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노래가 나오는 피리구멍, 제대로 입술을 대지 못하면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입만 갖다대면 가락이 울리는 뿔피리도 아닙니다. 세상에 제대로 몸과 마음을 붙이지 못하면 세상사는 맛이 없습니다.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그저 한평생을 동어반복하며 타자의 욕망에 갇히며 살뿐입니다.
세상은 생각만의 가두리가 아닙니다. 어디 그저 소리를 내자고 피리를 부는 건 아니듯 제대로 세상을 살자면 선택과 결정을 거쳐 온 마음과 생각을 다하고 몸을 바쳐야할겁니다. 한 곡조 끝나고 숨을 가다듬는 짧은 시간에 부지런히 악보를 넘기며 업연을 다듬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을 제대로 살 생각과 떡이 되면 모든 것과 멀어집니다. 그것은 꿈속의 내가 꿈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꿈을 꾸면 꿈속의 내가 그 내용을 경험합니다. 깨어나면 꿈속의 내가 사라지니까 꿈의 내용도 사라져야 할텐데 멀쩡하게 나는 꿈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꿈속의 내가 경험하는게 아니라 꿈꾸는 내가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겪는 것은 꿈속에 나오는 사람이 아니고 꿈꾸는 내가 꿈을 겪는 것입니다. 꿈을 꾸는 사람이 의식이라면 본질이 현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현상에는 꿈도 있고 생시도 있습니다. 본질이 나라는 소소영령한 개체를 통해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나라는 도구를 통해 의식과 부처와 성령과 참나 등이 경험합니다. 그러니 실제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의식과 성령만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 윈리로 나라는 것은 없지만 윤회는 있는겁니다.)
루시드 드림을 꾸면 꿈속의 모든 것이 마음 먹은대로 됩니다. 잠이 깨지않게, 그리고 너무 꿈에 몰입하지 않게 수위 조절하면 생각만으로도 원하는 세상이 구현됩니다. 고등학교 3학년때 밤 12시 넘어 잠을 자면 마법의 시간이 펼쳐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당시는 그것이 루시드 드림으로 이름 붙혀지는 건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비몽사몽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꿈이 너무나 생생했고 오직 내 상상력이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내 상상이 세상을 한계지었기에 끌어당기는 꿈세계란게 단순했습니다. 하늘을 날고 아름다운 여인과 같이하며 모든 시험에 100점을 받고 산속의 노인과 도닦는 소리를 했습니다. 잠에서 깨고나면 생시는 너무 갑갑했고 흐리멍텅했으며 의미가 없는 집과 학교의 시간은 지루했습니다. 12시만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루시드 드림은 찾아오지 않았고 나는 생시라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이 넓으니까 옥살이인 것도 잊으며 현실에 함몰되어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이 생시도 정신차리면 결국 꿈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 생각의 구현이 지구 시간으로는 느리고 지연되니까 자각몽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지나간 시간이 상상했던대로 살고 있을겁니다. 시간과 협업해서 본질이 나를 통해서 작동된 결과를 늘 오늘로 겪고 있을겁니다.
꿈이니까 더 신나게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생시가 꿈이라고 깨달으면 이 생시도 마음 먹은대로 될 것임을 믿습니다. 에고가 깨닫는 게 아니고 의식으로 깨어나야합니다. 나는 생사하는 몸이냐 불생불사의 의식이냐 하는 이 자각이 나를 영원히 구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남이 아니고 나 스스로 합니다. 나를 통해 본질, 즉 의식이 합니다.
눈앞에 드러난 이 세계도 내 생각이 보는 것이 아니고 실재로 생각을 보는 것은 의식입니다. 생각도 감각이라서 나를 통해서 실재로 보는 것은 의식인 것입니다. 의식은 무한대의 공덕을 이 세계에 베풉니다. 내가 없으면 이 세계는 없으니까 무연보시 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의식이 잠들어버리고 문을 닫으면 이 세계는 사라집니다. 내 의식이 우주를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어느 스님이 읊었습니다. 靑山不墨千年屛 청산불묵천년병 流水無弦萬古琴 유수무현만고금 千江有水千江月 천강유수천강월 萬里無雲萬里天 만리무운만리천 청산은 먹으로 그리지 않은 천년의 병풍이요 흐르는 물은 줄이 없는 만고의 거문고이어라 천 강에 물이 있으니 천 강에 달이 있음이요 만 리 하늘에 구름 없으니 만 리가 하늘이어라
우리는 개체로서의 물에 찍힌 달도장 하나만 건져도 천개의 달을 얻고 만리의 하늘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에 몸붙이되 이 세상이 꿈이고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의식이 펼쳐놓은 장으로서 그 가능성을 깨닫는다면 나는 세상을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게 아니고 생명이 나를 통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