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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백제의 역사적 실체
중국의 역사책인 <남제서>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나온다. "위나라는 100만 기병으로 백제를 공격했다. 그러나 백제는 이를 대파했다." 위나라는 중국 삼국시대 때 나오는 위가 아니라 북위를 말한다. 그럼 중국 북방에 있는 위나라 기병이 바다를 뛰어넘어 백제로 진격한 것인가? 오류를 범하지 않게 해석한다면 다음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북위의 기병이 고구려를 거쳐서, 즉 고구려가 길을 비켜주어 백제를 공격했을 경우이다. 그러나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당시 북위의 국력은 고구려를 압도할 정도가 되지 못하였고 북방의 패자였던 고구려가 타국 병사가 자신의 영토를 지나치는 것을 그대로 용납할 리가 없다.
둘째, 위나라가 말을 배에 실어서 바다를 건너 백제를 공격했을 경우다. 이 또한 어불성설이다. 100만 마리 말을 배에 실을 만큼의 배가 북위에 있지 않았다. 당시 조선술은 백제가 세계 최고였다. 두 가지 경우가 다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자존심 강한 중국이 자신들이 패한 역사를 기록해 놓았으니 거짓말 일리는 없다. 결국 우리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대륙 백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백제는 광활한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다. 백제의 영토는 한반도에 만 있지 않았다. 중국의 산둥반도, 남서부, 일본의 남부지방(구주) 등에 있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책계왕 원년(286년) 고구려가 대방을 치니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의 왕녀 보과를 취하여 부인을 삼았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르기를 대방은 우리의 구생(舅甥)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라고 적혀있다. 이 인용문을 통하여 몇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선 한반도 한강유역의 백제가 대방과 결혼동맹을 맺고 있었으며, 그로인해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하자, 백제가 이를 구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백제는 대방에 자리한 세력과 긴밀한 협조 이상의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위 기록이 나오는 3세기말의 경우는 낙랑과 대방을 각각 한반도의 평양과 그 남쪽으로 상정하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다. 고구려가 적대적인 낙랑을 넘어 그 남쪽의 대방을 쳤다는 기록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현재까지의 통설에 의하면 위 인용문의 기록은 후대의 사실을 부회하였거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설명이 되고 있다.
이처럼 낙랑, 대방의 위치와 관련하여 이해하기 곤란한 기록이 몇 군데 더 나오고 있는데, 그 하나가 304년 2월에 백제 분서왕이 낙랑의 서쪽 현을 공취하였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내용이다. “분서왕 7년(304년) 봄 2월, 낙랑의 서현(西縣)을 기습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현 평양의 낙랑을 전제로 하는 한, 위 기록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낙랑의 서쪽현을 백제가 빼앗았다는데, 대방을 넘어 백제가 낙랑의 서쪽을 공격하여 그 지역을 차지하였다는 것이 그렇게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문장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처음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주하였으나, 백제가 침범하여 부락이 쇠산하여져,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방책을 설치하지는 못하였다.”(자치통감 권제97 ?宗成皇帝下 永和二年) 여기서 부여의 초기 거주지로 등장하는 녹산(鹿山)의 경우는, 위 인용문의 기록 외에는 달리 언급되는 기록이 없어 오직 추정에 의할 뿐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부여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으므로 현재는 농안 지역의 동쪽 길림시 일원에 비정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런데 이 부여를 백제가 침범하였다는 것에 대한 현 학계의 견해를 일별하면, 첫째는 대다수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백제를 고구려의 오기(誤記로 보는 것이고, 다른 일각의 입장은 이 백제를 대륙백제로 보아 고구려를 우회하여 부여를 공격하였다는 것으로 보는 소수 의견이 있다. 여기서의 관건은 부여의 초기 거주지로 나오는 녹산(鹿山)의 위치에 대한 것이다. 인용문 외에는 달리 기록이 나오는 곳이 없어 추정에 의할 뿐이라고 했는데, 이를 과연 길림 또는 그 인근 어디로 비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이 부여를 공격한 주체가 하필 백제로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통설에 입각한다면, 이때의 부여를 대륙백제로 보기보다는 고구려의 오기로 보는 다수 견해가 더 옳다고 본다. 그런데 위 기록이 등장하는 시점은 346년에 모용황의 군대가 부여를 공격하는 시점에서 과거를 거슬러 부여의 정황을 설명하면서 나오는 기록이다. 여기서 백제에 쫓긴 부여는 연나라에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였지만, 모용황의 군대를 맞는 시점에서는 아직 방책도 설치하지 못한 상태이다. 또한 이 부여가 모용일족에게 그렇게 쉽게 무너진 이유로는 백제로 기록된 ‘실체’로부터 그 전에 이미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밖에 없는 정황이 가장 큰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부여가 어떠한 까닭이 있었던, ‘백제’로 표현되는 세력으로부터 실제적인 공격을 받아 세력이 현저히 약화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백제가 부여를 공격한 시점은 이 346년을 거슬러 그렇게 먼 과거의 일로는 볼 수가 없다. 한편 현 통설에 입각한다면 4세기 초에 고구려가 부여를 공격한 일이 실제로 있었는가 하는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4세기 초는 고구려에서는 미천왕(300~331년)과 고국원왕(331~371년)이 재위에 있을 시기인데, 고국원왕 재위 중에는 346년(고국원왕 16년)까지 전연의 모용황 군대와 싸워 국내성이 함락당하는 등 국난의 위기에 처하여 부여를 공격할 여력이 없었다. 한편 미천왕 재위 중에는 현도군(미천왕 3년, 16년), 요동 서안평(미천왕 12년), 낙랑군(미천왕 14년), 대방군(미천왕 15년) 등을 고구려가 공격했으며, 한편으론 모용외의 공격을 받아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와같은 정황을 부분적으로 전해주는 중요한 기록이 하나 있다. “313년 요동의 장통(張統)이 낙랑·대방 2군에 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서로 공격하여 해를 넘기면서도 해결되지 못하였다. 낙랑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하여 그 백성 천여 가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귀복하여,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으로 하여금 낙랑 태수를 삼고 왕준은 참군사(參郡事)로 삼았다.” (자치통감 권88 晋紀10 建興원년 4월조) 이 기록에 나오는 장통(張統)이란 인물은 자치통감 외에는 아무 기록이 없다. 만약 그가 서진(西晉) 조정으로부터 임명된 장군이나 관리였다면 그 장군호나 관작이 기록되어야 하는데, 이 인용문에는 그러한 정황이 나오지 않는다.
또한 ‘遼東張統’이란 문구로 미루어보아 그가 요동인이었거나 아니면 요동지역에 오래 거주하면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다스리던 호족세력m로 보인다. 이 장통이란 인물이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서로 공방전을 벌여, 해를 넘기면서도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낙랑 왕준의 요청으로 백성 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로 귀부하였다는 내용이다. 모용외는 이들을 위해 새로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삼는 한편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는 것인데, 이 기사가 313년 4월의 상황이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된 미천왕의 낙랑군 침입 기사가 같은 해 10월의 상황임을 고려한다면, 4월에 장통이 백성 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로 갔다는 것은 이때 미천왕이 장통과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고구려의 10월 낙랑 침입은 통설에서 말하는 평양 땅 낙랑군의 멸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새로이 설치된 요서지역의 낙랑군과의 전투로 보거나, 아니면 장통 일행이 옮겨간 다음에 구 낙랑군 지역을 차지한 일단의 새로운 세력들과의 전투로 볼 수도 있다. 미천왕과 장통의 싸움이 해를 이어 계속되었다는 것은 이 싸움이 그 전해인 312년부터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이고, 또한 이 전후시기에 미천왕은 삼국사기, 북사, 양서 기록 등을 통해 볼 때, 요동지역에서 주로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고구려가 힘의 우위에 있었던 것도 확인할 수가 있다.
결국 미천왕은 한반도가 아니라, 고구려 경계 서쪽의 요동지역(낙랑군과 대방군)에서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그 지역의 장통으로 대별되는 호족세력과 전투를 벌여 힘의 우위를 확보하고, 결과적으로 장통 일행은 쫓겨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장통 일행을 받아들인 모용외는 새로이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삼음으로써 이들 세력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둔다. 이 시기 미천왕은 요동지역에 대한 확실한 지배권을 확립하지는 못했지만 요동을 세력권 범위내에 두었던 것 같다. 이때 모용외의 거주지가 극성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모용외가 새로 설치한 낙랑군은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요서지역에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미천왕 시기의 고구려 또한 해를 거듭하여 요동의 지배권 확립을 위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부여가 당시 고구려의 지배권을 벗어나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새로운 전쟁을 벌일 여력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관련 사서에 이 시기 고구려가 부여를 공격하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점도 위 인용문의 부여를 부여로 보거나 또는 백제를 고구려로 대체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같은 맥락에서 위 인용문에 나오는 부여를 대륙백제로 본다면, 이 부여를 공격한 주체를 한반도백제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대륙백제의 초기 거주지역은 현 요동만의 대방지역과 그 인근 북쪽의 낙랑지역을 일부 포괄한 곳으로 볼 수 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4세기 초의 동북아 정세는 고구려 미천왕이 당시 요동으로 통칭되는 낙랑과 대방지역을 공격하고 있으므로, 대륙백제를 쫓아내는 주체를 한반도백제가 아니라 기존의 통설과는 다른 입장에서 고구려로 대체시킬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분서왕 7년(304년) 2월, 한반도백제는 낙랑의 서현(西縣)을 빼앗고, 10월에는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문제의 관건은 여기서 주장하는 부여의 존재가 과연 요동지역 즉, 낙랑과 대방에 있었느냐 하는 문제다. 만일 그렇다면 부여와 낙랑왕준 일행은 정황으로 보아 같은 실체로 판단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내용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고구려의 낙랑 공격이 있었던 313년 다음해의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미천왕 15년(314년) 9월에 남쪽의 대방군을 침공하였다.” 313년 4월에 낙랑군이 견디지 못하고 서천하여 모용외에 의해 다시 설치된 다음에 구 낙랑군 지역은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구 낙랑군의 남쪽지역에 있었다는 대방군 지역 또한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익년인 314년 9월에 고구려는 남쪽의 대방군을 공격했다. 그 남쪽의 대방군 또한 고구려 세력권에 들어갔어야 하는데 상황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을 위 인용문은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위 기록의 대방군에는 과연 어떤 세력이 있었기에 고구려가 다시 이 지역을 공격하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계왕을 거쳐 근초고왕이 즉위한 다음에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기록이 있다. 372년 백제왕 여구(餘句)가 동진에 의해 진동장군 겸 낙랑태수로 책봉되었다. 여구(餘句)는 근초고왕으로 중국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여씨성의 백제왕이다. 그런 그가 백제왕이면서 동시에 낙랑태수를 겸하고 있다. 이것은 동진 정권에 의해 백제왕이 낙랑지역에 대한 지배권 또는 연고권을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백제왕이 어떻게 하여 낙랑지역에 대한 일정한 권리를 동진 조정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론을 내리기엔 조심스러운 부분이기는 하지만 372년에 백제왕이 낙랑태수로 제수되고 있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논의가 만일 당시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선 것이라면, 분서왕의 낙랑 침공은 한성백제가 대륙백제와의 통합을 시도한 뚜렷한 흔적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그 흔적을 달리 찾을 길 없는 녹산(鹿山)지역도 인용된 문장 전체가 부여에 대한 기록임을 감안한다면 그에 따른 새로운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다시 정리를 해본다면 책계왕 원년(286년)에 한반도백제와 대방(낙랑과 함께 대륙백제지역)과의 결혼동맹으로부터 드러나는 연합세력이 분서왕 7년(304년), 한반도백제의 낙랑 서현 공격으로 인하여 분열되면서 대륙백제지역을 지배하려는 한반도백제의 의욕이 드러나고, 분서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이후 대륙백제지역은 인접한 고구려에 의해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실제적인 ‘西徙近燕’의 원인은 자치통감 永和二年(346년)의 기록에 의하면 한반도백제의 침공에 의한 것으로 결국 모용외 세력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이후 구 낙랑과 대방지역을 차지한 한반도백제 세력에 대하여 고구려가 다시 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고구려의 지배권 범위에 들지 못하였는데, 이를 말해주는 것으로 근초고왕 27년(372년)에 백제가 동진으로부터 백제왕이면서 동시에 낙랑태수로 책봉되는 것으로 알 수가 있다.
한편 한반도백제에 의해 ‘西徙近燕’한 주체인 ‘낙랑왕준’의 대륙백제 세력은 이후 모용일족으로부터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지내다가 모종의 원인에 의해 오히려 반기를 드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정황을 짐작케 해주는 것이, 장통은 이후 모용외에 충실한 장군으로 등장하여 고구려 미천왕 20년조에는 고구려의 하성(河城)을 공격하는 등 충성을 보이고 있는 반면에, 왕준(王遵)은 중심인물로 부각되지도 않으며, 앞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33년이 지난 346년에는 왕준을 이은 부여왕 현(玄)이 모용황 군대의 습격을 받아 멸망한다. 낙랑왕준의 세력은 346년, 멸망할 무렵에는 무려 5만여 구의 포로가 잡혀가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짧은 기간 동안에 상당한 세력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세력의 확장을 가능케 해주는 일련의 정황들이 있는데, 우선 첫 번째는 백제가 요서군과 진평군을 점령하여 백제군을 둔 시점이 동진 통치시기인데, 4세기 중엽을 전후한 이 시기가 대륙백제를 경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짧은 기간동안에 ‘낙랑왕준’의 형편없던 세력이 일어서서 귀부해 간 모용씨에게 반기를 들게 되고 결국 모용황 군대의 침공을 받게 된 사정을 짐작하게 해 준다. 즉, 낙랑과 대방을 점거하여 고구려와 대적하던 한반도백제가 낙랑왕준의 세력까지 통합하여 경영하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결국 한창 세력을 뻗치던 전연의 군대를 당하지 못하고 대륙백제의 전부 또는 일부가 패배를 겪게 된다. 그것이 바로 계왕(契王)의 2년 남짓한 재위기간과 근초고왕(近肖古王)의 346년 즉위로 일부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근초고왕이 서거하고 수(須)라는 이름을 가진 근구수왕이 재위한 다음, 침류왕이 재위에 오르는 384년에 공교롭게도 부여왕에 봉해지는 여울(?蔚)은 이후 부여왕이라는 지위 대신에 후연에서 우광록대부를 거쳐 392년에 좌부사(左?射)로 지위가 변하고 있다. 그런데 여구(餘句) 즉, 근초고왕이 낙랑태수를 겸하고 있었다는 것은 한반도의 백제왕이 대륙백제 지역(낙랑 또는 대방)에까지 영유권 또는 연고권을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인데, 같은 시기에 등장하는 여울과 여구라는 이름의 상관관계와 지금까지의 추론에 의해 볼 때, 여울은 부여 즉, 대륙백제(낙랑과 대방지역)의 부여왕이었고, 여구는 낙랑태수로 각각 그 시기를 달리하면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시기에 생존하였고 같은 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가진 두 사람이지만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은 시기를 달리하고 있다.
여구(餘句)는 여울이 부여의 왕자이듯이, 그 또한 부여지역에 있었던 지배세력, 또는 왕자 신분으로 있다가 모종의 과정을 거쳐 한반도의 백제와 세력을 합하여 통합된 왕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면, 그의 사후에 통합된 세력은 다시 분열하여 별개의 세력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로는 근초고왕의 다음 왕인 근구수왕의 이름이 여수(餘須)가 아니라, 수(須)로만 드러나며(한반도계), 다시 침류왕이 재위에 오르는 같은 해에 대륙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울이 별도로 모용수에 의해 부여왕에 임명되고 있으며, 같은 여씨계 부여세력인 건절장군 여암(餘巖)이 이때에(385년), 모용수에 반란을 일으켜 독립정권을 수립했다가 진압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정황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백제 왕세자 여휘(餘暉)와 관련한 기록이다. 백제 왕세자 여휘(餘暉)가 동진에 의해 사지절 도독 진동장군 백제왕에 봉해지는 386년은 한반도백제의 경우, 진사왕이 그 전해인 385년에 즉위하여 재위 2년째 되는 해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진사왕이 근구수왕의 둘째아들이며, 침류왕의 아우라는 것 외에는 진사왕의 이름 등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근구수왕의 둘째아들이며, 선왕인 침류왕의 아우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진사왕은 태자로 있었던 적이 없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침류왕이 돌아가자 태자가 나이가 어리므로 숙부 진사가 즉위하였다고 했다. 진사왕은 세자(태자) 신분에서 즉위한 것이 아니라, 전왕의 동생으로 있다가 385년에, 일본서기 전거에 의하면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서(晉書)의 백제왕세자 여휘(餘暉)에 대한 설명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진사왕에 대한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진서(晉書)에서는 백제왕이 아니라 백제왕세자 여휘를 백제왕으로 책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백제는 근초고왕 사후 정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일시 통합이 된 한반도와 대륙의 백제가 다시 분열하여 각각 따로 왕이 서는 형세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 당시의 국제정세는 후연의 모용수가 이해(386년)에 황제위에 오르고, 대왕(代王) 탁발규(拓拔珪)가 국호를 위(魏)로 고치면서 다시 새로운 긴장상태가 지속되던 시기였다. 다만 하나 달라진 것은 그동안 부여를 표방하며, 한반도와는 별도의 세력으로 있었던 대륙백제가 이제는 한반도에 자리한 백제와 그 이름을 하나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대륙백제의 계속된 위기와 그로부터 책계왕(실제로는 그 이전부터임) 이후 전개된 양자간의 교섭과 반목, 견제 그리고 국지전 및 통합의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이름은 ‘백제’로 하나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독자적인 건국 이래 완전히 다른 지역에서 각각 오랜 기간 동안 별도로 지내온 양 세력간의 통합은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384년에 한반도에서는 침류왕이 재위에 오르고, 대륙에서는 여울이 간난신고 끝에 모용수에 협력하여 부여왕에 봉해지면서 다시 갈라진 양 세력은, 한반도에서는 1년 후 진사왕이 재위에 오르고, 다시 1년 후, 대륙에서는 여울이 자신의 지위를 여휘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계속 모용수 정권에서 관직에 있었다.
그러면 이렇게 분리된 양 세력은 다시 합쳐졌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시기는 언제인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살펴볼 것은 백제의 전지왕(405~420)의 이름인 여영(餘映)이다. 중국 사서상으로는 여영(餘映)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한 전지왕의 재위기간뿐만 아니라, 다음 왕인 구이신왕(420~427)에까지 계속 백제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예컨대 景平二年(424년)의 경우, 백제왕 여영(餘映)이 사신 장위(張威)를 보내어 공헌하고 있음으로, 이 사신의 입을 통해 송 조정에서는 백제 왕실의 사정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백제에서 구이신왕(420~427)이 재위 중임에도 불구하고 여영(餘映, 전지왕)이 사신을 보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4세기말 이후의 대륙백제에 대해서는 중국의 [梁書 百濟傳] 등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대륙백제설을 주창하는 학자들의 주된 논거로 되고 있으므로 일단 여기서는 생략하며, 통시적인 관점에서 다시 이 시기로 넘어올 때에 언급하겠다.
이제 대륙백제 초기사 서술에 들어감에 있어서 먼저 따져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한반도백제를 포함하여 백제의 출신 종족을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이다. 우리의 고대사에 있어서 드러난 제종족들은 고구려로 대별되는 맥족, 부여 계통의 예족, 삼한의 한족 등이 있었다. 백제가 스스로 그 근원을 부여에 두고 있는 것은 개로왕의 국서나 사비도읍기 시절에 국호를 남부여로 한 것 등에서 잘 드러난다. 그렇다고 하여 백제를 부여 계통의 예족으로 볼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이것은 고구려의 주몽왕을 비롯한 초기 지배세력이 부여출신이며, 또한 도읍한 지역이 홀본 또는 졸본부여라고 하여 부여의 영역에 속하기는 하였지만, 그 종족을 맥족으로 보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의 비류왕과 온조왕은 주몽왕의 아들들이었다. 그리고 이주해온 건국의 주체세력들은 졸본(홀본)지역의 고구려 이탈세력들이었다. 그러므로 백제의 지배세력 또한 고구려와 한가지로 맥족이다. 즉, 사서들의 표현방식을 따른다면,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면서 동시에 고구려의 별종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종족적인 친연성은 예족의 부여(원부여)보다는 맥족인 고구려에 훨씬 가깝다. 이러한 전제하에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삼국사기에 분명히 기술되어 있는 백제 건국 관련 사실을 중국사서들에서는 과연 발견할 수 없는가 하는 점이다. 아울러 고구려 건국을 기원전 3세기 중엽 경으로 보고 있다면 백제의 건국 또한 그 무렵 직후가 될 것이므로 이러한 사실들까지 관련 문헌들에서 확인할 수는 없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을 염두에 두고 이제 잘 알려진 다음의 문장을 하나 살펴보도록 하겠다.
“고구려는 일명 맥(족)이다. 별종이 있는데 소수(小水)가에 의지하여 거주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좋은 활이 산출되는데, 소위 맥궁(貊弓)이 이것이다.”(後漢書/列傳/卷八十五東夷列傳第七十五/高句驪 주석1) 고구려가 대수(大水)가에서 건국할 때, 고구려의 별종이 있어 소수(小水)가에서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소수맥(小水貊)이라고 하였다. 즉, 건국한 나라 이름이 소수맥(小水貊)인 것이다. 그리고 문맥상 고구려의 건국과 소수맥의 건국이 시간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이 소수맥의 위치가 문맥상으로는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우선 이 소수맥이 거주하는 소수(小水)의 위치를 살펴보면, 서안평현 북쪽에 있으면서 남쪽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소수는 서안평현을 관류하거나 아니면 그 인근을 남쪽으로 지나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서안평현의 위치를 안다면 소수와 소수맥의 위치를 확정해낼 수가 있게 된다.
또 한 가지 의미를 둘만한 것은 고구려와 소수맥의 위치를 각각 대수(大水)와 소수(小水)라고 하여 특정한 강의 고유명으로는 볼 수가 없는 일반명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고구려는 큰 강가에, 소수맥은 그와 구분되는 작은 강가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문헌들에서 고구려가 초기 건국하였다는 대수(大水)의 고유명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비류수(沸流水)이며 또한 졸본천은 그 지류이거나 같은 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소수맥이 자리 잡았다는 서안평현이나 소수(小水)는 결코 한반도 지역이 될 수는 없다. 고구려의 별종인 소수맥은 한반도가 아니라 서안평이라는, 소수가 인근에 흐르는 요동지역 어딘가에서 건국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온조왕의 백제는 한반도 한강 유역에 건국하였다. 백제는 건국 시기에 주체가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비류계이며, 다른 하나는 온조계 세력이다. 온조왕의 백제는 이미 정설로 자리 잡은 것처럼 한반도 한강 유역에 자리를 잡았다. 비류왕은 미추홀(彌鄒忽)에 건국하였다고 했다. 지금까지 학계의 공론은 이 미추홀 위치를 인천으로 비정(比定)하였다. 그런데 미추홀의 지역 비정의 근거는 오직 삼국사기에 나오는 한 대목뿐이다. “비류는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로 돌아와 보고는,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비류가 도읍한 지역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은 오직 위 인용문 중에 나오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는 대목뿐이다. 미추홀이 습기에다 소금기가 많은 땅이므로 학자들마다 바닷가를 상상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온조왕이 터를 잡은 곳이 이견들이 많기는 하지만 현 하남 춘궁리를 비롯한 몇 곳에 비정되므로 미추홀 또한 온조왕의 왕성에서 그리 멀지 않았을 바닷가로 추정한 것이고, 그에 따라 나름대로 자연스러워 보이는 인천에 비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통해서 본다고 하더라도 미추홀이 온조왕의 하남 위례성과 거리상 가깝다거나 멀다고 추론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관점에서 중국사서들을 보면 백가(百家)로 대별되는 세력이 바다를 건너가서 이때부터 국호가 백제로 되었다는 사실이다. 온조왕 시대에 국호는 알려진 대로 ‘십제(十濟)’였다. 국호가 백제로 불리게 된 것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비류계 세력이 온조계로 와서 통합된 다음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중국사서에는, ‘百家濟海’ 후에 백제로 되었다고 하였다.
백제라는 국호가 등장하는 시기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비류세력이 온조세력으로 통합한 다음의 일이고, 중국사서들에 의한다면 ‘百家濟海’한 다음의 일이다. 그러므로 중국사서들에 등장하는 ‘百家濟海’한 세력은 다름 아닌 비류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비류계 세력이 바다를 건넜다고 하였다. 즉, 비류계 세력의 근거지였던 미추홀은 한반도 땅이 아니라 바다건너 요동지역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황해 바다 건너 요동 땅 어딘가의 미추홀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앞서 언급한 서안평 소수가의 소수맥(小水貊)과 미추홀에 도읍했다는 비류계 맥족의 연결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소수맥을 설명하는 중국 사서들을 통하여 고구려의 별종인 소수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지식으로는 초기 백제 세력 외에는 달리 없다.
초기 백제 건국 세력 중 하나인 비류계가 도읍한 곳인 미추홀이 한반도가 아니라 바다 건너 요동 땅에 있었다면, 그리고 그 시기가 고구려가 건국한 시기와 비슷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비류 세력이, 소수맥으로 불렀던 맥족과 같은 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현 학계에서는 이 기록들을 고구려에서 벗어난 비류와 온조 세력의 한반도로의 이동으로 보고 있다. 즉, 백제 건국 당시의 일로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바다를 건넌 다음에야 비로소 비류와 온조 세력이 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들은 백제라는 국명이 있기 이전에 요동 땅과 한반도에 각각의 국가 실체를 전제로 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온조왕의 십제가 있었고, 요동지역에는 소수가의 소수맥이 있었다. 요동 지역의 대륙백제가 한반도로 건너온 다음에 양 세력이 합해져서 비로소 백제라는 국호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고구려로부터 벗어날 때,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로부터 공격을 받은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넌 이유가 고구려의 공격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황해바다를 건너오기 이전에 이미 대륙에 백제의 전신인 모종의 건국 실체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구태(仇台)란 왕이 있었고 시간이 흐른 다음에, 이 실체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바다를 건넜다는 것이다. 이미 황해 바다 건너 요동 지역 어딘가에 구태로 대별되는 세력이 자리하고 있다가 한반도로 옮겨온 것이다. 여기서 관건은 구태와 비류와의 관계이다. 삼국사기는 비류왕이 미추홀에 도읍했다가 안거치 못하고 그의 사후 어느 시점엔가 신하와 백성들 즉, 미추홀 세력들이 바다를 건너서 온조왕의 백제로 왔음을 전해 주고 있다. 비록 바다를 건넜다는 구체적인 표현은 나오지 않지만 이를 계기로 국호가 백제로 되었다는 사실은 동일한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현 통설은 그 근본적인 해석에서 잘못된 것으로, 비류왕 사후 어느 시점에서 대륙쪽에 있었던 미추홀 세력들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져(또는 모종의 다른 이유로) 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형제국을 찾아와 합류하여 새로운 국호를 백제로 정하여 이후 통합된 세력이 발전해간 것으로 파악된다.
위에 나오는 여러 중국 및 국내 사서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백제는 출발부터 졸본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로서 중국 대륙에 있다가 점차 그 세력과 판도를 넓혀서 한반도를 거쳐 왜 열도까지 정벌해 나간 엄청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고대국가로서 일제 반도사관에 의해 그 실체가 왜곡되어 한강 이남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로 전락하였다. 삼국시대 정복군주라 함은 우선 고구려 광개토대왕(391~413)과 장수왕(413~491) 그리고 백제 근초고왕(346~375)을 들 수 있다. 백제의 최대 전성기와 고구려의 최대전성기가 공교롭게도 모두 위진남북조시대(220~581), 그 중에서도 5호16국(316~439, 123년간) 시대인 것이 우연은 아니다. 5호16국은 한(漢)나라가 망하고 삼국을 통일한 사마씨가 세운 진(晉)은 남쪽으로 천도하여 동진(東晉)이 되고, 북쪽은 북방 5개의 오랑캐가 16개의 국가를 세운 중국 최대의 분열기이다.
고구려, 백제가 팽창한 시기는 바로 중국의 분열기이다. 중국에 대륙백제를 건설한 왕은 고이왕 (234~286)인데, 중국은 당시 위, 촉, 오의 삼국 시대(222~280)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팽창과 위축은 중국의 정치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중국이 분열과 혼란에 빠질 때, 고구려와 백제는 공격적으로 나오고 힘을 확장하지만 중국이 단일 왕조로 통일되면 중국은 주변국의 위협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 첫번째 국가 과제가 되어 자신들이 분열시에 힘이 커지고 위협이 된 고구려, 백제를 공격한다. 수나라,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이 단순히 중화 자존심 싸움만은 아니다.
중국의 분열기는 백제, 고구려에게 팽창의 기회이지만, 반대로 신라에게는 불리하다. 왜냐하면 신라의 주적은 백제인데, 중국이 분열되면 백제는 중국 대륙에 있는 영토(대륙백제)가 확장되고, 이는 백제의 국력 신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국의 통일기에는 백제, 고구려 위축되고 반면 신라는 팽창의 기회이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시기가 중국의 통일기인 당나라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수나라, 당나라로 중국이 통일되면서 백제는 대륙백제를 잃고, 고구려는 수, 당의 침입으로 국력이 소진되어 고구려, 백제의 힘이 저절로 약화되는 어부지리를 신라는 얻었다.
진흥왕 (540~576)이 정복활동과 함께 3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시기가 바로 백제 성왕때 대륙백제가 붕괴된 이후(532)인 것이 그저 우연은 아니다. 대륙 백제의 소멸과 신라의 성장은 서로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왜 진흥왕대에 신라가 삼국의 주도권을 쥐고 세력을 팽창했는지에 대한 어떤 의문도 없이 그저 진흥왕 순수비의 위치만 외우는데 급급했다. 대륙의 정치상황이 그대로 한반도로 전해지고, 한반도 안의 국가간의 세력균형이 바뀐다는 것을 몰랐고, 그것에 대해서 거시적으로 설명하여 주는 국사책도 없었다. 만약 중국이 계속 분열되어, 고구려가 중원을 차지하고, 백제가 대륙백제를 유지했다면 신라는 감히 삼국통일 시도도 못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