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미국과 쿠바가 53년 만에 역사적인 국교 정상화 교섭을 시작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로써 마지막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그 변화의 바람에 대해 김수우(백년어서원 대표) 시인이 쿠바 현지에서 르포를 보내왔다. 김 시인은 '물질에 주눅 들지 않는 쿠바'를 주제로 한 출판을 위해 현재 쿠바로 건너가 취재 중이다. 우연이었을까. 호세 마르티 탄생기념일인 1월 28일,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 해발 970m에 있는 피델 카스트로의 게릴라 사령부를 방문한 것이. 호세 마르티 탄생 100주년 되는 해에 26살의 피델은 몬카다 병영을 공격하면서 혁명을 출발시켰다. 피델이 붙잡혔을 때 그가 당당하게 내세운 것은 호세 마르티의 정신이었다.
목숨을 걸고 쟁취한 독립과 평등이다. 오래전에 시장경제를 선택했고, 이제 미국이 쿠바의 경제봉쇄를 푼 이 시점에서 그들의 선택을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호세 마르티는 뉴욕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독립 후라도 점점 야욕을 드러내는 미국의 신제국주의와 맞서야 한다고 설파했다. 호세 마르티가 내세운 이상은 피델과 체 게바라의 정신으로, 쿠바의 애국심으로 빛난다. 하지만 이제 어떤 변화가 올 것인가.
바로 전날, 호세 마르티 탄생 기념 횃불 행진을 따라 걸었다. 그란마 주의 수도 바야모에서였다. 시에라 마에스트라는 바야모에서 가깝다. 그란마호가 박살이 나고 피델이 생존자 열두 명을 데리고 숨어든 곳이 시에라 마에스트라였다. 거기서 3년 동안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피델은 혁명을 완성시킨다. 마침 소풍 온 고등학생 40여 명과 함께 사령부를 탐방했다. 한류 문화에 빠진 청소년들은 한국인을 반가워하며 사진을 찍는다. 아이들은 4시간의 험한 산길을 힘들어했다. 손에는 낡았지만 저마다 휴대폰이다. 미국의 경제봉쇄로 생긴 경제 위기 한참 이후에 태어난 세대가 독립과 혁명을 얼마나 이해할까. 질문하기도 전에 한 고등학생은 "쿠바는 자유를 위해 투쟁한 역사를 절대 잊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쿠바는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세계의 눈길이 쿠바의 변화에 집중되어 있다. 53년 만에 미국이 경제봉쇄를 풀겠다는 건 세기적이면서 상징적인 소식이다. 마지막 사회주의 국가 쿠바와 자본주의 초강국 미국. 그들이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이민법, 대사관 설치 문제를 비롯한 회의가 연일 계속되지만 입장 차이만 서로 확인하는 중이다.
모두에게 매우 긍정적이긴 하지만 체제 속에서 변화의 물결을 느끼기엔 아직 멀다. 쿠바인들은 이 모든 과정이 간단하지도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다. 미국은 경제봉쇄법에 대한 근본적인 개정안은 아직 내놓지 않았다. 자유로운 기업 활동은 아무래도 3년 이상은 걸릴 거라 예상하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곧 외국인에게 제한되어 있던 마이애미 직항이 열릴 것이고,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마스터 등 미국산 카드도 쿠바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될 예정이다. 하지만 더 우선적인 것은 쿠바가 선택하는 키(Key)이다.
그래서 쿠바인들은 기다린다. 시간이 흐르면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기대한다. 기다림과 불편함엔 익숙한 그들이라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오늘도 살사를 추고 'Vivir mi vida'(내 삶을 살 거예요)를 노래한다.
쿠바는 이미 몇 해 전부터 물밑에서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가 일고 있다. 새로운 것은 아메리칸적이고 패스트적이다. 시장경제가 들어오고부터 쿠바는 이미 격차 사회에 접어들었다. 집을 사고파는 게 가능해지자 부동산 부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쿠바 사람들이 찾아가려는 경제라는 새로운 희망과 혁명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평등의식은 어떻게 공존하여 흐를 것인가. 그것이 그들의 숙제이다.
쿠바의 가장 큰 매력은 누구든 살사를 춘다는 것이다. 구십이 넘은 노인부터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까지 함께 그 리듬을 타고 몸을 흔든다. 그것이 쿠바의 저력이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해내는 게 이 사회의 장점이다. 빈부 격차뿐 아니라 세대 격차, 이데올로기 격차도 적다. 주변을 보면 모든 게 부족한데 그들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경쟁과 성과로 발전해온 반면 그들은 평등과 공존을 추구해 왔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하다. 우리는 가지지 않았는데 그들이 가진 것은 무엇일까. 그건 존재감이다. 이 존재감은 결국 문화에서 오는 것 같다.
한마디로 누구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의 가난과 문제점을 모르는 게 아니다. 불만을 자주 토로한다. 그러나 그 불만으로 인해 자신의 영혼이 빈곤해질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요지이다. 노래하고 춤추는 유쾌한 문화 속에서 혁명과 환상이 만든 그들의 문화가 감지된다. 담벼락 그림 조차도 리얼과 초현실이 얽혀 있다. 혁명과 환상이 어떻게 겹치고 있는지가 그들의 자유를 보여준다. 그것이 분명 유쾌할 수 없는 조건인데도 거리 전체가 활기찬 이유이다. 그들만의 리듬, 그들만의 춤은 도시농업, 공동체, 무료 교육과 의료 등과 함께 이 지구상에서 쿠바를 가장 지속 가능한 대안 사회의 모델로 떠오르게 했다.
2월 12일부터 시작되는 '쿠바 도서 축제'에 한국도 공식적으로 참가하게 된다. 오정희 소설가와 문정희 시인이 초대되었다. 9월 중에 있을 '쿠바비엔날레'에도 참여할 예정이라 하니, 일단 문화 교류를 확보해내는 우리 외교부의 노력이 보인다.
아직도 많은 숙제를 하고 있는 그들을 어쨌거나 그냥 믿어보고 싶다. 노예의 역사 속에 담긴 원시적인 생명성을 말이다. 아프리카성은 사실 그들의 영혼이 물질에 잠식당하지 않는 저력이다. 오래되고 쇠락한 건물과 자동차들을 고치고 또 고쳐 쓰면서 생긴 그들의 인내를 믿고 싶다. 어디서든지 무엇을 어떻게 고쳐 쓸까를 궁리하고 있는 쿠바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의 물건은 끝까지 의미를 부여받아 고치고 활용된다. 그들 또한 아무리 가난해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운 걸까.
쿠바는 한마디로 모순이다. 하지만 그 모순이 어둡고 우울하지 않다. 쿠바는 열심히 숙제하면서 오히려 질문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당신의 혁명과 환상은 무엇이냐고. 그들만의 유쾌한 모순이 자본에 잠식당하는 건 아닐까, 염려하는 우리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