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게 길을 묻다
──부산 동백
박강순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 주소
──민요
모든 것이 흔한 요즈음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온실에서 자란 꽃들이 화사하게 웃으며 나를 보아달라고 손짓을 한다. 하지만 화병에 꽂힌 꽃이나 소위 꽃꽂이 선생님들이 작품이라고 만들어 놓은 꽃에는 눈길이 가지 않는 것이 내 심정이다. 나도 갇혀있는데 너도 갇혀있구나 하는 동병상련일 수도 있고 작위적인 것에 대한 저항감일 수도 있다. 어쨌든 꽃은 가급적 저 피어나고 싶은 곳에, 저 피어나고 싶을 때 피어 있어야 아름답다. 아마도 남자들이 짙은 화장을 한 여자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 아닌가 싶다. ‘자연스러움’은 꽃에게나 사람에게나 모든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가장 우선되는 덕목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쉽게 꽃 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꽃을 버리고 먼 길을 마다 않고 꽃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새벽 잠을 설치고 먼 길을 달려와서 만나고 싶은 꽃을 만났을 때의 환희는 무엇이라 표현할 길 없이 기쁘고, 벼르고 별러서 왔는데 만날 수 없는 섭섭함은 마치 애인을 두고 길이 어긋난 것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밀양 아리랑을 부르면서 자랐지만 꽃을 보는 것이 님을 만나는 것처럼 반가울까 하고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 나를 보면서 ‘동지 섣달 꽃본 듯이 반가워 해준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꽃이 하나도 피지 않는 한겨울에 꽃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이며, 그 옛날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부산동백
어렸을 때 자란 집에는 제법 큰 동백나무가 있었다. 여관이었던 자리를 개조한 집이었는데 조그만 정원을 둥그렇게 둘러서 방이 있고, 그 한가운데 동백나무를 심어놓아서 어느 곳에서나 동백나무를 볼 수 있었다. 한 4월쯤이면 꽃이 피는데 떨어진 꽃을 주워서 붉은 꽃잎을 입에 부치고 입술을 빨갛게 그린 것처럼 단장하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꽃밥을 따가지고 음식을 만들고 놀았는데 노란 꽃술을 사금파리에 담아 냠냠거리던 기억도 난다. 좀더 자라서 고창 선운사 동백이 유명하다고 놀러갔던 기억이 있다. 선운사 경내에 동백이 많거니 했는데 한 그루도 볼 수 없어서 이상하다고 생각 했다. 그런데 절집 뒤쪽에 철조망 너머로 너무 많은 동백이 있어서 기가 죽어버렸다. 자라는 동안에 어른들이 우리 집 동백나무가 굉장히 귀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웬 동백나무가 이렇게 많단 말인가! 그 후에는 동백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다만 문리가 생기고 나서는 동백은 꽃이 봄에 피는데 왜 겨울 동을 써서 동백이라고 할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 적은 있었다.
그러다가 자라서 서울에서 십수 년 살다가 뜻하지 않게 부산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어린 나이도 아니고 나이 사십이 넘어서 아는 사람도 없는 객지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황량한 일인지, 마치 목장원 앞 바다에 떠 있는 배처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서울의 모든 것을 그리워했다. 그래도 바다와 친하게 돼자 제법 견딜만 해졌고 겨울이 되었다. 그 때 그 겨울 속에서 피어난 동백을 보았다. 12월인데 분명히 겨울인데, 붉은 꽃이 푸른 잎사귀를 수줍게 헤치고 해맑게 피어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내 고향에서는 4월이 되어야 피는 꽃인데……. 바닷바람에 흔들리며 붉게 피어나는 동백이 얼마나 나에게 위로가 되는지 돌고 돌아 고향의 익숙한 꽃이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내 이름이 왜 동백인지 이제 알겠니?”
동백은 신기하게도 해풍에 시달릴수록 더 윤기있는 잎사귀를 갖는다. 반짝거릴 정도로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잎사귀를 보면 동백기름을 발라 윤기나게 머리를 빗던 할머니의 모습이 생각난다. 어쩐지 촌스러운 것 같기도 하지만 다정한 고향의 기억이 있고, 후드득 떨어져도 크게 상처를 입지 않아 떨어진 모습도 그림처럼 아름답고, 꽃이 다 지고 나면 잎사귀 만으로도 훌륭하고, 열매가 열면 붉고 둥근 과실이 달린 모습이 보기에 좋다. 절벽 끝이어도, 해풍이 아무리 심하게 불어도, 푸른 바다 옆에 서 있는 동백을 보아야 동백을 제대로 보는 것 같다. 모래밭 위에 붉은 꽃대궁을 떨어뜨리고 담담하게 서 있는 동백꽃의 모습이 그대로 그림인 것처럼…….
요즈음 부산의 동백섬은 마치 제철을 만난 것처럼 갖가지 종류의 동백꽃을 피우고 있다. 귀한 하얀동백, 분홍동백, 분홍과 하양이 섞여 있는 동백, 마치 장미꽃 같은 겹동백. 하지만 나는 홑동백꽃이 가장 좋다. 동백은 워낙 원예품종이 많아 요즈음에는 가지가지 동백꽃이 있다. 지난 12월에 제주도에 갔을 때는 분홍 겹동백이 만개를 하고 피어나서 마치 분홍 장미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여 동백꽃이 아닌 줄 알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기도 했지만, 그런 화려한 원예종 동백에는 쉬 질리고 만다. 꽃 이파리를 다섯 개나 일곱 개 정도로 달고 활짝 꽃을 피기보다는 살포시 고개를 숙이고 노란 꽃밥을 선명하게 드러낸 토종 동백꽃이어야만이 담백하게 아름답다.
가까이에 있어서 소중함을 잊고 있지만 동백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길은 그지없이 아름답다. 소나무숲과 동백숲이 어우러져 있는 작은 섬을 천천히 걸으면 멀리 광안대교와 도시다운 해안선이 바라보이고,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검은 절벽을 따라 해운대 백사장이 발밑으로 파도를 부딪히며 다가온다.
이제 부산에서 십년 넘게 살다보니 바다가 너무 익숙해져서, 해운대가 아름답다는 것도 잊고 산다. 때로는 가까이에 있는 것은 익숙함으로 너무 소홀하게 대하고, 멀리있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가 많다. 부산에 살면서 동백꽃이 익숙하다 보니 처음에 내가 느꼈던 감동은 잊어버리고 거기에 있는지 조차 까마득하게 잊게 된다.
얼마 전에 동백꽃을 그리는 여수의 화가 한 분에게 동백꽃 그림 하나를 구입하였다. 해풍에 시달리며 절벽 위에 핀 동백을 거친 질감으로 표현하였는데 볼수록 마음에 든다. 거친 자연에 나와 있어도 붉은 단심을 잃지 않는 동백의 정열을 보는 듯하여서 마치 바닷가에 핀 동백을 보는 듯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부산에 흔하게 피어있는 동백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귀한 것과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처음엔 그지없이 소중하게 생각하다가도 익숙해지면 그 소중함을 잊어버리는 사람의 마음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 꽃을 보았을 때는 그리 예쁘게 보았다가 그 꽃이 인공으로 재배가 되어 흔하게 돌아다니게 되면 그 귀한 꽃이 언제 그런 마음이 들었는가 싶게 시들해진다. 하지만 그 귀한 마음을 잊어 서는 안 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옆에 가까이 있어서 고마운 것이고 나에게 와서 귀한 것이며 내 옆에 머물러 주어서 소중한 것이다. 세상의 많은 이름 지어진 것 중에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내가 알게 되니 그것도 나에게 아는 체 하는 것이고, 다른 것과 구별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꽃 중에서, 세상의 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알고 나에게 익숙한 것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제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태어난 고향에선
동백이 동백인 줄 몰랐어요
이 곳에 와서야
동백이 동백인 줄 알았어요
타는 사랑 말고는
그렇게 피어날 수 없음을 알았어요
꼭꼭 숨겨놓은 아픔이 있어야
그렇게 피어날 수 있음을 알았어요
바닷바람
질투의 넋을 삼키고
이 겨울 피어나는 붉은 마음을 보아요
──졸시, 「부산동백·3」 전문
박강순 /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1992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단순한 진리』외 3권이 있고 제6회 서울시인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