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으로 빚은 <그 흙>, 설치미술의 극치를 보다
본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무의식적 갈망
임옥상 특별전-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2.10.21.-2023.3.12
경복궁 옆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서울)에서는 지금 임옥상 화가의 특별전시가 열리고 있다. 2022.10.21.-2023.3.12.까지 무려 5개월 가까이 전시되는 그의 전시는 한마디로 ‘설치미술의 극치’이며, ‘직관과 은유의 심오한 결합’이다.
<임옥상-여기, 일어서는 땅>은 한국 현대미술 작가 임옥상의 대규모 설치 프로젝트 중 주옥같은 결정체들을 모아놓은 귀한 전시이다. 임옥상 작가는 민중예술과 한국 리얼리즘 미술 흐름을 이끌어가는 대표적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우리는 리얼리즘 미술에서 출발, 대지미술, 환경미술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작업영역을 넓힌 임옥상의 과거와 현재를 주목한다. 국립 현대미술관 내 장소특정적 조건과 상황을 활용하여 새롭게 선보이는 작업들과 그에 연관된 주요작들은 작가의 예술세계 본질을 보다 확장된 맥락에서 읽어내게 한다.
먼저 제 6전시실에 들어서면 표면이 흙으로 빚어진 설치작품 <흙의 소리>(2022)를 만나게 된다. 관람객들은 3.9m X 4.8m크기의 거대한 입체작품에 압도 당하고 만다. 인간의 머리가 옆으로 누워 있는 듯한 형상, 마치 대형 와불(臥佛)을 보는 듯 하다. <흙의 소리> 작품은 한 쪽에 입구가 있어 그 거대한 인간의 머리 속으로 관객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동굴과도 같이 다소 어두운 공간에서 관객들은 대지의 어머니가 내는 숨소리를 느낄 수 있다. 안과 밖, 빛과 어둠, 소리와 침묵 그리고 이를 경험하는 관객의 신체적 움직임은 다시 깊은 지하공간으로 이끄는 계단이라는 특정적 공간상황을 통해 이어진다.
전시실 내 계단을 내려가 그 끝에서 마주한 긴 복도 공간에는 작가의 또 다른 주요재료인 ‘철’로 만들어진 <산수>(2011)가 자리하고 있다.
무려 9m 길이, 폭 2.7m 크기의 <산수>작품은 금속세공업자와도 같이 섬세한 감각으로 그려낸 듯한 입체작품이다. 코르텐스틸이라는 철물을 재단하여 만든 이 작품은 전통적인 수묵산수에서 볼 법한 형상을 띠고 있다.
<산수> 작품 공간을 지나 옆방으로 들어서면 드디어 이번 전시의 하일라이트인 <여기, 일어서는 땅>(2022)을 만나게 된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신작인 가로 12m,세로 12m 높이의 대규모 설치작업 <여기, 일어서는 땅>(2022)을 전시의 중심에 놓고 이를 둘러싼 서사를 위해 6전시실과 7전시실 그리고 전시마당에 그의 초기 회화와 최근작을 ‘깍지 끼듯’ 마주 이어 구성했다. 거대한 전시장 벽면을 단 한 작품으로 덮은 <여기, 일어서는 땅>을 보는 순간 관람객들은 그 웅장함과 신비로움에 말문을 잃는다. 어떻게 이런 대작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이게 건축인가, 조각인가? 아니면 미술인가 마술인가?
작가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작년 3월 논 위에 작업을 거의 다 해놨는데 갑자기 수일간 폭우가 쏟아졌어요. 그간의 노력이 헛수고가 됐죠. 땅이 바짝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재작업해야 했어요. 이 작업은 엄청난 먼지와의 싸움이에요. 힘도 많이 들죠. 2×2m 크기의 흙판 총 36개를 이어붙여 완성한 것인데, 흙판 1개의 무게가 30㎏이에요. 논바닥에서 떼어낼 때는 50㎏ 느낌이죠. 혼자서는 불가능해 인부 세 명을 썼는데, 일이 끝난 후 내게 ‘앞으로는 그림 나른다고 하지 말라’고 부탁하더라고요. 너무 힘겨웠던 거죠.”라고 말한다.
벽 위에는 다양한 형상들이 흙으로 빚어진 듯 자리하고 있다. 사람, 동물, 식물, 인공물, 기호 등이 나열되어 있어 문화적, 정치사회적 맥락을 충분히 가늠하게 한다. 더 즉자적인 차원에서 다가오는 것은 흙의 빛깔이고 질감이다. <여기, 일어서는 땅>은 재료나 의미에 있어 매우 근원적인 지점에 닿아 있다. 즉, 장단평야 논에서 떠온 흙은 추수 후 땅의 상황을 그대로 담고 있다. 베고 남은 볏단의 아래 둥치, 농부와 농기계가 밟고 지나간 자국, 논에 내려앉은 이름 모를 생물들의 흔적, 그리고 여전히 배어 있는 땅 냄새, 숨 냄새 등이 원초적인 무의식을 깊숙이 건드리는 듯 하다.
그런가 하면 바닥에 펼쳐져 있어야 마땅한 땅이 수직으로 높이 서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작품에 대한 경험이 직관적인 동시에 관념적으로 혼재하여 다가온다는 점에서 중첩된 의미들이 땅의 표면을 휘덮고 있는 듯 하다. 미술에 비전문가인 필자가 보기에도 설치미술의 극치, 무한경지를 보여주는 대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어 다음 방은 설치미술이 아닌 회화적 작품들의 전시 룸이다. <임옥상: 여기, 일어서는 땅>은 장단평야에서 떠낸 ‘흙’에서 시작되었다. 이 흙은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1976년 작 <웅덩이>를 소환한다. 그리고 2021년 <무극백록>, <무극천지>를 마주하게 하고,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마당의 현장 설치작 <검은 웅덩이>와 교차한다.
우선 임옥상이 처음 작가활동을 시작할 즈음, 물, 불, 흙, 철, 대기 등의 물질적 요소들은 작품 소재로 자주 등장했다. 작가는 어린 시절 들판 저 멀리 보였던 불의 형상을 잊을 수 없었고, 청년 시절에는 들과 산으로 들어가 직접 자신의 신체로 자연과 접촉하고 호흡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임옥상의 제 1회 개인전은 <웅덩이>, <나무1>(1978), <들불2>(1981), <땅Ⅱ>(1981) 등의 작품처럼 흙, 땅, 논밭, 대기, 나무 등의 자연을 유화로 그려냈다. ‘은유적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이 타당한 이 시기 작품들에서 자연풍경은 인위적 힘에 의한 변경, 왜곡을 겪고 있다.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해당 작품과 마주하면 이들이 내포한 의미를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제7전시실에 재소환된 작가의 제1회 개인전과 그 시기 작품들은 물리적으로 그 사이 사이를 움직이며 걸어다니는 관객의 신체적 행위를 통해 비로소 의미가 더해지고 채워진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어느 새 작가의 최근 그림들을 마주하게 된다. 2010년대 작가는 캔버스 위에 흙을 덧발라 채우고 그 위에 유화물감, 먹물 등을 혼합하여 형상을 그려냈다. 그 형상들은 작가의 신체적 행위 자체를 반영하기도 하고, 상당히 구상적인 산수(山水)풍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유화의 기름에 대한 불편함을 벗어던지고 , 더 잘 소통하기 위한 재료탐구과정에서 1990년대 작가는 한지를 발견했다. 종이가 되기 이전의 펄프상태는 작가를 매료시켰다. 임옥상은 종이를 이용하여 부조를 제작하고 그 위에 물감을 덧바르거나, 종이부조를 거푸집 삼아 흙을 떠내는 등의 작업을 상당기간 지속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1983년 작 <새>, <귀로>, 1997년 작 <정안수>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섬세하기 그지없어 다루기가 매우 까다롭고 힘으로 제압되지않는 등 한지가 가진 특성으로 말미암아 작가는 상당한 내적 인내와 절제를 배웠다고 말한다.
<흙 D1>(2018), <4.3레퀴엠>(2018), <북한산에 기대 살다>(2020), <봄>(2022), <흘리다>(2022) 등 2010년대 회화는 종이 부조작업을 지나오면서 귀결된 재료탐구과정의 현재이다. 흙은 이미 작가 초기 회화에서부터 나오는 핵심 모티브이다. 그러나 지금의 흙은 구상이기도 하고 추상이기도 하다. 서사가 보이나 서사의 구조는 지속적으로 재배치된다. 모호하지 않지만 의미가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 흙으로 지은 산수풍경은 그럼에도 다시 사회풍경과 오버랩된다. 이제 의미는 화면 속 풍경과 이를 마주하는 관객 사이에서 매번 다르게 증식한다.
임옥상 작가는 1950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나 용산고와 서울대학교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앙굴렘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79년부터 13년 동안 광주교육대학교와 전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민족미술협의회 대표를 역임했다.
첫 개인전은 1981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한바람>이란 제목으로 개최되었고, 이후 1988년 ,아프리카 현대사>, 1991년 ,임옥상 회화 초대전>, 1995년 <일어서는 땅>, 2011년 <토탈 아트:물, 불, 철, 살, 흙>, 2017년 <바람일다> 등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다. 1990년대 들어서는 1993년 퀸즈랜드 트리엔날레,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 2004년 2010년 베이징 비엔날레 등 주요 국제미술행사들에 초대되었다.
작가는 1990년대 중반 이후 ‘미술관 밖’ 미술실천 차원의 참여프로그램, 이벤트, 설치, 퍼포먼스 등을 다수 기획, 진행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공공미술 공공프로그램 등을 통해 소통의 계기를 구체화했다. 근래 민통선 내 통일촌 장단평야의 실제 논에서 ‘예술이 흙이 되는’ 형식을 빌려 일종의 환경미술 혹은 대지미술, 현장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이는 작가의 오랜 인생관, 예술관이 복합적으로 엮여 펼쳐진 실천의 장이라 할 수 있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전시되지않았지만 2017년부터 청와대 본관 로비에 전시된 그의 작품 <광장에, 서>(가나아트 제공)는 촛불집회 현장의 감동적 장면들과 SNS에 무수히 올라온 생생한 시위 기록사진들을 회화적으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해 30호 캔버스 108개를 연결해 흙을 물감 삼아 완성했다. 이 작품은 크기가 무려 가로 16.2m, 세로 3.6m에 이르는 대작이다.
임옥상 작가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변화를 멈추는 순간 죽은 목숨”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스펙트럼이 넓다. 1995년 이후 회화에 국한하지 않고 조각과 설치미술로 표현영역을 넓혔다. 소재도 흙 뿐 아니라 나무, 쇠, 철로 확장했다. 공간도 거리로, 광장으로 확대됐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전국이 들끓던 2016년 겨울에는 주말마다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을 찾았다. 그곳에서 대작 <광장에, 서>(2017)를 완성했다.
- <광장에, 서>작품은 2017년부터 청와대 본관 로비에 걸렸어요. 작가로서 굉장히 힘든 결정이었어요. 수락 후 바로 후회했죠. 권력의 가장 핵심에 작품이 걸린다는 것 자체로 어떤 프레임에 갇힐 수 있으니까요. 나는 특정 대통령이나 당을 지지하지 않아요. 그런데 청와대에 그림이 걸리는 순간 사람들은 나를 이른바 ‘문빠’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 2016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을 하지 않았나요? 차선의 선택이었죠. 양당체제하에서 우리 모두는 지금껏 차선의 선택을 강요받아왔어요. 하지만 이제는 이 양당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 촛불정부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문재인 대통령은 인격적으론 훌륭하지만 5년 만에 정권을 잃었어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임옥상의 예리한 예술적 칼날은 시대를 넘어 무한공간에까지 날카롭게 메스를 가하고 분해해 왔다. 자연생태와 환경문제, 사상의 분열과 대립, 더 나아가 문명사적 위기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거침없이 이들 부위를 오늘이라는 수술대 위에 올려놓는다.(글,사진/임윤식)
*이곳에 올려진 작품사진들은 전시작품을 필자가 휴대폰으로 직접 찍은 것들이므로 원본작품에 비해 색상이나 질감이 많이 떨어지며 일부 작품의 경우에는 극히 일부분 크롭된 경우도 있음을 밝혀둠. 또, 필자의 주관적 견해는 별도로 하고, 작품 소개 글의 대부분은 전시해설 내용에서 발췌하였음.
https://www.youtube.com/watch?v=lAYo2suHmHk