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은 추우면 홰로 올라가고 오리는 추우면 물로 들어간다.”
사람은 추우면 따듯한 난로 옆으로 가고 싶고
따듯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싶은데
동물인들 다를 바 있겠는가?
그런데 닭은 추우면 홰로 올라간다고?
아니, 그 홰가 무슨 태양광 스마트 벤치인가? 홰로 올라가게.
오리는 추우면 물로 들어간다고. 강물이 무슨 온탕인가?
이열치열(以熱治熱) 하는 것도 아닌데, 냉탕에 왜 들어가?
살다 보면 불운이 닥칠 때가 있다.
연륜이 든 노인들을 찾아가면 으레 이런 말을 한다.
“다 지나가는 바람이야, 그냥 생긴 대로 살게나”
팔자대로 살다 가라는 말이다.
팔자소관으로 여기고 참고 살라는 의미다.
이게 위로의 말인지 비아냥거림인지 맴이 썩 개운치 않다.
오늘도 어제같이 중랑천 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겨울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지만
늘 습관처럼 산책하는 길이라 그냥 무심히 걸었다.
초겨울 날씨에 비까지 뿌리니 더 살살한 감이 든다.
중랑천에는 많은 새들이 모여든다. 기후변화 탓인지
이제는 텃새, 철새구별도 모호해졌다.
터줏대감인 참새와 비둘기는 그렇다 치고
왜가리 백로, 청둥오리와 비오리, 가마우지 등
중랑천 강변을 걷다 보면 쉽게 볼 수 있는 새들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백로 한 마리가
한쪽 강변에 우두커니 서 있다.
비도 내리고 날이 차서 그런지
먹잇감을 못 찾은 모양이다.
비 내리는 강변에 홀로 멀거니 서 있는 꼴이
처량하기까지 보였다.
그런데 강변 맞은 편 오리들은
여유롭게 즐기며 자맥질하고 있다.
늘 물속에만 노는 놈들이라 비가 오던 말던 개의치 않는다.
날이 춥던, 덥던 이놈들은 개의치 않는다.
한참 무심히 바라보는데
문득 “순연(順緣)”이란 말이 떠올랐다.
“닭은 추우면 홰로 올라가고
오리는 추우면 물로 들어간다.”라는 말의 의미가
마치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본 듯 선명하게 뇌리를 비춘다.
“아 하, 이것이 바로 그 말이구나.
닭은 추우면 홰로 올라가고
오리는 추우면 물로 들어간다”라는 말이.
세상의 물결을 거슬리지 않고
물이 흘러가듯 순리(順理)대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무위(無爲)의 삶을 살라는 의미다.
그러나 무위의 삶이라고 해서
죽음까지도 벗어난다는 그런 말이 아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피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느 선승(禪僧)이 이런 말을 했다.
“도를 깨친들 인연불락(因緣不落)은 없다.
인연불매(因緣不昧)의 마음으로 살라”라고.
하늘 아래 살면서 팔자소관으로 돌리고
거기에 매여 벗어나지 못한다면 응보(應報)가 괴롭다.
그러나 팔자소관이 희든 검든 그것에 매이지 않는다면
마음이 무심해 지니 설령 지옥에 가더라도
고통은 없다는 것이다. 인연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것으로 인한 보(報)는 순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하늘처럼 사는 것이 인연불매인 것이다.
하늘을 보자. 봄이 오면 새들은 노래하고,
꽃들의 향기는 바람을 타고 퍼진다.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온다. 비가 오고 눈이 온다.
천둥번개가 치고, 우박이 쏟아지기도 한다.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는 하늘 아래에서 일어난다.
하늘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늘은 이 모든 변화에 물들지 않는다.
물들거나 때 묻지 않는다.
하늘이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늘은 깊고 멀리 있다.
하늘은 어디에나 있으면서
그 현존(現存)과 멀리 떨어져 있다.
모든 곳에 충만해 있으면서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하늘처럼 사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천국이 아니라 사바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 또한 사람이기에 배고픔과 포만을 겪는다.
무더운 여름이 오면 그늘을 찾고
추운 겨울이면 두꺼운 옷을 입고 살아간다.
좋은 날도 오고 나쁜 날도 온다.
우쭐대고 싶도록 행복한 날도 있고,
죽고 싶어질 정도로 괴로운 날도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왔다가는 가버리지만, 그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해도 그는 마치 거울에 비치는
사물을 단지 <지켜보는 자>처럼 주시할 뿐이다.
덧칠하지 않고 그것들을 보고 있을 뿐이다.
거울에 비치는 영상처럼 그대로 세상을 보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잠깐 왔다가는 가버리기 때문이다.
하늘은 구름이 끼어도, 날이 맑아도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비난하지도 않고, 시기하지도 않는다.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것,
절대고독의 한가운데에 우뚝 선 자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이런 자를 수행자라고 하고
또 구도자라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보살이라 한다.
바보라고 불러도 좋고 천재라 불러도 좋다.
무어라 불러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행동이다. 삶의 방향이다.
부정이 아니라 수용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란 말처럼 삶의 모든 것을 수용한다면
지옥과 천당이 다르겠는가. 그것이 인연불매의 삶이다.
인연불매로 살수 있다면 삶은 그것으로 충분(足)하지 않은가.
백조와 오리를 보자.
백조는 몸에 비하여 큰 날개와 긴 다리를 가지고 있다.
하늘 높이 비상할 때는
그렇게 우아하고 자연스럽고 멋질 수 없는데
먹이 사냥을 할 때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자맥질은 하지 않는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오로지
태어난 그대로 긴 다리와 긴 부리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그러나 백조와 달리 오리는 몸에 비하여 날개가 크지 않다.
그래서 높이 날지 못한다. 수면을 따라 뒤뚱뒤뚱 나는 꼴이
우습게 보인다. 그러나 자맥질만큼은 능수능란하다.
그러나 백조는 오리의 자맥질을 부러워하지 않고
높이 날지 못하는 오리는 백조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시기심이 발동하여 영역 싸움도 하지 않는다.
비교하지도 않고 잘났다고 우쭐대지도 않는다.
백로도 오리도 주어진 삶 그대로 수용하고 살고 있다.
가마우지란 놈은 백로와 이웃사촌이다.
백로는 우아하게 마치 눈이 날릴 듯
흰 날개로 하늘을 날지만
가마우지는 온몸이 연탄처럼 검어서
백로처럼 창공을 날지만
백로처럼 그런 우아한 멋은 없다. 그러나 오리보다 더 오래
더 깊이 자맥질을 할 수 있지만 우쭐대지도 않고
백로의 흰 빛을 시기하지도 않는다.
백조와 왜가리 그리고 오리들은 각자 타고난 그대로
열등의식이나 우월성을 따지고 않고
각자 태어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같은 강변에 살지만 자기의 영역을 고집하지 않는다.
각자 타고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처럼 나와 너를 금을 그어놓고 살지도 않고,
<나>다, <내 것>이다 하고 욕심부리지도 않는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태어난 그대로 거슬리지 않고
수용하는 삶을 즐기는 것이다.
그것이 순연의 삶이다.
삼국지를 보면 재미난 이야기 많이 나온다.
천문 지리에 달통하고 책사이며 전쟁의 귀재라는 불리는
촉의 재상 제갈량이 라이벌 사마의와의 마지막 전투를 한다.
백전백승의 귀재이지만 오장원 전투에서
위나라 사마의 군대를 화공으로 몰살 직전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천문 지리에 달통한 제갈량도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로 화공이 실패하자 한탄하며 외친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완성시켜 주는 것은 하늘이구나"라고.
천문 지리에 아무리 총명하다고 해도
이는 인간의 지식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식을 분별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총명이 뛰어나다고 한들
어찌 하늘의 순리를 이길 수 있겠는가.
순연이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무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무위는 명자상으로 들어낼 수 없기에
무어라 정의할 수가 없다.
뿌리를 자르지 않으면 가지를 쳐도 잎은 무성히 다시 나온다.
우리 마음의 모든 지식의 뿌리는 땅속에 숨은 나무뿌리와 같다.
그래서 뿌리를 잘라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팔자소관을 탓하고, 운명을 탓하는 것은
타고난 성품 그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고난 그대로가 아니고, 자기가 바라는 쪽으로
그리고 싶은 대로 덧칠을 가하기 때문이다.
사념(思念)으로 덧칠하기에 탁(濁)해지는 것이다.
욕망, 야심, 어리석은 생각으로 덧칠을 가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어떤 이미지가 눈에 들어오면
깊은 의식의 창고에서 비슷한 것을 찾아낸다.
그것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면
명자상(名字相)이 떠오른다.
명자상이 떠오르면 바로 분별이 시작된다.
같은 보름달이라도 신혼 때 보는 기분과
미망인 되어 보는 달이 같이 보이겠는가?
말이 갖는 이미지를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덧칠이 시작된다.
감정(受)이라는 놈이 슬며시 들어와
좋다, 나쁘다. 즐겁다, 괴롭다, 옳다 그르다 하는 느낌을
옛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고 보라는 듯이
거들기 시작한다. 좋으면 취하고 싫으면 버린다.
숨어 있던 옛 기억이 크게 한몫한다.
이것저것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苦와 樂으로 갈라져
집착하게 된다. 이것이 고통이요, 불행의 시작이다.
생사고락(生死苦樂) 업(業)의 고리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삶을 운명이니 팔자소관으로 탓하지 말고 살자.
태어난 그대로 살면 된다. 비난할 것도 후회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삶이란 달리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삶이란 존재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목적이 있다는 것은 덧칠하는 것이다.
태어난 그대로 살아야 한다.
삶을 덧칠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
불교가 말하는 평상심이란 이런 삶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 그대로, 태어난 그대로, 덧칠하지 않고 산다면
바라고 찾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마음에 비친 영상을 따라 덧칠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
닭은 추우면 홰로 올라가고
오리는 추우면 물로 들어가듯
생긴대도 살다 가야 한다. 그렇게 살면 불 속에서도
연꽃이 핀다고 선승(禪僧)들이 말하지 않는가.
『不離當處常湛然(불리당처상담연)
火裏蓮華處處開(화리연화처처개).』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