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의 봄
전주꽃밭정이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민술
화단에서 자라던 꽃과 나무들을 화분에 옮겨 베란다에 들여 놓았다.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 오던 날, 2011년 8월 19일, 무엇이 그리 아쉽고 서운했는지 아침부터 비가 쏟아 졌다. 하기야 40년 전 양철지붕 집을 헐어내고 새로 지은 집이다. 3남매를 가르치고 결혼시킨 집이기도 하고, 큰 수리를 몇 번 하면서 땀으로 정을 쌓은 집이 아닌가? 집없는 설움도 달래주고 재산 목록 1호이기도 했다.
젊었을 때 전셋방을 구하러 복덕방에 들르면 뒷골목으로 데리고 가 나무대문을 두드렸다. 50대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고무신을 신고 나와 대뜸 하는 소리가 애들이 몇이나 되느냐고 물었다. 셋이라고 하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뒤돌아 들어갔다. 애들이 많으면 전셋방을 얻기도 힘들었다. 화장실 다닐 때도 주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살던 기억이 머리를 스친다. 기억으로는 서너 번 이사를 한 것 같은데 어떤 주인은 도배를 해 줄 수 없으니 도배를 하고 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인댁에는 애들도 없고 우리 애들이 기를 펴고 살 것 같아서 이사를 한 적도 있지 않았던가? 나도 내 집을 갖고 살면서 방이 다섯 개나 되어 내가 세 개를 쓰고 두 개는 애들이 많던 적던 상관없이 좋은 사람 같으면 세를 놓았다.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전세금도 많이 받지 않고 한 집 식구처럼 집도 맡기고 나다닐 수도 있어서 아내도 좋아라 했다. 우리 집에서 살다가 나갈 때 집을 사서 나가는 사람이 많아 우리 집이 복福집 같기도 했다. 집 없는 설움을 달래 주던 집을 팔고 가려니 하늘도 서운해서 비를 주신 것 같았다.
집을 팔고 이사를 간다니 주위 사람들이 우산을 받고 나와 염려하면서 섭섭해서 비가 오는가 싶다며 걱정을 해 주었다. 이삿짐센터 사람들은 비옷을 입고 짐을 나르는데 나는 차에 올라 포장을 치느라 애를 먹었다. 센터 직원들이 다 해주는데도 왜 서둘렀던가? 이사 패 移舍 敗란 말이 있다. 깨지고 부서지고 잃어버리고 이삿짐도 많아 탑차 말고도 2대를 더 불렀다. 혼자서 들기 힘든 고무화분이 6개, 올망졸망 크고 작은 화분이 30개가 넘어 차량 3대를 부르는데 크게 한 몫 한 것 같았다.
손자 도연이가 진북초등학교 입학기념으로 3년생 소나무를 화단에 기념식수를 한 것이 그 소나무와의 소중한 만남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이니 소나무는 열 살이다. 열 살 먹은 소나무 밑둥이 어린이 종아리만한 나이테를 하고 뿌리가 넓게 퍼져 있어서 가위로 자른 뒤 고무화분에 심은 것이다.
이사 온 아파트는 서남 간 西南 間이다. 남쪽으로 조금 치우쳐 더러는 남향이라 하고 중개사들도 남향이라 전망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쇠를 놓고 보면 서남간이 분명했다. 남향으로 조금 치우친 탓인지 동이 트기 무섭게 햇빛이 들어왔다. 베란다 유리벽 창너머 구이 쪽 학산자락 푸른 소나무가 새까맣고 아직 겨울산인데도 유리벽을 들어온 햇빛으로 겨울 속 베란다는 봄을 맞아 꽃들에게 봄노래를 열창해 준다.
베란다 제일 앞줄 햇빛이 많이 쏟아지는 자리에 소나무를 배치하고 다음으로 계라, 설토화, 불루베리, 감귤, 등 큰 화분을 차례로 놓았다. 선인장과에 속하는 알로에, 산세메리아 다음으로 군자란, 호접란, 동양란, 풍란 그리고 이름 모를 것도 많다. 그런데 베란다 2년차 소나무와 계라 가지에 힌 곰팡이가 생기고 파란 이파리가 사람이 황달 든 얼굴마냥 누렇게 변하고 가지가 마르는 것 같아 화원에 가서 물었더니 병명은 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라던 것을 실내에 옮겨 놓으면 지열과 통풍을 못 받아 고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물약을 주어 분사기로 뿌려 주었더니 한 이틀 살아날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아파트 공터에 소나무와 계라, 설토화, 불루베리를 옮겨 최선을 다했는데 설토화만 살고 소나무는 아파트로 이사 와서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불루베리는 작년에 꽃도 피고 복분자보다 더 좋은 열매를 기대했는데 보람 없이 가버려 지금도 서운하다. 주택에 살 때는 감나무와 키 큰 동백나무가 적당히 그늘을 만들어 주고 통풍이 원할해서 잘 살았던 것 같다.
푸른 잎들은 떠나고 비교적 화분에 잘 적응하는 것만 30여종이 남았다. 잊지 않고 군자란은 꽃대를 촛대처럼 세우고 촛불처럼 베란다를 밝혀 준다. 1월 20일부터 천리향이 꽃망울을 터뜨릴 것 같아 베란다에서 아예 거실로 옮겨놓고 신주단지 모시듯 했더니 고추 꽃처럼 엷은 분홍색 꽃망울을 터트려 향을 토했다. 향기가 천리 간다하여 천리향이라 하지 않는가. 고추꽃은 하나씩인데 천리향은 망울이 열두어 개씩 송이로 만들어져서 몇 개씩 피고지고를 반복했다. 20여 일 동안 거실에 향기를 내뿜어 식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텅 빈 집인데도 천리향이 따뜻하게 반겨 주어서 피로를 잊는다. 입춘이 지났다고 해도 아직은 찬바람이 남아 있는 겨울 속 초봄인데, 베란다의 봄은 계절의 향기를 유감없이 뿌려준다. 늑장을 부리지 않고 찾아오는 베란다의 봄이 몹시도 반갑고 고맙다.
(201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