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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스크랩 주상절리가 빼어난 광주 무등산 규봉암(제1부)
현림 추천 0 조회 124 17.11.07 21: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주상절리가 빼어난 광주 무등산 규봉암(1)


@무등산의 주봉은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하는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으로 불리는 3개의 봉우리로 이어져 있다.

규봉(奎峰)은 무등산 정상인 천왕봉에서 동남쪽으로 300m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1,100m에 이른다.

규봉암(奎峰庵)은 규봉에서부터 남동쪽에 이르는 능선의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상부에서 약 900m, 규봉에서 약 600m에 이른다.

규봉은 1872채색 지도에도 무등산 정상부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로 표시되어 있다.

규봉암은 행정 구역으로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에 위치한다.

예로부터 규봉암을 말하지 않고서는

무등산을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무등산의 또 다른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규봉암의 역사와 위치]

규봉암에 대한 기록은 신라 시대에 의상 대사가 서석과 규봉을 보고 정사(精舍)를 세웠다고 한 것이 최초이다.

조선 초기 문신 권극화는 광산(光山)의 진산을 무등산 혹은 서석산이라고 하는데,

그 형세가 웅장하여 모든 산에 비길 바가 아니다. 산 동쪽에 암자가 있어 이를 규암(圭庵)이라 하고

그 곁에 서석(瑞石)이 겹겹이 서 있는데

옛날 의상 대사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비로소 정사(精舍)를 세웠고,

그 후 보조국사와 진각선사가 이곳에서 수행했다고 전한다.

이후 제대로 절의 모습을 갖추어 창건하기는 798(신라 원성왕 14)

당에서 귀국한 순응 대사였다고 전하고 있다.


 

권극화가 언급한 규봉암은 암자와 함께 있는 서석(瑞石)을 통틀어 이야기 하고 있다.

규봉에 있는 암자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 창건되고, 폐사되었다가 재건되고,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지만,

규봉암의 서석은 오랜 세월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규봉 일대의 서석은 입석대, 서석대, 광석대로 대표되는 무등산의 주상 절리 지형이다.

무등산의 주상 절리 지형은 암괴가 크고 장엄하며,

암괴가 층층이 단을 이루어 마치 병풍과 같은 모습을 갖는다.

그 중에 규봉암은 사찰 뒤 서석을 광석대로 불리며

다양한 주상 절리대가 주변의 식생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계절마다 그 색을 다양하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규봉암에 오르는 길은 광주시 무등산국립공원 증심사 지구에서나

원효사 지구의 탐방로를 주로 이용하는데 가장 빠른 코스는 화순 이서면 영평리 장복동 마을

도원탐방지원센터에서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 길이다.

도원탐방지원센터에서 규봉암까지 거리는 1.8km에 불과하다.



다만 이곳 지리에 익숙치 못한 초행자라면 도원탐방지원센터 가는 길이

농로(農路)라서 길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네비에만 의존했다가는 농로길이라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쉽상이고 

 또 안내판이나 마을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려워 길을 물어볼 수도 없어

들머리 근처에서 헤매게 된다는 점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현지 주민들의 협조를 받는 것인데

 이서면 우체국 앞 맞은편에 <뽕잎칼국수 식당>이 있는데

식사를 하고 그 식당 주인에게 협조를 구하면 친절하게도

탐방지원센터까지 길안내를 받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규봉암 일주문


서석(瑞石)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이렇게 조성해 놓았다.




돌계단을 올라서면 장엄한 규봉암이 나타난다. 좌측에는 관음불을, 전각은 삼성각 그 옆으로 본당격인 관음전이 있다.




















@규봉암에 대한 창건연대가 확실하게 전하는 문헌이 없고

다만 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순응대사가 중창했다고 전해지며

혹은 고려초 도선국사, 보조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절에 신라의 명필 김생(711791)이 쓴 규봉암의 현판이 전해 오다가 절취당했다고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고려 말에 왜적들과 전투를 벌였던 격전의 현장이기도 한데

이성계가 전북 황산대첩에 나가 왜적과 싸우다가,

규봉암으로 도망친 왜군 폐잔병 12명을 생포했다는 기록도 있다.

1739320일에 쓴 규봉암 상량문이 발견되어 당시에 규봉암을 재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지도서(1759)에 의하면 폐찰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로보면 규봉암이 그리 크게 증축되지 않았거나 다시 폐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에 6. 25 동란으로 사찰이 불에 타 10여년간 폐허가 되었다.

1957년 관음전과 요사채를 지어 복구하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규봉암 옆에 있는 하늘을 찌를 듯한 기암괴석 광석대는 입석대,서석대와 더불어 무등산 3대 석경(石景)으로 꼽힌다.







관음전은 규봉암에서 본당인 대웅전격이다.




관음전 안은 관음보살 한분만 모시고 있다.


관음불 옆에는 두개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인 신중탱이다.


다른 하나는 이 탱화인데 영산회산탱인듯 하다.













규봉사(圭峯寺)/ 규봉사에서/김극기

궤상고난명(詭狀苦難名) 괴상한 모양 무엇이라 이름하기 어려운데

등림만상평(登臨萬象平) 올라와 보니 세상이 눈 아래에 있네

석형재금출(石形裁錦出) 돌 모양은 비단을 잘라 만든 것 같고

봉세탁규성(峯勢琢圭成) 산 형세는 옥을 깎아 이룬 것 같네

승천병진적(勝踐屛塵迹) 좋은 곳에 오니 세속의 더러움 끊었고

유서첨도정(幽棲添道情) 그윽이 사니 도정이 더하네

하당포차망(何當抛此網) 어찌 세상 일 버리고

부좌학무생(趺坐學無生) 부좌하여 무생불법을 배우지 않으리.

~동국여지승람40~





삼성각


정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모신 칠성탱이다


독성(나반존자)


산신









@무등산 주상 절리대의 생성과 특징

무등산 주상 절리대의 특징은 정상부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발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5~6각의 형태를 가지며, 수정 기둥과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암괴의 크기는 위치마다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입석대, 서석대 일대의 암괴가 1~2m 내외 두께에

m의 크기를 갖지만, 규봉암 일대의 암괴는 5~7m의 두께로 수m의 암괴가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주상 절리는 현무암질에서 나타나지만, 무등산의 주상 절리는 생성 원인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규봉암 일대 주상 절리 지형의 특징은 첫째 기존 주상 절리 지형과는 다른 암질을 가지고 있다.

규봉암의 암질은 무등산 석영 안산질 응회암으로 매우 뜨거운 화산재들이

수백m 두께로 쌓여 있다가 암석과 같이 굳어지고, 이후 치밀한 안산암질로 재결정된 암질이다.

이 응회암은 약 8300만 년 전에 분출된 이후 천천히 식혀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다른 지역이 급속하게 식혀져 암괴의 크기가 수십인 것이 주를 이루는 반면에

규봉암의 경우에는 수m~수십m에 해당하는 암괴가 나타나는 주요한 이유가 된다.




규봉암의 경우에 높이 960m 높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암괴 지역의 폭이 130m, 기둥의 높이가 20~30m, 경사 각도는 80~90°를 유지하고 있다.

규봉암 암괴의 형태는 5~6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한 면의 길이는 1.5~2.2m 사이이고, 직경은 3m,

암괴 기둥의 높이는 2~10m로 다양하나 주로 7~8m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암괴의 크기의 차이는 암질에 따른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특징은 주상 절리대의 생성 과정이나 성인이 다르다.

 제주도는 파랑의 해식 작용에 의하여 현재의 해안에 드러난 주상 절리로

성인이나 생성 과정이 비교적 간단하다.

그에 비하면 무등산의 규봉암은 수천만 년 전에 이루어진 후

다양한 지구의 기후 환경 변화 과정을 겪으면서

독특한 생성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지형이다.

무등산의 규봉암의 암질이 무등산 안산암질 응회암이라는 것은

화산 활동이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주상 절리의 지형적인 특징은 기나긴 지질 시대에서

 최근에 어떤 기후 환경에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실제로 규봉암도 신생대 4기에 동안에 동결 융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무등산의 규봉암의 주상 절리는 동결과 융해가 반복되면서

기둥 모양의 암괴들이 떨어져 나와 토양 속에 묻히어 경사면을 따라 이동하였다.

이에 따라 암괴가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주상 절리대는 점차 후퇴하였고 현재의 위치에서 남아 있게 되었다.







광석대(廣石臺)[광석대에서][김창흡]

무수기봉렬(無數奇峯列) 무수한 기이한 봉우리 열 지어 있어

회간유차대(回看有此臺) 고개 돌리니 바로 광석대로구나.

식피사적의(息疲斯適矣) 피로 풀기에 적당하고

연상경유재(延賞更悠哉) 구경하기 또한 문득 유유하네.

후세단제단(後勢丹梯斷) 붉은 계단 끊어진 뒤 기세와

전도적벽개(前途赤壁開) 붉은 벼랑 열린 앞 길이라

관기선적근(觀?禪跡近) 바둑 두는 신선의 자취 가까이서 본 듯하여

부좌욕망회(趺坐欲忘?) 가부좌하고 않아 돌아갈 마음 잊었네

도선관기처거차불원(道詵觀?處距此不遠) 도선 국사가 보았다는

바둑 둔 곳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삼연집 습유(三淵集拾遺). 10~




규봉암 주지스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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