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승지를 가다 - 예천군 용문 금당실
약 39Km
2009년 4월 11일
9월 20-21일
혼자서
산행지도
차창 밖으로 보이는 문경땅을 보니 지난 눈시울이 앞을 가로 막는다, 백두대간 하늘재을 가기 위해
문경으로 와서 탄항산을 오르고 주흘산을 보았고 숨가쁘게 조령을 넘었던 기억이 가물거리고 넓은
문경땅의 산들이 가장 험하여 벼랑의 의지하여 사다릿길을 만들었다는 그 길들을 3일씩 걷고도 다 걷
지 못한 신라의 땅 관문현 지금의 문경이던가,
문경을 지나 안동으로 달려가는 34번 4차선 도로를 지나다 보면 예천공항이 있고 소백산에서 내려온 산
줄기들이 예천을 에워 싼 금곡천을 따라 용문으로 10여 분 쯤 들어가면 상금곡리 넓은 들판위 금당실에
내려 닿는다, 교통이 불편하였던 옛날 말은 이제 물건너가 동서로 고속도로가 생겨 서울에서 2시간 30
분이면 예천에 올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정감록은 십승지중 다섯 번 째로 꼽힌 곳 금당실은 앞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뒤로는 소백산맥이 첩
첩이 자리하고 있어 평시에는 앞의 넓은 들에서 농사를 짓고 전시에는 소백산으로 숨어 들어갈 수 있는
지형으로 냇물이 흘러가는 금당실인 것이다,
"예천에 있는 금당동 북쪽은 비록 지세가 깊지 못하여 밖으로 드러나 있으나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아
여러 대에 걸쳐 편안함을 누릴 것이다"라고 남사고도 적고 있었다,
금당실과 오미봉넘어 상부댐
금당실 뒤로 가장 가까이 오미봉이 있고, 사진에 조금 보이는 산줄기 위에가 망월봉이며 북쪽으로 봉우리
몇 개를 더 넘으면 매봉이 서쪽의 국사봉이 남쪽으로 백마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마을 앞으로 들 가
운데를 가로 지르는 금곡천과 한천을 감싸듯이 흐르다가 마을 동남쪽의 생천리에서 합류하여 예천으로 빠
져 나간다라고 용문을 기록하고 있었다,
‘예천군지’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지나가면서 계명현과 견폐현을 보고는 ‘학고개(鶴峴)가 입구에
있고 고개(犬峴)이 오른편에 있으니 중국 양양 마을의 금곡과 지형이 같다’고 금곡(金谷)이라는 이름이 생겨
났다고 한다. 지금은 금당실,금당, 금당곡 등으로 불러지고 있다고 했다,
백룡사
백마산을 오르기 위해 예천에서 택시를 타고 용문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용산리 마을을 지나
구불구불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닿는 곳 아주 작은 백룡사다, 시골 내음이 물씬 풍기는 암자같은 절 앞
마당에 무성한 풀꽃들과 감나무 앞에 놓인 미나리밭 또한 시골 집 같은 곳이다, 표고버섯을 펼쳐 놓으
시며 한 송이 건네 주시는 스님의 정겨움도 다른 절에서 느껴 보지 못한 애뜻한 마음을 담아 법당옆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뒷 길로 오른다,
솔숲사이를 가로 질러 백마산으로 가는 길에 봄이 오는 소리가 길섶 가까이 있었다, 잎이 엷고 제일로 큰
연분홍 철쭉이 너더댓 송이씩 꽃을 피우고 큰 가지위에 피어난 하얀 산벚꽃,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계곡을
꽉 메운 진달래 군락의 향기가 가득 이 산을 진동시키니 내 마음 속 한결 그윽한 느낌이 퍼져 나간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위에 묘가 있는 곳에 다달으니 가시달린 두릅 냄새도 꽃만큼이나 커서 지나다가 걸
음을 멈춰야 했다,
백마산
철조망이 산릉으로 이어져 있다, 가시덤불에 길을 헤쳐 나가다 하는 수 없이 철조망을 넘어 가니 한결 수
월히 걸을 수 있었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곳에 닿아서야 용문 시가지가 눈으로 들어오고 그 뒤로 매
봉과 양수발전댐과 우뚝 솟아 있는 다음에 가야할 산줄기의 높이가 낮아지면서 용문의 산둘레를 치고 있는
예천도 보였다,
383M 높이에 넓은 능선으로 차지하고 있는 백마산이라 표기하고 있었다, 삼각점이나 정상적도 없는
예천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나즈막한 백마산였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봉화산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내가 버스를 타고 예천으로 왔던 길 34번 국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백마산이 품고 있는 산자락 나무들을 보면서 걷는다, 새삼 산의 나무와 이곳 정원의 숲들이 해가 바뀌고
가지에 잎이 새순을 피우고 봄을 맞이하지만 서로 적지 않게 제각각 다른 모습과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어느 산에서 보다 길에 가시덤불이 많았던 지난 길을 벗어나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건
아마 독특한 내음이 선사해 주는 우주의 순환일 꺼라 생각한다,
임도를 지나 덕고개에 오니 개복숭아꽃이 만발하였다,
서쪽으로 고집하였던 길을 북쪽으로 산행이 이어지는 언덕을 내려서니 묘 1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찌된 것일까??? 불과 얼마 전에 일이었을텐데 십승지가 생기게 된 배경은 기근, 역병, 전란의
삼재를 피하게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적어도 이 곳에 살던 옛 어른들은 삼재를 면했을 법한데 지나
가는 길가에 한 무덤이 내 머릿속을 유추해 본들 답은 알 수 없었다,
금당동의 땅은 비록 얕게 드러났으되 병란이 미치지 않아 여러 대에 걸쳐 평안을 누릴 것이다란
말 또한 평온이다란 단어조차 내심 갑자기 의문스러워졌다,,
느티나무
수심리의 느티나무가 380년 된 보호수 고목이 한 낮의 태양을 받으며 가는 길 쉬어가라 한다,
들엔 농부의 손길이 바빠지면서 논에 물을 가두고 밭을 갈며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하는 모습도
보인다, 올들어 비다운 비 한번 내리지 않아 봄가뭄이 계속되고 있어 산 길을 걸어가는데도
바스락 거리는 발자욱 소리가 어느 때보다 달갑지 않게 들렸었다,
요즘 국립공원은 산불로 인하여 입산금지 되었다,
오후의 햇빛이 한참을 걸어온 산길에 지치게 한다, 그늘진 숲 서편 어디쯤인가 앉아 있어도 좋을 듯한
싸리나무꽃이 활짝 피어있는 산 오르막도 있다, 꽃이 풍기는 향내가 코끝까지도 달콤함이 진하고도
그윽하게 느껴진다, 가늘게 뽑아 올리는 꽃줄기의 탐스런 하얀꽃이 있어 국사봉 오르는 산길을 달래
주기도 했다,
오늘 만큼은 국사봉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요즘 가뭄으로 인하여 산불감시 싸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이곳도 국사봉 산사랑은 지극한가 보다, 노사리 마을을 거쳐 사면을 타고
올라갔다, 국사봉 오르는 임도를 만나기도 하고 소나무 숲길이 있어 더운 길을 위안삼 듯 쉬
엄쉬엄 올랐다,
헬기장을 지나 처음으로 국사봉 오르는 팻말을 소나무에 못질을 하여 놓았으니 이거 잘하는 건지는 모르나
그저 반가울 뿐,
팻말이 없으면 깨밭재란 고개를 그냥 스칠 수 있을 것 같은 고개같지 않은 깨밭재다,
국사봉 정상
너른 헬기장에 국사봉 정상석이 서 있었다, 정상이라기 보다 넓은 공간의 분지를 이루고 있는 국사봉 정상 주변에
진달래가 만발히 피어 있고 여기저기 지저분한 쓰레기가 널려 있다, 언제부터 봉화대를 세워졌는지 알 수 없으나
이 곳에는 명당 묘터가 있으나 묘를 쓰면 이 고장에 비가 오지 않는다 하여 묘(墓)를 쓰지 못하며 극심한 한해(旱害)
때엔 용문(龍門) 면민(面民)들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 한해(旱害)가 계속되면 묘가 있는가 확인하여 묘가
있으면 파내기도 했다고 한다.
또 산불이 나서 국사봉 정상(頂上)에 불이 붙게 되면 하늘에서 비가 내려 불을 끈다는 전설도 있다고 용문면 사람들
은 말하고 있었다,
정상석이 있는 곳에서 500여M 진행하면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를 만나게 된다,
고도가 헬기장이 있는 곳보다 이 곳이 더 높은 것을 보면 이 곳이 국사봉 정상석이
이 곳에 세워져야 할 것 같은데,, 용문 뒷날 마을에서 국사봉을 찾아 오는 산님들
이 많은지 오고간 흔적들이 많이 나풀거리는 표지기들이 나무게 걸려있기도 하다,
국사봉에서 바라본 천주봉
성황당고개에서 문경으로 가다 경천호를 만나게 되는데 유난히 뾰족한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위용을 하고 있는 839M의 천주봉이 국사봉을
내려 오면서 보인다,
초간정
원류마을 앞 울창한 수림(樹林)과 기암괴석(奇巖怪石)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 경승지(景勝地)에 우뚝 서있는
정사(亭舍)로서 옛날 도끼자국에 얽힌 전설 이야기가 많은 많큼 초간정 송림숲에 금곡천에 지어있는 모습도
예사롭지 않았다,
옥매라는 기생이 장고춤을 추다 물에 떨어져 죽자 화가 난 그의 어머니가 도끼로 찍었다는 자국이 어데 있을까,
굳게 닫힌 초간정의 문과 옆에 유흥음식점으로 지어져 있는 지금은 아주 먼 옛날 이야기로 되어 가고 있었다,
더운 여름을 보내고 한참 만에야 성황당고개에 다시 섰다, 떠벅 떠벅...풀벌레 소리가
희미한 가운데 내 발자욱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너른 임도를 걷는 것 만으로 좋
은 길 북으로 오르는 산 길 누군가 걸어간 발자욱이 다져낸 흙 길 오랫만에 오는 산길
의 그리움과 목마름이랴!!
한적한 이곳 혼자서 걸을 때 가끔 만나는 버섯 채취하는 분들과 짧은 인사도 정겨웁다,
문경시경계 산행을 다녀간 분의 표지기를 따라 가면 산행길이 쉬워진다, 성황당고개
에서 출발한지 두 시간만에 사부령에 도착했다,
사부령
사부령을 출발하여 된비알을 숨쉬며 오르는데 비가 한방울씩 떨어지더니 시간이 갈수록 많이 내린다,
북으로 고집했던 산행길을 삼거리를 만나면서 동으로 평지같은 길을 걷기도 하면서 산릉을 구름속에
갇히어 있는 듯 했다, 속세를 바라보면 흰구름만 있을 뿐 보이는 것은 우거진 나무숲의 싱그러움, 맑
은 산향기, 정겨운 비밀을 품고 보물을 찾아가는 것처럼 설렘에 부딛치는 나뭇가지가 발길을 붙잡기도
한다,
동으로 동으로 비속의 구름을 밟았을 때 나타난 전망바위!
금당실이 있는 용문면이 흰구름꽃을 피워 올리며 숨박꼭질 한다,
잠시 기둘러 용문사가 바로 보이는 산릉에서 저기는 초간정, 여기는 금당실,
그 위에 펼쳐진 국사봉으로 이어지는 금당실의 십승지 산줄기를 바다다 볼
수 있었다,
매봉
매봉으로 가는 길은 온통 빗길이었다, 비는 많이 내리는 것 같지 않은데 아무 준비도 없이 산에 올라온
나의 차림은 왼종일 산행한 것처름 빗물로 범벅을 해서 매봉으로 가기가 힘들 것 같아 유명한 용문사을
둘러 보고파 발길을 돌렸다,
용문사에서 매봉으로 산님들이 많이 다니는 길 흔적을 알 수 있다,
윤장대, 부조아미타불, 영산회괘불탱, 천불탱 이름만으로도 기억하기 조차 힘든 용문사의
유물들을 보고 싶었는데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월요일이 휴관이라니 처벅 처벅내려
갈 수 밖에 없었다,
상부댐의 조감도
이튿 날, 예천군 양수 발전소가 한창 공사중인 상부댐에 닿았다. 70만평 부지에 80만KW의 발전용량을 2010년
10월까지 완공하기 위한 큰 상부댐 공사장이었다, 이 곳은 출입통제 구역으로 공사하시는 관계자들만 출입할 수
있는 올라가는 임도 끝 정문에서 사람들을 통제한다, 산행하고 싶어하는 내 마을을 알아 들었는지 모르지만 내
입담에 안 넘어가면 어쪄랴, 하늘아래 산릉이 마루금이다,
이 곳 때문에 출발을 룡화사에서 해야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으로 담아 본 산줄기 아래 상부댐이 조성될 곳으로 지금은 시멘트와 철근으로 온통 댐공사와 시설물들로 들어
서 있지만 얼마 후 이 곳은 물 저장탱크가 될 생각을 하니 씁쓸해지기도 했다, 백두대간 몇 곳에 발전소를 설치하
여 자연 유수를 차단한다는 것도 있지만 산을 찾는 우리로선 생태파괴가 더 많은 손실로 자연훼손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싶었다,
하부댐에서 바라본 용문
윗능내 518봉 삼각점
사람이 다니지 않아 험한 길이다, 잡목이 여름내내 우거져 산초나무와 칡넝쿨에 엉키고 잡풀들로 진행
하기가 힘들다, 가도 가도 이어지지 않는 산 길 산줄기는 바로 여기인데 임도로 내려섰다가 올라가기도
하고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기어보기도 하고 어렵게 올랐더니 453봉에 큰나무와 바위가 있었다,
묘가 수없이 많다, 몇 미터 가다 보면 묘, 몇 미터 가다 보면 묘, 수 없이 많은 묘들이 이 곳에 즐비한
걸 보면 명당인 줄 알고 살었던 용문 옛사람들이지 싶었다, 부지런한 조상들은 벌초한 곳도 있어 산행
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몇 십년 묵어 버린 묘도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나무도 자라 있었다,
이 도로에서 500여M 남쪽으로 대저리 큰 맛질이 있고 하학리 아랫마질이 있다,
금당과 이웃한 맛질 (대저리, 하학리, 능천리)까지 합하면 서울의 반은 된다고 하여 이 곳 사람들은
전해오는용문은 공기가 맑아 살기 좋은 곳, 또한 큰 물이 없는 금곡천의 수량을 알 수 있을 듯 싶었
다,
아랫맛질 또한 北向이고 뒷산이 높아 햇빛이 잘 안드는 곳에 사는 곳이지만 衣食 걱정을 안 해도 된
다는 明堂 마을이라고 했다,
능천리 능내에 왔을 때 고추를 따시는 노부부 뵈오니 반가웠다, 능천리에 사시는 할아버지는 40년 넘게 금
당지를 관리하셨다면서 많이 가물어도 금당지가 60% 정도의 담수하고 있다고 자랑하시기도 했다, 이곳에
서 바라다 보이는 오미봉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둥그런 모습으로 두 산이 보이는 오미봉이 이곳 사람들
은 둘 다 오미봉으로 부른다 하였지만 지도상으로 표시되어 있는 오미봉은 오른쪽 금당이 연꽃이 피는 연못
자리이고 오미봉이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이곳 지형을 "연화분수형"이라고 한다,
육녀봉 가는 길
가야 할 산행이 막막하다, 싸리나무와 칡넝쿨에 엉키고 가시가 달린 산초나무와 더불어 수풀진 숲을 갈 수가 없다,
앉아서 한참을 씨름하다가 이 길을 원망도 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 가야 할 저 정글을 헤쳐서 넘어야 난 오늘 산을
내려 올 수 있을꺼다, 옆 사면을 돌아봐도 똑같은 산릉 스틱으로 원없이 두두리고 이 곳을 지나온 난 원시림숲의
정글을 빠져 나와 보니 온몸이 상처로 범벅되어 있었다,
일곱번째 십승지 산행으로 이 길이 가장 험한 숲길로 기억될 것 같았다,
육녀봉
풀이 무성한 묘 1기가 자리하고 있다,
산초나무가 있는 223.6봉
생천지
닭을고개에 오니 집 한 채가 콘테이너 박스와 자리하고 있었다, 콘테이너 박스옆으로 산행길은
이어진다,
닭을고개에서 철탑으로 이어지는 조그마한 산이 가야할 산행길이 되는 것이다,
철탑 57번 ~ 밭 ~정자가 있는 비닐하우스 ~마을뒷밭 ~철탑 58번으로 찾아가는 길 유의해야 한다,
정자가 있는 비닐하우스에 정성들여 키운 와송과 줄줄이 달려 있는 오이에 농약을 한 번도 치지 않
았다고 따아 가방에 넣어주신 주인 아저씨 물 한 통 얻으려 했는데 고맙습니다,
룡화사
십승지의 땅모양을 호리병처럼 휘돌아 나아가는 금곡천을 따라 돌아 나오는 임도도 천천히 택시속도를
낼 수밖에 없는 울퉁불퉁 좁은 길이었다,
정감록에 기록되어 있는 예천 금당실은 난의 해가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란 말을 100리길 용문 산행을 하였어도 옛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십년 전만 해도 이곳 용문은 평당 3천원하던 땅값이 지금은 10배가 넘는 금액으로 뛰었고 교통이 불편하여
오지로 통하였던 것도 이제는 모두가 오래전 이야기가 되어갔다,
용문면 들판에 나락이 맑은 물 금곡천이 있어 더 누렇게 잘 익어가나 보다,
용문면사무소에 근무하시는 분이 예천역까지 데려다 주시면서 금당꿀이 용문의 토속품이라며 건네 주신
고마움을 안고 버스에 올랐다,
첫댓글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다녀오셨네요. 혼자서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면서 걷는 멋스런 시간을 대신 가져봅니다. 늘 즐거운산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