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한국에서 요란하게 출범한 예금실명제가 공명사회를 만드는 결정적 제도인 것처럼 홍보됐지만 당시에 나는 의아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려면 수표실명제를 해야지 예금실명제가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난리법석을 피우는가 싶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금실명제가 금융거래의 투명성에 기여를 한 것 같지만 사실 알고보면 알맹이 없는 풍선이었다. 실명제가 실시되었지만 한국에서는 돈세탁을 ‘트럭’ 단위로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최근에 증명되었다.
캐나다에는 예금실명제 없어도 깨끗한 사회를 잘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친목회 회계를 맡고 있는데 회비를 은행에 맡기려고 ‘Seoul Club’이라는 구좌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 예금주인 나의 신분증명과 주소 등을 확인하고 신청한대로 구좌를 만들어 준다. 돈 주인의 신원과 실명을 관리하면 그만이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천문학적 숫자의 뇌물들이 전국을 제한없이 날아다니고 있는데, 돈 세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돈 세탁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자기앞수표 라는 무기명(비실명) 예금이 있기 때문이다.
은행에서는 자기앞수표를 발행할 때 그 돈을 ‘별단예금’ 구좌에 넣게 되는데 그 예금을 찾아갈 사람을 무기명으로 발행하기 때문에 자기앞수표는 비실명 예금증서가 되는 것이다. 원래 수표에는 발행인(예금주), 수취인, 지급인의 세 당사자가 있게 마련인데 한국의 자기앞수표는 발행자와 지급인이 동일인이고 수취인은 무기명이니 실질적으로 기명된 당사자는 한 사람뿐이다. 이처럼 익명성과 돈세탁이 보장되는 수표제도를 두고서 깨끗한 사회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캐나다에서 발행되는 모든 수표에는 수취인 이름이 반드시 기입되어야 하고 은행에서 발행하는 머니오더(Money Order. 자기앞수표에 해당)에도 물론 수취인 이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표를 받은 수취인은 그 수표를 자신의 예금구좌에 넣어야 되고, 결국 돈이 누구의 구좌에서 누구의 구좌로 건너갔는지 명확한 기록이 남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실명거래이고, 금융거래의 투명성이란 것이다. 캐나다처럼 고액 현금거래를 통제하고 기명식 수표만 사용하게 하면 돈세탁을 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한국의 자기앞수표는 10만원짜리로 한번에 수백, 수천매씩 무기명으로 발행된다. 고액권 현금과 다를 것이 없다. 10만원권 화폐처럼 식당에서 밥값으로 내기도 하고, 술집에 가서 아가씨 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원칙적으로는 한 다리 건너갈 때마다 이름, 주민등록번호 적어야 하지만 그런 바보 같은 짓거리를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기분좋게 술 마시고 팁, 주면서 사장님이 쭈그리고 앉아서 주민등록번호 적고 있으면, 궁상맞은 짓 좀 그만하라고 마담한테 야단맞고 쫓겨나게 된다. 또 웬만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월급 말고 어떻게 해서 생긴 자기앞수표를 가끔 부인에게 몇 장씩 전달해 주어야 생활이 유지되도록 되어 있다.
자기앞수표는 몇 다리를 건너서 돌아다니다가 대개 한달 이내에 발행된 은행으로 돌아가는데 분실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이상 중간 유통과정을 문제삼지 않는다. 이처럼 돈세탁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열어놓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자고 난리법석을 치는 모습을 보면, 참 해괴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명사회를 만들자고 떠드는 사람들도 사실은 ‘무기명 자기앞수표’가 꼭 필요하기 때문에 누구도 그걸 없애자는 말을 꺼내지는 못하는 위선으로 가득찬 사회, 밖에서 바라보는 우리의 가슴이 이렇게 아픈 줄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알기나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