을 내어 놓았다. 강원도의 민심이 아직도 산처럼 순박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계방산 오름길에는 등산객들로 넘쳐났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무 살 안팎의 젊은이에서부터 쉰 세대의 아저씨, 아주머니들로 가득하다. 한두 살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산행에 나선 씩씩한 젊은 아빠의 행보가 부럽다. 흩날리는 눈발을 뚫고 지체되는 앞사람을 추월해 나가기가 수월하지 않다.
1,173m봉에 이르렀다. 싸라기 같은 눈발이 산길에 흩어져 내린다. 배고픈 흥부의 아내가 보았으면 떡가루로 착각하였을 작고 하얀 눈발이다. 그러고 보니 설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눈발이 거세어지면서 시계는 불투명하다. 20M 앞도 잘 보이지 않아 먼 곳의 설경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꽃과 서리꽃이 혼합된 눈꽃 터널을 그냥 무심히 지나갈 수밖에 없다.
눈꽃 산행에 처음 나선 등산객의 입에서는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오늘 같이 눈 내리는 날의 산행은 일생에 몇 번 오지 않는 기회라는 것이다. 탄성을 지르는 등산객의 환호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어 완경사의 능선길을 따라 걷자니 산죽밭이 이어졌다. 하얀 눈이 내려 푸근히 내려 덮인 산죽밭이다. 하얀 이불을 덮고 누운 푸른 산죽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진다.
1496m봉에 이르렀다. 남동쪽으로 쇠등처럼 순하게 하늘금을 이루는 정상이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부드러운 남동릉을 따라 올라가니 주목군락지가 서서히 나타난다.
해발 1,577M의 계방산 정상에 이르렀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친다. 맑은 날이면 한강기맥의 출발점인 오대산도 보이고 운두령 아래의 보래봉, 회령봉도 일망무제의 전망으로 터질 것이다. 그러나 눈보라가 휘날리는 오늘의 날씨로는 기대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운두령에서 계방산 정상까지는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 짧은 구간이다.
계방산 정상에는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도 힘겹게 올라와 있었다. 겨울 캠프이거나 극기 훈련인 훈육 행사인 모양이다. 입시 위주의 과외 열풍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가이드의 마음 씀씀이가 든든하고 믿음직하다.
정상에서 북동릉을 타고 얼마쯤 산길을 따라 갔다. 이 능선을 타고 계속 진행하면 산길은 오대산 효령봉에 닿을 것이다. 숲이 좋은 초여름에 하루 종일 걸어가면 좋은 산행이 될 것이다.
북동릉 삼거리에는 아름드리 주목군락이 있었다. 흰 눈을 지붕처럼 뒤집어 쓴 커다란 주목은 초가집처럼 보였다. 등산객들은 바람도 자거 눈발도 막는 주목 아래에 들어가 점심을 먹는다. 간단한 점심을 먹기에 그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었다.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노동계곡으로 내려섰다. 전나무가 드문드문 놓인 산비탈에 아직도 지난여름에 있었던 수해의 흔적이 남아있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쓰러져 산길을 막는다. 1시간 30분쯤 걸어 내려오니 급수대가 있는 공터가 나온다. 계방산 제 1야영장으로 이승복 기념관 청소년야영장이다. 몇 동의 천막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니 겨울 야영에 나선 마니아들이 있는 모양이다.
야영장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진 거리에 반공소년 이승복 생가가 있었다. 이승복 생가는 화전민이 짓고 사는 귀틀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방 두 칸과 부엌에 딸린 외양간이 전부인 초라한 삼간집이었다. 마당 한 구석에는 감자, 옥수수 등의 곡식을 보관하던 움집도 딸려 있다. 방문을 열어보니 어두컴컴한 방바닥에 띠로 맨 거적때기가 깔려 있다. 생가의 마당에는 작은 빗돌이 하나 서있었다. 이승복 추모비였다. 빗돌에 쓰인 글귀는 다음과 같았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
여기는 반공의 꽃 이승복이 꿈을 키우며 자라던 곳
발길을 멈추고 옷깃을 여미니
아! 지금도 들리네
「공산당은 거짓말쟁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그 용맹 그 외침 산울림 되어
계방산을 흔들고 태백산맥을 울리고
공산당의 가슴 서늘케 울렸나니
꽃송이 채 꺾여간 어린 넋이여
자유의 불기둥이여
이어 이승복 생가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 있었다.
「1968년 12월 9일 밤, 단란하게 살고 있던 이승복군 가족 7명 중 아버지와 할머니는 이웃집 이삿짐을 날러주러 가고 집에는 5명이 남아있었다. 산 속에서 내려온 무장공비 잔당 5명은‘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항거하는 이승복과 그의 일가족을 살해하여 아이들 3명은 외양간 뒤쪽의 오지랖 물속에 처박고 어머니와 큰아들은 퇴비 더미에 파묻어 두었으나 공비의 칼에 36곳을 찔리고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큰 아들 이학관은 정신이 돌아와 이웃집으로 기어가 구출이 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식구들은 그 날 밤, 군견을 대동하고 출동한 수색대원에 의해 시체로 발견되었다.」
1960년대, 우리 사회는 '5.16 군사혁명'을 계기로 반공태세가 날로 강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1964년 '한일회담반대' '월남파병반대' 시위 등의 반정부 소요의 여파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이를 기회로 북한은 '무력 대남 도발 공작'으로 정책 전술을 전환하였다.
1961년「노동당 4차대회」에서는 남한에 '지하당 조 직확대'와 '반미통일전선의 형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남한 내의 북한 동조자들과 북한과 결합시키는 형식을 통한 '공산화 통일 실현'을 결정하고 도발에 들어갔다. 1968년 1월 21일「청와대 무장공비 침입」1968년 10월 30일「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등으로 '대남 유격전'을 본격화에 나섰다.
연이은 북한의 도발에 남한에서도 적극적인 대응으로 맞섰다. 향토예비군을 창설하는가 하면 영화 실미도로 밝혀진 대북 공작「만수대 무장공비 침투 계획」등을 현실화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이 도발한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공작되었다.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120명을 15명씩 조 편성하여 침투시킨 사건으로 군복, 신사복, 등산복 등으로 위장하여 게릴라전을 펴게 하였다.
11월 3일 새벽, 북한의 무장공비들은 평창군 주민들을 모아놓고 남자는 남로당, 여자는 여성동맹에 가입하라고 총검으로 위협하였다.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머뭇거리자 대검으로 찌르는 등의 만행을 자행하고 뒤늦게 도착한 주민은 돌로 머리를 쳐서 죽이기도 하였다. 이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 2학년 이승복 어린이와 그 가족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달린 주민들의 릴레이식 신고로 군경이 출동하였다.
군경과 예비군의 본격적인 토벌작전은 그해 12월 28일까지 약 2개월 간 계속되었다. 이 작전에서 우리 군경은 무장 공비 11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한도 군인과 경찰, 일반인 등 20여명이 사망하는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이 작전은 북한이 아무리 잔악한 무장 공비를 침투시켜도 이를 격멸할 수 있다는 튼튼한 안보태세를 실증으로 보여주었다. 청와대 무장공비 침입과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사건의 실패로 북한 124군부대는‘이리가도 죽고 저리가도 죽는 부대’라는 유행어로 떠돌기도 하였다.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북한이 남한의 산악지대와 농촌에서 게릴라활동의 가능성을 탐색해 본 것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베트남의 공산화와 같은 민족 전쟁을 할 수 있겠는지를 시험한 것이라고 한다. 아직도 대남 무력 적화 통일의 야욕을 버리지 않는 저들의 속셈이 야속하기만 한다.
계방산 주차장에는 수십 대의 산악회 버스가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서너 가구의 가난한 화전민이 밭을 일구고 살던 60년대의 모습이 아니다. 운두령 산장 등의 펜션과 용골송어횟집 등의 식당으로 번화한 마을로 변모되어 있다.
‘솔대와 하늘’이라는 식당에 들어서니 이형 내외가 먼저 와서 송어회를 맛보라며 술잔을 건넨다. 콩가루에 비벼 먹는 송어회가 구수하다. 눈꽃 산행을 마치고 아늑한 귀틀집에 앉아 송어회를 먹는 맛에 계방산은 다시 가고 싶은 산행길이었다.
첫댓글 꼼꼼한 산행기 한참을 잘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하하하 멋있게 잘같다오신섯 같아 흐흠합니다 즐거운 하루항상되십시요
몇 주전 내가 다녀 왔던 계방산은, 대청봉은 물론, 선자령의 풍차?까지 잘보이던데.....! . 아무튼, 임선생님 ! 송어회 잘드셨다니 다행이군요!, 그리고 오늘이 음력 섣달 그믐 날입니다. 설 잘 보내시고 대박나는 내년에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