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방식 교사 (서울 동북고등학교)
윤리를 담당하며 2005년부터 EBS 강사로 활동 중이다. EBS가 뽑은 최고의 교사로 선정됐으며, 동북고의 청문회 식 토론법 개발을 비롯해 융합 수업, 통합 논술, NIE 수업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되지 않는 것을 연구하는 취미가 있다.
‘시사 이슈 교과서로 따라잡기’는 시사 상식과 논술, 두 마리 토끼를 잡아보려는 시도에서 기획됐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핫한 이슈들을 콕콕 집어 이를 둘러싼 쟁점들을 분석하고, 교과서와 연계해 생각해봅니다. 서울 동북고 강방식 교사와 함께 시사의 세계로 풍덩 빠져보시죠. 밥상머리 토론거리로 ‘강추’입니다. _편집자
‘쿡방’ 현상, 현대 가족의 음식 문화를 생각하다
설날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TV를 시청하고 있다. 며느리는 부엌에서 안주상을 차리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느긋하게 손자들과 TV에 나오는 연예인이 누군지 이야기한다. 남편은 술안주를 빨리 가져오라 하고, 덩달아 아이들도 엄마에게 먹을 것을 재촉한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 함께한 엄마는 시어머니가 돌리는 채널에서 우연히 나온 케이블 tvN의 <삼시세끼 어촌편>에 눈이 간다.
180cm가 넘는 키에 콧수염을 멋있게 기르고, 검은색 옷을 위아래로 맞춰 입고, 두건을 쓰고 배추를 씻는 남자 탤런트에 엄마는 매료되었다. 생선을 칼로 휙휙 손질하고, 자기만의 독특한 레서피로 만든 양념장을 장어에 쓱쓱 바른다. 그는 예전에 남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연예인이었는데, 지금은 부엌에서 열심히 요리하는 남자로 변신했다.
엄마는 나도 저 남자가 해주는 요리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다른 가족도 정말 저 요리를 먹고 싶다는 마음이 발동한다. 모두 입에 침이 고이지만 머릿속은 전혀 다른 세상이 그려지고 있다.
최근 TV 프로그램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코너가 ‘먹방’(먹는 방송)이다. 아침이나 점심, 저녁, 심지어 새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출연진이 누군가 만들어준 요리를 먹으며 “정말 맛있어요” “이런 맛 처음이에요” “처음에는 시큼했는데 씹을수록 달콤해요” 등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20여 년 전 일본에 가서 TV를 켜면 “오이시(맛있다)”라는 소리가 방송국을 가리지 않고 나오던 모습과 유사하다. 이젠 스튜디오뿐만 아니라 야외, 심지어 외국의 어느 정글에서도 연신 먹어댄다.
1~2년 전부터는 먹는 방송이 진화해서 요리하는 방송, 즉 ‘쿡방’으로 바뀌었다. <삼시세끼 어촌편>은 이번 설 연휴 차승원의 멋진 요리 솜씨에 역대 최고 시청률인 14.2%를 기록했다. 케이블 올리브TV의 <신동엽, 성시경은 오늘 뭐 먹지?>에서는 두 MC가 요리 경쟁을 한다. KBS-2TV <해피투게더3>에서는 자신만의 야식만들기를 보여준다.
이들 프로그램의 공통점은 남자 연예인이 요리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찬찬히 분석해본다.
쿡방 현상 둘러싼 쟁점
시대 변화 반영한 사회현상! vs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세상!
시대상 반영 01 쿡방은 우리에게 요리는 일상생활의 중요한 일부이고, 가족 행복의 핵심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지나치게 일 중심의 사회에서 휴식이 중요하고, 여유롭게 맛있는 요리를 하면서 그 기쁨을 주위 사람들과 나누기를 권한다. 앞으로 아이들에게도 요리하고 청소하는 것을 분담시키고 함께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입시 준비를 위해 공부만 시키는 것은 직장인들에게 돈만 벌어오라면서 엄마, 아빠와 자식의 관계가 멀어지는 이야기와 똑같다.
상품화 세상 01 쿡방은 지나치게 지엽적인 곳에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모으면서 시민의 사회 비판적인 의식을 약화한다. 방송국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각종 현안문제를 분석하면서 시민의 의견을 모으고, 합리적으로 조율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있다. 마치 스포츠(sports), 섹스(sex), 스크린(screen)이라는 3S 정책으로 국민의 관심을 오락에 집중시켜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배제하는 논리와 비슷하다.
시대상 반영 02 쿡방에서 남자들이 요리하는 모습은 남편 주부의 등장이 자연스러워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직장보다 살림에 관심이 있고, 주부 역할을 여자보다 잘하는 남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성 역할의 고정관념을 깨뜨려 남편과 아내가 집안일과 직장 일을 합리적으로 분배하도록 유도한다. 한국 남편들은 아직도 북유럽 국가에 비해 가사 노동 분담 비율이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상품화 세상 02 쿡방을 통해 요리는 여자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떨쳐내는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남자들이 고된 직장 업무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쿡방의 최근 트렌드는 남자들에게 슈퍼맨을 요구한다. 워킹맘에게 집안일, 시댁과 관계를 전부 원만하게 수행하는 슈퍼우먼을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남자 중심의 직장 문화를 개선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쿡방은 전형적인 가부장제에서 책임감만 강조되는 남자들의 어깨에 벽돌 하나 더 얹는 셈이다.
시대상 반영 03 쿡방은 시대 흐름에 맞춰 적절한 아이템을 개발한 창의적인 작품이다. 민주주의와 토론을 강조하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방송계에 토론 프로그램이 등장했고, 학교나 시민 단체에서 토론이 활성화된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가져온다. 그동안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쟁점에 관심을 둔 거대한 장벽에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이 시대에 쿡방과 같이 일상생활 속 요리를 통해 사람들은 힐링을 하고 삶에 대한 만족감을 높일 수 있다.
상품화 세상 03 방송국이 주도하는 쿡방은 대기업 광고 수단으로 바뀔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삼시세끼 어촌편>과 <신동엽, 성시경은 오늘 뭐 먹지?>가 해당 채널 모기업의 상품을 자주 노출하듯, 다른 쿡방들도 지나치게 경제적 이윤을 얻기 위한 단기적 관심에 집중하면 애초에 의도한프로그램의 가치가 변질될 수 있다. 요리하는 연예인도 이미지로 살아가는 존재기에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그럴듯한 요리, 괜히 있어 보이는 삶의 만족감을 공허하게 재생하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교과서와 연계해 생각해볼까?
<기본편> 교과서 여기!
인간은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는 삶을 결정한다
+ 중학교 <사회> 교과서 : ‘문화의 의미와 특징’ 단원
+ 고등학교 <사회문화> 교과서 : ‘문화의 이해’ 단원
문화의 속성 가운데 변동성이 있다. 문화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문화 요소가 추가되거나 소멸되면서 변한다는 내용이다. 예를 들면 대보름이 밸런타인데이에 밀려 젊은 층이 많이 다니는 백화점에는 부럼보다 초콜릿 매출 실적이 높은 것, 깔끔하고 단정한 양복을 입던 직장인의 의복 스타일이 창의성을 강조하는 시대 흐름에 맞춰 캐주얼한 복장을 허용하는 분위기로 바뀐 것 등이 있다.
마찬가지로 쿡방은 여성 지위와 직장 생활의 변화를 통해 바뀌어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문화 현장이다. 인간은 문화를 창조하는 유일한 존재지만, 개인의 삶은 다시 문화에 의해 결정되는 속성이 있다. 쿡방이 점점 변해가는 대한민국 사회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개인(즉 남편이나 아내)들은 자신의 현 지위를 성찰하고 바람직한 부부, 부모 자식 관계 형성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화두를 던져준다.
+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 : ‘여가 생활의 설계’ 단원 여가는 일반적으로 직업적 활동 외의 활동으로 소비하는 시간을 말한다. 과거에는 경제성장과 근검절약을 강조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가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현재는 소득수준이 매우 높아지고, 주 5일 근무제가 채택되면서 여가의 중요성이 확대되고 있다. 여가는 일에 대한 성취감과 근로 의욕을 북돋운다. 취미나 특기를 살려줌으로써 자기 계발을 통해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다. 직장에서 누적된 피로를 해소하기도 한다. 특히 직장 생활로 소홀해진 가족이나 친구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어 더 나은 삶을 설계할 수 있다.
쿡방을 통해 요리하는 남자들이 많아지면 가족의 유대뿐만 아니라 각종 소모임에서 성심성의껏 해주는 요리를 즐겁게 나눠 먹는 문화가 만들어지며 두터운 인간관계를 형성할 것이다. 앞으로 여행이나 봉사 활동 등으로 확대되면 단순히 잠을 자거나 TV를 시청하는 등 소극적 여가에서 적극적 여가 형태로 변하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심화편> 좀더 생각해보기
시대에 따라 달라진 성 역할, 가족의 의미
신경숙이 쓴 <엄마를 부탁해>는 가족의 가치, 가족에서 엄마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게 한 소설이다. 자식들이 전부 수도권에서 생활하며 시골의 부모님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가는지 알 수 있다. 서울은 시골에 비해 무척 바쁘게 돌아가며 서로 안부를 묻고 직접 만나면서 먹을 것을 챙겨주는 일을 통해 정을 나누는 것이 부족하다. 나중에는 시골에 내려가는 것도 힘들어서 부모님 생신에 시골의 엄마, 아빠를 서울로 모셔서 잔치를 열어주는 상황에 이른다.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타는 과정에 엄마가 실종되고, 엄마를 찾기 위해 전단을 뿌리고, 경찰에 신고하며 그동안 엄마가 자식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소설은 차분히 말한다.
알고 보면 서울만 바쁜 것이 아니다. 엄마도 젊은 시절에 자식들을 키우면서 쉴 틈 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 추석을 앞두고 문풍지에 예쁜 단풍잎을 골라 바르는 등 자신만의 취미 생활을 하는 모습도 있다. 서울에 올라올 때 엄마는 자식들을 위해 떡을 하고, 콩자반과 김장김치를 가져온다. 자식들의 삼시세끼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엄마의 모습은 예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tvN의 <삼시세끼 어촌편>에서 남자 연예인이 요리하는 모습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소설 속 엄마와 쿡방의 차승원은 공통적으로 가족 간에 정을 나누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주인공 역할을 한다. 차이점은 시대에 따라 성 역할과 직장의 구조가 변하면서 가족의 의미, 요리의 의미가 서로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미즈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