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 《아집도 대련》의 일부.
최충과 9재 학교의 설립
최충은 죽은 뒤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에게 그는 이 시호보다는 해동공자(海東孔子)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그의 최대 업적이 유학자로서 학교를 설립하고 제자를 가르쳤다는 데 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고려사』 95 열전 최충전은 그의 학교 설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현종 이후 전쟁은 겨우 멈췄으나 미처 문교(文敎)에는 겨를이 없었다. 최충이 후진을 불러 모아 가르치고 일깨우는 일을 게으르게 하지 않으니, 학도들이 모여들어 거리와 골목에 차고 넘치게 되었다. 드디어 9재(九齋)로 나누어서 낙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도(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시중(侍中) 최공도(崔公徒)라고 불렀다. 무릇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제들은 반드시 모두 먼저 도(徒) 중에 예속되어 공부하였다. 매년 여름철에는 귀법사(歸法寺) 승방을 빌려서 공부를 하였고, 도 중에 급제하여 학문이 뛰어나나 아직 벼슬하지 않은 자를 뽑아서 교도(敎導)로 삼고 9경(九經)과 3사(三史)를 가르쳤다.
(『고려사』 95 열전 최충전)
이 기록에 따르면 최충은 처음에는 소규모로 학생들을 모아서 가르쳤던 것 같다. 그러나 점차 인원이 늘어나자 마침내 9개 반으로 나누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학교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시중 최공의 도'라 한 것을 보면, 최충이 시중이 된 문종 1년 이후가 될 터인데, 어쩌면 그가 은퇴한 문종 9년 이후일 가능성도 있다.
그가 학교를 만든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위에 인용한 기사에는 과거에 응시하려는 모든 자제들은 반드시 그 도에 속했다고 한다. 이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이에 따른다면 학생들은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과거합격률을 높이기 위해서 이 학교에 들어갔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실제 최충은 그 자신이 과거에 급제한 경력이 있고, 현종 17년과 정종 1년에 지공거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한 적도 있으며, 태자의 교육을 담당한 경험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력을 감안하면 그가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9재 설립의 목적과 배경
그렇지만 9재의 이름이 『주역』·『서경』·『중용』·『예기』·『맹자』 등의 유교 경전에서 따온 것이고, 각각의 재들이 상호 연계성을 갖는 단계식 전문강좌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충이 9재를 개설한 목적도 좀더 근본적인 곳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특히 9재에서는 9경과 3사를 가르쳤는데, 교수진도 이름난 전문학자가 아니라 '9재 출신으로 급제하여 학문이 뛰어나나 아직 벼슬하지 않은 자를 뽑아서 교도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점은 9재가 과거시험을 본격적으로 대비한다기보다는, 유교의 기초적 소양을 쌓게 하고 그것을 폭넓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해준다.
또 그의 학교에 '몰려온' 학생들은 누구였을까 하는 것도 궁금해진다. 고려의 국립대학 격인 국자감에는 단과대학 격인 국자학, 태학, 사문학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가르치는 과목은 비슷하지만 입학생의 자격에 차별을 두어서 각각 문무관 3품 이상, 5품 이상, 7품 이상 관리의 자제들만 입학하게 하는 제한이 있었다. 그런데 9재의 학생들을 보면, 숙종 초인 1100년경 성명재에 입학하여 훗날 복야(僕射)로 승진한 인물의 묘지명인 「박복야 묘지명」을 보면 그는 지방 출신이었고, 1160년대에 솔성재에 입학한 이승장(李勝章)은 가난을 이유로 내세운 의부(義父)의 반대를 무릅써야 했으며, 1181년에 성명재에 입학한 이규보(李奎報)도 중견 관리의 자제였다.
이와 같은 사례를 보면 최충의 9재에는 국자감에서와 같은 신분적 차별은 없었던 듯하다. 이와 같이 생각해보면 최충이 학교를 설립한 목적은 국자감과 달리 교육의 기회를 더욱 넓은 계층에게 제공하는 한편, 그들에게 유교적 가치와 윤리를 널리 보급시키고자 한 데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는 그가 어린 시절 해주에서 겪었던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물론 당시 사회에서 과거의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면서 최충의 원래 의도는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고 과거를 준비하는 교육기관으로 변질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최충의 영향을 받은 다른 유학자들도 다투어 학교를 설립하면서 이른바 사학 12도가 형성되자, 최충의 문헌공도의 성격도 보다 빠르게 변질되어갔을 것이다. 9재의 단계별 전문성이 약화되면서, 각 재는 이름만 달리할 뿐 동일한 수준으로 교육하게 되었던 것도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하다.
그러나 후대의 변질이야 어떠하든 9재를 만든 결과 교육의 기회가 더욱 확대되었고, 그에 따라 귀족사회의 구성원도 그 폭을 더욱 넓혀가게 되었다는 점은 최충의 커다란 공로의 하나로 평가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 김용선, 〈최충의 활약과 가문의 번성〉 中 발췌, 《한국사 시민강좌 39 : 고려사회 속의 인간과 생활》, 일조각,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