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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하라(출 20:12-17)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열두 명의 제자들 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 중에 사두개인들도 있었고,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어느 날,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관한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난 후, 바리새인들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러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십시오.
뿐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물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 가운데, 길과 진리요 생명되신 주님을 만나고자 따라다닌 사람들도 있지만,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따라다닌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자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무슨 오류가 없는가? 중대한 하자가 없는가? 그러한 것을 발견하고자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함으로 이 자리에 나오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하면 시험 들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잘 전한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하고자 한다면,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올 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예비하신 하늘의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듬뿍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던 어떤 율법교사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정말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질문한 것일까요?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영생을 얻을 방법을 진정 물어 보았다면,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그 가르쳐준 방법을 실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목적밖에 없었기 때문에, 대답을 듣고 행하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경을 읽다 잘 깨달아지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경우, 어떻게 합니까?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경우 어떻게 합니까? 그냥 넘어가십시오. 아직 이 말씀에 대한 깨달을 단계가 아닌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것이 가장 은혜가 됩니다. 나중에 다시 한번 읽어 보면, 지금은 깨달아지지 않았던 것이, 환하게 깨달아질 때가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다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조금 지나면,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이지 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 이해하고 있는 것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될 때도 있는데, 굳이 이해 안되는 것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성경을 읽다보면, 깨달아질 때가 있습니다. 설교 말씀을 들을 때 깨달아질 때도 있습니다.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내버려 두십시오.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필요할 때, 필요한 부분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을 얻는 방법을 정말 몰라서 물었습니까? 질문을 던진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율법교사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성경에 대하여, 훤히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옛날 서당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면, 물론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일반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해 보면, 서당에서 공부할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천자문을 외우는 것이 아닙니까?
“하늘천 땅지 검을현 누를 황, 집우 집주 넓을 홍 거칠황, 날일 달월 찰영 기울축”
천자문을 외워야지, 그 다음 공부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선비들 공부하는 것을 보면, 공부하는 책을 줄줄 외워야 했습니다. 어느 한 문장이 나오면, 그 문장의 의미를 말해야 하고, 아니면, 그 다음 문장을 이어 외워야 하는 것을, 주로 사극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줄줄이 외우고 있어야, 글 좀 읽는 선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 율법교사가 되려면 어떤 공부를 했을까요? 구약의 말씀을 다 외우다 시피 해야 했습니다. 특별히 구약 중에 모세 오경은 필독서였습니다. 모세 오경은 필히 다 외우고 있어야 했습니다.
신명기 6:4-5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씀을 보면,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집에 앉았을 때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길을 갈 때에도 가르쳐야 했습니다. 누워 있을 때에도 가르쳐야 했습니다. 일어날 때에도 가르쳐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애야, 신명기 6:4-5절 말씀을 외워 보라”고 말합니다. 밥을 먹고, 잠시 앉아 있는데, 아버지가 “애야, 신명기 6:4-5절 말씀을 한번 외워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와 함께 길을 가는데, 아버지가 “애야, 신명기 6:4-5절 말씀을 외우면서 가자”고 하십니다. 하루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애야, 신명기 6:4-5절 말씀을 외우고 자렴”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율법교사가 몰라서 예수님께 질문했을까요? 예수님이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교사가 거침없이 대답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막힘이 없이 줄줄 외웁니다. 시원스럽게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입으로, 영생을 얻는 방법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율법교사는 영생을 얻는 방법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구원받는 방법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고 있었습니다. 구원 얻는 방법을 묻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한 말입니다.
간수도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 한 마디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바울의 말 한 마디에, 그대로 믿고 순종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영생의 방법을 물었던 율법교사는 믿지 않았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영생의 방법을 직접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다시 한번 영생의 방법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자기 입으로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 거침없이 고백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입니까? 그러나 그 은혜와 축복을 받아들이지를 못했습니다. 은혜와 축복이 자기 앞에 있었지만, 그것을 받아 누리지를 못했습니다.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시는 대도 믿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받아 들일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갈급해 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과 축복과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교사의 입을 통하여, 밝혀진, 영생 얻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영생 얻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연스럽게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준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다한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준다는 것입니다. 힘을 다한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뜻을 다한다는 것도, 자기의 생애를 준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이웃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준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왜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주기가 아까운 것입니다. 손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이웃에게, 뭔가를 주면, 그만큼 나에게는 손해가 발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대답을 들으시고,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물음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0-36)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웃입니까? 아니면 강도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강도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첫째 계명에서 넷째 계명까지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만을 섬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다른 우상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날을 늘 기억하고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에서 열 번째 계명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는 말씀은, 따로 시간을 가지고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십니까? 대부분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얼마나 아끼는지 모릅니다. 그 무엇보다도 내 몸을 아끼고, 사랑합니다.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내 몸을 아끼고 사랑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데, 내 몸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여섯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을 보면,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면 살인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사랑한다면 간음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사랑한다면 도둑질 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웃의 집을 탐낼 수 있겠습니까?
살인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귀한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성을 빼앗는 것입니다. 도둑질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귀한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이웃의 집을 탐내는 것은 역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렸습니다. 죽음 직전이었습니다. 다 죽게 된 것을 버리고 강도들이 가 버렸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에 이르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같은 유대인인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를 피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쓰러져서 다 죽어가고 있는 그를 보았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자기가 타고 왔던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진 사람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주었습니다. 그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자기가 타고 왔던 짐승도 그를 위하여 내어 주었습니다.
그가 머물러야 했던 주막도 내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던 데나리온도 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막 주인에게 부탁합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쓰러져 있는 사람을 원래 알고 있었습니까? 전혀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기와 관계된 사람입니까?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냥 내버려두고 가도, 누구도 무엇이라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쓰러진 사람이 혹시 부자였을까요? 사마리아 사람만 알고 있는, 혹시 돈 많은 부자였을까요? 혹시 부자라는 것을 알고, 구해 준 것은 아닐까요? 부자를 구해주면, 혹시 그 가족들로부터 사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치밀한 계산을 하고, 돌보아 준 것은 아닐까요?
요즘 세상은 참 무서운 세상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 이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지난 9월 7일 서울광장에서 귀가하던 A(여)씨는 샛길에서 5-6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아이와 마주쳤다. 그 아이는 잃어버린 아빠를 찾아달라며 A씨의 손을 이끌고 어둑한 골목 고깃집 앞으로 갔다. 그런데 고깃집 앞에 다다른 A씨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덩치가 큰 남성 2명과 외소한 남성 3명이 ‘왔다’라고 외치며 옆의 좁은 골목에서 터벅터벅 걸어왔던 것. A씨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뒤도 안돌아보고 번화가 쪽으로 뛰었다. 그리고는 문을 막 닫으려는 약국에 들어가 도움을 청했다. A씨는 그 뒤를 쫓아와 ‘아빠 찾았어, 그런데 누나는 집에 안 가?’라고 묻는 아이를 겨우 내치고는 집에 전화를 해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A씨는 ‘덩치 큰 남성이 그 아이를 안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소름이 끼쳤다. 이제는 어린 아이라도, 나이 든 할머니라도, 몸이 불편한 분이라도, 절대 경계를 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길을 가는데, 도움을 청하는 어린이나 노인을 앞세워서, 부녀자들을 납치하려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이 많이 다니는 병원이나 길에 지갑을 떨어뜨려놓고는, 부녀자들이 땅에 떨어진 지갑을 줍는 순간, 어디선가 남자가 나타나, 자기 지갑을 훔쳐간 사람으로 부녀자들을 몰아붙인다는 것입니다.
“경찰에 알리지 않겠다. 남편에게 알리지 않겠다. 지갑에서 돈이 얼마 정도 없어졌는데, 돌려주면, 없었던 일로 하겠다. 이 자리에서 합의하자.”
요즘은 선한 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참으로 무서운 시대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아무런 계산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주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와서 더 주겠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아까운 마음이 들면 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을 다 알면서도, 왜 못하는 것일까요? 주는 것이 아깝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주어야 하고, 마음을 주어야 하고, 물질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아깝기 때문에,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묻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율법교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말씀하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 10:27)
그렇습니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여야 합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내 가정과 다른 사람의 가정을 파괴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타인의 것을 도둑질 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이웃의 집을 탐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지난 번 제직회 때, 매월 첫째 주일 헌금은 구제 헌금으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구제헌금이라 부르기보다는 앞으로는 “선한 사마리아인 헌금”으로 부르겠습니다.
작은 출발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섬기고자 합니다.
거창한 출발은 아니지만, 매월 첫째 주일, 장년주일헌금, 아동부 주일헌금은 “선한 사마리아인 헌금”으로 드려집니다. 우리의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해지리라 믿습니다.
우리 교회 재정상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넉넉하지 않을 때, 시작하는 것이 더 보람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차고 넘치는 가운데,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 하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욕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넉넉한 가운데 도움을 주면, “넉넉하니까, 남을 도와주는 것이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별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없는 가운데 시작하면, 부족한 가운데 시작하면, 우리의 마음이 더욱더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없는 가운데 하는 것이, 더욱 보람 있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매월 첫째 주일 헌금은 “선한 사마리아인 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려져, 어려운 이웃이나 단체를 정기적으로 돕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한다는 것은 빼앗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가정을 빼앗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빼앗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지 않습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함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예비하신 풍성한 은혜와 셀 수 없는 축복을, 자자손손, 천대까지, 듬뿍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되신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며 섬기는 행복한 교회가 되게 해 주옵시고,
사랑하며 섬기는 참된 행복을 맛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