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 중 가운데 날입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났습니다. 양치를 하고 구룡마을 마당에 모였습니다. 오늘 행정의 설명을 듣고 어제 저녁 술 마시던 매점 바로 옆 큰 건물 ‘온정각’ 식당으로 갔습니다. 어제 ‘금강산호텔’ 식당에서 맛을 안지라 이번에는 채소를 주로 하여 들어서 한 접시 가득히 가지고 왔는데 그 조리가 역시 남쪽 사람들이 했는지 어제와 같은 맛은 덜 하고 다만 무공해 화학비료를 쓰지 안해선지 신선한 맛으로 식사를 잘 했습니다.
다시 숙소로 가서 간단한 산행의 차비를 하고 자기에게 차례진 경내버스를 탔습니다.
△구룡연가는길 ⓒ안재구
<김정숙휴양소>와 김정숙 장군
이제부터 산 안으로 들어갑니다. 온정리 금강산특구에서 그 한가운데에 있는 건물의 규모는 상당한데 공사를 완성하지 않고 그냥 시커멓게 방차하고 있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현대아산 측의 안내원의 설명으로는 그 건물이 ‘김정숙휴양소’라고 했습니다. 일본이 오래전에 금강산에 관광투자를 한다면서 호텔을 짓게 되었는데 공사를 하다가 조ㆍ일 사이에 외교문제가 심각해지자 (왜놈다운 근성이 발휘했는지-이것은 내 말입니다.) 공사를 중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정숙휴양소’라는 좋은 이름을 가진 호텔을 그대로 시커멓게 방치할 수 없어 이북 공화국에서 이를 맡기로 했고 곧 공사를 계속하기로 했답니다.
‘김정숙휴양소’라는 이름의 김정숙은 여성 항일빨치산의 장군으로 당시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부인되시는 분으로 빨치산투쟁에서 만나 동지들 앞에서 결혼하신 여성 빨치산으로 김일성 장군의 호위를 맡으신 여성 장군이십니다.
김정숙 장군은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 오산덕에서 탄생하셨고, 일찍부터 독립군에 참가하셔서 활동하신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시며 성장하셨습니다. 모진 가난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는 일가와 함께 1922년 봄 두만강을 건너셨고, 연길현 북구에서 사시다가 1928년 봄부터는 8도구에서 좀 떨어 진 서산리에서 생활을 하셨으며 이곳에서 아버지를 여의셨습니다. 그 후 연길현 부암동 하촌마을에 사시다가 1930년 봄부터 김일성 장군의 정치공작원이 배워 주는 야학에 다니시며 혁명운동을 공부하셨습니다. 마침내 1931년 9월에는 청소년들의 혁명적인 반군사조직인 소년선봉대에 입대하셨습니다.
그 뒤 김일성 장군의 지도로 진행된 1931년 추수투쟁과 1932년 춘황투쟁에 참가하셨으며 투쟁대오의 앞장에서 용감히 싸우셨습니다.
1932년 7월에는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하시여 조선혁명의 청년전위로서의 높은 영예를 지니고 활동하시였는데, 1932년 7월 15일 일제침략자들의 ‘토벌’을 만나 어머니와 오빠를 잃으시자 김정숙 장군은 유격구에 들어가셨습니다. ‘8구공청위원회’ 위원, ‘8구아동단’지도자의 중책을 맡으셨고 ‘공청’의 지도일군으로 활동하셨습니다.
그 후 1934년에는 ‘공청’ 연길현위원회에서 공청사업과 아동단사업을 지도하셨고, 1935년 3월에 삼도만유격구역에 오신 김일성 장군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으며 1935년 9월 안도현 처창즈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셔 17살 녀성의 몸으로 손에 총을 잡고 항일유격전에 나셨습니다.
김정숙 장군은 1936년 4월 무송현 마안산지구에서 군복차림의 몸으로 김일성 장군을 또다시 만나 귀중한 가르침을 받았고 이때로부터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에서 친위전사로 활동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후 김정숙 장군은 처창즈전투(1935. 10), 내도산전투(1936. 11), 시난차전투(1936. 7), 서강전투(1936. 7), 무송현성전투(1936. 8)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들에 참가하셔서 수많은 전공 세웠으며 항일의 여성영웅으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김정숙 장군은 1937년 1월 백두산밀영에서 당에 입당하셔 장백현 도천리와 국내 신파지구에 나가 당 조직과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 강화하는 사업을 줄기차게 전개했습니다.
김정숙 장군은 무산지구진공작전(1939년)과 대부대선회작전(1939-1940년) 등에 참가하고, 김일성 장군의 신변안전을 위해 세심한 관심을 돌리셨으며 홍기하전투(1940. 3), 대사하치기전투(1940년 초여름) 등 여러 전투에서 자신의 몸으로 방패삼아 김일성 장군의 안전을 보위하셨습니다. 얼음구멍을 까고 빨래한 김일성 장군의 젖은 옷을 자신의 가슴에 품어 말리고 자신의 탐스러운 머리채를 잘라 적구로 떠나시는 김일성 장군의 신발에 깔아 드리는 등 지극한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
김정숙 장군은 정치군사활동에도 적극 참가하셨으며 특히 1941년 여름부터 시작된 조국해방 최후결전을 준비하기 위한 사격훈련, 통신훈련, 스키훈련, 도강훈련, 낙하산훈련 등 각종 훈련에서 뛰어난 기질을 보였고, 1944년 3월 8일에 열린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의 대규모 사격경기에서 단연 1등을 차지하셨습니다.
광복 후 김정숙 장군은 김일성 장군의 건국사업을 도우기 위해 그의 심려를 덜고 힘과 지혜를 가지고 도우셨습니다. 김정숙 장군은 1945년 11월부터 근 1개월에 걸쳐 함경북도 선봉군과 청진시 일대에서 여러 부문 사업을 지도하셨고 그 후에도 평양시를 비롯한 여러 곳의 공장, 기업소와 농촌과 어촌 등을 찾으시어 인민들로 하여금 새 조국 건설을 위한 투쟁에서 공을 세우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특히 여성들의 정치조직인 여성동맹을 지도하여 여성들이 새 조국 건설에서 한몫을 담당할 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이북 공화국에서는 김정숙 장군을 여성 항일 영웅으로 받들고 그의 서거 이후 그를 그리면서 그가 활동하시던 곳, 그리고 지도하신 곳 등을 유적지로 삼아 그의 나라를 위한 공을 기리고 있습니다.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 장군을 따라 배우려는 인민들의 염원을 받아 회령과 신파땅(량강도 김정숙군 김정숙읍)에 김정숙 장군의 동상이, 평양시 대성산의 혁명열사릉에는 반신상이 모셔져 있으며, 회령혁명사적지와 신파혁명사적지, ‘김정숙동지혁명사적관’(회령)과 ‘신파혁명사적관’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1981년 8월부터 량강도 신파군이 김정숙군으로, 신파읍이 김정숙읍으로, 량강도 혜산제2사범대학이 김정숙사범대학으로, 량강도 신파녀자고등중학교가 김정숙녀자고등중학교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구룡폭포 ⓒ안재구
금강산의 경관
버스를 타고 산으로 조금 올라갔습니다. 얼마 안가서 ‘목란관’ 못 미쳐 주차장에 도착했고 버스의 종점이라 해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건너편에 보이는 흰색 건물이 ‘목란관’이었습니다. 그 아래에 다리가 있는데 ‘목란교’랍니다. 다리 건너 ‘목란관’은 점심 때 식사를 거기서 한다기에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건물을 에돌아갔더니 계곡을 건널 다리가 나왔는데 그것이 ‘양지다리’랍니다. 아직 길은 거의 평길입니다. 그래서 길 양편에는 소나무 숲이 욱어져 있습니다. 돌산인데도 골짝이에는 부엽토 층이 두터워 자양을 잘 빨아들이는지 통이 굵고 곁가지도 없이 위로 죽죽 뻗어 자란 붉은 껍질의 아름드리 적송(赤松)이었습니다.
금강산의 소나무는 거의가 적송입니다. 백두대간의 소나무는 적송이 대부분인데 이남에는 하도 벌목을 많이 해서 거의 없고 아주 깊은 산에만 있답니다. 그러나 금강산에는 보이는 소나무가 모두 적송이었습니다.
금강산의 소나무는 잔가지가 없답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쌓이기에 그 무게로 너무 잔가지가 울창하면 가지는 부러지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죽죽 곧은 잔가지가 없는 금강산 소나무를 설송(雪松)이라고도 한답니다.
이러한 말은 이북 청년들의 봉사대원이 해설하는 데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길은 계곡에 따라 오른편에 나 있는데 계곡물과는 좀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길가에 좌판을 벌이고 간단한 음료수와 선물용품을 매대에 올려놓고 있는 여성 봉사대원이 있고 곁에는 날렵하게 생긴 청년이 있습니다. 둘은 물건 파는 데에 그리 애달아하는 모양은 아니지만 고객에게는 아주 친절했습니다. 이들은 이남 땅에서 통일운동을 하는 단체인 ‘범민련’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지 유달리 반가운 눈을 하고,
“선생님들, 반갑습니다.”
“예, 수고합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자연 걸음을 점시 머물고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통일운동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통일운동한다고 금강산 오는 것도 어려워 못 오다가 이제야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고생은 하지만 투쟁해서 얻는 보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 동안 세월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 6.15공동선언 덕입니다.”
“예, 그렇지요.”
“그럼 많이 파세요. 올라가겠습니다.”
대개 이런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물 ⓒ안재구
그러다가 산을 우러러보니 그 경관은 새로웠습니다. 아하! 감탄사가 그대로 나왔습니다. 어느 사이 걸음은 산으로 깊이 들었고 길도 가풀막 길에 들어섰습니다. 보이는 경관이 아름다워 놀라 절로 나오는 감탄이었습니다. 이러한 감탄은 점점 잦아졌고 놀라움은 더해 나갔습니다.
나도 산을 많이 다녔습니다. 이남 땅의 아름답다고 하는 산은 거의 다 다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계절마다 다녀서 몇 번을 다녔는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경관도 많아 보았습니다.
그래서 금강산이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고 그냥 경관이 빼어나게 좋은 데가 있어서 그렇겠지 라고만 생각하곤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곳 금강산을 와서 보고는 그 떳떳 미적지근한 생각이 그만 다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이건 산길을 가려면 발밑의 길을 봅니다. 그러다가 산을 우러러봅니다. 그러면 대개 좀 전에 본 경관이 연장되어 나옵니다. 골짝의 굽이를 돌거나 가파르게 오르거나 또는 내리거나 했을 때 새로운 경관이 펼쳐져, 아! 아름답구나! 라고 감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산은 그 차원을 넘는 것입니다. 발밑을 보면서 산길을 가다가 고개를 들 때마다 새로운 경관의 아름다움으로 아하! 라고 탄식을 내쏟아야 했습니다.
산천경계의 아름다움으로 금강산을 제일로 친다고 하는데 세상에서 이런 아름다움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금강산 이상으로 아름다운 산은 남녘땅에선 없다고 이미 알고 있지만 북녘 땅에서도 있다는 말을 들어본 즉은 없습니다. 아마 세계에서도 이처럼 아름다운 산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나라 밖에 산은 나가보지 못해서 단정해서 말은 못하지만 정말 있다는 말은 듣진 못했습니다.
이러한 산이 우리나라에게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나는 이번 금강산 기행으로 애국심이 곱절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금강산의노을 ⓒ안재구
보존의 아름다움
아무리 아름다운 산이라도 잘 보존하지 못하고 훼손한다면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산의 아름다움은 산세, 지세의 아름다움에다가 숲의 아름다움과 물의 아름다움 그리고 환경의 아름다움, 이 4가지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이 중에서 지세 또는 산세는 어쩌지는 못하지만 나머지 3가지, 즉 숲, 물, 환경은 사람들 손에 달렸습니다. 산세가 아무리 빼어나도 도로를 마구 내어 산허리를 마구 자르거나 골프장 같은 것을 멋대로 닦아 산세를 파괴한다면 이것도 사람에게 달려 있을 수 있습니다. 숲과 물 그리고 환경은 전적으로 사람의 작은 부주의에서 또는 무관심, 도덕심 결손에 따라 훼손될 수 있습니다.
자본을 산에 투자해서 이윤을 챙기는 데만 생각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기 땅에서 기업을 하는 데에 국가가 마구 간섭을 못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땅 가진 자들이 위락시설이나 골프장을 마구 내고 숲을 해치고 물을 해칩니다. 그래서 공해가 심각하고 산의 경관은 근본적으로 파괴되고 맙니다.
그리고 내 하나쯤이나 하는 생각으로 도덕심을 상실한 행동을 마구 합니다. 계곡에 쓰레기를 마구 버리고 대소변을 마구 보고 가래침을 뱉고 하면 산은 더러워지고 냄새가 등천을 하며 파리가 들끓습니다.
금강산은 철광석을 비롯한 비철금속자원의 보고라고 합니다. 질 좋은 방사성물질도 풍부하게 부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들 광물질을 채광한다고 개발하면 금강산의 산세는 달라지고 그 결과 아름다운 경관은 파괴됩니다. 금강산에는 어떤 광산도 없답니다. 일제 때 왜놈들이 금을 그리고 중석을 캐내기 위해 개발한 광산도 김일성 주석님의 금강산 보존정책으로 모두 없앴답니다.
숲도 금강산의 동식물을 모두 천연기념물로 하여 철저히 보호되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보다시피 금강산 전체를 금연지구로 만들어 산불예방을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쓰레기통을 아예 두지 않고 모든 쓰레기는 가지고 내려가기, 가래침도 뱉지 않기, 화장실(북측 말로 위생실)도 지극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있는 위생실도 유료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정리 마을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냇물을 그대로 마시고 있답니다. 보다시피 길바닥에는 오물 하나도 없고 계곡에는 병 또는 유리조각 하나 없는 청결한 산이었습니다.
아무리 단속을 하고 엄한 벌로 다스려도 사람들 모두가 지키려는 마음이 없으면 그 단속은 소용없게 됩니다. 그것은 단속이 아니라 교양으로, 나아가서 사상의식이 확립됨으로써 실천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북 공화국은 사회주의나라이고 더구나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원리로 철저히 관철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실천하는 집단주의가 관철되고 있는 나라입니다.
아름다운 금강산이 이처럼 철저히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김일성 주석님이 영도하는 조선로동당의 사람중심의 정책의 구현이며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 아래 인민의 집단주의적 도덕의 실천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금강산의 비경 ⓒ안재구
봉사대원들과의 대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것을 더욱 빛내고 있는 이북 동포의 집단주의적 도덕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면서 금수다리를 지나 또 만경다리를 건너 금강산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금강문’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는 조그마한 매대를 놓고 기념품과 사탕과 과자, 음료수를 팔고 있는 남녀 한 조로된 봉사대원을 만났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봉사대 선생, 참으로 반갑습니다. 우리는 남과 북 그리고 해외의 조선민족이 민족대단결을 토대로 해서 3자 연합으로 이루어진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남측본부 성원들입니다. 우리 ‘범민련’을 알고 있습니까.”
“반갑습니다, 선생님. 알다 뿐입니까. 이북에서도 ‘범민련’이라는 단체가 있지 않습니까. 선생님들, 그 사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습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금강산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렇게 인사를 텄고 나와 내 곁에 있는 우리 일행들과 한참 경관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 저 멀리 보이는 세존봉에서 흘러내려오는 연봉을 배경으로 해서 사진도 찍고 음료수도 사 마시고 땀을 식혔습니다.
바위가 포개어져 마름모꼴의 트인 바위굴을 나타났습니다. ‘금강문, 이랍니다. 이곳을 지나야 금강산이랍니다. 그 굴을 지나자 바로 아래에 흔들다리가 있었습니다. 거기부터 발아래에 연두색 유리와 같은 물결과 그것이 한 곳에 잠깐 머물러 옥색 담수가 된 청하고 소리가 날 듯 한데 그 맑은 물에 훨떡 벗고 그냥 물속에 들어가고픈 생각을 주저앉히고 앞으로 나아갔더니 계곡 한가운데 평지바위가 가로 놓여 있고 거기에는 청년봉사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우리 성원 중 몇 사람이 그들과 담소를 하고 있으면서 그들이 나를 보자 불렀습니다.
나는 그들 곁으로 갔습니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나를 소개했습니다.
“이 선생님은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교수였습니다. 그러다가 ‘남민전’ 사건으로 사형을 받았는데 세계가 알아주는 유명한 수학자라 세계 수학자들이 연판장을 만들어 항의해서 감형되어 무기징역을 살았습니다. 10년을 살고 가석방되었는데 ‘구국전위’사건으로 또 무기징역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5년 살고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쌍무기를 가지고 있는 통일운동의 지도자입니다.”
라고 장황하게 소개했습니다.
두 봉사대원 중 한 사람은 나이가 좀 들어보였는데 아마 이 구룡폭코스의 책임자인 듯 했습니다. 서로 반갑다는 인사를 마음으로부터 울어나게 했지만 예민한 말은 서로 삼갔으며 말없는 가운데 동포로서의 이해와 우리민족끼리 통일이라는 데서 서로 꼭 틈이 맞는 느낌을 주고받기만 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번 우리들은 금강산의 경관을 관광하는 것도 목적이지만 그밖에 60년이나 갈라져 서로 만나보지도 못했던 이북 동포들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가 모두 힘을 합쳐 통일운동을 열심히 해서 마음대로 오고가고 하는 하나의 조국을 이루어냅시다.”
“그럼요.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치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선생님 말씀대로 열심히 통일운동을 하겠습니다.”
제법 시간을 지내면서 대화하는 사이에 그의 말투는 어르신으로 되고 나는 잘 아는 동내 청년으로 착각하게 만들 지경이 되었습니다.
나는 다시 목적지 구룡폭포로 향해 일어나면서 말했습니다.
“옛날 내가 소년 때, 남조선단독선거를 반대하여 궐기한 2.7구국투쟁 후, 남조선인민유격대의 전신인 지방 야산대에 있을 때 우리 동지들은 서로 ‘동무’라고 불렀지. 이제 봉사대원인 청년을 만나니 그때 우리들이 불렀고 지금 여러분 사이에서 부르는 그 ‘동무’라는 호칭을 부르고 싶소. 어디 그렇게 불러봅시다.”
그는 몹시 송구한 듯 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봉사원 동무, 그럼 또 만납시다. 김정일 장군님을 잘 받드시고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통일의 그날을 보시도록 건강하게 오래 사십시오.”
나는 악수를 청하면서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의 얼굴이 희미했습니다. 내 눈망울에는 눈물 그득하게 고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좀 속도를 내었습니다. 다리를 하나 건너 담수가 연달은 연주담을 보면서 또 하나의 다리를 건너자 길 앞에 ‘관폭정’이라는 정자가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우리 일행이 있었고 사진을 찍고 찍어주곤 하면서 금강산의 경관에 흠뻑 취하고 있었습니다.
가맣게 높은 곳에서 수천년을 조금도 쉬지 않고 연주담으로 내려꽂히는 폭포가 시원한 물소리를 내면서 여전히 물기둥이 되어 아래 담수에 발을 담고 서 있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그래서 등정은 여기에서 마쳐야 했습니다. 구룡폭포 위에 있는 폭포의 수원인 상팔담에 가보는 일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급히 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왔습니다. 원래 오후 1시까지는 ‘목란관’에서 점심을 마쳐야 하는데 ‘목란관’에 도착하니 1시 반이 다 되었습니다. 오후에는 온천욕이나 삼일포ㆍ해금강 코스의 관광인데 너무 늦어 아예 포기하고 ‘목란관’에서 냉면을 시켜 먹곤 퍼져 예쁘장한 여성 봉사원과 나의 아내 사이에 재미있는 대화가 있었습니다.
나의 감옥살이 때 우리 가족이 친지, 일가친척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되어 살던 때를 이야기하자 그 봉사원은 눈에 눈물을 그렁하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아내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겼습니다. 그런 고난 속에서도 우리 가족은 건강하게 지냈고 아이들 모두 대학까지 졸업하고 모두 다 사회에서 당당하게 일하면서 살고 있으며 막내는 민족 21이라는 통일운동 잡지의 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소녀 봉사대원은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소망은 우리민족 전체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우리민족 전체가 선생님의 소망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아무쪼록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기 바랍니다. 통일은 바로 눈앞에 왔습니다. 건강하신 몸으로 통일의 그날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이 ‘목란관’의 여성 봉사원과 하직의 악수를 나누고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마지막 버스를 탔는데 신계사 앞에서 차를 세워 신계사를 방문했습니다.
신계사는 6.25전쟁 때 미군이 불 질러 태웠는데 이북의 불교단체와 이남의 조계종불교단체가 합의하여 사찰을 복원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대웅전을 지어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아직 단청도 되지 않았지만 부속건물 14동도 연이어 복원한다고 했습니다.
대웅전을 보고 절을 경비하는 봉사대원들이 있는 숙소에 가서 그들과 잠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통일운동을 서로 열심히 하자는 다짐을 하는 등 환담을 나눈 다음 시간이 없어 더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을 안고 버스를 타고 ‘온정각’ 주차장으로 내려왔습니다. 온천욕도 삼일포ㆍ해금강도 다 떠난 뒤였습니다.
그래서 ‘온정각’ 선물매점에서 이것저것 돌아보다가 간단히 땀을 씻고 4시 반부터 시작하는 ‘평양모란봉교예단’ 공연을 기다렸습니다.
△평양모란봉교예단 ⓒ안재구
평양모란봉교예단 공연
오후 2시 반 정각에 평양교예단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웅장한 ‘김정일 장군의 노래’ 반주를 배경음악으로 해서 교예단 전원이 나와 인사를 했습니다.
이북의 교예는 일제 때 곡마단의 교예가 아닌 곡예를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켜 인간의 능력을 예술적 재능과 그 훈련과 더불어 새로이 이북에서 창조한 하나의 예술적 장르인 것입니다.
일제 때 가난한 농민이 자식을 키울 힘이 없어 이리저리 자식을 남의 집이나 곡마단에 주어 보냈습니다. 그 어린 것이 굶주림과 학대를 받으면서 재주를 익혀 곡예를 배웠습니다. 때로는 관객들의 눈을 속이는 요술도 한 목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곡예를 옛날 봉건시대의 사당들의 재주와 비견했고 곡에를 천한 재주로 멸시했습니다.
그러자 8.15해방을 맞아 봉건적 잔재가 청산되고 사람이 사람을 직업이나 신분에 따라 천시하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직업을 차별해서 어떤 직업을 천시한다는 것을 금지한다고 해서 그냥 그 직업이 존중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직업이 존중되려면 그 직업이 인민들에게 고상한 풍모로 보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김일성 장군은 유랑하는 직업인 곡예사들을 모아 그들에게 일정한 주소를 가질 수 있게 상설교예극장을 지어주고 거기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주를 익히고 그 재주를 고상한 예술적 풍모를 가지도록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사상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재주는 날로 발달했고 그 풍모도 날로 고상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예술적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평양모란봉교예단 ⓒ안재구
이들의 곡예는 체육과 결합되어 이론화되었으며 음악과 연극 등 주변 예술과 결합되면서 그것은 마침내 일제 때 우리들이 보던 곡예하고는 전혀 다른 교예라는 예술로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지 높은 교예를 보고 다른 나라의 서커스단은 모두 이를 배워 그들도 곡예를 예술적 경지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지금은 러시아에서도, 중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동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교예단이 조직되고 모두 다 예술로 승화시켜 예술의 새로운 장르로 창조되고 있습니다.
조선은 사람을 가장 중히 하는 나라입니다. 과거 인명을 경시하던 곡예가 아니라 교예는 철저한 안전시설과 안전성의 확보가 최우선시되고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님의 지도로 창조된 교예의 예술을 보고 조선의 젊은이들의 교예의 지경을 텔레비전이나 영화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손에 잡힐 듯 한 거리에 관람하게 되어 이것만으로도 이번 관광은 온 값을 톡톡히 받는 셈입니다. 교예 자체에 대해서는 영화나 텔레비전으로 본 사람이 많고 내가 그것을 평가할 인식의 양도 모자라고 해서 말할 바가 아닌 것 같습니다.
교예공연을 관람하는 동안 내내 박수와 탄성으로 장내를 긴장했습니다. 보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모두 마음은 하나로 묶여 있는 듯 했습니다. 막간에 익살배우가 나와 관람자 중에서 한 사람을 이끌어내어 함께한 익살은 ‘빈민련’의 성원이라서 그런지 포장마차 주인답게 재치가 넘쳤습니다.
공연이 끝나도 공연을 하는 교예배우도 관람자도 서로 손을 잡고 떠나기가 아쉬운 듯 눈물을 글썽이면서 손을 놓을 줄 몰랐습니다.
“우리 다시 만나요.”
참으로 서로 목 매이는 모습이었습니다.
△평양모란봉교예단 ⓒ안재구
금강산 통일의 밤
교예공연 관람을 마치고 ‘온정각’의 식사를 마치고 오후 8시 반부터 구룡마을 가까이를 산책하다가 ‘정몽헌회장추모비’를 발견했습니다. 정몽헌 회장은 선친 정주영 회장의 그의 고향 이북 공화국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지고 조국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하는 일의 내용은 우리완 달라도 통일로 나아가는 목표는 같습니다. 민족적 정치적으로 하는 우리들의 통일운동이 피나는 탄압을 맞받아하는 일과 남과 북의 경제교류라는 방식으로 겨레를 아우르는 일을 하는 이들 두 부자의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통일대로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정주영 회장과 그 아들 정몽헌 회장의 남북경제교류의 운동을 무슨 ‘퍼주기’라면서 그리고 ‘외화불법유출’이라면서 ‘한나라당’과 통일운동을 적대시하고 법률조문을 글자로만 해석하는 소견 좁은 반동검사들의 구박은 정몽헌 회장으로 하여금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금강산특구일망정 이북 동포의 땅을 밟게 된 것은 이들의 노력의 대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고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명복을 빌었습니다. 우리는 조국의 이남 땅을 강점하고 있는 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기어이 우리 대에 조국통일을 이룩할 것을 다짐하고 이때까지 두 부자분이 이룬 공적에 대해 기리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금강산 통일의 밤 ⓒ안재구
밤 9시가 거의 다되어 통일의 밤이 열렸습니다. ‘통일OX알아맞추기’ 등으로 본행사전의 놀이에 이어, 본 행사로 들었고 우리들의 통일의지를 구호와 노래에 담아 금강산 하늘에 울려 퍼지도록 했습니다.
특히 이규재 의장님의 “오늘은 범민련 15년의 역사를 새로 쓰는 날입니다.”라는 연설은 합법화가 되던 안 되던 이미 ‘범민련’은 명실 공히 존재함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이어서
………
하나된 조국의 영광 기필코 이뤄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땅의 미국 놈 몰아내는 것
………
이라는 ‘범민련 찬가’, 우리의 의지를 금강산 하늘에서 미국 놈의 워싱턴으로 향해 외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본 행사를 마치고 뒤풀이 잔치로 모두 열심히 뛰고 굴렸습니다. 이어 ‘통일열차놀이’와 ‘대동놀이 한마당’으로 이어 갔습니다. ‘조국통일 만세! 범민련 만세’를 연호하면서 ‘금강산 통일의 밤’의 행사를 마쳤습니다. 범민련의 깃발은 시종일관 금강산의 밤하늘에 나부꼈습니다.
△금강산 통일의 밤 ⓒ안재구
마지막 밤이 아쉬워
'통일의 밤’ 행사를 마치고 술꾼들은 어제 밤에 술판을 벌렸던 온정각 옆 술가게 매장에 모였습니다. 나는 ‘진보정치’에서 일하는 분과 ‘새로운 통일전선운동문제’에 대한 토론 때문에 먼저 매장의 탁자에 앉아 술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토론은 쉽게 결속 짓게 되었고 그곳으로 온 젊은이들과 어울리게 되었으며 11시 패장의 시간도 훨씬 지나 패장시간을 거듭 연장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12시를 기하기로 하고 마지막 합창으로 ‘동지애의 노래’가 추천되었습니다. ‘동지애의 노래’의 노래는 언제 불러도 감동적인 노래입니다. 물론 이 노래는 매장의 이북 여성 봉사대원들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노래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동지애의 감정을 모아 노래를 불렀습니다. 북녘의 동지들은 지나온 그 노래가 지나온 역사였고 남녘의 우리들은 바로 역사를 창조하고 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장함은 다 함께입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통일을 못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자 눈물이 났고 노래는 억이 막혀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북녘의 여성봉사원 동지들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래는 2절까지 끝까지 불렀습니다.
남녘의 동지들이 부른 노래에 대해 답하는 북녘 여성 봉사대원들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노래는 ‘다시 만납시다’였습니다. 처음은 북녘 여성봉사대원들의 합창이었다가 노래가 진행되어가자 점점 합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마침내 3절에 접어들자 남녀 대합창으로 되었으며, 마지막 장인 ‘목메어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는 메아리가 되어 금강산 밤하늘에 울려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모두 일어났고 젊은이들은 식탁 위에 있는 술잔 안주접시들을 챙기고 식탁을 닦으며 의자를 모아 재곤 하면서 북녘 봉사대원들의 일을 거들었습니다. 정말로 보기 좋은 정경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바로 이미 통일이 다 된 것이었습니다.
구룡마을 숙소에 갔더니 편이점도 이미 패점한 후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여흥을 못 잊은 우리들은 매점 앞에 놓인 탁자에 둘러앉아 어디서 구해왔는지 술잔을 서로 교환하면서 짧은 여름밤이 아쉬운지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술김에 한 이야기라서 그런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밤은 깊어가는 지경을 넘어 새벽이 가까워지는 새벽 2시가 지났습니다. 이제 씻고 들어가서 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